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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엽 목사의 찬송학 (13)

[ 2019-06-07 15:58:10]

 
조영엽 박사
전 국제기독교연합회(I.C.C.C. Dr. Carl McIntire. 19487월 설립) 본부선교사

 
중세 시대의 찬송


초대교회 시대 이후 중세교회의 대표적 음악은 그레고리안 찬트(Gregorian Chant)였다. 그레고리안 찬트는 단순성가(Plain Chant)로서 단성제창이다. 중세 시대의 모든 성가는 라틴어로만 쓰였고, 성가도 잘 훈련된 일부 성가대원만 불렀으며, 연주도 교회에서 인가받은 사람들만 할 수 있었다. 성가의 범위나 내용도 시편과 일부 성구들로 구성되었으므로 매우 단조롭고 빈약했다. 그러나 그레고리안 찬트는 서방교회(로마 천주교)의 전례(예배) 음악과 서양음악의 기원으로 그 영향은 지대하다. 다시 말하면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 음악은 중세 로마 천주교의 음악이었고, 중세 로마 천주교의 음악은 그레고리안 찬트 곧 단성제창으로 전례 음악(미사 음악)이었다.

중세 암흑시대(Dark Ages, A.D. 500-1500)는 로마 천주교의 배교로 1천 년 동안 교회 음악도 빛을 보지 못했다. 이 긴 세월 동안에는 찬트와 단순성가 외에는 아무 음악도 발전하지 못했다.

종교개혁과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하여(로마 천주교는 예배 미사가 계속되었으나) 개신교의 음악은 회중 찬송으로 발전되었다. 마틴 루터의 합창(Choral)은 루터교를 위시한 개신교회들에 많은 부흥을 가져왔고, 칼빈의 시편가(Psalters)는 칼빈주의 개혁교회들의 찬송이 되었고, 찰스 웨슬리의 부흥 찬송(Hymns)은 감리교와 모든 개신교회의 부흥을 가져왔다.

1860년 이후 미국에서는 부흥사 무디(D. L. Moody)가 인도하는 부흥집회 때 부흥 찬송(Revival Hymns)과 복음찬송(Gospel Hymns)이 블리스(Bliss)와 생키(Sankey)에 의하여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전도를 위한 부흥 찬송들과 개인의 신앙 간증을 위한 복음 찬송들이 퍼짐으로써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을 가사로 한 하나님을 향한 찬송들은 점차 뒤로 밀려나게 되었다.

20세기 초에 들어서는 미국의 부흥집회들에서, 그리고 신오순절 교회 계통의 교회들과 부흥집회들을 통하여 소위 복음송(gospel song)과 현대복음송(C. C. M.)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현대복음송은 세속화된 교회의 대중가요이다.

1.
암브로스(Ambrose, A.D. 339-397), 밀란의 감독, 회중 찬송의 시조

암브로스는 회중 찬송을 처음으로 교회에 도입한 교회 음악의 시조라고 불린다. 그는 귀족 가문에 태어나 고전음악, 수사학, 법학, 헬라어 등을 공부했다. 30세에 이미 이탈리아 북쪽 지역을 관할하는 지방 단체장이 되기도 했다. 그는 밀란의 감독 아우켄티우스(Aukentius)가 세상을 떠난 후(A.D. 373) 세례를 받기도 전에 감독이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사제(priest)가 되지 않으려고 피신도 했었지만, 기독교 집안에서는 처음으로 사제가 되었다. 그는 감독으로서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자들과 교회를 위하여 다 바친 물욕이 없는 성직자였다. 그는 밀란의 감독으로 추대된 이후 감화력 있는 설교자, 능력 있는 행정가, 영향력 있는 정치가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정통 신학의 기수로서 이단 아리안주의(Arianism)를 반대하는 몇 권의 글을 썼으며, 아리안주의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그는 성직의 권위와 위상을 높였다. 성 어거스틴에게 큰 감화와 영향을 주었으며 A.D. 387년에는 어거스틴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자신을 조력하던 모니카(Monica, A. D. 331-387)는 성 어거스틴의 어머니가 되었다. 그는 A.D. 39744(금요일)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몸은 그가 세운 성 암브로스 성당에 안장되었다.

