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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한국전쟁과 순교자

[ 2020-05-23 10:51:17]

 

공산당의 남침으로 민족의 대재앙을 겪어

 

신앙을 지키기 위한 허다한 순교자들 생겨


김남식 박사
(한국장로교 사학회 회장본사논설고문)

 

서론

 

2020625 한국전쟁 70주년을 맞는 해이다. 70년이 지났으나 아직도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우리에게 살아있다. 지구상 유일의 분단국가인 이 땅에 평화의 봄은 언제 올 것인가?

625 한국전쟁에서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부분은 순교자들이다. 이들에 대한 바른 연구와 예우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여기서 625 한국전쟁의 비극을 탐색한다.

 

. 6·25전쟁의 수난

 

1950625일에 일어난 한국전쟁은 단순한 민족분쟁이 아니라 세계열강들이 참여한 세계전쟁이었다. 그 비극적 수난은 아직도 고쳐지지 않은 상처이고, 우리 가슴에 남긴 피멍이었다.

 

1. 6·25 한국전쟁의 배경

 

35년간의 피맺힌 한을 단번에 풀어버린 해방의 감격을 맞이하고 나서, 우리 동족은 국제정치의 비극적 현실 앞에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채 연합국들의 승전의 전리품처럼 얻어 온 해방은 그렇게 쉽고 또 값싸게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원산항에 소련군이 들이닥치는 모습을 보면서 뼈아프게 깨닫게 되었다.

진주한 소련군은 젊은 장교 김일성을 내세워 공산정권을 세울 계획을 하고 있었다. 1960년대부터 교회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박해와 피 흘리는 순교의 행렬이 시작되었는데 이제 본격적으로 교회가 수난의 길을 가야 하는 막다른 골목에 접어들었다.

공산주의자들은 한국전쟁을 일으켜 남한을 공산화할 계획을 치밀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1945년 진주한 소련군은 김일성이 공산당 정권을 세우는 데 성공하자 194812월 철수를 완료하였다. 전략적으로 철수를 마친 그들은 남한의 미군 철수를 거듭 요구하였다. 남한의 미군 역시 UN의 감시 하에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동년 12월부터 철수를 시작하였다. 19495월에 10만여 명의 기독교인들이 서울운동장에 모인 가운데 주한미군 철수 반대집회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194812UN의 결의에 따라 동년 12월부터 철수를 시작하여 고문단 500명만을 남겨두고 이듬해 6월까지 완료하였다. 이는 북한 공산당이 남한을 공략하기 위한 호조건의 첫 번째 단추를 끼운 것이었다. 반공주의자로 명성이 높은 이승만 박사는 남북통일을 그의 생의 목표로 북진 통일론을 줄곧 이야기하고 있었으므로 미국은 한국을 중무장시키면 북으로 쳐들어가게 되고 이것이 국제전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판단하고 한국군의 무장을 경계하여 겨우 소총 정도의 무기만 공급하고 대포나 탱크 같은 것은 전혀 제공하지 않았다.

1949년 중국은 모택동에 의해 완전히 공산화되어 북한 김일성의 남침에 좋은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던 1950112일 그러니까 625가 발발하기 불과 6개월 전에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이 전국 기자클럽에서 미국의 방위선은 알류선 열도,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을 잇는 선이며, 한국은 이 방위선에서 명백히 제외되어 있어 한국에 군사적 공격이 생겨도 먼저 공격받은 국민이 저항하고 다음엔 유엔 헌장 밑에 전 문명 세계가 조치해야 할 것이라는 발언을 했다. 이것은 곧 한국의 방위를 미국이 책임지지 않겠다는 말로서 우리의 운명과 직결되는 내용이었고, 북한에게는 더할 수 없이 좋은 침략의 조건이 형성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던 발언이었다.

