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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에 우리는 무얼해야 하나 ⑥

[ 2017-07-19 15:36:29]

 
 조정칠 목사 (뉴욕 필라 블루벨 한인교회 설교목사)

3 예수 유일 흔적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회수가 11번쯤 된다. 그중에서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될 시간이 있었으니 곧 밀실에 침입하신 일이다. 문을 열고 들어오시지 않고 문이 닫힌 상태인데 들어서셨다. 거기서 부활에 확신이 없던 제자에게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라고 하셨다. 손에 못자국, 옆구리에 창자국을 확인하여 부활을 의심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 상처의 의미를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소중한 상처를 부활하신 첫 날에 보여주시지 않고 그 뒤에 보여주신 뜻이 있을 것이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없는 곳에서 자기 제자들만 모여있는 엄밀하게 문을 닫고 아무도 출입을 못하게 해놓은 방안에서 마치 비밀을 공개하시듯이 손을 내밀어서 못자국을 자세하게 확인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허리끈을 풀고 허리를 만져서 확인하도록 몸을 내어 맡겼다. 그만큼 상처에 관심을 보이셨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은 많은 사람이 보는 데서 시위를 하신 적이 없다는 것이다. 엠마오로 가실 때도 두 사람에게만 동행을 하셨다. 부활은 믿는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고 믿는 사람에게만 해당이 되는 제한된 사건이다. 부활은 믿는 사람이 증거하는 신앙이다. 믿지 않으면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신비롭고 거룩하고 고귀한 상처만은 지키고 간직하고 사랑하고 자랑할 만하다.
지금도 그 상처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지 모른다. 예수님은 굳이 상처가 아니라도 살아난 증거는 얼마든지 확인할 것이 많았다. 우선 눈으로 보아도 진짜 사람인지 아닌지는 아이들도 안다. 말소리, 숨소리 동작 하나하나 무엇하나 증명이 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거기에 음식이 있었는데 그것을 잡수셨다. 그런데 손에 못자욱을 특별하게 강조하셨다. 그 상처가 곧 부활의 증거였다.

인간이 아무리 머리가 명석해도 부활을 이해할 수는 없다. 부활을 상상하기도 어렵고 부활을 체험하기는 더 어렵고 부활을 증명하기는 정말 불가능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다르다. 부활을 인정하고 확신하고 있다. 그것을 찬양도 하고 증거도 한다. 물론 직접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본 것과 다름없이 믿고 있다. 그런데 성경에는 부활을 증명할 역사적 사건이 몇군데 있다.

사람이 기절했다가 깨어나면 신체에 별 이상이 생기지 않는다. 마치 잠을 자다가 깨어난 것과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사람이 완전히 죽었다가 신체가 부패한 상태에서 다시 살아나면 그 신체가 정상인으로 살아나게 된다. 사람의 몸은 세포로 형성된 생물이다. 죽었다가 살아난 새사람은 새몸으로 돌아오는 것이 상식이다. 새몸에는 절대로 상처가 남아 있을 수가 없다.
구약성경에는 나아만이라는 장군이 문둥병자였는데 선지자의 능력으로 병을 고친 사건이 있다. 그 병자가 선자자의 명령을 따라서 요단강 물속에 일곱 번 들어갔다 나왔다 반복한 후에 나와보니 그 병이 나았다. 그때 발견한 나아만 장군의 살결이 어린아이처럼 깨끗하였다고 했다. 물속으로 일곱 번 잠수를 반복한 것은 죽었다가 살아난 것과 방불한 상황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거기서 다시 부활하셨지만 신체가 부패했다는 증거는 없다. 부활은 예수님 한 분뿐이시다. 설령 이 세상 어디서 죽었가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그후에 죽지 않고 계속 살았다고 믿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예수님은 살아서 그대로 그 몸으로 승천하셨다. 그런데 손에는 상처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 증거가 유일한 그리스도의 증거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썩지 않을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신성한 몸이셨다. 그래서 그의 상처는 거룩한 가치다.
그래서 예수님의 상처는 고귀하다. 주검이 예수님의 숨을 끊을 수 있어도 부패는 시킬 수 없다. 썩지 아니할 거룩한 몸을 입고 계셨기 때문이다. 부활의 증거는 곧 상처였다. 예수님은 그 상처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시려고 비밀리에 그 방에 침입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상처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살았다는 증거는 가능했다. 그러나 상처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 더욱 귀한 일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의 그 심정을 모르고 있다. 그래서 엉뚱하게 흉칙한, 사람 죽이는 형틀을 성스러운 교회에 설치하는 큰 잘못을 범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을 생각하면 너무 죄송하고 안타깝다. 아무리 뜻이 좋아도 무슨 형상이라도 우상은 우상이다. 무슨 소리를 해도 개혁자들은 십자가의 뜻을 알고도 그러지는 않았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 오늘날 교회가 그들을 배신하는 행위는 용서될 수 없다.