암브로스의 첫 회중 찬송(Congregational Hymn)

암브로스는 회중 찬송을 처음으로 교회에 도입한 '교회 음악의 시조'(the founder of church music)라고 불린다. 그는 찬송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헬라어 휨노스(Hymn)에서 인출했다. 로마 제국의 첫 기독교인 콘스탄틴 황제에 의하여 A.D. 313년 밀라노 칙령이 내려진 이후 서방 교회들은 로마 제국의 번성과 더불어 성경이 제롬(Jerome)에 의하여 라틴어로 번역되었으며(Vulgate), 암브로스의 찬송도 라틴어로 보급되었다. 그러므로 암브로스를 '라틴 찬송가의 아버지'(father of Latin hymn)라고도 부른다. 그는 적어도 4편의 찬가(단순성가, Chant)를 발표했는데 그 찬가들은 주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찬송들이었다.

암브로스의 찬가는 전례 성가(典禮聖歌)로서 오랫동안 불렸다. 그가 작시한 찬송가들 중에 '찬란한 주의 영광'(O Splendor of God󰡑s Glory Bright, 찬송 130)은 성삼위일체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이다.
암브로스는 작사뿐만 아니라 작곡에도 뛰어난 종교 음악가였다. 암브로스는 최초로 4선법을 제정하고 종전에 부르던 찬송가의 창법을 개선하여 회중을 2개 파트로 나누어 교대로 노래하게 했다. '교창'(Antiphonal singing)은 획기적인 일로 평가를 받으며 현대 교회의 에배 때 성시 교독하는 것도 이 교창에서 유래되었다. 그 후 회중 찬송은 5세기부터 수도원의 발달과 더불어 교황과 수도사들의 손으로 들어가 사실상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때까지는 평신도들과 거리가 멀어졌다.

사실상 A.D. 590년부터 1517년까지는 중세 암흑시대(drak ages)로서 영()의 세계는 빛을 잃고 로마 천주교의 교권과 부패만이 만연한 시대였다.

2.
그레고리 1(Gregory I, A.D. 540. 9. 3.~604. 3. 12.)

콘스탄틴 대제 시대부터 종교개혁 시대까지 약 180명의 감독이 있었는데 그들 중 그레고리 1세만큼 영향력을 발휘한 감독은 아무도 없었다. 마지막 교부이며 천주교의 첫 교황인 그레고리 1세는 중세 교황의 대부로 the Great()라는 호칭이 붙여졌다.

그는 A.D. 540년 로마의 부유한 원로 가문에서 아버지 골디아누스(Gordianus)와 어머니 실비아(Silvia) 사이에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철저한 신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의 가문에서는 이미 교황 펠릭스 3(Felix III, 재임기간 A.D. 483. 3. 13.~492. 3. 1.)와 교황 아기피터스 1(Agapitus I, 재임기간 A.D. 535. 5. 12.~536. 4. 22.)가 배출되었다.

그는 법률과 신학을 공부하여 30세에 로마의 한 지방장(a provincial governor)이 되기도 했다(A.D. 572-575). 그렇지만 그의 신앙과 경건생활은 그로 하여금 세상을 등지게 했고 그의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수도사(monk)가 되어 물려받은 많은 재산을 모두 자선 사업에 사용하고, 시실리(Sicily)7개의 수도원을 세웠고 로마에 있는 자신의 저택(mansion)을 성 안드레 수도원(St. Andrew)으로 개조하고(A.D. 574-575), 자신은 자신의 수도원에서 물욕 없는 수도사 생활을 했다.