1950625일 주일 새벽, 보병 10개 사단, 전차 242, 항공기 211대의 정예부대로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들이 38선을 넘어 밀물처럼 남한으로 진격해 왔다. 그러나 남한에는 보병 8개 사단에 전차는 한 대도 없었고, 항공기는 연습기 10대가 고작인 상태였다. 그러므로 625를 맞아 남한이 입은 피해는 필설로 다 형용하기 어렵다. 공산군들이 파죽지세로 남한을 거의 다 점령하고 부산항 하나만 겨우 남아 있을 때 유엔군이 한국에 참전함으로써 남한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UN군 파병안을 미국이 UN의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다루게 되었을 때, 소련 대표 아담 말리크는 유엔이 중공의 가입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회의 참석을 보이콧 하고 있었다. 말리크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거부권 아니오라고 말하는 대신 76일 모스크바에서 있을 협상에 참석하기 위해 롱아일랜드에서 편히 쉬고 있었다.

소련이 거부권을 행사치 않은 덕에 안전보장이사회는 한국에 유엔군 파견을 결의하게 되었고, 따라서 세계 역사에 유례가 없는 16개국의 군인들이 UN군의 이름으로 한반도에서 전투를 한 기이한 역사를 기록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1953년에 이르러 3년 동안 동족들 간에 이데올로기 때문에 죽이고 죽는 전대미문의 전쟁은 그 슬픈 역사를 남기고 휴전선이라는 국경 아닌 국경을 경계로 휴전이 성립되어 종전이 아닌 휴전으로 포성은 일단 그쳤다. 한국은 휴전을 극력 반대했지만, 미국과 한미 상호안전보장 조약의 체결과 장기간의 경제원조 및 한국군의 증강 등을 약속받는 선에서 어쩔 수 없이 동의하고 말았다.

 

2. 교회의 수난과 순교자들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다시없는 동족간의 대참살극은 어이없는 결과를 모든 분야에 남겨 놓았다. 그러나 그 어느 집단보다도 교회는 더 큰 상처를 입었다. 북한에서 월남한 교회 지도자들은 이미 북한에서 조선기독교도연맹을 만들어 공산주의를 지지하지 않은 기독교인들과 교역자들을 무참하게 학살했던 자들의 만행을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전쟁이 나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인민군이 서울에 입성하자 지하에 숨어 있던 공산주의자들은 제 때를 만나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기독교인들을 색출하고 검거하는 때 기독교인들이 앞장섰다는 사실이 너무나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대목이다.

서울이 함락되었을 때, 경동교회 교인을 자처하는 김욱이 나타나 기독교민주동맹이라는 간판을 종로 YMCA 건물에 걸고 김일성 환영식을 준비한다며 떠들고 다니면서 교인들의 동원을 독려하였다. 그는 미처 피난 가지 못한 교회 지도자들에게 79(주일)에 인민군 환영대회를 기독교 측에서 열라고 협박하였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연락이 닿는 각 교파 목사들은 서울 감리교 중앙교회에서 인민군 환영준비위원회를 위해 모였고, 위원으로 장로교회의 유호준, 김종대, 감리교의 박만춘(납북), 그리고 기독교교육협회 협동총무 심명섭 목사 등이 위촉되었다. 예정된 날 환영행사를 열기는 했으나 인원이 제대로 동원되지 않아 환영대회는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마침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잔류해 있던 목사, 장로들은 최문식이 나타났을 때 간담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최문식은 1933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았으나 공산당으로 전향하였다. 그는 1946년 대구에서 일어난 철도파업의 행동대원 노릇을 한 이재복 목사와 함께 파업을 주도하였다. 대구사건이 진압된 후 이재복은 총살형을 당했으나 최문식은 당시 미 군정청의 고급관리로 있던 김치묵 목사가 같은 동향인 연고로 김 목사의 주선으로 총살형을 면하고 풀려났으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다시 투옥되었다가 전쟁이 터지고 나서 인민군이 남하하자 출옥하였다. 그는 종로 기독교서회에 자리를 잡고 나서 은신하고 있던 목사들을 찾아내어 강제로 동원시켜 821일 김일성 정부를 지지하는 궐기대회를 열었고, 목사들에게 자수서 제출을 강요하였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보낼 남북통일 호소문을 작성한다면서 목사들로 하여금 강제로 서명케 하는 일을 강행하였다.