한국교회 부흥이 샤마니즘 효과라는 것은 비난이 아니라 모독이다. 교회 안에 미신적 요소가 한두 점이 아니라고 한다. 교회 목사와 무당이 닮았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닌지 모른다. 무당들이 주렁주렁 걸어놓고 사람을 호리는 것하고 목사들이 교회 안에 커다랗게 걸어놓고 바라보게 하는 십자가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목사들의 대답을 듣고 싶다. 도대체 성경을 정말 믿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나도 그런 고민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요즘 교인들이 십자가 없는 교회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이 목사들이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방관했으니 그만 두는 것도 어려운 문제다. 우리 교회도 십자가 없는 교회라고 왔다가 돌아가는 교인이 없지 않다. 그래서 십자가를 우상같지 않게 성부성자성령의 표시 아래 예수님 상처를 포함시켜 그 화면을 종이에 그렸다. 이전 것 1 새로운 것 1 전자는 십자가 후자는 부활로 두 줄로 십자가를 그려보았다.
거기에 색상을 입히면 5색이 된다. 5색십자가, 부활의 십자가 무슨 이름도 가능하다. 나는 우리 교인들에게 아름다운 십자가라고 했다. 크게 그려서 교회 전면에 걸었다. 얼마나 아름답고 보기만해도 마음이 편하다. 그 십자가 가운데 포인트가 압권이다. 막대기 두 개로 가로세로로 묶어서 무덤 앞에 꽂아두는 죽음의 상징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아름다운 십자가를 권하고 싶다.

예수님은 부활하셨다고 믿는다면 죽은 십자가는 당치도 않는다. 그럴려면 십자가를 다시 부활의 십자가로 만들면 되겠다. 지금 말하는 죽은 십자가는 의미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의미다. 살아났으면 주검은 소멸되는 것이 맞다. 주검 기념은 없는 것이다. 나는 예수님의 상처가 담긴 5색 십자가를 어떻게 전해줄까 고민하다가 이번에 그렇게 할 기회를 잡았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다.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이며 신앙의 표상이다. 아무리 예찬을 해도 표현력이 모자라서 죄송할 따름이다. 그런 것 하고 십자가를 설치하는 것 하고는 구별을 해야 한다. 무슨 형상이든지 설치하면 우상과 같이 될 우려가 있다. 비록 십자가라도 예외는 아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우리 죄를 구속하셨지만 그 물건을 신성시 하라는 뜻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 동안 교회 안에 십자가를 설치하지 않던 때가 꾀나 오래 지속되었던 것은 개혁정신의 연장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이 교회로부터 십자가를 위시하여 어떤 형상도 놔두지 않고 모두 교회 밖으로 내어버렸다는 것은 오직 교회는 깨끗하고 거룩하여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우상은 더러운 것이라고 성경에 설치 불가라는 것을 모르는 목사가 없다. 교인들의 성화에 못이겨서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이제는 교인들을 설득할 때다. 종교개혁자들이 그렇게 했으면 마땅히 우리도 따라야 한다는 것을 교인들에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교인들도 많이 성숙해 있다. 어째서 해보지도 않고 좌절하려는지 모르겠다. 예수님의 고귀하신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하면 개혁정신을 훼손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그 많은 십자가를 처리하기도 쉽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종교개혁 500년을 상기하자는 것이다. 그 표시를 누구 좋으라고 세우는지 그것만은 알아야 될 것 같다.

