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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개혁신학회, 논제는 교회와 국가

[ 2019-04-29 14:37:15]

 

< 이상규 박사>

11명의 학자 주제논문 발표는 뜨거웠다

이상규 박사
(고신대 명예교수, 백석대 석좌교수, 역사신학)

지난 413일 총신대학교 제2종합관 카펠라홀에서는 한국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2019년 봄 개혁신학회 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날 논제는 '교회와 국가'였으며, 주강사로 고신대학교 이상규 교수가 '한국기독교와 민족, 민족주의'에 대해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다음은 이상규 교수가 발표한 <한국기독교와 민족, 민족주의>라는 주제논문 중에 민경배 교수와 주기철 목사와 관련한 내용들을 중심으로 소개한다.

<
한국기독교와 민족, 민족주의>

1.
문제와 과제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민족'이라는 말만큼 가슴 뭉클하게 하는 말은 흔치 않을 것이다. 민족, 민족의식, 민족주의 등 민족에 대한 과도할 정도의 반응은 우리 민족이 처한 역사적 배경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우리는 일본제국주의의 신민통치하에서 살아왔고, 부일 혹은 친일 행위자들의 반민족적 행위에 대한 거부, 해방 후 반민특위의 구성과 와해에 대한 역사, 곧 집단적 기억은 아픈 경험으로 남아있다. 일제하에서 우국지사나 독립운동가들은 한결같이 민족 혹은 민족정신을 강조했다. 정인보에게 있어서 그것은 ''이었고, 박은식에게 있어서는 '국혼'(國魂)이었다. 그들은 민족 교육을 강조했고, 민족문화를 지키기 위해 총독부와 맞섰다. 이런 역사적 정황 때문에 민족, 민족문화, 민족문학, 민족음악, 민족민주운동 등은 낯익은 주제가 되었다. 최근에는 '우리 민족끼리'라는 이름의 민족적 동일성 주장은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하는 가치로 인식하기도 한다. 이처럼 민족은 정치적 균열을 규제하는 상위의 기준으로 부상했는데, 이런 민족 개념의 부상은 탈식민화(post-colonialism)의 도정에 오른 한국근현대사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민족주의라는 개념은 광범위하기 때문에 무분별하게 사용되거나 남용되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민족주의를 이성적 질서보다는 감성적 열정의 문제로 인식하여 맹목적 배외주의(Chauvinism)로 인식하여 반미운동을 민족운동으로 간주하는가 하면 과도한 혐오증(Xenophobia)의 미몽에 젖어 있다. 민족주의는 민족이나 민족의식과는 다르므로 민족의식과 민족주의는 구별되어야 하지만 이들과 무관하지는 않다.

서구에서 민족주의는 16세기 시작된 것으로 보아 자본주의만이 아니라 민족주의도 종교개혁의 산물로 보지만 대체로 근대후기 민족국가 형성과 더불어 일어난 것으로 본다. 특히 민족주의는 19세기 이후 크게 대두되었고, 1914년 세계대전은 민족주의 팽창이 가져온 불행한 결과였다. 우리나라에서 민족주의의 대두는 일제하의 상황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의 민족주의는 3가지 유형 혹은 노선으로 짖거되어 왔는데, 첫째는 근대화운동, 곧 선진문명을 받아들임으로써 근대적 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개화지향의 민족운동, 둘째는 보수 근왕(勤王)운동으로서 신흥자본주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방위하려는 충의사상(忠義思想)에 기초한 민족운동, 그리고 세 번째 유형으로는 동학운동에서 보는 바처럼 민중봉기는 봉건적 특권계급에 대한 거부인 동시에 외세의 침투에 저항하는 제3의 노선이 있었다. 비록 이런 유형적 구분이 가능하나 따지고 보면 '근대지향''민족보존'의 두 노선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근대지향에 무심했던 척사위정파가 후자에 속한다한다면 개화파는 전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양 측면을 통합적으로 인식한 것이 소위 '자강민족주의'(self-construction nationalism)이다. 우리의 것을 보수하되 선진문명을 받아들여 국제적인 정치질서의 냉엄한 현실에서 민족의 자강을 추구하는 소위 자강민족주의가 대두되는데 이 필요에 적절하게 응답한 것이 기독교, 기독교회, 그리고 기독교선교사들이었다. 개화지향은 개신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든 요인이 되고 이것이 소수의 엘리트 그룹의 기독교 영입운동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차기벽은 '한반도는 개국 이래 일(), (), () 삼국의 각축장으로 화한 끝에 결국 일본한테 병탄당하고 말거니와, 개신교는 일제침략의 위협하에 전전긍긍하던 한국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형태로 나타났기 때문에 개신교에 대한 한국인의 태도는 일본인이나 중국인의 그것보다 훨씬 더 수용적이었다.'고 지적한다.
, 기독교의 수용과 발전은 한말의 국가적 비운과 직결되어 있었다. 이런 역사적 정황에 근거하여 이 글에서는 민족의 현실과 기독교와의 역사적 해후, 그리고 기독교가 어떻게 민족의 현실에 부응하여 기독교적 민족주의를 형성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정리해 두고자 한다. 동시에 민족문제와 관련하여 '민족교회론'을 제기한 민경배 교수의 견해와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거부에 대한 '민족주의적 해석'에 대한 논평을 첨부하였다.

