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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초기 예배모범과 그 역사 연구 ②

[ 2021-08-31 11:35:23]

 

김병화 목사 (기독교문화연구원 원장)

 

2장 교회의 예배 의식

 

1. 예배시간이 되거든 예배당에 들어가 각기 좌석에 앉되 단정하고 엄숙하며 경건한 모양을 지키며 자기와 목사와 그 참석한 모든 사람과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로 복을 빌라.

(딤전 2: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2. 예배시간에는 모든 사람이 엄숙한 태도와 공경하는 마음으로 예배하고 목사가 '낭독'하거나 인증하는 성경 밖에 다른 것을 읽지 말 것이다. 합당치 못한 모든 행동을 일체 하지 말 것이요, 어린이들은 부모가 데리고 있는 것이 좋으니 한 가족이 하나님의 집에 같이 모여 앉는 것이 가장 마땅하며 주일학교 예배회로 따로 모일 때는 교역자나 당회원이 반드시 출석 인도하라.

(36:8)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무릇 선지자 예레미야의 자기에게 명한 대로 하여 여호와의 집에서 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을 낭독하니라'

 

) 우리나라 최초 교회 - 널다리골교회

 

1894년 평안남도 평양에 설립된 장로교회이다. 미북장로교 선교사 마펫(S.A. Moffet, 馬布三悅)1893년 평양에 도착해 선교부를 설치하고 최치량이 경영하는 주막에서 전도를 시작했다. 그후 4~5명이 모여 예배하게 되었으며 장소가 협소하여 널다리골(板洞)에 있는 홍종대 소유의 기와집을 매입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다.


이 널다리골교회가 장대현
(章臺峴)교회의 시작이 되었으며, 선교사들은 이 교회가 평양에서의 중심이 되고 최초의 교회가 된다고 하여 중앙교회 또는 제일교회라고 불렀다.


선교사 마펫이 전도를 시작하면서 그의 집에는 밤마다 돌이 날아드는 수난을 겪었다
.


어느 날은 서문통에서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는 어려움도 당했다
. 이러한 시련을 극복하여 마침내 믿음의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1894
1월에 22명의 학습 교인을 세우게 되었으며, 7명이 세례교인이 되었다. 또한 이동승을 최초의 영수로 임명하여 시무하게 했다. 이영언을 교사로 세우고 학생들을 모집하여 사숙을 시작했다. 이것이 후에 숭실학교로 발전했다.


1899
년에는 영국인 선교사 토마스(R.J. Thomas, 崔蘭軒)를 참수했던 박춘권이 스스로 교회를 찾아와 회개하고 선교사 마펫에게 세례를 받는 놀라운 일이 있었다.


신자의 증가로 예배당을 신축하기로 하고 광고하자
3,000여원이 헌금되어 총공사비 7,000여원을 들여 장대현 언덕에 72간의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 소래교회 설립

 

서상륜, 서경조 형제에 의해 세워진 한국 최초 자생 교회인 소래교회(사진)의 설립연도에 대해서 1883년 설, 1884년 가을 설, 1885년 봄 설, 심지어 1887년 설에 이르기까지 여러 주장과 기록이 있다(기독교문사 기독교사전 p.535).


그중에서
1883년 설이 가장 큰 지지를 받고 있다. 그 근거로는 평양신학교 교수회에서 교수논문집으로 발행한 신학지남 제7권 제4(192510월 발행) 103~122'徐景祚信道傳道松川敎會設立歷史'란 서경조 목사의 기고문에서 '1883년 계미년 장연 송천동에 이주하게 된지라 이때에 백씨는 심양에 들어가 라목사에게 수세하고 매서직분을 받고 조선경성에 이주하시고'(p.105)라는 항목이 있다.

또 하나 한국교회사 연구가 이찬영 목사의 저서 '한국 기독교회사 총람' p.p128~129'필자가 19622월에 백령도 부흥회 인도차 갔을 때 백령도 중화동교회 당회장 허간 목사가 소장하고 있던 송천교회 당회록을 친히 목도하였는데, 교회연혁을 기록하면서, 설립이 1883516일이라고 되어 있었다. 허간 목사님은 6.25사변 전까지 송천교회 당회장으로 시무하시다가 전쟁 때문에 송천교회 당회록을 휴대하고 백령도에 와 계신 때였다'라고 기록을 남기고 있다.


무릇 역사란
'누가 말 하더라'는 설()을 넘어 물질 증거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위에서와 같이 평양신학교 교수 논문집 신학지남과 소래교회 당회록을 통해서 1883년 설을 믿는다.

