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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대 총회장 백은 최재화 목사의 3.1운동 야사 ⑤

[ 2017-07-19 15:42:36]

 
 김남식 박사

대구에서의 만세운동

대구에서의 만세운동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이갑성이 대구 남성정교회(오늘의 대구제일교회) 이만집 목사와 접선하므로 구체화되어 갔다. 이만집 목사는 처음에는 적극적으로 나오지 않았다. 1919224일에 이갑성의 방문을 받고 독립운동에는 찬동하나 만세시위로 독립할 수 있느냐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였다(이만집에 대해서는 김남식, 이만집 목사의 생애와 사상서울, 새순출판사, 1987을 참조하라).
이갑성의 지령을 받은 최재화는 세브란스 의전 학생인 이용상과 같이 독립선언서 4백매를 가지고 대구로 갔다. 최재화는 대구에서 활동하기로 하고 이용상은 마산으로 갔다. 마산에는 이갑성의 지령에 의하여 만세 시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창신학교 교장 이승규(시조 시인 이은상의 부친)와 부교장 이상소 등이 이미 연락을 받고 있었다. 이용상은 228일 밤에 이상소 부교장의 집에 도착하였다. 이상소는 이 선언문을 의신여학교 교사 박순천과 문창교회 지도자들에게 보여 적극적 지지를 받게 되었다.
한편 창신학교 학생 한태인, 이정기, 이일래와 의신여학교 학생 최봉선, 안음전 등은 31일에 이은상의 공부방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들었다. 이들은 마산 장날인 312일에 추산정에 모여서 만세를 부리기로 하였다.
이용상과 헤어진 최재화는 이만집 목사를 방문하고 서울에서의 거사 계획을 설명하면서 이 목사가 대구 지방을 주도해 주기를 간청하였다. 최재화의 이러한 간청을 듣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이만집 목사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최 선생, 고맙소. 젊은이들이 나라를 위하여 이렇게 일어날 때 주저할 것이 어디 있겠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 우리 함께 노력합시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손을 마주 잡았다. 대구에서의 위대한 사역을 하려는 순간이기에 엄숙한 고요가 이들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하나님의 뜻이기에 성공과 실패를 생각지 말고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이만집 목사는 조용히 무릎을 꿇고 기도드리기 시작하였다. 최재화의 가슴에도 뜨거움이 치밀어 올랐고 콧날이 찡하며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였다.
'자비하신 아버지 하나님. 이 민족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시련 속에서 자유를 갈망하오니 자유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자유를 주시옵소서. 고난이 와도 좌절하지 말게 하시고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기적으로 구원하여 주신 것같이 이 민족을 구하여 주옵소서. 우리에게 모세의 지팡이를 주시고, 담대한 믿음을 주옵소서. 저희는 연약하오니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강하게 하여 주시고, 민족을 위해 일어난 이 나라의 젊은이들과 동족들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이만집 목사의 기도는 뜨거워만 갔다. 회의에서 확신으로, 주저에서 행동으로 옮겨지는 순간들이다. 여기에 나라를 위한 기도의 모닥불이 지펴지고 뜨거운 열기가 솟아나는 것이다. 무릎꿇은 최재화는 󰡐아멘󰡑을 연속하며 뜨거운 신앙의 열정 속에 빠졌다.
이 목사의 긴 기도가 끝나자 이들은 바빠지기 시작하였다.
최재화는 이만집 목사의 집에 머물면서 동지 규합과 선언문 준비 등에 노력하였다. 이만집 목사는 김태련 조사를 설득하였다. 독립운동은 이 민족의 사명이니 우리가 나서야 한다고 권고하며 설득하였다. 김태련 조사는 흔쾌히 가담하기로 결심하고 대구 시내의 여러 교회에 연락을 담당하였다.
대구 계성학교와 신명여학교 학생들을 동원하기로 하고, 이 학교 교사들 중 중심인물들을 포섭하였다. 계성학교의 교사 백남체, 최상원, 김영서와 신명여학교 교사 이재인은 학생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하며 이들을 지도하는 방안들을 이만집 목사의 서재에서 최재화와 의논하였다.
218일부터 39일까지 개최되고 있던 대구성경학원의 성경강습회에는 경북지방 각 교회 교역자 혹은 지도자 50여명이 참석하고 있었다. 김태련 조사는 이들 중 14-5명을 설득하여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하였다.
38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이날은 대구의 큰 장날이요 토요일이기에 만세를 부르기 좋은 기회였다. 이만집 목사가 총지휘를 하고 김태련 조사가 성경학원 학생들과 같이 선언서와 태극기를 준비하고, 최재화가 계성학교 교사 백남채, 최상원, 김영서, 신명여학교 교사 이재인 등을 통해 학생들을 동원하여 행동대가 되기로 하였다.