[
한국 기독교와 민족주의 : '기독교 민족주의'(Christian Nationalism)]

중국 중심 세계질서의 종지부를 찍은 청일전쟁은 우리에게 충격이었다. 중국에 대한 믿음은 무너졌다. 조선의 조야에서는, 일본의 승리는 문호를 개방하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결과라는 점을 깨닫게 된 것이다. 조선의 조야는 세계질서, 그리고 극동의 새로운 정세에 눈을 뜨게 되었고, 점증하는 열강들의 야욕을 희미하게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도 서양문물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민족적 자강(自强)을 이룰 수 없다는 인식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서구와 손잡는 방법은 무엇인가? 당시로서는 기독교라는 통로뿐이었고, 결과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기독교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런 것이었다. 소수의 엘리트 그룹의 기독교 영입론은 그 시대의 요청이었다. 그래서 청일전쟁 이후 기독교에 대해 새로운 관심이 일기 시작하였다. 코리언 리포지토리(Korean Repository)에서는 '이 가련한 조선인들은 고난과 불안의 와중에서 두 손을 뻗쳐 하나님을 찾고 있다'고 기록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아직 미미한 서양종교로만 이해되던 기독교에 대해 새로운 관심이 일기 시작하였고 청일전쟁이 끝난 1895년부터 신자 수는 급증하기 시작했다. 기독교는 서구문화를 전파하는 도관으로 이해된 것이다. 말하자면 청일전쟁 이후 기독교에 대한 관심과 신자의 급증은 기독교를 통한 민족 자강의식의 발현이었다. 이 점을 호주의 역사가인 케네드 웰즈(K.M.Wells)'자강 민족주의'(self-reconstruction nationalism)라고 불렀다.

이런 환경이 한국교회를 반일(反日) 충군애국적(忠君愛國的) 성격으로 주형하였다. 한 가지 사례가 189510월에 발생한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에 나타난다. 108일 일어난 이 야만적인 시해사건은 단순히 한 여인의 죽음이 아니라 국가 변란을 시도한 사변이었다. 일본의 조선침탈 야욕을 보다 분명히 노출한 이 사건은 심각한 국가적 위기였다. 의기소침한 고종은 기독교회에 구원의 손을 뻗쳤다. 언더우드는 고종의 부름을 받고 7주일간 입궐 수직하였고, 감리교 선교사 존스(G.H.Jones)는 고종의 측근으로 통역을 맡았다. 이런 비운의 역사에서 한국기독교는 충군애국의 종교로 인식되어 갔다. 교회공동체에 의해 아래와 같은 나라사랑의 노래(愛國歌)가 지어졌고, 교회는 고난의 여정에서 안식할 수 있던 터전이었다.
'하나님께 성심기도 국태평과 민안락을 / 임군봉축 정부사랑 학도 병정 순검사랑 / 사람마다 애자품어 공평정직 힘을쓰오 / 육신세상 있을 때에 국태평이 제일좋다 / 굳게 잡고 맹세하여 대군주의 덕을 돕세.'

