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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영의 사역과 신학연구 (1)

[ 2020-09-01 10:26:54]

 

< 김남식 박사>

신사참배에 항거하는 합법적 반대운동전개

성경적 신앙을 바탕으로 일왕 앞에서 신앙진술

김남식 박사 

 서론

 

역사는 기록에 의해 보존되고 전승된다. 소설가 이병주의 표현대로 '일광(日光)에 비치면 역사가 되고 월광(月光)에 비치면 전설이 된다.'

한 인물을 탐구함에 있어서 바른 관점이 중요하다. 여기에는 연구자의 선입견이 작용한다. '선입관 없는 주석은 없다'고 한 불트만의 말처럼 연구자의 관점에서 평가할 수밖에 없다.

 

1. 인물사(人物史) 연구

 

인물사 연구는 그 개인만이 아니라 시대적 상황과 함께 탐구되어야 한다. 이것은 '시대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시대를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연구자는 김두영(金斗英)이라는 한 인물을 조명한다. '김두영 연구'를 위해서는 선행 연구 자료로는 박용규의 뛰면서 일하는 기계와 김두영의 자술회고록 몰래 익은 포도송이이 있다. 소록도교회사가 김두영의 사역을 보여준다.

 

2. 교회사적 의미

 

'김두영 연구'는 단순한 개인 전기가 아니라 김두영을 통하여 역사의 한 단면을 발굴하고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역사적 사실을 조명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김두영을 통해 이루어진 '합법적 신사불참배 운동'이라는 '새로운 투쟁 모델'에 대한 새로운 조명과 이해가 필요하다. 김두영의 사역이 지금까지 가리워졌는데 이것을 '역사화'하는 작업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특히 김두영의 고백에 귀를 기우려야 한다.

 

. 김두영, 그 생애론

 

한 사람의 인물을 탐구하기 위해서 그의 삶의 전영역을 보아야 한다. 어느 한 세대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조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김두영의 삶을 '신앙'이라는 틀 안에서 몇 가지 측면으로 조명하려고 한다.

 

1. 신앙의 배경

 

김두영의 생애를 논할 때 '신앙'에 중심이 되고 평양, 이천(利川), 그리고 가문이 바탕이 된다.

고향이란 그리움의 땅이다. 떨어져 있어도 늘 함께 있고, 향수는 연한 물안개처럼 우리의 가슴에 번져지고 있다.

고향은 단순히 탯줄을 묻은 곳이 아니다. 꿈이 싹텄고, 신앙이 꽃피운 그림같은 곳이다. 이것은 뿌리이고, 열매이다.

평안남도 대동군 추을미면 이천리, 훗날 이천의 행정구역이 강동군 청룡면 이천리로 바뀌었으나 이 고장 사람들은 '니천'(利川)이라고 부른다. 이곳이 우리가 추적하는 '소록도의 목자 김두영(金斗英)'의 고향이다.

평양시는 대동강과 그 가지흐름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쌓인 벌과 평양 언덕 벌, 이를 둘러싸고 있는 낮은 산지들로 되어 있다.

역사의 도시 평양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어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와 '평양대부흥운동'의 근원지가 되었고, 한국장로교회의 유일한 신학교인 '평양신학교'를 통하여 수많은 사역자들을 배출하였다.

장대현교회, 산정현교회 등을 비롯한 수많은 교회들의 종소리는 시민들의 영혼을 일깨우는 우람스런 외침이었다.

지금은 비록 기독교를 부인하는 공산당 정권의 수도가 되었으나 우리의 가슴에는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천의 일제강점기의 행정구역은 대동군 추을미면 이천리였다. 당시 대동군은 평양시를 둘러싸고 있었다. 마치 계란 노른자위를 싸고 있는 흰자위 같았다. 김일성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호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 했고 이천의 행정구역을 강동군 청룡면 이천리로 만들었다.

김두영은 191713일 평안남도 대동군 추을미면(후에 청룡면으로 개칭) 이천리 신촌부락 157번지에서 김경호(金敬鎬)와 왕경순(王敬淳)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곳은 평양에서 12km 떨어진 곳으로 남북 대동강이 합류하는 삼각지로 아담한 농촌이었다. 김두영이 태어난 집은 신촌 부락 남쪽 끝에 있는 초가집이었다.

