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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 신앙 ①

[ 2017-11-10 16:57:09]

 

한국 순교자에 대한 역사적 고찰 

김남식 박사
(한국장로교사학회 회장)

서론
순교란 고통스러운 영광이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타의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 쓰라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순교를 앙망하며 이것을 최고의 축복으로 여긴다.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놀라운 성장을 하였다. 그 풍성한 열매의 배후에는 순교의 피흘림이 있었다. 우리는 이것을 간과하고 눈에 보이는 모습에만 집착하는 경우가 많다.
순교를 하나의 흘러간 이야기처럼 생각하는 오늘의 시대에 '순교신앙'의 아름다운 전통을 복원하기 위하여 '순교'의 진정한 모습을 발굴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 뒤에는 순교의 피흘림이 있었다. 눈에 보이는 번화한 모습에만 현혹되지 말고 그 이면에 있는 참 모습을 그리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 시대의 박물관에 전시된 '순교'를 역사의 빛 앞에 드러내는 작업을 하자.

. 순교에 대한 신학적 접근

순교란 끝까지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구약의 인물들 가운데는 여호와의 말씀을 생명 바쳐 지킨 위대한 성인들이 있다. 그들은 모두 죽음에 직면하기까지 말씀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우리가 히브리어로 순교를 말할 때 마땅하게 떠오르는 규정된 순교에 대한 용어는 없다. 그러나 죽었다, 죽음 등의 단어로 그것을 대신하여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히브리어로 죽는다(무트)라 하면 창 7:22; 48:7: 4:19; 5:4; 삼상 28:3; 삼하 12:8; 왕상 14:12; 4:2; 16:6; 18:26; 2:2 등에서 나오고 있다. 또한 무트 동사의 명사, 죽음은 (마베트)라 일컬으며 창 21:16; 27:2; 10:17; 16:1; 23:10; 35:25; 31:27; 1:1; 1:17; 삼상 20:3; 2:7; 3:21; 8:36; 26:18; 18:21; 52:11; 13:14; 4:3; 2:5 등에서 나타난다.

구약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순교에 대한 구절은 사 53:9, 12에서 한 의인의 죽음에 빗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예언이다. 53:8 이하에 따르면 그가 죄인처럼 심문과 곤욕을 당하며 끌려갔지만 그는 강포나 입의 궤사를 행치 않은 무죄자였고 그럼에도 그가 죄인으로 낙인찍혀 악인들과 함께 죽었다는 것이다. 곧 그는 그의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53:12). 위에서 사 51:9, 12에 마베트 명사는 9절의 '그 묘실'12절의 '사망'으로 번역되었다.

어원론적으로 볼 때 '순교'로 통용되는 영여 martyrdom'신앙을 위하여 감수함'이란 뜻과는 훨씬 다른 의미를 지닌다. '신앙을 위하여 죽음을 감수함'이란 제한된 의미가 형성된 것은 일찍부터이기는 하였으나 신약에서 그러했던 것은 아니었고 150년경에 폴리캅의 순교를 취급하는 내용에서 그러한 의미로 사용되었음이 발견된다. 신약에서 이 용어는 증거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때의 증거는 신앙에 대한 증오 때문에 죽음을 당하는 것을 감수하는 증거가 아니라 말과 설교에 의한 증거를 의미하였다. 일반적으로 증거를 의미하였던 단어가 기독교 신앙을 위하여 죽음을 감수함이란 의미로 사용되게 되었다는 사실은 기독교 신앙의 성격이 어떠하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 한편 신앙을 위하여 죽는 이런 행동에는 증거의 특성이 부여된다.

1.
순교의 과정

순교의 과정에 대한 설명은 대체로 형식적 맥락에서 시작하여 실질적 맥락에 대한 논의로 마무리 된다. 우리가 증인의 죽음과 그가 증거하는 신앙 사이의 형식적 관계를 고려할 때 우리는 일어난 일이 어떤 의미를 지니느냐 하는 것보다는 실제로 일어난 상황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다. 엄밀한 의미에서 신앙을 위한 죽음은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죽음을 '감수하는 것'이요, 신앙을 위하여 전투에서 쓰러지는 것, 무의식 상태에서 죽음을 당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이 신앙을 위하여 죽음을 당할 때 그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 신앙의 의미와 진리를 효과적으로 증거한다. 여기서는 하나는 보다 객관적이고 다른 하나는 보다 주관적인 두 측면들이 있다.