정리하면, 적어도 1895년 이후 1910년대의 성장은 기독교를 통해 민족적 자강을 이루는 의지의 결과였고, 그런 결과로 기독교는 반일적 성격과 함께 충군애국의 종교로 인식되었다. 존스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실질적 집착보다 더 강력한 애국충군의 보루는 찾기 어렵다'고 평가했을 정도다.
한국에서의 기독교의 수용과 급성장에 대한 논의에서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기본적 전제는 아아(亞阿)제국의 많은 나라들과는 달리 일제의 식민통치 하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한국이 직접적으로 일제의 통치를 받기 시작한 것은 1910년 이후이지만, 사실은 그 이전부터 일제의 조선 침략은 계속되어 왔다. 기독교가 전래될 당시 한국은 점증하는 일제의 침략 하에 있었다.

일본은 1875년 병자수호조약의 체결을 통해 조선 진출의 발판을 확보했고, 청일전쟁(1894-5)과 노일전쟁(1904-5)에서 승리함으로 한반도에서 청과 러시아의 세력을 배제했다. 1905년에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이듬해 통감부를 설치하였고, 1910년에는 조선을 병합 병탄(倂呑)하였다. 이때부터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고, 흔히 15년 전쟁이라고 부르는 만주사변(1931), 상해사변(1932), 중일전쟁(1937) 그리고 태평양전쟁(1941)을 거쳐 1945년까지 일제의 지배를 받았다. 이와 같은 일제의 식민지배 하에서 기독교가 전파되었고, 수용되어 갔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기독교는 반일적 민족주의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일본은 식민지민의 모든 것을 수탈해 갔으나 기독교회는 한국 도처에 근대학교를 설립하고 서구식병원을 설립하는 등 한국인들의 현실적 요구에 부응해 갔다. 식민지배와 수탈과정에서 한국인들은 기독교의 수혜를 경험했다. 기독교는 개화와 개혁의 정신적 보루였고, 일제에 대항할 수 있는 잠재적인 힘으로 인식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우리나라는 아시아, 아프리카 제국의 여러 나라들과는 달리 기독교 국가의 식민통치를 받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과 교회는 쉽게 유대관계를 형성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한국에서는 독특한 민족주의를 발전시켰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적 민족주의였다.

기독교 국가의 식민통치를 받았던 나라에서는 민족주의는 대체로 반() 기독교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 대표적인 나라가 인도네시아였다. 인도네시아는 1602년부터 1942년까지 340년 동안 화란의 지배를 받았다.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는 두 가지 성격을 띠게 되었는데, 첫째는 반 외자(外資)운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반 기독교운동이었다. 기독교국가의 식민통치하에 있는 인도네시아에서 기독교 신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는 반민족 행위였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 반대적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민족주의는 기독교와 결탁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한국교회는 신앙 안에 민족적 과제를 수용하였고, 교회는 민족과 유리된 정신적 기초를 제공하였고, 때로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반일운동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이와 같이 기독교와 민족이 결합하여 소위 '기독교민족주의'(Christian nationalism)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김세윤 교수는 이를 '기독교와 민족주의의 결혼'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일제하에서 기독교인=민족주의자=不逞鮮人(불령선인)으로 간주되었고, 교회나 기독교학교는 기독교민족주의 온상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바로 이런 특수한 상황이 특히 1910년 이후 한국에서 기독교 수용을 보다 용이하게 했다. 기독교와 민족주의가 결합되고, 민족주의가 기독교 수용에 긍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독특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현실은 후일의 한국기독교의 자기표현과 정체성 형성에도 영향을 주었다.

[
민경배 교수의 민족교회론]

한국에서 민족교회론을 처음 제기한 인물은 민경배 교수였다. 그의 한국교회사 인식에서 중요한 출발점은, 한국교회를 '민족교회', 한국교회사를 '민족교회형성과정사'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그의 1972년판 한국기독교회사에서부터 제시되어 왔다. 그는 한국교회사가 '민족교회사의 입장에서 취급되어 오지 않는 점을 주목하고', '자료의 빈곤이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선교사적 역사방법론을 가능한 피하고', '우리 한국을 주체로' 역사를 기술했다고 말한다.

