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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헌신한 여선교사들 ①

[ 2020-09-28 10:17:28]

 

기획시리즈

정정숙 박사

정정숙 박사의 새로운 시리즈를 시작한다.

이 땅에 복음을 선포한 여자선교사들의 헌신의

자취를 추적하며 매회 2명씩 소개한다(편집자주).

 

 

(1) 스크랜톤, 한국 여성교육의 개척자

이화학당을 세워 여성교육 개척

교육선교의 새로운 모델 제시해

 


한국은 전래로 남성위주의 사회여서 여성들은 이른바 삼종지도라고 하여 어렸을 때는 아버지에게
, 결혼하면 남편에게, 남편이 죽으면 아들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유교의 윤리가 여성들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살고 있었던 한국 여성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의 구원만이 아니라, 여성의 지위 회복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여성들이 공식적인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준 분이 있습니다.

메리 스크랜톤( Mary Scranton)여사, 그가 바로 한국 여성교육을 개척하였습니다. 매리 스크랜톤은 1832129일에 미국 매사추세츠 주 벨처 타운에서 에라스트스 벤톤(Erastus Benton) 목사의 맏딸로 태어났습니다. 메리는 자라서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의 제조업자 스크랜톤(W. I. Scranton)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러나 1872년에 어린 아들 하나를 남기고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메리는 이 고통을 신앙으로 이겨냈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아들은 예일대학과 콜럼비아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병원을 개업하고 있다가 한국 파견 선교사를 지원하자 메리도 한국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감리교 여선교부에 지원하여 승인을 받았습니다.

1885년 스크랜톤 모자, 아펜셀러 부부, 언더우드가 아라빅 호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를 떠나서 한국으로 향했습니다. 227일에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하여 이수정에게 한글을 배우면서 한국 문화를 배웠습니다.

당시 한국은 갑신정변을 겪어서 정치적으로 혼란하기 그지없었고 외국인 여성들이 머물기에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메리는 아들과 언더우드 선교사의 뒤를 이어서 1885620일에 한국에 입국하였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가 52세였습니다. 그 당시에 그 나이이면 '할머니'여서 한국 사람들이 그를 부를 때 '대부인'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메리 스크랜톤은 여성교육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정동에 있는 아들의 집에 머물면서 학교를 세울 대지를 물색했습니다. 미국 대사관과 장로교 선교부와 가까운 정동에 있는 19채 초가와 대지 6,120평을 구입했습니다(현재 정동의 이화여고 자리).

여자학교를 세운다는 것은 당시 한국의 실정에서 꿈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1886531일 밤에 한 부인이 하인을 거느리고 찾아와서 배우기를 청하였습니다. 그 여인은 고위관료의 첩으로서 영어를 배워서 황후의 통역사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3 개월만에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6월말경에는 10여 세의 소녀가 찾아왔습니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 이 아이가 첫 정식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그 아이의 어머니가 찾아와서 아이를 데려갔습니다. 이웃 사람들이 '딸을 서양여자에게 팔아먹었다.'고 욕을 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학생은 병으로 죽어가는 어머니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젖을 먹으려는 아이였습니다. 이 아이를 데려다가 먹이고 입히고 치료하여 공부시켰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학교가 1886년 말기에는 4명의 학생이 되고, 1887년에는 7명이 되었을 때 명성황후가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교명을 지어주고, 외무독판(오늘날의 외무부 차관) 김윤식을 통해서 편액(오늘날의 액자)을 보내와 격려하였습니다. 스크랜톤 부인은 처음에 학교 이름을 <전신학교>(專信學敎 Entire Trust School)라고 하려 했으나 <이화학당>으로 정착했습니다.

이렇게 세워진 학교가 '한국적 여성''기독교적 여성'이라는교육 목표를 추구하며 󰡐세계적 이화󰡑가되었습니다.

 

(2) 로제타 홀, 최초의 여성병원 개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병원 개설하고

여자맹아학교 세워 새로운 광명 주다

 

기독교가 이 땅에 전래된 후 전도, 교육, 의료사역이 조화롭게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교회를 세우기 전에 학교와 병원을 세운 것은 아주 귀한 선교전략이었습니다.

당시 이 땅의 의료시설은 극히 미미하였고 여성과 어린이를 위한 의료시설은 백지상태였습니다. 스크랜톤 의사는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여성과 어린이를 위한 병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어머니 메리 스크랜톤에게 이야기하자 그도 동감을 했습니다.

그래서 미국 감리교 여선교부에 여의사 파송을 청원하자 1887년에 2명의 여의사를 파송해 주었습니다. 1887년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여성만을 위한 병원이 개설되었는데 그 병원이 바로 보구여관(保救女館)이라는 유명한 병원입니다. 그 위치는 오늘날 동대문에 있는 이화여대 부속병원의 심프슨 홀과 젠센기념관 중간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여성을 질병으로부터 구해주고 보호해 주는 여자의 집'이라는뜻의 <보구여관>은 명성황후가 지어준 이름입니다.

선교부에서 여의사 선교사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내자 많은 젊은 여의사들이 한국에 선교사로 가겠다고 지원을 했고, 그 중에 메타 하워드( Meta Howard)1877년에 한국에 파송되었습니다.

하워드는 1887년부터 1889년까지 3,500명의 여성 환자를 진료했으며 그의 의술이 탁월하여 󰡐양교자󰡑, 󰡐귀녀󰡑로 불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들어서 과로로 철수했습니다.

그 후임으로 온 여의사가 로제타 셔우드(Rosseta Sherwood)입니다. 1890년에 한국에 온 그는 한국기독교회사와 한국의학사에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18926월에 의료선교사로 온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과 결혼하여 󰡐홀 부인󰡑으로 불렸습니다(이하 '홀 부인'이라고 표기합니다).

홀 부인은 우리나라 최초의 간호학교와 맹아학교를 세웠으며, 평양부인병원의 설립자이자 '여성 의학반'을 개설하여 여성 의사를 배출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미국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을 나온 박에스더(본명 김점동, 본 시리즈 (9)에 소개)와 일본과 북경을 누비며 의료활동을 한 김애희 등이 있습니다.

홀 부인은 한국에 온지 10개월 동안에 2,500명의 환자를 진료하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1892년 제임스 홀과 결혼하였고, 이들 부부는 1894년에 사역지를 평양으로 옮겼습니다.

홀 부인은 평양부인병원을 세워서 진료를 시작할 때 한국의 여의사 박에스더도 동참시켰습니다. 제임스 홀은 미국과 캐나다에서 교사 생활을 하였고, 신학과 의학교육을 받았으니 선교사역의 전영역을 감당할 수 있는 훌륭한 인재였습니다.

1895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환자의 수가 급증하였고, 콜레라가 유행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홀 부부는 자신의 몸을 가리지 않고 진료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제임스 홀 선교사가 콜레라에 걸려 생명을 잃었습니다.

이 일은 당시의 사회와 교계에 큰 충격이었습니다. 홀 부인은 선교기금과 부의금을 모아서 <홀 기념병원>(TheHall Memorial Hospital)을 세우고 의료선교사 포웰 (Edward Forwell)로 하여금 의료사역을 계속하게 했습니다.

홀 부인은 일시 귀국하면서 박 에스더를 미국에 데려가서 본격적으로 의학교육을 받게 하여 정식의사가 되도록 준비시켰습니다. 그는 1897년가을에 두 아이와 함께 한국에 돌아와서 서울의 <보구여관>에서 일하다가 평양으로 가서 부인병원을 운영하고, 여자맹아학교를 세워서 이 땅에 새로운 역사를 기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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