그는 얼마 되지 않아 교황 베네딕트 1(Benedict I, 재임기간 A.D. 575. 6. 2.~579. 7. 30.)의 권유로 로마의 7집사 중 한 사람으로 임명되었다. 2년 후(579)에 교황 펠라기우스 3(Pelagius III, 재임기간 A.D. 579. 11. 26~590. 2. 7.)는 그레고리를 교황의 대리 사절로 콘스탄티노플(현재 터키 이스탄불)로 파견했다.

수년 후(A.D. 585-586) 로마로 돌아온 그레고리는 그의 수도원에서 원장으로 있으면서 많은 성직자와 로마 시민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드디어 A.D. 59093일 교황(Pope)으로 추앙되었다. 그는 거룩한 성직을 두려워하여 동굴로 피신도 했으나 다시 발견되어 시민들의 환호 속에 교황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교황 그레고리 1세는 영적 지도자로서 당시 수도원들과 사회의 퇴폐적인 악습들을 타파하고 개혁했다. 당시 성행했던 성직매매, 주교들이 예하 사제들로부터 받아 온 연례 선물 그리고 헌납금 등을 금했다. 사제들(Priests)의 선출과 엄격한 생활 등에 대한 세부 사항 등을 법으로 제정하고, 성직자의 독신생활을 강조했다. 또한 정치적 지도자로서 뛰어난 영향력을 발휘하여 농민들을 위한 농민 보호법을 제정하여 서민과 농민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했고, 거리의 빈민들과 병자들에게 급식을 공급하는 온정도 잊지 않았다. 그는 로마의 실제적 통치자로서 사회의 기강을 바로잡고, 군에서 월급을 지불하며 장군들을 임명하고, 스페인, 가울, 북이탈리아 등 서방의 여러 나라들과의 유대도 강화했다.

또한 캔터베리의 어거스틴(Augustine of Canterbury)을 잘 수련된 40명의 사제들과 함께 영국으로 파송하여(596-601) 앵글로색슨 족(Anglo-Saxons)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했다. 그는 그의 막강한 영향력으로 교회의 권위를 신장시키며, 황제의 권한과 통치하에 있었던 기독교를 중세 교황권으로 이전시킨 교황 절대주의(Papal-absolution)의 기반을 닦아 놓았다. 그는 결정을 하는 사람인 동시에 엄격한 금욕적 사람, 물욕과 사심이 없는 사람, 헌신적인 사람, 인간미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말년에는 중풍으로 보행을 못했으며, A.D. 604312일 그의 영혼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소천했고, 그의 몸은 성 베드로 사원에 안장되었다.

그레고리안 찬트(Gregorian Chant)

교황 그레고리 1세는 교회의 예배 음악에도 지대한 공을 세웠다. 그러므로 그를 추모하여 그의 이름을 따라 중세교회의 예배 음악을 그레고리안 찬트라고 부른다. '찬트''단순성가'를 말한다.

그레고리안 성가는 예배 음악(liturgy music)으로서 단순성가(plain chant, 단선율)이다. 단순성가는 시를 읊듯 읊는 형식이다. 단순성가의 특징은 단성으로 섬세하고 조용하고 은은하며, 소박하고 엄숙하고 무게가 있고 안정감이 있으며, 웅장하고 경건하고 호소력이 있다. 그것은 절대적 순결, 장엄, 엄숙, 경건에 있다. 그레고리안 성가는 아름다움, 즐거움, 쾌락 또는 감정적 만족 등을 목적으로 한 노래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레고리안 성가인 단성 제창은 지금까지 로마 천주교의 전통적 미사(예배) 음악으로 군림하고 있다.

그레고리안 성가는 구약 히브리인들의 성전 예배에서 유래되었고 그 음악의 이론과 형태도 히브리 것을 모방했다. 히브리인들의 예배 송가는 어떤 한 음(단성)을 택하여 가사를 읊어 나가는 것으로 가사의 시작이나 끝 무렵에 음을 다소 높이거나 낮추는 것이었다.
따라서 천주교의 전통적 예배 음악인 그레고리안 성가는 유대교의 시편 송가와 유사하다. 그레고리안 찬트는 중세 전례(예배) 음악의 절대적 척도였다.

