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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에 우리는 무얼해야 하나 ⑦

[ 2017-09-15 15:33:22]

 
 조정칠 목사 (뉴욕 필라 블루벨 한인교회 설교목사)
4. 최선 특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쓰면서 결론에 이르러 고백하기를 자기는 예수님에 대하여 본 것을 다 쓰려면 그 기록한 책을 보관할 장소가 어디에도 없다고 했다.
은혜입은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자기 기억 속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쯤씩은 있을 것이다. 성경 인물을 다 열거할 필요는 없다. 다만, 예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내가 기억하는대로 한 사람 증언하고 싶다. 그렇다면 내가 고른 사람은 의미가 좀 더 있을지 모르겠다. 그 사람을 가리켜 최선의 특혜자라 했다.
신분으로나 행위로나 출신성분으로나 그의 죄상으로나 죽어 마땅한 사형수요 강도다.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죽기 직전 십자가 위에서 말 한 마디로 예수님께로부터 '오늘밤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허락을 받았다. 이런 특혜는 성경 어디에도 없다.
어떤 교회 목사가 그 사람 설교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우편 강도는 죽기 1분 전에 회개하여 구원얻었단다. 나는 그가 참 간도 크다 싶었다. 교인들이 들으면 공연히 교회에 열심히 다닌다고 하면 어쩔려고 저런 소리하는가 싶었다. 성경을 똑똑하게 알지 못하고 겉으로만 알고 하는 소리다. 회개를 언제 했다고 하는지 그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회개를 했다고 말하기는 부적절하였다.
목사들의 단골 메뉴가 회개다. 모든 성경을 몇 가지 메뉴에 맞추는 설교가 한국교회 목사들의 관례다. 회개 순종 헌신 충성 봉사 그런 틀이 없으면 설교를 못한다. 무슨 지시든지 해야만 되는 줄 아는 타성이 몸에 베어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수도 없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명백하게 가르친다. 회개로 구원얻는다는 말은 없다. 그 강도의 믿음을 보셨다고 하면 될 것이다.
한국교회는 불교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공을 쌓아야 신앙인 줄 아는 것이 불교식이다. 성경은 행함으로의 구원은 없다 가르친다. 행함에는 다분히 속이는 경향이 있다. 조금 행한 것으로 침소봉대하여 얼마나 과장 선전하는지 모른다. 기도 조금한다고 온 도성이 다 알게 소문을 낸다. 기도는 은밀한 것이다. 은밀하게 들으시고 은밀하게 갚으신다.
봉사 좀 하고도 선교 좀 하고서는 뻥튀겨서 팝콘처럼 뿌린다. 그런 외식은 무효다. 신앙은 외식으로 포장해서 매매하듯 본전을 찾아간다. 순순히 하는 일은 좀처럼 보기 어렵다.
강도는 자기도 예수님도 1,2분 후에 죽게 되어 있다. 그 강도는 자기 친구처럼 살려달라고 구걸하지 않았다. 살고 싶어서 회개한 적도 없다. 그런데 그 강도가 숨이 간신히 붙어있는 곧 죽게 될 예수님을 보고 죽어가는 분이 아니라고 보았다. 나라를 가지고 임하실 왕으로 보았다.
그 강도는 불멸의 예수, 불멸의 왕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그분이 왕으로 신하와 천군의 호위를 받으면서 임하실 때 자기는 그 백성들 속에 있지도 않겠으니 이렇게 보고 있는 모습이나마 한 번 기억만이라도 해주십사 하고 우러러 보았다.
기독교는 위대한 인물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 가장 작고 낮은 사람을 바란다. 강도는 먼지만큼 자기를 작게 만들어서 예수님의 왕국을 찬양했다. 예수님은 그냥 볼 수가 없을 만큼 기특한 것같다. 아무 말씀도 않으시고 오늘 당장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예수님 생애 중에서 최선의 특혜를 베풀어 주셨다.
특혜, 한 사람만 하자니 너무 아쉽다. 한 사람 더 해야겠다. 다 잘 아는 38년 된 베데스다 못에 있는 환자다. 예수님이 그 사람을 찾아간 것은 조금 특이하다. 예수님은 주로 갈릴리에서 활동하셨다. 명절에는 유대인 남성은 예루살렘에 가야하는 백성의 의무가 있다. 예수님이 명절에 가신 것도 그런 이유다. 예수님이 그곳에서 38년 된 병자 앞에 서 계셨으나 그 병자는 예수님이신 줄 몰라봤다.
예수님이 먼저 말을 시작하셨다. 그 사람에게 당신이 낫고 싶으냐고 물었다.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하면 될 일이다. 그 사람이 대답을 이상하게 하였다. 'Yes'라는 표현을 하려고 그랬는지 자기가 뭔데 낫고자 하느냐고 묻는지 아리송한 답변이었다.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그 말이 끝나자 예수님은 즉시 일어나 걸어가라 명했다. 그 사람은 곧 일어나서 자리를 들고 걸어서 나갔다. 몇 걸음 가다가 뒤를 돌아보니 그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벌써 떠나고 없었다. 못 입구에서 검문에 걸렸다. 그날은 안식일이다. 안식일에는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은 불법이다. 추궁을 당하였으나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어서 곧 풀려났다.