(1)
사람에게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만일 생명이 위협을 당하거나 사라진다고 할 때 지상에서의 생명의 종식으로 존재가 단순히 소멸되는 것은 아니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죽음은 자기 자아의 소멸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다. 설사 그가 영원한 생명으로 소생되기를 희망한다고 할지라도 그러하다. 인간의 의식적인 생활 과정에서 죽음이 기억될 때 그것은 인간에게서 자아를 강탈하는 사건으로 느껴진다. 죽음이 그것과 더불어 언제나 가져오는 이러한 박탈감은 죽음이 외적 폭력에 의하여 초래될 때 특히 극심하다. 그러므로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로써 자유롭게 인간의 최대의 소유를 배격하고 다른 사람이 지닌 이 최고의 소유물에 대한 적법한 주관자 노릇을 결코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내어주는 것은 그 사람이 이러한 강탈의 행위를 초월하여 가시적인 사건들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의 존재를 확신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리고 이 주권의 작용이 너무나도 실제적으로 느껴져서 지상에서의 최고의 좋은 것, 자신의 존재조차 그것을 위한 아무 저항 없이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그 까닭에 순교가 지향하는 목표는 순교자의 죽음을 죽는 사람의 인격 위로 높이 솟아있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실재이다. 그리고 그 목표는 인격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는 그는 존재를 박탈당함을 자유로웁고 희생적인 봉헌으로 변화시킬 수가 없다. 이것은 순교자는 스스로를 살해한다거나 죽음을 인격의 소멸이라는 의미에 있어서의 자기 파괴는 아니다. 그러나 순교는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 파멸로 경험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당사자는 그의 자기의 지상 실존 즉, 그가 사실적 경험을 통하여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 까닭에 순교는 최상의 사랑의 행위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가치에 대한 신념에서 우러나온 사랑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성육신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확증시키기 위하여 스스로 생명을 박탈당하는 것은 신앙에 대한 증오로 인하여 죽음을 감수하는 것이다. 이러한 죽음은 단순히 신앙의 명제를 증거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인격적인 신앙의 의미에 있어서이다. 이러한 죽음은 단순히 신앙의 명제를 증거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인격적인 신앙의 의미에 있어서이다. 증거된 신앙은 순교를 통하여 '나는 당신을, 당신 안에서 믿습니다'는 것으로 열정적으로 행사된다. 순교는 신앙을 통하여 확증된 당신하나님에 대한 사랑어린 포기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신앙에 대한 증거이다. 그리고 그 신앙은 하나님이신 생명이 당신과의 인격적 만남을 의미한다.

(2)
이렇게 객관적으로 설정된 상황은 또한 그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표현이다. 그 하나님을 위하여 인간은 자기 생명이 취하여지도록 허용한다. 그리고 그의 사랑을 위하여 우리는 생명 손실의 고통을 감수한다. 그러나 그의 사랑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 순교의 명백한 의도가 될 필요는 없다. 그 보다 그의 의도는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1:23) 사랑어린 욕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에게 미치는 효과는 증거의 효과이다.