김두영의 본관은 당악 김씨(唐岳 金氏)이다. 김두영의 증조할아버지 김기형이 일찍 예수를 믿은 한국 초대교회 성도 중의 한 분이었고, 할아버지 김현길(金泫吉)도 신앙을 이어갔다. 김두영의 아버지 김경호(金敬鎬)1893년 김현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전국전도대장'이란 별명이 붙은 권서였다.

김경호는 1938년경 대동강 철교 건너 신리에 동광교회를 건축하고 최억태 장로와 같이 장로 장립을 받았다. 신리는 백선엽 장군의 고향 마을이기도 하다. 그 후 평양 역전 연화동교회로 이적하였다가 월남하였다.

김경호와 개성 왕씨 왕경순(王敬淳) 사이에 31녀를 낳았다. 장남 김두영(金斗英, 1917), 차남 김두옥(金斗玉, 1919), 삼남 김두찬(金斗贊, 1931), 장녀 김화은(金花恩, 1935)을 두었다.

이천교회는 1904년 평남 대동군 추을미면 이천리에 설립된 장로교회로 처음에 이홍언(李鴻彦)의 전도로 노덕경(盧德卿) 한복순(韓馥淳) 김용국(金用國) 김성룡(金成龍) 등이 믿고 미림교회에 출석하여 예배드리다가 1년 후 3간 초가집을 매입해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선교사 마펫(S. Austill Moffett; 馬布三悅)과 목사 노인묵(盧仁黙)과 장로 김성수(金聖受) 등이 시무하였으며 1940년 당시에는 목사 박경구(朴敬求)와 장로 김병서(金病瑞; 1928년 장립), 김도길(金道吉; 1928년 장립), 김재은(金在銀; 1932년 장립), 김윤서(金允序; 1938년 장립) 등이 시무하였다.

이천교회가 설립한 신우(信友)학교는 평남 대동군 추을미면 이천리에 설립된 학교로서 1906년 선교사 S. A. 마펫(馬布三悅) 및 김명선(金明善)에 의해 설립되었다.

보통과 4년 고등과 3년의 학제를 갖춘 남녀공학 초등교육기관이었다. 1912년 교장으로 김명선이 봉직하였으며 1925년에 이르러 학교 개축 및 보통학교 인가를 위해 노연항(盧然恒) 교장 이하 교직원 그리고 학부형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활동하였다. 특별히 방경모(方敬模), 김명선 등의 노력으로 19263월에 목표액 5천원이 돌파되었으며 그 해 5월경 교사를 신축하였고 그 해 가을학기부터 6년제 보통학교로 학제를 개편하였다.

일제말기 또 다시 운영난에 빠지게 되었을 때 박용만(朴用萬)이 당시 시가 3만원 상당의 토지를, 한영록이 1천원을 회사하여 학교의 기반을 든든히 하였고 교사를 신축하였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이천의 큰 축복이었다. 교회가 설립되자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찾아와 믿게 되었고 교회가 급속도로 부흥케 됨에 따라 또 다시 48평의 2층 건물인 연건평 96평에 기와집 예배당을 건축하여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주일날이 아닌 6일간 주간 초등학교를 설립하여 학교를 경영하게 되었다.

이에 소문이 각지에 퍼지자 10, 20리 밖에서 자녀들을 보내어 공부하게 했다. 그리하여 학생 증가로 예배당만으로는 많은 학생을 수용할 수 없게 되어 예배당 서편으로 부지 20,000여 평을 매입하여 한옥식으로 큰 학교 건물을 건축하여 학교로 사용케 했다.

 

2. 신앙의 형성

 

김두영이 이천교회 출신으로 이천교회가 세운 신우학교를 졸업하고, 독학으로 교사 자격시험에 합격하여 모교인 신우학교 교사가 된다. 그때 그의 나이 17세였다.

김두영의 신앙 형성은 성경연구를 통해 이루어졌다. 소학교 시절의 일인데 성경연구에 관한 에피소드가 있다.