그는 기존의 한국교회사 연구는 '선교사적' 연구로서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가 주체가 되는 역사이자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의 자료에 의존하는 역사기술로서 한국교회사가 주체적으로 기술되지 못했다고 보고,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 교회의 연장이 아닌 우리가 주체가 되는 역사를 기술해야 하는데, 그것을 '민족교회사'로 인식하고 있다. 선교사적 방법 혹은 선교사관(宣敎師觀)이란 백낙준 박사의 입장인데, 백낙준은 처음부터 자신의 입장을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역사기술이 '선교사적' 기술임을 부인하지 않았다. , 그는 1929년의 영문판 저서 서문에서 "1832년부터 1910년까지 한국에서의 개신교의 '전파''확장'의 과정에서 있었던 일을 기술하였다."고 밝히고 있는데, 전파(introduction) '확산'(spread) 혹은 '확장'(expansion) 등은 선교사적 접근에서 가장 사용되던 용어였다. 그는 라투렛(Kenneth Scott Latourette)을 추수하여 교회사를 '선교사' 혹은 '기독교 확장사'로 이해하고 있다. 그의 학위논문으로 저술된 한국개신교사는 사실은 '한국에서의 개신교 선교의 역사'였고, 한국에서 수행된 외국선교부들의 사역, '선교사' 연구를 중심 테마로 삼았다. 이런 그의 입장은 민경배 교수가 '민족교회사론'을 제시한 이후 더욱 분명하게 표명되었고, 아래와 같이 선교사적 방법을 변호하고 있다.

'기독교사는 본질에 있어서 선교사(宣敎史)이다. 반드시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기독교 사상의 한 중간적 존재이다. 우리 주님이 죽으심으로부터 다시 오실 때까지만 존재하게 되어 있다(고전 11:26). 이 중간적 존재체(存在體)인 교회의 철두철미한 사명은 복음 선포이다. 기독교사는 자초지금에 선교사로 일관되어 왔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우리 한국개신교회사도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선교사를 외인 선교사에 의한 피선교의 과정으로 해석하여야 만은 아니 된다.'

교회사를 '선교의 역사' '선교사'로 이해하는 것은 라토렛의 입장인데, 그는 최근 250여 년간의 근대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선교사들에 의한 복음의 확산에 주목했다. 그는 기독교역사에서 선교의 역사를 결정적인 요소로 간주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교학(선교사)과 교회사를 하나로 통합시켰던 대표적인 학자였다. 그가 쓴 7권의 최근세 교회사는 기독교확장사(A History of the Expansion of Christianity, 1937-1945)로 명명되었다. 라투렛은 중국에서의 개신교 역사도 집필했는데, 그것이 A History Christian Missions in China(1929)였다. 백낙준은 라투렛의 입장을 전수한 것이다.

선교사적 방법이 복음의 전파자만이 아니라 수용자의 환경에도 동일한 관심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복음 수용자의 역사적 상황, 곧 한국인의 신앙체험이나 신앙고백의 인식에는 상당한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선교사적 방법의 장점은 이용하되 우리 '민족'의 현실에서 기독교회의 역사를 새롭게 그리고 주체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바람직한 접근이라고 할 수 있고, 이런 점이 민경배 교수의 기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민족', '민족교회' 혹은 '민족교회 형성'이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가 말하는 민족은 19세기의 전체주의적 민족주의, 즉 독일의 나찌나 이탈리아의 파시즘이나 군국주의 일본에서 사용되던 인종적 개념으로서의 민족이 아니었고, 아모스가 비판했던 선민의식도 아니라 언어 역사 생활양식 문화를 공유한 민족공동체를 의미했다. 그가 말하는 '민족교회'란 독일의 '민족교회'(Volkskirche)'국가교회'(Staatskirche)도 아니고 신채호의 국혼적 민족주의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민족정신을 고양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도리어 그가 말하는 '민족교회'의 개념은 국가교회 형태나 영국교회(Church of England)와 같은 민족 혹은 인종 혈통주의에 근거한 개념이 아니라, 한국민족과 함께한 교회라는 점에서 민족교회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한국교회사 인식에 있어서 민족적 정체성과 민족적 일체감을 중시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민족교회란 첫째, 방법론적 측면에서 한국이라는 민족공동체의 주체적 역사인식이자 한국이란 역사현실에서 기독교회의 역사를 자주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시도로 볼 수 있다. 둘째, 민족의 역사와 고난을 함께한 교회라는 점에서 민족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즉 민족교회를 민족공동체와 어깨를 맞대고 고난의 근대사 속에서 여정을 함께한 교회로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셋째, 미국의 교파 중심적 교회와 다른 연합된 하나의 교회를 민족교회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국기독교회사(1993) 143항에서 '민족교회 형성의 좌절'(pp. 289-295)을 논하고 있는데, 장감 양 선교부와 교회가 연합하여 하나의 교회를 이루지 못한 점을 두고 민족교회가 형성되지 못했다고 아쉬워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저자는 비록 각기 다른 선교부에 의해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하더라도 한국에서의 연합된 하나의 교회를 기대했고, 이 교회를 민족교회로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 민족교회는 탈 선교사를 지향하되 친일로 경도되지 않고, 친동양을 지향하되 반선교사로 경도되지 않는 교회를 민족교회의 성격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민경배가 말하는 민족교회는 배타적 민족주의나 국수주의적 개념이 아니라 민족의 역사와 함께한 교회일 뿐이다.