끌려온 목사들이 적극성을 보이지 않자 이에 격분한 최문식은 목사들 색출 작업에 전력투구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자행하였다. 그는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되자 밀려가는 공산군과 더불어 월북하였다. 한편, 감리교회에서도 감리교인이며 인민군인 최택이라는 자가 성서공회 2층에 사무실을 차려 놓고 자수서를 받아 내고 있었다.

유엔군의 개입으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리에 이루어져 서울 수복이 눈앞에 오자 북한 공산당은 지하에 숨어 있던 목사들 검거에 혈안이 되었다. 김인선, 김윤실 목사는 유치장에서 순교하였고, 나머지 목사들은 대부분 납북되는 비운을 겪었다. 장로교회의 송창근, 남궁혁, 김영주, 유재헌 목사 등과 감리교의 김유순 감독을 비롯하여 양주삼, 방훈, 김희운, 조상문 목사, 성결교회의 박현명, 이건 목사, 구세군의 김삼석, 김진하 사관 등 60여 명이 납북되어 현재까지 그 생사여부도 알 수 없으니, 이것은 본인과 가족 그리고 우리 온 교회의 참담한 고통이 아닐 수 없다.

이름이 남아 있는 분들은 그나마 다행이고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학살당하거나 행방불명된 이들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전쟁 중에 순교를 당한 이들도 적지 않았는데, 북한에서 조선기독교도연맹의 총회장까지 맡았던 김익두 목사도 저들에게 총살당하였다. 황해도 신천 서부예배당에서 새벽기도 하던 중 공산당이 들이닥쳐 김익두 목사 외 6인의 교인이 총살당했고, 기독교도 연맹에 가담했던 많은 목사들도 결국 살해되었다.

장로회신학대학장을 지낸 박창환 목사의 부친 되는 박경구 목사는 황해도 장연 서부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다. 그는 평양의 숭실전문학교를 마치고 교육계에 투신했다가 늦은 나이에 목회를 시작하였다. 박 목사가 진남포 득신소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그 학교 교사로 있었고 숭실중학교의 동기생이었던 강양옥이 조선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하라고 협박하였으나 그는 끝까지 신앙의 절개를 지키면서 이를 거절하였다. 박 목사는 625가 터지던 날 주일 새벽에 체포되어 쇠줄로 양 손목과 양 발목이 묶여 끌려갔는데 후에 손가락과 발가락이 모두 무참히 절단된 시체로 발견되었으며, 같이 살해된 교인들은 입이 흙과 재로 틀어 막힌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북에서 순교한 이들 중 꼭 기억해야 되는 인물 가운데 주기철 목사가 섬기던 산정현교회의 유계준(劉啓俊) 장로와 백인숙(白仁淑) 전도사를 빼놓을 수 없다. 유장로는 주기철 목사가 감옥에 있을 때 그 가족들에게 자비로 생활비를 계속 지급하였고, 해방이 되고 나서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구체화되어 가자 주 목사 가족들과 자기 가족들을 먼저 이남으로 피난시키고 혼자 교회를 지키다가 공산당으로부터 순교하였다. 백 전도사는 주 목사가 감옥에 있을 때 목사 없는 성도를 안정모 사모와 함께 심방하면서 돌본 믿음의 역군이었는데 결국 공산당에 의해 정일선 목사와 함께 순교하였다.