순교의 직접적 효과는 사람들이 같은 인간이 순교하는 것을 볼 때 무엇이 저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자기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생명이 소중할 터인데 그것을 방어하거나 저항하지 않고 내어주게 하였는가 그들로 하여금 의문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들은 죽어가는 사람이 죽음의 경계너머에 있을 상을 얻기를 바란다는 것을 배운다. 그들의 경이로운 물음은 피상적 답을 얻는 것으로 중단되어버릴 수 있다. 그러나 그 의문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다. 그 의문은 진정한 답변이 주어질 영역을 지시한다. 비록 그 순간에는 의문이 그대로 존재할지라도 말이다. 순교할 수밖에 없는 증오에도 불구하고 믿어지는 신앙은 이미 답변 역할을 충실히 한다. 순교라는 실존적 증거는 단순한 언어적 증거가 소유하지 못하는 신빙성을 그 증거에 부여한다. 그러나 물론 우리는 너무 조급하게 결론을 내리지 말아야만 한다. 결국 순교자가 죽은 것은 일차적으로 주관적 확신 때문이었지 반드시 객관적 진리를 위한 것이었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교는 최소한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을 위하여 순교자가 죽었는가를 묻게 하는 한 효과적인 증거이다.

2.
순교에의 경외심

초창기에 교회에서 순교자들을 위한 예배가 생기게 할 정도로 순교를 대단히 존경하게 하였던 특별한 기독교적 이유는 일어난 일의 내재적 의미에서 모색되어야 한다. 위대한 진리는 순교에 의한 죽음이 기독교인의 삶을 그리스도의 삶과 일치하는 것으로 확실하게 봉인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삶은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하여 죽음으로 종식되었다.

(1)
순교자의 죽음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닮은 것은 두 요소이다. 첫째로 그는 그리스도가 죽으셨듯이 죽는다. 그는 폭력에 의하여 자기 생명을 빼앗으려는 자들에게, 이렇게 하므로 그는 자기 생명을 하나님께 드리게 된다는 확신으로 아무 저항없이 생명을 넘겨준다. 더불어 그는 하나님께서 무력에 의하여 강탈된 생명을 사랑으로 받으실 준비를 하고 계시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둘째로 이 닮음은 그리스도의 죽음에의 진정한 참여뿐만이 아니라 또한 그 죽음의 효력에의 참여이다. 순교자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희생제사적 특성과 그 구속적 능력에 참여한다. 그 까닭에 초창기부터 교회는 순교자의 죽음을 기념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순교자의 죽음을 죽은 기독교인에 대한 찬양으로서가 아니라 이 순교가 전체적인 성도들의 공동체가 지니는 의미심장함에 대한 감사어린 승인으로서였다.
순교가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적 죽음에 대한 반영이요. 은총으로 말미암는 이 죽음에의 참여라는 사실은 또한 순교의 인격적 특징을 강화시켜 준다. 순교자는 '어떤 명분을 위하여' 죽지 않는다. 만일 그가 그렇게 하였다고 하더라도 물론 그의 순교는 자유로운 죽음의 감수라는 점에서 인격적 가치를 지닐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순교에 있어서 인격적 특성은 고조된다. 왜냐하면 그 순교는 아버지에게 드려지기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적 죽음에 통합되거나 또는 거의 일체화되는 것으로 이해되고 또 그렇게 감수되기 때문이다. 순교자는 그리스도의 운명에 참여하는 것을 기뻐한다. 그는 이 참여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아버지께 드리는 행동을 성취한다.

(2)
이러한 상황은 왜 초기부터 순교가 '피의 세례'로 간주되었는가를 설명해 준다. 성례전적 세례를 받지 못한 경우라고 할지라도 이 피의 세례를 통하여 성례전적 세례에 의하여 발효되는 은총이 전달된다. 그 한 이유는 순교가 하나님에 대한 최상의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이유는 순교가 성례전적 세례를 통하여 상징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실질적으로 수행한다는 것이다. 즉 순교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고 그와 더불어 다시 부활하는 것이다(참조, 6:3-11). 그 까닭에 고대의 신앙적 확신에 의하면 순교는 교회론적인 세례의 효과는 소유하지 않는다. 그러한 세례의 효과는 순교자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왕권의 표징으로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의 영역에서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교는 세례에 의하여 발효되는 은총을 소유한다. 왜냐하면 그 죽음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희생제물로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에 일치하기 때문이다. 피의 세례로서의 순교가 진정한 물의 세례를 대신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물의 세례를 통하여 상징적으로 일어난 것에 대한 실질적 집행이다. 즉 그것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고 장사되어 그와 더불어 사는 것의 실질적 집행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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