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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병의 6.25 참전기 (1)

[ 2020-06-09 08:29:07]

 

그때 사람들은 다 버리고 떠났다

나이 어린 학생 71명이 남아 이 땅을 지켰다

 

다음의 글은 6.25전쟁 70주년에 국방일보에서 70년 전 학도병 참전사를 찾아 그때의 전황을 듣는 시간으로 20205256.25참전 학도의용군기념사협회 회장이며 1950811일 포항전투 생존자이며 3사단 학도의용군 회장이 김만규 목사를 찾아 증언을 듣게 한 것입니다(역자주).

 

매년 6월이 되면 이곳저곳에서 6.25 상기 구국기도회라는 특별집회 광고를 보게 된다. 이름 있는 이들이 유명한 곳에서 민족을 구원하자는 모임과 집회를 한다는 광고다. 필자는 6월이 되고 6.25만 되면 󰡒하나님 한번만 살려주이소󰡓라는 절망에서의 부르짖음이 매번 연상된다. 그리고 과연 내가 산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경륜임을 새삼 기억하게 된다.

 

막을 수 있었던 전쟁

 

6.25전쟁은 막을 수 있었던 전쟁이다. 당시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모택동을 찾아다니며 남침 계획을 승인해 달라고 하면서 소련에는 무기를, 중국에는 병력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우리 정부나 우리 군, 교계의 뜻있는 인사들은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과 국회는 1949년 미국무장관 달라스가 극동 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한다󰡑고 일본 도쿄에서 선언할 때 우리 정계가, 우리 정부가 특단의 조치를 취하면서 미국 정부에 이 문제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지 않고 등한히 하였다.

한편, 이때 군부는 1사단장 김석원 장군과 육군참모총장 채병덕간에 38선상에서 남북간 물물교환을 하며 장사하는 것을 적발하고 그 책임을 물어 참모총장은 당시 1사단장이던 김석원 장군을 책망했다. 이 건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 군 원로이며 제일 유명한 용장 김석원 장군을 군에서 파면시켰다.

그러던 중 육군본부의 강문봉 정보국장 산하의 육군본부 작전상황실장 박정희와 그 휘하 북한 반장 김종필 등이 19496월부터 9월까지 북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결과 북한이 38선 주변의 민가를 북으로 소개하고 밤마다 중장비를 실은 열차를 남하시킨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더욱이 북한의 첩자를 체포하여 북한 사정을 청취하니 무엇인가 중대한 작전을 준비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박정희김종필 팀은 참모총장과 국방부장관 그리고 대통령에게 북한 정세를 보고했다. 대통령 이승만은 국방부장관 신성모에게 이 사실을 확인하라고 지시하였고, 국회는 긴급히 임시국회를 소집하여 현하 북한 정세와 남침 가능성을 물었다. 1949년 가을 국회청문회에서였다.

청문회는 육군본부 작전정보처 작전상황실장 박정희와 북한반장 김종필 대위의 북괴 남침 기도 조짐이 있다는 보고에 대한 청문회였다.

당시 국회는 북한의 남침 기도에 대한 보고를 우습게 처리하였다. 이에 군 작전상황실에서는 38선상에 있는 사단 첩보대에 지시하여 장교 1인 문관 1인을 북한 쪽에 침투시켜 현지상황에 대한 사진 또는 증거물을 확보하여 1950630일까지(첩보기간 10) 보고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때 신성모 국방부장관은 국회에서 󰡒까딱없습니다. 만일 북괴가 남침하면 우리 국군은 당일에 북진하여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압록강에서 고기잡아 사시미를 먹고 오겠습니다.󰡓라고 허풍을 쳤다.

 

그때 상황으로는 김일성이 남침을 위해 소련의 스탈린과 중공의 모택동을 찾아가 19506월경 남침하겠다(숲이 짙은 녹음기를 이용하자는 것)는 보고를 했는데, 스탈린은 안 된다고 거절했고, 모택동은 남침을 하면 중공군 10만 명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비록 38선을 돌파하여 남침한다는 데는 거절했으나 극동의 맹주로서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군사개입이 아닌 무기지원을 허락했다. 그것이 바로 저 유명한 Mig15 야크기, T3 탱크 등이었다.

사실상 양대 공산 맹주의 허락을 받았으니(병력은 중공, 무기는 소련) 김일성의 남침 계획은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당시 남쪽 대한민국의 상황을 살펴보면,

1950620일 육군은 전후방의 초급장교를 교체하였다. 당시 일선부대 초급장교는 대동아 전쟁시 일본군에 복무했었던 장교들이 대부분이었으나 후방의 군사학교 출신들은 전투 경험이 전혀 없는 장교들이었다.

1950623일은 전군에 농번기 지원령을 내려 군병력의 절반을 농촌 모심기 사역에 동원하였다.