서울에서는 신당동중앙교회 안길선 목사와 김예진(金禮鎭) 목사가 순교했고, 서대문 감옥에서 주채원 목사 등 여러분들이 순교하였으며, 김응락 장로는 영락교회 앞에서 순교하였다. 김인룡, 김윤실 목사 등은 서대문 감옥에 갇혀 있다가 후퇴하던 인민군들에 의해 총살당해 순교하였다. 전북 옥구군 미면 원당교회 교인 75명 중 73명이 한꺼번에 살해되는 처참한 살육이 감행되었다. 전북 삼례교회 김주현 목사는 그의 가족 7인과 함께 순교했고, 광주 양림교회 박석현 목사가 순교할 때 그의 장모, 부인, 외아들까지 함께 공산당에게 살해당하였다. 황해도 봉산의 계동교회 180여 교인 중 175명이 나무로 된 예배당 안에 갇힌 채 모두 태워 죽임을 당함으로써 순교의 길에 들었다. 대전형무소에는 남한 각지의 교역자, 평신도들이 수백 명 투옥되어 있었는데, 공산당들이 후퇴 직전에 감옥에 불을 질러 이들 모두가 불에 타 순교하였다.

625를 겪으면서 인적 피해뿐만 아니라 교회당의 파괴도 심각하였다. 장로교회 소속 예배당 소실이 152, 파손 467, 감리교 소속 예배당 소실이 84, 파괴 155, 성결교는 소실 27, 파괴 79, 구세군은 소실 4, 파괴 4동 등이었다. 이것은 통계에 나온 것의 일부일 뿐 실제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피해가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1) 군인과 민간인의 피해

 

31개월간에 걸친 625 전쟁 시기에 목숨을 바쳐 자유를 지킨 전사자의 수는 한국군 225,784명을 포함해서 유엔군 총 264,520명에 달한다.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나 전상을 입었거나 행방불명된 사람이 한국군 76655명을 포함해서 유엔군 총 876,005명이다. 자유 우방을 위해 참전한 미국의 젊은이 중 모두 157,730명이 사상 혹은 행방불명이 됐다. 무명의 이등병에서 위로는 장군에 이르기까지 용감히 전사했는가 하면 딘 소장에겐 포로라는 치욕을 안겨주기도 했다.

이와 같이 민족의 수난 625 전쟁은 유엔군 115463명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남겼다. 유엔군은 131이라는 우세한 공중전을 통해 114대의 항공기 피해를 입은 대신 공산군에는 미그 15기를 포함해서 총 1,108대를 잃게 했다. 중공군은 꽹과리를 울리며 쳐 내려와 인해전술을 썼지만 90만 명이 전사했고 인민군은 52만 명이 죽었다. 그런가 하면 406천 명의 비전투 요원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유엔군의 폭격으로 공산군은 차량 75,000, 기관차 1,000, 열차 16,000, 교량 2만 개소, 철로 2,700개소, 함선 600, 탱크 410대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유엔군의 북진(北進) 그리고 14 후퇴와 함께 695,316명의 북한 동포가 피난길에 올랐다. 북한의 기습은 남한의 주민들에게도 피난길을 강요해서 2394,918명이 부산, 제주 등지로 대이동을 했다. 그래서 남반부 9개 도의 해방 지구 108개 군, 1,168개 면, 13,654개 리의 지방 주권 기관의 선거 사업을 성공시켰다.”고 북한은 떠들어댔다.

그들은 현물세 25%의 강징과 수탈, 차용증 1장으로 마구 털어가는 등 악몽의 90일간의 점령 기간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 말고도 128,736명이 학살되는 등 총 139968명의 민간인이 비극을 겪었다. 이 중 244,663명은 모진 고문을 견디다 못해 숨져 갔는가 하면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지금도 아픔이 가시지 않은 부상자는 229,625명이나 된다.