이들의 준비는 일본 경찰이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하게 되어졌다. 서울과 각 지방에서 만세운동이 있자 대구의 일본 경찰과 헌병들은 자못 긴장하여 학생들의 동태를 주목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이들이 감시의 눈을 부릅떠도 나라를 사랑하는 뜨거운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
37, 김태련 조사는 자기 집 골방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며 태극기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여기에는 대구 성경학원 학생들이 함께 수고하였다. 조그마한 골방이지만 터질듯한 긴장으로 가득하였고 말없이 손만 놀리는 이들의 눈초리에는 수만, 수천의 언어가 오고가고 있었다.
경북경찰국 편찬 고등경찰 요사에는 독립선언서 200, 태극기 대소 40본을 그렸다고 되어 있으나 이들이 등사한 선언서는 약 3천매였고, 태극기도 수 백 개에 달하였다.
38, 학생들은 평소와 같이 학교에 갔다. 서로의 긴장어린 눈길 속에서 오전 수업을 하고 학생들은 보통 때와 다름없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집으로 돌아가는 척 하였다. 여기저기에 일본 경찰의 감시의 눈길이 있었으나 학생들은 모른 척 하고 집합장소인 서문시장 안으로 잠입하였다.
대구에서의 만세운동은 이만집, 김태련 등을 중심한 기독교 지도자들과 계성학교, 신명여학교, 대구성경학교, 대구공립고보 등의 학생들이 일선 행동대가 되어 활동하였다.
사립학교들의 참여는 교사들의 지도로 되어졌으나 대구공립고보의 경우는 학생들의 자발적인 의사에 의해 되어졌다. 그들이 참여하게 된 전말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이갑성과 최재화를 통하여 대구지방의 독립운동을 주도하게 된 이만집 목사는 계성학교와 신명여학교 교사들을 중심으로 준비작업을 하고 있었다. 거사 전날인 37일에 평양 숭실대학생 김무생이 대구에 잠입하여 대남여관에 숙박하면서 계성학교 교사 최상원과 만나 다른 지방에서의 만세운동에 대하여 설명하고, 대구 지방의 거사를 독려하였다.
최상원은 그 여관 주인의 아들인 대구고보 4년생 허범을 설득하여 대구고보 학생들이 동조하도록 하였다. 허범은 대구고보 4년 급장인 신현욱과 의논하여 각 학년의 영향력 있는 학생들을 소집하였다. 3년생 백기만, 2년생 하윤실, 1년생 김수천 등 각 학년 대표들에게 내일에 있을 만세운동과 서울과 평양 등 각지에서 전개되는 독립운동에 대하여 설명하고 대구고보의 모든 학생들이 여기에 참여키로 하며, 각 학년 대표들이 자기 반을 책임지기로 하였다.
38일 오후3시경, 대구고보 학생 2백여 명은 대봉동 소재 학교를 출발하여 서문시장으로 향하여 갔다. 이미 거기에는 이만집 목사와 김태련 조사 등이 인도하는 계성학교, 성경학교 학생들과 일반 시민 7백여 명이 모여 있었다.
계성학교, 대구고보, 성경학교, 천도교의 교남학교 학생들이 모이자 이만집 목사의 인도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위대들은 중앙통을 경유하고 동성로 쪽으로 향하였을 때 남산동 쪽에서 신명여학교 학생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이들과 합류하였다.
이들의 독립만세는 처절하고 절박하였다. 큰 장날이어서 경북 각지에서 모인 장꾼들도 여기에 합류하였다. 서문 다리 지나는 이들은 하나의 물결이었고, 이 민족의 염원을 가슴에 안은 피맺힌 호소였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머리가 산발이 되는 것도 모르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신명여학교 학생들의 외침에 일본 경찰도 어찌하지 못할 정도로 열기에 찼으며 숭고하였다.
그날 저녁부터 검거 선풍이 불기 시작하였다. 이만집 목사와 김태련 조사를 비롯하여 계성학교 교사들과 성경학교 학생 등 57명의 남녀 학생들이 대구경찰서로 연행되기 시작하였다.
38일의 만세운동이 있은 이틀 후인 310일 오후에 다시 만세 시위가 있었다. 39일 주일이기에 대구 시내의 교회에는 긴장감이 가득하였다. 어제의 시위로 연행된 학생과 교인들이 있었고, 이만집 목사와 김태련 조사도 체포되었기에 월요일에 다시 만세를 부르려는 전갈들이 오고갔다.
310일 오후4시경, 덕산시장에는 각 교회 교우들과 대구 시내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내를 행진하였다.
경찰은 시위자들을 구타하기 시작하였고 시위의 주동자 65명을 검거하였다. 이러한 경찰의 검거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은 찬송을 부르면서 시위를 계속하였다.
대구지방의 만세운동으로 이만집 목사가 3년 징역언도를 받았고, 계성학교 학생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옥고를 겪었다.
최재화는 표면에 노출되지 않았던 사람이기에 대구에서 만세시위로 체포되지 않았다. 그는 10일 밤에 고향 선산으로 탈출하여 고향에서의 만세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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