1950624일에는 육군본부(현 국방부 자리)에 벙커를 설치하고 북괴 동향과 작전 지휘에 절대 우위를 확보하는 군시설을 마련했다고 벙커 낙성식을 거행했는데, 그 자리에 전군(,,공군)의 고급장교들이 다 동원되었고, 낙성식 후에는 술과 음악과 춤으로 향연을 즐기는 화려한 연회가 베풀어졌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첫 번째로 개최된 공개 댄스파티였다. 처음에는 자기 부인과 그 다음 다른 이의 부인과 손을 잡고 춤을 추었다(, 군부대가 첫 번째로 시작한 자유부인 행사였다).

이 댄스파티는 새벽 130분에 끝이 났다. 술에 만취한 군 고급장교들이 각자 집으로 돌아간 시각이 새벽 2시경이었다.

한편, 북괴가 남침의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던 차에 620일 초급장교의 전후방 대 교체가 있었고, 623일에는 전군의 영농지원 작전이 펼쳐졌으며, 624일에는 육군 벙커 낙성식과 그에 따른 흥겨운 주연이 베풀어졌고, 그 다음날은 바로 주일이었다. 전국의 공무원들과 경찰 병력들까지 모두 공휴일을 맞아 근무지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바로 이때를 틈타 전방사령부에 작전지시를 내렸다. '전 인민군은 즉각 남침하라!' '동무들의 건승을 빈다.' '무자비한 공격을 감행하라!' '8.15 전에 부산을 함락하라!'는 등등의 전투 명령을 하달하였다.

1950625일 새벽 4시경 북괴군 12개 사단은 김일성의 남반부 침공의 작전명령을 받고 그대로 38선을 돌파하였다.

결국 1950630일까지 첩보 보고를 하라는 북파 요원들은 영영 돌아오지 못하였다.

인민군이 38선을 돌파한 이후 파죽지세로 개성을 넘어 동두천, 의정부로 진격해 올 때 국군들은 간헐적으로 반격하면서 육군본부, 국방부 등지에 북괴군이 남침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그 당시 신성모 국방부장관은 보고를 받지 못했고,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술에 취해 곤히 잠을 자던 중이었다.

당번병이 󰡒장군님. 북괴가 남침하고 있답니다.󰡓고 보고했으나 술김에 잠결에 󰡒야야 치워버려! ×소리 하지마!󰡓라고 큰소리 치고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새벽 북괴의 기습 남침 보고 후 몇 번에 걸친 급보가 올라온 뒤에야 채병덕 참모총장이 잠에서 깨어나 대통령에게 전화로 󰡒각하. 문제 없습니다. 용감한 우리 국군이 반격하여 38선을 돌파하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하고 육군 벙커로 달려갔다.

인민군이 미아리고개를 넘어 서울 시내로 진격하자 제일 먼저 줄행랑친 것이 채병덕 참모총장이었다.

인민군이 서울에 진주하자 애국동지들은 몸을 숨기기가 바빴고, 김일성과 새 시대를 맞이한 이들은 서울 동대문운동장에 모여 위대한 김일성 장군 환영대회라는 것을 개최하였다. 이때 김일성 환영대회 대회장이 김종대 목사였다(통합측 증경총회장).

이에 앞서 종교계는 19504월 대구제일교회에서 제36회 총회로 모여 소위 김재준 파동으로 칼부림 난동이 있었다. 그리고 그해 6.25가 발발하자 교계 인사들이 1950626일 서울 YMCA회관에 모여 󰡒만일 북괴가 서울을 침공하면 교회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의했다. 이때 교회를 버리고 피난 가자는 측(김재준 파)과 우리가 일제 때 교회를 버리고 신사참배를 한 치욕을 다시 해서는 안 된다는 측(한경직 파)으로 나뉘어 토론 끝에 󰡒우리는 교회를 지키자󰡓고 결의를 하였다.

그러나 정작 인민군이 미아리고개를 넘어오기 전에 한경직 목사는 미8군의 짚차를 타고 한강을 건너 수원까지 도망하여 수원에서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나 한경직 이외다. 용감한 우리 국군이 곧 북진할 것이니 조금도 염려마시기 바랍니다.'라고 호소하였다.

또 김종대 목사와 다수의 목사들은 김일성 환영식을 대대적으로 거행하였고, 사회 지도급 인사들과 유명 인사들, 재벌, 국회의원들, 국군의 장군들 가족 그리고 국가공무원들이 모두 제 살기에 바빠서 남쪽으로 도망을 갔다.

부산으로, 제주도로, 일본으로, 혹은 미국 본토나 하와이로 도망하는 이들이 속출했다. 군병력은 지리멸렬했고, 조국을 지키고 민족을 지키려는 이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에 정부, 국회, 군대, 종교계를 보면서 6.25 전 상황을 바로 직시하고 바로 말했다면 6.25는 막았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막을 수 있었던 전쟁이었으나 막지 못한 6.25전쟁에 우리 종교계도 공범자 신세를 면할 수 없다.