84,532명이 붉은 쇠사슬에 묶여 애통의 미아리고개를 넘어 지옥에로의 행진을 강요당해서 지금까지 소식조차 알 길이 없다.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진 가족 친척 형제도 33,212명이나 된다. 소위 해방전쟁이란 미명 아래 입가에서 젖 냄새가 가시지도 않은 어린 16세의 소년부터 반백이 다 된 50세의 늙은이까지 끌어내어 강제로 의용군에 입대시킨 수는 40만 명이 넘는다.

인민군의 강제 의용은 1차 때에 16세에서 20세까지, 2차 때는 16세에서 30세까지, 3차 때 16세에서 35세까지, 45차 때는 16세에서 40, 그 후에는 50세까지로 나이를 올렸다. 의용대로 징집된 이들이 자기 키보다 큰 소련제 장총을 메고 낙동강 전선으로 끌려가던 모습은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625 전쟁이 나기 전 해인 1949년도의 남한 인구 중 2024세 연령층이 8.5%를 차지했으나 6년만인 1955년도엔 8.2%로 줄어들었으며 2529세 계층은 6.7%에 불과했다. 전쟁이 얼마나 많은 젊은이의 목숨을 앗아갔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625 전쟁 당시 부산의 인구가 1429,726명이었다. 이와 맞먹는 수가 북한의 학정 90일 동안에 죽어가고 혹은 강제의용군으로 끌려갔다.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은 200만 양민의 목숨과 14만 병력을 구제했다. 유엔군의 무제한 북진 명령이 내렸을 때 패주하는 공산군 측은 도, , , 면 단위로 학살 인원을 미리 정해 놓고 수의 확인을 위해 눈, , 귀 등을 잘라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남한에서의 만행 말고도 북한은 625 전쟁의 예비 학살과 보복 학살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소위 조국해방전쟁역사에는 미군이 가장 많은 학살을 했다고 기록했다.

경남 남해에서 인민군 제6사단(사단장 방호산, 195012월 영웅 칭호를 받았으나 휴전 무렵 숙청)이 패주할 때 76명의 청소년을 북한에 데려간다고 속이고 경남 산청군의 어느 산중에서 사살, 얼마 후 시체로 발굴됐던 일도 있다.

군경 가족, 교원 봉급생활자 등이 많이 집결된 수원, 대전, 광주, 김천, 전주, 군산, 천안 등지에서 한 곳에 3,000, 어떤 곳에서는 500명씩 몰려 있다가 붙들려 철사로 손이 묶여 생매장 되거나 총살당했고 군경가족은 부인, 유아를 가리지 않고 생매장을 했으며 우는 어린애를 삽으로 쳐 죽이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황해도 웅진읍에선 300명의 읍민을 학교에 모이게 하고 그들을 산으로 이동시킨 후 기관총으로 집단 살해했는가 하면, 강원도 강릉 구정면 예천리의 지서 앞에서 40명이 살육 당하였다.

대전에선 1천 명의 애국 인사들을 끓는 물에 집어넣어 죽이기도 했다. 할당제 살육이 공개되어 입장이 난처해진 김일성은 무정, 김한중, 최강 등에게 책임을 씌워 면직시키기도 했다.

국군 18연대가 입성했을 때 원산 감옥에 수감되었던 280명이 학살당했음을 발견했다. 이들 중에는 한명준 목사, 김봉식 신부, 이희영 목사들이 섞여 있었으며 중 고등학교 학생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강릉과 원산 사이에선 인민군이 총탄을 아낀다고 돌을 매달아 바다에 던져 죽인 것만도 3천 명이 넘었다. 평양 감옥에는 1천 명이 넘는 시체가 쌓였고 어머니를 껴안고 같이 죽은 67세의 어린이들과 젖을 먹으려다 죽은 어린이도 있었다. 평양에서 인민군이 도주하면서 철골리 지역에 집결시켰던 2,500명을 학살했고 귀호리 부근에서는 400명을 죽었다.