내가 서울서 목회할 때 새벽시간이 되면 종탑에 십자가를 형광등으로 밝혀 놓았다. 어두운 밤에 길 찾기에 좋으라고 한 것이다. 한 주민이 그 십자가를 보면 무섭다고 편지를 교회 앞으로 보냈다. 자기는 야간 근무를 하는 사람인데 근무를 마치고 오는 시간이 새벽이라 집 가까이 오면 교회 십자가 불빛이 무섭다고 했다. 그날 즉시 불을 꺼주었다.

내가 아름다운 십자가를 그리게 된 것도 몇 번의 어려운 일이 생겨서 궁여지책으로 고안한 것이었다. 그나마도 우상 같다는 소리는 듣지 않게 되어 다행이다. 한 번은 십자가 세우지 않는다고 그 교인이 떠났다. 또 한 번은 다른 교인이 십자가헌금을 500불 교회에 바쳤다. 그런 정성을 무시할 수 없어서 기독교백화점에 가서 여러 가지 십자가를 살펴보기도 했다.
헌금을 한 교인은 매주일 십자가만 고대하고 있다가 기어히 교회를 떠났다. 교회측에서도 상처를 주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가면 생각이 달라질 줄 알았다. 그 교인이 떠난 다음에 새로 들어온 교인이 있었다. 12년 전에 다녔던 교인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 교인의 말이 아직도 십자가 없네요 라며 환하게 웃었다. 그 교인의 웃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환하게 웃는 십자가를 연상했다.
나는 십자가 걸지요 라고 환하게 대답했다. 그날부터 환하게 웃는 십자가를 찾아보려고 십자가 수집하는 목사를 찾아갔다. 정말 십자가가 그렇게 다양하게 상품이 되어 있는 줄 몰랐다. 어떤 십자가는 예술작품으로 등록이 되어 있기도 했다. 나는 돈 들이지 않고도 화려하고 밝은 십자가를 만들어서 우리 집안에 걸어놓고 전시회를 했다. 관람객은 카메라맨 1명만 초청했다. 그후 첫 작품을 우리 교회에 걸었다.

십자가는 성부 하나님이 계획하셨다 - 황금색
성자 하나님이 죽기로 복종하셨다 - 보혈색
성령 하나님의 잉태로 탄생하셨다 - 하늘색
성흔 십자가 상처로 보증을 하셨다 - 검은색
성도 눈보다 더 희게 깨끗게 하셨다

어떻게 십자가를 그려도 구속받은 성도의 표시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 십자가뿐이다. 그런데 아름다운 그 십자가는 신기하게도 정중앙에 한 공간이 십자가의 수혜자로 당당한 자리가 되어 십자가의 의미를 대변하고 있는 완성도가 높다. 다만 상처(聖痕, 성흔)은 못과 창 자국으로 얼룩지게 했다. 누구라도 만들 수 있게 아주 쉽고 정확하게 설계 했다. 어긋날 일도 없고 모양이 100% 일치하게 도안했다.

1)
기본형태 - 정사각형 색종이만 있으면 금방 될 수 있다.
2) 배치요령 - 색종이 5장으로 십자 모양을 만든다.
3) 1장 추가 - 사장이 똑 같은데 아래쪽에 흑색 1 추가.
4) 손댈곳 - 성흔은 흑백(문과피)을 얼룩지게 못, 창 자국을 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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