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회원가입아이디/비밀번호 찾기
2021년 1월 26일
회사신문보기총회교계 기관교육 선교신학 신앙논단 기획 | 오피니언
 
회사소개 한국교회문제 협력상담소 상담게시판 공지사항

칼럼
논단
기독교문화/책
바른예배와찬송
기획연재
건강상식
Home > 논단기획 > 논단
김두영의 사역과 신학연구 (3)

[ 2020-12-18 14:42:04]

 

2. 도전의 사역

1945815, 우리는 일제의 사슬에서 해방되었다. 이 날을 우리는 광복절이라고 하고, 중국은 승전일, 일본은 종전일이라고 한다. 보는 관점의 차이이다.

 

(1) 공산치하에서의 사역

김두영은 평양에서 해방을 맞는다. 그는 조만식 선생을 모시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직을 맡고 정권인수식의 사회를 한다.

건국운동에 앞장서서 공산당과 투쟁한다. 31운동 기념집회, 재건전도대, 만세 시위 등을 기독교 사무소장 자격으로 김두영이 주도한다.

김두영은 체포되어 70일을 관 같은 곳에 감금되어 고문을 받는다. 모두 27, 130시간의 고문은 사람으로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다. 이 고통을 이기고 1947524일 단신 월남하였다.

 

(2) 전쟁의 와중에서

김두영은 월남하여 애국운동을 계속하다가 19504월에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625일의 공산당의 남침으로 가족을 두고 단신 피난하게 된다.

대구에서 현지 교회 지도자들과 피난 온 목사장로들이 합세하여 대한기독교구국회를 조직하여 한경직 목사를 회장으로 선출하였다. 김두영은 청년연합회의 일을 한 관계로 봉사부 차장이 되어 민심 수습과 피난민 구호사업을 맡았으나 재정과 장비가 없어 이렇다 할 일은 못하고 미국에서 선교사들이 얻어 오는 구호품으로 목마름이나 축여 주는 정도였다.

이 무렵 전쟁은 더 악화되어 정부는 부산으로의 후퇴를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 민족이 부산에 모두 피난할 수도 없고 대구를 잃으면 나라 전부를 잃는다는 생각에 구국회가 선봉이 되어 대구 사수를 부르짖으며 하나님께 기도를 외쳤다. 김두영은 이 상황을 보고 있다 못하여 육군본부로 달려가 강문봉 작전국장을 찾았다.

기독 청년들이 현지 주민이건 피난민이건 의용군을 모집하여 전투에 참여케 하겠으니 나에게 모병권을 부여하여 주시오.”

하고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기독교의용군징병관이라는 특명장을 받아 거제도로 건너가 사흘 동안에 3,000명을 모집하여 부산으로 왔다. 이때가 7월 하순 장마철이라 궂은비가 한없이 내렸으나 이 많은 군병들이 묵을 곳이 없었다. 사람이 살 만한 곳에는 이미 피난민들로 차고 넘쳤으며 여관이나 온천 창고 등 비를 피하고 잠을 잘 수 있는 곳에는 이미 정식 군인들이 꽉 들어차 있어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두영은 황금천 목사와 온 부산시를 다 뒤져 왜정시대의 소시장으로 이들을 이동시켜 임시 피하게 한 다음 계엄사령부로 달려가 이곳의 사용을 허락받았다. 그러나 이곳은 천정만이 있어 비를 피하거나 잘 수가 없었으므로 근처의 창고에서 가마니를 꺼내다 1인당 세 장씩 주어 하나는 벽을 막고 하나는 깔고 하나는 덮도록 하여 잠자리를 마련하여 주었다. 이리하여 3,000명의 의용군이 소 시장과 우초 창고에서 잠을 잘 수 있게 되었으나 먹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먼저 사령부에 가서 5,000 가마니를 가져다 한 가마니씩의 쌀로 밥을 할 수 있는 가마솥 열 개를 사다가 20일 동안 밥을 해 먹였다.