이밖에도 기정리 공동묘지, 청룡한 공동묘지에 생매장 등 학살행위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평양역에서의 학살에 많은 납북 인사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전쟁 비용과 재산 피해

 

625 한국전쟁은 1940년대의 미 국방 예산 규모를 1백억 달러 선에서 4백억 달러 선으로 끌어올려 미소의 군비 경쟁에 부채질을 한 것으로 주목된다.

미국은 625 다음 해인 1951년에 국방예산을 440억 달러, 1952년에는 504억 달러, 1953년에는 463억 달러를 책정했고, 한국전쟁 직접 비용만도 150억 달러를 사용했다. 그런가 하면 한국도 4105천만 원의 전쟁 비용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유엔군의 참전과 국군의 증강은 약 2천억 원의 방대한 적자와 유엔군 대여금 격증으로 19506월 현재 574억 원이었던 화폐 발행고는 9개월이 지난 19513월 현재 5배가 늘어난 3,282억 원으로 인플레를 유발, 물가는 3배가 뛰어 올랐다. 매년 국방예산은 전체 예산의 6070%를 차지해 전쟁 2년 만에 물가는 10배로 뛰어올라 궁핍과 경제 불황을 배태해 버렸다.

피아의 포격전, 폭격으로 가옥 피해는 594,190동으로 모두 파괴되었으며 이 통에 북한 주민 2백만 명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했다. 폭격 피해액은 4105천만 원으로 남한의 시설, 가옥 피해만도 228,1054,217달러에 달했다.

한국군만도 3,907톤의 폭탄과 1298발의 로켓을 퍼부었고 2,500만 발의 기관포, 64톤의 네이팜탄을 소비했다. 인천 상륙 작전 때 5,012톤의 전투용 물자를 양륙했던 것만으로 미루어 보아도 625의 전쟁 비용은 가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휴전 다음 달인 195388일 소련 최고회의는 북한 인민이 번영과 평화로운 생활을 향유하고 번영하는 것을 갈망하는 까닭에 심대한 전쟁 재해를 복구하고 경제 부흥을 위하여 즉시 10억 루블의 원조를 제공한다고 성명했다. 1953년까지 소련이 북괴에 보낸 원조는 138천 달러에 달했던 것만 보더라도 전쟁 피해는 상상할 수 있다.

북한은 625 전쟁 기간 60만 동의 가옥과 6천 동의 학교 등 큰 건물이 파괴되었다고 했다. 이러한 피해는 휴전 후 10년 동안 3,567의 주택을 세웠다는 북한의 공식 발표로 미루어서도 추측이 가능하다.

휴전이 된 후인 19531122일 킹 운크라 단장은 한국의 전후 복구를 위해 10억 달러가 필요하다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도 우리나라의 피해는 역사상 유래가 없는 큰 참상이라 할 수 있다.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싸움은 10만 명의 전쟁고아와 30만 명의 전쟁미망인 그리고 33만 명의 전쟁 불구자를 낳았다. 전쟁고아는 큰 사회 문제로 대두, 전국 곳곳에 고아원을 세우게 했고, 우리에겐 생소했던 고아원들이 늘어났다.

연금 수급권자만 해도 144천 명이며, 교육 보호 대상자도 38천 명, 간호 수당 생계 부조 수당 수급권자는 16천 명에 달하고 있다.

 

(3) 후유증

 

, 다리를 잃은 상이군인들의 행패는 전후 원호 대책의 부실로 극도에 달했다. 물품 강매, 행패, 강제 찬조 등 그 사회적 부작용은 컸다. 그러나 이들 당사자들의 문제에 못지않게 그들의 2세들과 전쟁고아들의 사회생활은 그들이 성장함에 따라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었다. 특히 전쟁고아들은 심각한 범죄 문제로 등장했다.