[
주기철 목사와 민족주의 문제]

1970
년대 이후 '민족'에 대한 관심이 한국교회와 신하계의 중요한 관심사로 제기되면서 '민족교회론'이 신학자들의 지지를 받았고, '민족신학'을 말하는 이들까지 등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제하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싸웠던 이들에 대해서도 민족주의적 평가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 일례가 주기철, 손양원 목사 등의 신사참배 거부 행위를 민족주의적 시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이들의 신사참배 거부 행위를 '민족주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은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가 하면 경계해야 할 위험한 요소가 있다.

신사참배 거부행위가 한국교회와 민족적 기여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은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실제로 이들이 신앙적 동기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일제와 싸웠지만, 결과적으로 반일 민족운동에 기여하였다는 점은 인정될 수 있고, 민경배 교수는 이것을 내연과 외연의 관계, 곧 신앙의 현상학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사참배 거부자들의 진정한 동기가 무엇이었던가를 정립하는 일이다. 역사가에 있어서 해석에 앞서 사실(fact) 규명이 우선한다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신사참배 거부자들이 민족적 과제를 위해 저항하고 투옥되고 순교의 길을 갔는가? 민족적 동기가 신사참배 거부의 진정한 동기였는가? 그렇게 볼 수 없다. 민족주의는 대체적으로 배타적 성격을 지니고 있고, 타 민족에 대한 공격적 성격을 지닌다. 말하자면 민족주의는 우리 모두에게 정의(justitia omnibus)일 수 없고, 따라서 보편적 가치일 수 없다. 19세기 이후 민족주의적 팽창은 양차대전의 원인이었고, 20세기의 민족주의는 이탈리아, 독일, 일본의 경우에서 보는 바처럼 전체주의적 파시즘 체제로 굳어갔다. 분명한 사실은 민족주의는 보편적 가치일 수 없고, 민족을 이데올로기화 할 때 폭력을 동반한다. 독일의 나치스나 일본의 군국주의가 그러했고, 이들은 민족을 이념화함으로써 타 민족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했다.

기독교 복음은 민족이나 민족주의 한계 안에 안주할 수 없고, 탈 민족적, 탈 인종적이며 보편적 성격을 지닌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유대주의적 경계를 넘어 이방세계로 전파되어 민족주의의 한계를 넘어섰고, 복음전파의 보편성이 강조되었다. 따라서 민족, 민족주의는 경계해야 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이 글에서 주기철 목사는 그의 목회와 설교에서 민족, 혹은 민족주의를 어떻게 이해했는가에 대해 간략하게 검토하고자 한다.

18971125일 경남 창원군 웅천면 북부리에서 주현성 장로와 조재선 여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주기철 목사는(1897-1944) 개통학교(1906-1912), 정주 오산학교(1913-1916), 연희전문학교 상과(1916)를 거쳐 평양의 장로교신학교(1922-1925)에서 수학하고 초량교회(1926-1931), 마산 문창교회(1931-1936), 평양 산정현교회(1936-1944)에서 목회했다.