 

M1 소총보다 겨우 10cm 더 컸던 꼬마였는데

 

나는 철부지 꼬마 소년으로 감히 6.25 전장에 학도병으로 출전하였다. 이때가 1950. 7. 25. 당시 나이 만 15세였다(1935. 4. 1.).

꼬마는 친구 박현식(대구성광 동창)과 함께 북쪽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을 구경하러 대구역 광장에 나갔다.

꼬마 소년의 눈에 비친 피난민. 갈곳도, 있을 곳도, 먹을 것도 그들을 환영하는 곳도 없이 그냥 버려진 빈깡통 같은 비참한 모습을 보고 '이놈, 김일성 나에게 죽어봐라. 나는 이 시대에 화랑 관창이야.'라고 다짐하면서 내가 군에 나가서 김일성이를 잡아 이 전쟁을 끝내야겠다고 결심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조국을 사랑하는 학도여. 나와 함께 전선으로 가자.」 「조국은 너희들을 부른다.」「조국을 사랑하는 학도여 조국의 운명은 여러분의 손에 달려있다. 가자 김석원 장군 휘하로!라는 격문이 붙은 것을 보게 되었다.

이는 학도병 모병소인 대한학도의용대 본부가 만든 격문이요, 모병광고 문안이었다.

 

격문은 김석원 장군 명의로 된 것으로서, 나는 김석원 장군이 나를 부른 것으로 여겨 󰡐그래. 김석원 장군의 부름에 기꺼이 나서서 김일성을 처치하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당시 모병소는 대구역 앞 동아빌딩 2층에 마련되어 있었다.

꼬마가 찾은 동아빌딩 2층 대한학도의용대 본부에서 모병 일을 담당하던 이들은 손도심(이후 서울신문 사장이 됨), 김영삼(전 대통령), 심영택, 김용섭(학도의용군 중대장) 등이었다.

모병관들이 나를 보고는 '. 꼬마야 여기 왜 왔냐?'라고 물었다.

꼬마는 대답하기를 '김석원 장군이 나를 불러서 왔습니다. 나는 김일성이를 잡으러 갑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때 그들의 첫 번째 물음이 '꼬마야. 넌 몇 살이냐?'였다.

분명 호적에는 193541일생이지만 얼른 대답하기를 '내 나이 17세입니다.' 라고 답하였다(어머니가 말한 1933313일을 기억하며).

학도의용대 모병소에서 뿐 아니라 얼마 후 대면하게 되는 수도사단장 김석원 장군까지 󰡒너 나이가 몇 살이냐?󰡓고 물으면 예외없이 시치미를 뚝 떼고 ', 열일곱입니다.'라고 속였다. 그러나 아무리 거짓말하고 우겨도 왜소한 신체는 속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너는 안 돼.'

 

너무 어려서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일성이를 잡는 데 나이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 내가 가서 김일성이를 죽이겠다.󰡓고 말하자 그들은 자필 지원서를 써라고 하여

󰡒나는 김일성을 죽이려고 학도의용대에 자진 입대합니다. 절대 후회하지 않습니다. 1950725. 김만규󰡓

라고 쓰고 손에 인주를 묻혀 지장을 찍었다.

 

나의 이런 용기와 고집이 그분들의 눈에 '됐다'고 보였는지 대구의 학도병 모병소나 수도사단의 김석원 사단장은 나를 학도병으로 인정해주어 마침내 수도사단 학도대 중대연락병이 될 수 있었다.

그때 나의 키는 처음 만져보는 38, 99식 일본제 소총보다 조금 더 큰 정도였다.

그날 밤 집에 가서 어머니께 '엄마. 나 김일성 잡으러 갈거야. 내일 전쟁터로 간다.'고 말하자 어머니는 '안 된다'고 펄쩍 뛰었고 두 명의 형들은 '이놈의 새끼, 어린놈이 건방지게 어디 매 좀 맞아보라'고 몽둥이를 들고 덤볐다.

꼬마는 급히 몸을 피해 박현식 동문의 집에서 그날 밤을 보내고 다음날 대구역에 집결하여 대구시장 허흡 씨의 환송사를 들으며 대한부인회가 주는 주먹밥을 먹고 1950727일 밤에 무개열차를 타고 대구에서 수도사단장 김석원 장군이 전투를 벌이고 있는 안동역으로 달려갔다.

 

󰡐꼬마󰡑는 이때 같이 참전했던 형들이 지어준 별명이었다. 자원입대하여 꼬마가 처음 들은 노래가 󰡒학도병아 잘 싸웠다. 승리의 길로 역적의 공산당을 때려부셔라. 밀려오는 괴뢰군을 때려 죽여라.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며 가자.󰡓였다. 이는 이북 출신 서북청년들이 즐겨부르는 노래였는데, 우리 일행의 3분의 2가 서북청년과 관계 있는 학생들이었다.

그렇게 하여 꼬마 소년이 전장에 투입된 것이 1950728일 수도사단의 안동 철수작전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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