그레고리는 종래의 모든 로마 천주교의 예배와 예배 음악을 수집 정리하여 편집한 자(Codifire)이다. 그레고리안 찬트는 7-8세기에는 악곡 형식이 형성되고 9세기는 전성기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11세기에는 교회음악 이론가요, 사제인 귀도 다렛조(Guido D󰡑Arezzo, A.D. 990-1050)에 의한 4선 보표의 발명에 따라 네우마(Neumes, 단음)를 사용하게 됨으로써 음악사적 형태가 갖춰지게 되었다. 네우마는 중세교회 음악에서 기보법으로 사용된 음표(music note)였다. 네우마는 멜로디의 일반적인 방향을 제시해 주고 속도와 음량을 어느 정도 지시해 준다. 따라서 화성적 경향이 대두되면서 일반 회중이 아닌 잘 훈련된 성가대원들만이 예배 성가를 부를 수 있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예배 의식에서 회중을 외면하게 되어 11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동안 그레고리안 성가는 큰 발전은 없었다. 문화적 손실은 유감이지만 그로 인하여 예배의 경건성이 보전되었다.
그 후 12세기 후반, 프랑스에 새롭게 노트르담 사원(Notre-Dame Cathedral)이 건축되면서 레오닌(Leonin)과 페로린(Perolin)이라는 두 음악학교가 설립되고, 음악의 형식과 음계 그리고 악보 표기가 정립되었다.

트렌트 공의회(The Council of Trent, 1545-1547, 1551-1552, 1562-1563, 세 번 모임)에서는 전례(예배) 음악에서 가사(내용)가 주도권을 갖도록 규범화했고, 악기의 사용을 제한했으며, 그레고리안 찬트 이외에 다른 세상 음악들은 허락하지 아니함으로써 그레고리 성가의 부활을 시도했다.

A.D. 1564년 교황 피우스 4(Pius IV)는 추기경 회의를 소집하고, 교황 말셀루스의 미사곡(the Mass of Pope Marcellus)을 추천하면서 현대 작곡들을 보다 더 수용할 것을 권장했다. 당시 현재 작곡들이란 바흐, 모차르트 등의 곡들을 말한다.

15세기 후반부터 시작되는 르네상스(Renaissance) 시기에 이탈리아의 작곡가 팔레스트리나(Palestrina, A.D. 1525-1549)에 의해서 다성음악(polyphony)이 정립되었고, 바로크(Baroque) 시대(1600-1700)에 들어서면서 관현악 편성과 지금의 피아노 같은 건반악기의 개발과 음악적 형식들이 정립되었다.

20세기에 접어들어 프랑스 소렘(Solemes) 수도원의 수도사들을 중심으로 예배 의식에서 찬트(Chant)의 부활 운동이 다시 일어났다. 그후 독일의 음악인 와그너(Wagner, Richard, A.D. 1813-1883) 박사가 찬트 부활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교황 피우스 10(Pius X, 재임기간 1903. 8. 4.~1914. 8. 20.)는 교회 음악의 개혁(1903. 11. 22.)으로 그레고리안 찬트의 부활을 가져왔다. 다시 말하면 그는 그레고리안 시대의 위대한 다성음악을 전례 음악의 척도로 선포하고, 전례 음악에 세속 음악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피우스 10세는 가장 보수적, 건설적 개혁을 추진한 교황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성직자들의 영적, 도덕적 수준과 목양을 효과적으로 증진시켰으며, 신학교들과 신학교들의 교과과정을 개혁했고, 가정, 학교, 공동체 등은 예수 그리스도를 최우선 중심으로 할 것을 강조했다. 피우스 10세는 현대 천주교 전례(예배) 음악의 선구자로 군림했다. (계속)
 
조영엽 박사
전 국제기독교연합회(I.C.C.C. Dr. Carl McIntire. 19487월 설립) 본부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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