 

) 조선 최초의 기독교인, 최초 장로, 최초 순교자 백홍준


존 로스는 존 매킨타이어와 함께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파송된 중국 선교사였다
. 먼저 중국에 왔던 알렉산더 윌리엄슨 선교사가 있었는데, 로스는 그에게 조선에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면서 로스는 조선에 대한 마음을 간직한 채 187410, 만주의 고려문을 드나든다. 고려문은 조선과 중국이 자유롭게 물물교환을 하던 곳이었다.


존 로스 선교사는 그곳에서 조선인들에게 한문성경을 가지고 전도했는데
,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성경책을 비롯한 서양문물을 거부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럼에도 로스로부터 한문성경을 받았던 한 50대의 조선 상인이 있었다. 그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 아들이 성경을 2~3년간 읽고 공부한 후 존 매킨타이어를 찾아가 더 깊이 공부하기도 한다. 그 아들이 백홍준이다.


백홍준은
1876, 존 로스에게 세례를 받는다. 그리고 고향인 평안도 의주에 돌아가 복음을 전하려 한다. 로스가 번역한 성경을 가지고 의주에 들어가는데, 백홍준은 성경을 그대로 들이다 3개월간 감옥에 들어간 적이 있다. 이에 백홍준은 성경을 한 장씩 뜯어내어, 시장에서 산 책과 함께 묶어서 들어가 통과했다. 백홍준은 성경을 숨겨둘 장소가 마땅치 않아 태우거나 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그럴 때 로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경을 표백시킨 물을 마시는 자마다 생명을 얻게 될 것이며, 성경을 태운 재를 입는 자마다 크게 성장하리라.'


그렇게 백홍준은 몰래 전도하며 의주뿐만 아니라 강계
, 부성, 삭주 등 전도의 지경을 넓혀간다.

1885년에는 약 18명이 예수를 믿어 백홍준 집에서 예배를 드린다. 18879월에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14명의 세례교인과 함께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창립할 때 백홍준은 최초의 장로로 추대되기도 한다.


1892
년에는, 백홍준이 존 로스를 비롯한 외국인들과 만난 게 드러나 봉천 감옥에 들어간다. 그리고 2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 순교한다. 백홍준은 조선 최초의 기독교인이자 조선인 최초의 순교자가 된다.

 

) 한국 최초의 기독교 순교자 로버트 토마스 목사


기독교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본격적으로 선교하기 이전에 한국 선교의 가능성을 찾은 선교사들이 몇 있다
. 그중 조선 땅에 귀한 피를 뿌리고 순교한 사람은 로버트 토마스(Robert J. Thomas, 托馬浚 또는 崔蘭軒) 목사가 유일하다.


그는
18409, 영국 웨일즈(Wales) 지방 라야다(Rhayada)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토마스는 1859년 런던대학교 뉴 칼리지에서 대학과정과 신학과정을 마치고 목사안수를 받았다. 목회보다는 선교에 뜻을 둔 토마스는 목사안수를 받은 후, 런던 선교회의 파송을 받고 갓 결혼한 부인과 함께 중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그해 가을 상해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아내가 세상을 떠나는 불행한 일을 겪기도 했다.


아내를 잃은 슬픔에다
, 현지 런던 선교회 책임자들과도 뜻이 맞지 않자 토마스 목사는 선교사 직을 사임하고 산동성 지푸 세관에 취직하였다.


그곳에 주재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의 알렉산더 윌리엄슨 목사를 만난 그는 선교에 대한 열정을 다시 불태우기 시작하였다
. 그러던 중 토마스 목사는 우연히 한국에서 천주교 박해를 피해 산동성으로 피난 온 천주교 신자 두 사람을 만났다. 그들에게서 한국 천주교회 박해의 소식을 들은 그는 한국 선교의 꿈을 꾸기 시작하였다. 그는 일단 세관에 사표를 내고 한국 선교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침 한국으로 가는 배가 있었다.


그가 이 배를 타고 많은 양의 한문성경을 가지고 한국의 서해안으로 떠난 것이
18659월이었다. 그는 황해도 연안 창린도에 도착하여, 약 두 달 반을 머물면서 섬사람들에게 성경을 나누어 주는 한편, 한국어를 배우면서 열심히 전도한 후 중국으로 돌아갔다.


기회를 다시 찾고 있던 토마스 목사는 때마침 미국 상선인 제너럴 셔먼
(General Sherman)호가 무역을 위해 한국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18667, 그는 이 배의 통역 겸 안내자로 동승하여 선교의 열정을 불태우던 한국으로 다시 향하게 되었다.


약 일 주일 후 제너럴 셔먼호는 대동강 입구 용강군에 당도하였다
. 제너럴 셔먼호는 계속 강 상류로 거슬러 평양성으로 항진하였다. 배가 머물자, 평양 감영의 문정관(問情官)이 등선하여 목적지, 항해의 목적 등을 묻자, 토마스 목사는 서툰 우리말로 통역을 하였다. 문정관들은 우리나라는 외국과의 무역은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므로 퇴각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제너럴 셔먼호는 이를 무시하고 강 깊이 항진을 계속하였다.