산정현교회 시무중인 19382월 검속 이후 약 7년간 옥중에서 투쟁하던 1944421일 밤 순교하게 되는데, 그의 목회 여정에서 주기철은 민족에 대한 관심은 경시하지 않았으나,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경계한 것으로 드러난다. 소양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19261월 초량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1931년까지 6년간 시무했다. 초량교회 전임 정덕생 목사의 영향으로 교회에는 민족주의적 경향이 짙었고 교회 안에는 독립지향 인사들이 영적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었다. 실제로 정덕생 목사 재임기(1917-1925)에 부산의 독립운동가인 백산 안희제(1885-1943), 석산 윤현진(1892-1923), 안창호 계열의 심은사는 초량교회에 적을 두고 있었다. 일반적 경향이지만 당시 독립지향의 민족주의자들이 교회의 조직과 방어 속에 자신을 감추는 일이 없지 않았다.

일제하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이런 상황은 이해할 수 있다. 주기철 목사 또한 민족운동의 정신적 보루였던 오산학교 졸업생으로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깊었다. 그러나 그는 민족독립이 교회가 수행해야 할 우선 과제이거나 사명일 수 없다고 인식했다. 그는 민족주의적 동기가 신앙보다 우선시 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전임자와 다른 순수한 목양의 길을 추구했다. 그는 조국의 현실에 대해 무관심하지는 않았으나 민족주의자들과는 다른 시각으로 민족 문제에 접근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복음과 그리스도에 충성하는 것이 민족의 현실을 타계하는 길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런 그의 정신은 그의 목회생활에 강하게 남아 있었다.

주기철 목사는 19367월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했는데(1936-1944), 1906104일 장대현 교회에서 분립한 교회로서 남문밖교회, 창동교회에 이어 평양 제4교회로 통칭되기도 했다. 이 교회에는 김동원, 조만식, 오윤선, 유계준 등 저명한 민족 지도자들이 출석하던 교회였다. 그래서 민경배는 산정현교회를 민족주의자들의 아성이라고 불렀다.
19367월 이 교회에 부임한 주기철의 취임 첫 설교 '세 가지 신앙'은 민족주의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는 한국교회에는 3가지 유형의 신앙이 있다고 전제한 다음,

첫째로 민족운동, 정치운동하기 위하여 교회에 들어와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둘째는 인격을 높이며 도덕생활을 위해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중생하여 그리스도의 속죄를 중심에 모시고 감사의 신앙생활을 하기 위하여 교회에 오신 분이 또한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산정재(산정현)교회에서도 첫째, 둘째에 속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 이제라도 이 자리를 나가주시오.
라고 외쳤을 만큼 교회의 일차적인 사명은 복음운동이며, 민족적 과제는 이차적이고도 부차적인 과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단순히 도덕적 생활이나 교회를 배경으로 하는 민족운동 혹은 독립운동을 경계하였다. 그는 복음운동이 정치적으로 이용되거나 복음운동이 도덕 혹은 윤리운동으로 평가절하 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따라서 그의 목회활동과 신사참배 반대투쟁을 민족운동 혹은 민족적 동기에서 보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이미 1930년대에 '주 목사는 대 일본제국의 신민(臣民)이 아니란 말이냐, 일본국민이기는 하다.'라고 한 말이나, 1940년 창씨개명이 요구되었을 때 비록 불가피한 현실이기는 했으나 신천기철(新川基徹)로 개명된 점에서도 드러난다. 비록 비 자의적이라 할지라도 창씨개명 그 자체를 민족주의적 근거에서 통석하게 여긴 흔적이 없다. 이런 경우는 주기철의 경우만이 아니었다. 신사참배를 함께 반대했던 손양원, 한상동 등도 동일하다. 이들은 '참된 믿음이 곧 애국의 길'이라고 믿었고, 그들의 신앙행위가 곧 애국의 길이었을 뿐이다.

주기철은 독립운동하기 위해 감옥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의 신앙 투쟁은 민족독립과 민족해방운동에 영향을 끼쳤을 따름이다. 의도된 행동과 획득된 결과는 다를 수 있다. 불의한 시대에 있어서의 신앙적 결단은 그 시대를 밝히는 도덕적 측면을 지니게 되고, 그 시대가 압제받는 시대였다면 민족적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정리하면, 일제하의 상황에서, 특히 주기철 목사의 학교 교육과 목회활동 기간, 그리고 구금에서 순교에 이르는 기간 동안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담론은 민족, 혹은 민족주의였다. 구한말에서 1905년까지는 '민족'이란 말이 빈번하게 사용되지 않았으나, 일제에 의한 침탈이 가속화되는 1905년 이후, 특히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민족의 문제는 중요한 화두가 된다.