이 사람도 십자가상에 강도와 비슷하다. 우선 한 평생 아무 업적이 없다. 그의 대답 속에 갈망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낫고자 하느냐고 물었으니 통쾌하게 '네 그렇고 말굽쇼'라고 했어야 옳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반응이 아주 즉각적이고 신속했다. 그렇다면 그 대답이 만족했다는 뜻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을 크게 감동시킬 만한 답변이었다. 그는 자기에게 아무도 도움이 되어주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쉽게 말하면 하늘 아래 저는 혼자입니다. 저 바깥에 사람도 나를 모르고 여기 있는 병자들도 내게는 적수랍니다. 헌데 선생님만은 하늘 아래 오직 나를 알아주는 한 분이십니다 라고 했다.
예수님도 이름 모를 그 고독에 쩔어있는 가엾은 그 사람의 처절한 인생 고백을 듣는 순간 즉시 하늘로 날려보내는 한 마리 비둘기처럼 자유를 주고 싶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한 푼 줍쇼 하는 태도가 아니다. 제발 적선 좀 하소라는 구걸도 아니다. 당신은 이 세상에 유일한 인간 중에 인간이라고 고백했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아직 아무것도 준 것이 없다. 도와주겠다는 선의도 보여주지 않았다. 낫고자 하느냐고 물어보기는 했으나 기대한 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 왜 그렇게 예수님을 좋아했는지 알 수 없다. 우리는 예수님을 너무 잘 안다. 그래서일까 예수님보다 더 좋아하는 것이 많은 것 같다. 목사들은 예수님보다 자기가 하고 있는 목회를 더 좋아하는지 모른다.
말과 혀로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 같은데 설교할 때 태도를 보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분위기를 느낄 수 없게 할 때가 있다. 그것은 욕심이 노출될 때이다. 목회는 욕심으로 되지 않는다. 목사라고 하고 싶은 말이 없으라는 법이 없다. 참고 있던 본심이 자기도 모르게 설교에 묻어서 나올 수가 있다. 목사라면 누구나 경험하게 되는 일이다. 교인들이 그런 것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러나 알고도 이해하고 넘어간다. 목사도 사람인데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혜로운 목사는 얼른 수습하여 설교를 궤도 위에 올려놓고 정상을 유지한다. 설교란 그처럼 어려운 것이다. 순간적인 방심이 본의가 아닌 사심으로 이탈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란 목사에게 기회도 되고 시험도 되는 것이다. 문제는 빈도이다. 1년에 한 번쯤은 잊어버릴 수 있다. 그러나 습관처럼 하고 싶은 말을 억제시키지 못하면 곤란하게 된다.
욕심을 부리고 나면 뒷맛이 여간 캥기지 않는다. 그런 후유증이 엉뚱한 데서 폭발하는 수가 있다. 그런 연쇄반응으로 목사의 말에 디메지가 생긴다. 목사는 무엇보다 말을 조심하여야 설교를 제대로 할 수 있다는 것만은 잊어서는 안 된다.
38년 된 병자는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모른다. 그곳에 있어봤자 희망도 없는 사람이다. 예수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것은 틀림없다. 교육수준도, 세상경험도 빈약한 인간 말단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예수님을 감동시켰는지 그 비결이 무척 궁금하다. 낫고자 하느냐고 물었으니 그렇다고 짧게 대답하여 병 낫기를 택하지 않고 예수님을 흠모하고 싶었을까 생각할수록 신기하기만 하다.
그 병자를 생각하다가 내가 깨닫게 된 것이 있다. 인간이 내려갈 수 있는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면 욕심을 포기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다. 욕심이 없으면 인간은 순수하게 되는 것 같다. 그 병자는 어쩌면 자기의 병을 친구삼아 그렇게 살다가 죽기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많은 사람들이 시간만 나면 산으로 계곡으로 늪으로 가는 것은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것을 동경하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교회는 순수한 맛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개혁으로 다시 순수한 교회로 돌아가고 싶다. 옛날에는 길 건너편에 성경 들고 교회 가는 사람을 보아도 멀리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지금은 같은 엘레베이터 안에서도 서로 얼굴을 돌려버리는 시대다. 마음이 이렇게 닫혀서야 어찌 예수라는 이름을 입에 올릴 수 있을까. 살았다 하는 이름만 있고 실상은 죽어있는 교회를 보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슬픈 모습을 개혁으로 다시 돌려 놓았으면 좋겠다.
예수님과 그 병자는 인사 한 마디 나눌 겨를도 없이 헤어졌다. 그 병자가 너무 흥분해서 감사하다는 인사도 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지만 예수님이 먼저 자리를 뜨신 것이 정답 같다. 예수님은 좋은 말씀 한 마디도 남겨주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말씀을 아껴두셨다가 때가 되면 하시려고 편하게 가는 길을 방해하지 않으셨다. 그 증거가 그 다음에 나 있다. 어느날 성전에서 예수님은 그 사람을 알아보셨다. 그 사람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 동안 자기는 예수님을 많이 찾고 있었던 것 같았다. 자기를 낫게 해주신 분이 예수님이신 줄 확인하게 되자 그 길로 달려가서 못에서 검문하던 사람에게 자기가 몰랐다던 그 사람이 예수님이셨다고 밝혀주었다. 이렇게 착하고 책임감 강한 사람인 줄 예수님은 미리 알아보셨던 것이다. 거기서 예수님은 말씀을 하셨다. 건강을 지키려거든 죄를 짓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예수님은 말씀을 뿌리실 때를 알고 뿌리신다.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지 말라고 하셨다. 말씀은 귀한 것이다. 말씀은 심는 씨앗 같은 것이다. 돌짝밭 가시밭 같은데 심지 말라고 하셨다. 도를 전하는 것과 말씀을 심는 것은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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