그러나 그냥두면 영양실조로 죽을 수밖에 없기에 이 의용군들을 위해 군 당국에 부탁하여 카츄사 부대와 함께 합숙 훈련을 하게 하였다. 812, 3,000명의 의용군을 미군 수송선에 태워 보냄으로 인계를 마치고 모병의 책임을 이것으로 완수했다. 이들이 한 달 사이에 늠름한 군인이 되어 미군들과 같이 3,000명이 인천 상륙작전에 참가하게 되었으니 한경직 목사와 다른 많은 목사들이 김두영의 활동력과 추진력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셨다. 출정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숙연한 맘이 들었다.

 

(3) 제주도 피난 생활

서울을 포기하고 제주도로 피난하라는 군의 지시가 내려 인천에서 배로 제주행이 시작되었다. 월남 신도들도 인천에 모여 LST라는 배에 몸을 싣고 덕적도까지 왔을 때 로빈훗이라는 만 팔천 톤급 대형 배로 옮겨 타는 일이 시작되었다. 대형 배로 옮겨 3만 명의 피난민이 출발하였다.

195125, 피난민들이 제주읍에 도착하여 제주주정공장 뜰에 모였을 땐 그 곳은 이미 부산에서 들어온 피난민들로 인하여 포화 상태였다. 그래서 김두영은 일행들을 각 면으로 재배치하기로 했다. 각각 돛단배에 태워서 보내는데 김두영 가족을 포함한 500세대는 조천면으로 다섯 척의 배에 태워 보냈다. 추위 속에 두 시간이나 걸려서 도착하였을 때는 아침의 햇살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차가운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김두영은 피난민 인솔자라는 책임감에서 각 민가마다 한 세대씩의 피난민을 받아들여 방을 하나씩 내어주도록 하였다. 이 일을 다 끝내고 마지막으로 김두영의 가족을 데리고 한 민가로 들어갔을 때 아내와 고종사촌 동생인 최재경은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다섯 시간이나 겨울비 속에서 떨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수백 명의 목사와 전도사가 모인 제주도는 54개의 부락에 교회가 세워졌고, 예배를 드리는 일이 전쟁 중에도 중단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학교를 세워서 제주도민을 가르치는 일을 하여 피난 생활을 할 일 없이 기생충처럼 구호양곡만 축내는 일을 하지는 않았다. 기도와 전도에 힘쓰며 제주도내 부락마다 교회를 세우고 제주도민도 구원의 은총에 참여하는 빛의 길을 열었던 것이다.

많은 목사들이 신학교를 열 일을 생각하다가 51년 가을 학기부터는 부산진교회에서 장로회신학교를 개교하기에 이르렀고, 가족은 제주에 두고 교수와 학생들이 부산에 나가 공부하고, 방학에 제주에 돌아가서 지내는 묘하고도 평온하며 안정된 피난 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제주에서의 피난 생활은 16개월 정도 계속되었다.

김남식 박사(한국장로교사학회 회장)

 
ⓒ 기독신보 (http://www.ikidok.org)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최근인기기사
S교회 무엇이 문제였나?..
제103회 총회 둘째 날 ..
이단감별사의 거짓증언은..
교회법과헌법해설
포토뉴스
사진으로 보는 제480회 총회
공지사항
시스템 점검
인터넷 기독신보 드디어 오픈합..
기독신보사 ∥ 등록번호: 서울,아 01362 ∥ 등록(발행)일: 2010.09.29. ∥ 인터넷기독신보 ∥ 발행인 및 편집인: 김만규
청소년 보호정책이메일 무단수집 거부개인정보취급방침 ∥ 개인정보 및 청소년보호책임자: 김만규
서울시 구로구 오리로 1197, 118-406 (오류동, 금강수목원@) ∥ 메일주소: ikidok@naver.com ∥ 전화번호:(02)2684-1736 ∥ 팩스:(02) 2684-1737
Copyright ⓒ 기독신보. All rights reserve. 기독신보의 기사 등 모든 컨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