김두영이 소학교 5학년 때 있었던 일이다. 그의 아버지는 열심 있는 집사로서 교회 회계를 맡아 수고하였다. 그러나 웃지 못 할 일은 회계인 아버지가 글을 모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집에서 유일하게 글을 아는 김두영이 할 수 없이 아버지 대신 회계가 되어 모든 것을 정리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성미를 거두고 도장을 찍어주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왜냐하면 이름을 알아야 그 이름 밑에다 도장을 찍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이 생겼는데 아버지께서 성경 공부를 하기로 맘먹고 총회 종교교육부에서 권장하는 성경통신과를 지원한 일이다. 아버지가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글 모르는 아버지를 위해 성경을 읽어 드려야 했다. 어린 그에게는 무척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으나 성경을 많이 읽는 기회로 생각하고 부지런히 읽어 드렸다.

이렇게 성경을 읽어 준 다음 아버지가 불러 주는 답을 다시 기록하였다. 무척 힘들고 하기 싫었지만 차츰 차츰 성경의 이야기에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사사들의 활약이며 다윗의 이야기 등이 흥미를 끌게 되었고 여러 가지 이적의 기사들이 그를 성경 속으로 끌어들였다.

6개월쯤 해서 이 과정은 끝이 나게 되었다. 얼마나 고생이었는지 24개월 동안 성경을 이십 번 통독하였다는 데서 그 어려움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얼마 후에 총회에서 졸업장이 왔는데 김두영의 이름은 없고 아버지의 이름만 적혀 있었다.

김두영의 아버지는 이러한 성경공부를 계기로 한글을 터득하였고, 성경필사작업을 하며 각지를 다니며 전도하여 󰡐전도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성경 공부로 인하여 어린 김두영의 신앙은 순풍에 돛 단 듯 무척 빨리 성장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 때의 그 성경 말씀이 후일 그가 설교하고 성경을 가르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일본으로 가서 공부할 때도 지치고 힘든 그를 이끌어 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아울러 기도생활이 그의 신앙을 형성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김두영의 차남 김중석은 아버지의 기도생활을 이렇게 평가하였다.

'하나님을 정말로 믿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길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할 기도만 하시고 그 다음엔 어린아이처럼 그 기도가 응답될 줄로 믿으셨습니다. 어찌 보면 너무 단순한 것 같은데, 바로 이 어린아이 같은 믿음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버지의 기도에 잘 응답하셔서 신유은사도 많았지요.'

 

3. 신앙의 계승

 

신앙이 아름다움은 '계대신앙'에서 그 향기를 발한다. 그래서 우리는 계대신앙의 가문을 '신앙의 명문가'라고 부른다. 김두영의 가문이 그러하다.

김두영에게는 3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이 있는데 5남매가 모두가 목사와 사모가 되는 특별한 복을 받았다.

장남 김의석 목사는 소록도교회 부목사로 헌신했고, 현재 뉴질랜드에서 교포선교를 하고 있다. 차남 중석 목사는 서울음대 성악과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총신대 음악교수를 역임하였고, 현재 사랑교회 원로목사와 북한교회세우기연합 사무총장으로 헌신하고 있다. 3남 승석 목사는 중앙대학교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충만교회 담임목사로 갈보리선교회 회장으로 동남아지역 선교에 열심이다.

장녀 김명자 사모는 중소기업중앙회 관리이사 출신인 이상호 강도사의 부인으로 헌신하였고, 차녀 김명신 사모는 고 박창훈 목사의 부인으로 소록도교회 담임목사를 거쳐 필리핀 마닐라 사마리아 교회 목사로 헌신하였다. 박창훈 목사는 필리핀에서도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사역하다가 순직하였다.

신앙의 대는 3대 목사로 이어진다. 김승석 목사의 두 아들이 목사가 되어 헌신하고 있다. 김현철 목사는 충만교회 부목사와 갈보리선교회 총무로, 김현성 목사는 수원 화산교회 부목사로 섬기고 있다.

김두영의 조카 김요석 목사는 전남의 한센병 치유자 정착촌인 영호교회에 시무하다가 지금 몽골선교사로 헌신하고 있다.

이 가문의 흐름은 소록도를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섬김과 선교라는 두 단어가 이 가정의 대표적 화두이다. 어린 시절을 소록도에서 보낸 자녀들은 모두가 목회자와 사모가 되었고, 필리핀, 몽골, 동남아, 북한선교에 자신들의 모든 것을 쏟아 붓고 있다.

신앙은 헌신을 통해 계승된다. 교회 권력과는 거리가 먼 이들의 사역은 오늘의 우리에게 섬김이 무엇이며 그 결과가 어떠한 지를 보여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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