민족은 감성적이면서도 본능적인 흡입력을 지니게 되고, 식민지배 하에서 민족의 생존권을 지키려는 '저항적 민족주의'를 형성하게 된다. 그래서 한일병합부터 해방까지 민족, 자주, 민족독립운동 세력은 정치적 국민보다는 언어, 역사, 문화적 동질성을 가진 운명공동체로서의 민족개념을 강조하여 이 당시의 민족주의는 ethnic nationalism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이것은 민족주의가 자유, 독립을 지향하는 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투쟁적 개념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즉 일제하에서 민족주의는 저항적 성격, 반침략, 반봉건을 포괄하게 되는데 대체적으로 제국주의에 대한 대응 이데올로기로 대두되었다.

이 시대를 살았던 주기철 목사는 본인이 의식했든 의식하지 못했든 민족의식과 민족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청년기와 학창시절, 그리고 목회활동을 하게 된다. 그는 1906년 인척 주기효가 설립한 개통학교에서 김창환, 유수성, 이규설 등을 통해 민족애와 반일사상을 접했고, 오산학교에서 이승훈, 조만식, 유영모 등을 통해 민족의식과 민족주의를 접했을 것이 분명하다. 식민지배기 오산에서 수학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민족, 민족의식에 무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주기철에게는 민족이 처한 현실을 관조하는 민족의식이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주기철의 목회와 설교, 신사참배 거부가 민족적 동기에서 출발한 것임을 암시한 일이 도리어 그의 신념체계, 행동양식을 결정했던 것은 신앙적 동기였다. 따라서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 반대와 저항을 민족주의적 동기로 관찰하는 것은 주 목사의 신앙적 의의 추구와 그 고난의 여정을 왜곡할 위험이 있다. 주기철 목사가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그 결과로 순교에 이르게 된 것은 민족적 울분이나 반일적 동기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신사참배 강요가 제1계명과 제2계명을 범하는 우상숭배로 보았기 때문이다.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 반대와 저항은 이중적인 비() 민족주의적이었다. 일제하에서 독립지향의 민족주의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인종적 민족주의(ethnic nationalism)에 대한 거부였다. 일본의 민족주의는 근본적으로 신도(神道)에 뿌리를 두고 있다. 도꾸가와 막부(德天幕府)가 성립한 17세기 이후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대두된 소위 '일본적 중화주의(中華主義)',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에 나타난 '일본주의', 그리고 근래에 다시 보게 되는 '일본인론'(日本人論)은 연원적으로 말하면 일본 신화에 바탕을 두고 있고, 자기 민족은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타 민족보다 우월하다는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그 기초가 신도였다. 일본 최고(最古)의 역사서인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日本書記)는 신도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는데, 신화를 근거로 하여 자기 민족은 '신의 나라' 백성으로 그 고유성과 우월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附說)도 이런 인종적 우월 의식의 반영이었다.

신도에 근거한 이러한 우월의식은 일본의 동아시아 대외관계 정책의 근간이 된다. 이것이 소위 화이의식(華夷意識)인데, 만세일계(萬世一系)라는 천왕을 타국이나 타 민족에 대한 우월의 근거로 삼아 소위 '정한론'(征韓論), 조선침략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일제의 소위 '대동아공영권' 확보라는 차원의 전쟁 정책은 바로 이런 논리의 결과였다. 즉 신도주의는 일본 민족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이데올로기였다. 이 점은 이스라엘의 유대교와 비교될 수 있다. 유대교적 선민사상이 이스라엘 민족주의의 근간이듯이, 신도는 일본민족주의 표현이었다. 이것이 제국주의적 패권주의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 반대는 일본의 극단적인 민족주의, 곧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에 대한 반대였다. 이런 점에서 주기철 목사의 삶의 여정과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비() 민족주의적인 하나님의 의()의 추구였다고 할 수 있다. 주기철 목사의 삶과 설교, 저항과 순교의 동기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었다. 비록 그는 민족의식과 민족주의적인 시대정신에 무지하거나 무관심하지 않았으나, 그의 사회활동을 움직였던 신념은 하나님의 계명에의 충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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