그런데 제너럴 셔먼호는 무역선답지 않게 중무장을 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문정관 중군
(中軍) 이현익을 억류하고 강압적인 자세를 보였다. 이렇게 되자 강변의 병졸들과 성민들이 물러가라고 고함을 치면서, 돌을 던지고 활과 화승포를 쏘기 시작하였다. 위협을 느낀 제너럴 셔먼호에서도 소총과 대포로 응사를 시작하였다. 이런 와중에 홍수로 불었던 대동강 물이 줄어들고, 서해의 썰물 때가 되자 강물이 급격히 줄어 제너럴 셔먼호는 강바닥에 좌초하고 말았다.


평양감사 박규수의 명에 따라 군은 상류에서 작은 배 여러 척을 연결하고 그 위에 나무를 쌓아 불을 붙인 신탄선
(薪炭船)을 떠내려 보냈다. 이 신탄선이 제너럴 셔먼호에 닿자 배가 불타기 시작하였다. 불이 크게 번지자 선원들은 어쩔 수 없이 강으로 뛰어내려 강변으로 헤엄쳐 나왔다. 대기하고 있던 병졸들이 뭍에 오르는 선원들을 닥치는 대로 칼로 쳐죽였다.


토마스 목사도 더 이상 배에 있을 수 없어
, 성경 몇 권을 품고 강으로 뛰어내려 헤엄쳐 나왔다. 강변에 이른 토마스 목사를 퇴교(退校) 박춘권이 칼로 쳐죽였다. 이로써 토마스 목사는 한국 초기 선교 역사에서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개신교 성직자 순교자가 되었다. 토마스 목사는 품고 온 성경을 강변 여기저기에 뿌렸다. 자기를 죽이려는 박춘권에게도 한 권을 주었으나 받지 않자 그대로 모래사장에 던지고, 순교의 길에 들어섰다.


박춘권은 자기 칼을 맞고 죽어가는 서양 사람이 건네주는 책을 받지 않았으나
, 상황이 끝나고 돌아갈 때, 하나를 주워 집으로 가져갔다. 갖고 간 성경을 정독한 그는 후에 예수를 영접하고 독실한 신자가 되어, 안주(安州)교회 영수(領袖)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때 군중 속에 열두 살 난 소년
, 최치량이 있었다. 그는 토마스 목사가 흩뿌린 성경 세 권을 주워 갖고 있다가 한 권을 영문주사(營門主事) 박영식에게 주었다. 박영식은 그 성경을 한 장씩 뜯어 벽지로 발라 썼다. 후에 박영식의 집터에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이 세워졌다.


토마스 목사를 죽인 박춘권의 조카 이영태가 박영식의 집에 들었다 벽에 바른 성경을 읽고 감동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진실한 교인이 되었다
. 그는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레널즈(W. Reynolds, 李訥瑞)의 조사(助事)가 되어 한국인 성서번역위원의 한 사람으로 성경번역에 큰 공헌을 하였다.


토마스 목사는 박춘권의 칼을 맞아 죽었고
, 그 시체는 토막 나 강변에서 불태워졌다. 제너럴 셔먼호의 닻줄은 평양 동문에 걸려, 해방되던 1945년까지 남아 있었다.


토마스 목사는 기독교 목사로서 조선 땅에 최초로 순교의 피를 흘리고 죽어갔는데
, 이때가 186692일로 그의 나이 27세였다. 그는 이렇게 숨져갔지만, 그가 전해 준 복음은 한국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그가 순교한 대동강 물을 마신 평양 성민 다수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평양은 한국교회의 중심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해방 때까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 대동강에서 순교한 토마스 목사를 기념해 설립된 교회

 

한국교회는 1927년 그의 순교를 기념하여 토마스 목사가 묻혀 있는 쑥섬에 1천여 명의 교인들이 모여 추모예배를 드렸다. 1932년에는 토마스 목사의 이름 첫 스펠 'T'자 모형으로 토마스 목사 기념 예배당이 건립됐다.


고대 교회 교부 터툴리안은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 되고, 교회는 순교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라고 말했다. 한국교회는 1930년대부터 6.25사변에 이르기까지 많은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이 공산당에 의해 순교의 길을 걸었다. 일제 말엽에는 신사참배 거부로 주기철 목사를 위시하여 적어도 50여 명의 목사들이 순교의 영광의 관을 썼다.


이들 귀한 순교자들의 피를 먹은 한국교회는 무성한 숲이 되어
, 주님이 명령한 귀한 사역을 지속하고 있다. 이 일은 토마스 목사로부터 비롯된 순교자들의 고귀한 순교의 피의 은덕이라 말해야 마땅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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