516 이후 향상된 원호 대책에도 불구하고 특혜로 배운다는 생각에 2세들은 스스로 소외감을 느껴야 했고, 사제관계나 교우관계도 상이군경 가족이라는 사실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까지 빚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는 말씀처럼 동정을 받는다는 입장은 어딘가 떳떳하지 못하다는 경향을 불어 넣어 실지 교육에서나 대인관계에 많은 정신적 문제점을 남기고 있다.

전쟁고아가 성장함에 따라 부모의 애정 결핍으로 일어나는 반항심과 비뚤어진 성격 등은 여러 가지 범죄를 빚게 하고 있다. 전쟁미망인의 등장은 새로운 사회 윤리와 도덕관념에 많은 문제점을 던지기도 했다. 물론 여성의 적극적인 사회생활에의 참여 특히 직업 전선에의 참여 등은 이제까지의 여성 지위에 대한 가치 변화를 낳기도 했다.

전쟁이 빚은 물리적 피해는 벌써 보상되고 복구되었을지 모른다. 전쟁 전의 서울 거리보다는 지금의 서울 거리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발전되었다. ‘파괴는 건설의 어머니라는 옛말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극은 없다고 외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625 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이 가져다 준 적대감정은 쉽사리 풀리지 않고 있다.

살육의 비극이 파 놓은 의식 구조와 가치관의 균열은 70여 년이 넘도록 좁혀지지 않고 우리의 주위에서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전쟁미망인의 고뇌와 전쟁고아의 반항, 불구의 용사들이 토해내는 절규들이 주위에 아직도 메아리친다.

한국교회는 수난을 이기고 성장하였다. 고통을 이긴 신앙은 오늘의 삶을 이끌어 나가는 데 큰 힘이 되고 있는 것이다.

 

결론

 

625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많은 순교자들이 나왔다. 그 수는 우리들이 정확하게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심지어는 한 교회에서 수십 명의 순교자가 나오는 슬픈 영광이 있었다. 여기서는 순교자 중 몇 사람의 발자취를 살펴본다. 그러나 이들만이 순교자의 전부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625 전쟁 중 북한군과 공산당에 의해 순교한 기독교 교직자는 이름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사람만 176명이 확인되었고, 납북된 교직자는 194명으로 피살과 피랍 피해자를 합하면 희생자는 370명에 이른다. 이는 정부가 전쟁이 끝나기 전에 조사, 작성한 피살자 명부’, ‘피랍자 명부’, 대한적십자사가 1956년에 희생자 가족들로부터 자진 등록을 받은 실향사민 등록자 명부목사’, ‘장로’, 천주교의 신부등으로 교직이 명확히 밝혀진 기독교인들과 기독교의 여러 조사 자료를 종합한 숫자다. 여기에 피살 또는 납북된 이름 모를 일반 신도를 합친다면 그 숫자는 크게 늘어날 것이다. 전쟁이 끝나지 않았던 1952625일자 한국기독교신문에는 400명의 목자(牧者)가 희생되었다는 기사가 있었고, 남한의 피해와는 별도로 북한에서만 장로교 교역자 240, 감리교 46명이 순교 또는 행방불명된 것으로 알려졌다.

기독교 연구자들의 조사로는 피살 또는 납치된 기독교 교역자는 정부가 조사한 숫자보다 훨씬 많았다. 장로교 177, 감리교 44, 성결교 11, 성공회 6명이라는 연구도 있었고, 가톨릭에서는 남북한을 합쳐 한국인 52(교구장 1, 신부 40, 수녀 7, 신학생 4)과 외국인 98명을 포함하여 150명이 희생되었다.

집단 학살사건의 희생자가 된 교인도 많았다. 한 마을의 교인들을 집단으로 학살하거나 교역자 일가족을 무참하게 살해한 사건도 여러 곳이었다. 공산당의 북한군이 종교의 자유를 부인하고 특히 기독교에 대해서는 탄압의 차원을 넘어 말살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공산당의 종교는 이데올로기였다. 김일성김정일을 신격화하는 단계로 왜곡하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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