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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대 총회장 백은 최재화 목사의 3.1운동 야사 ④

[ 2017-06-26 16:15:41]

 
 김남식 박사
최재화 사건

3
1일의 아침은 이 나라의 새로운 장을 기록하였다. 민족 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발표한 독립선언서는 세계 만방에 이 민족의 자주 독립을 선언하는 엄숙한 외침이었다.
서울 종로의 파고다 공원에는 12시경부터 배재고보, 중앙고보, 휘문고보, 양정고보, 경신학교, 이화여고보, 숙명여고보, 진명여고보 그리고 보성전문과 연희전문 등의 중등학교 이상의 각급학교 학생 4~5천 명이 모였다. 이들은 연전의 김원벽, 보전의 강기덕의 지휘로 모여든 학생이다.
1910년의 한일합방 이후 자취를 감추었던 태극기가 휘날렸고, 감격에 찬 가슴으로 부르는 '대한독립만세'는 지축을 흔드는 절규였다. 흰옷의 무리들은 밀려오는 파도와 같이 꾸준하게 그리고 질서 있게 나아갔다.

들려오는 만세소리

거사 당일까지 일본의 헌병과 경찰들이 전연 눈치 채지 못하게 민족의 가슴과 가슴이 모인 이 뜨거움의 연결은 함께 살고 죽자는 동지들의 정성을 한 곳에 모았다.
파고다 공원에 모인 학생들과 시민들은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太和館)에서 예정을 바꾸어 독립을 선언하고 파고다 공원에 올 수 없게 되자, 경신학교 졸업생 정재용이 한 장의 종이를 접어들고 단상에 올라가 감격에 넘치는 어조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선언서의 낭독과 만세 삼창이 끝나자 학생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각 학교 대표자의 지시에 따라 시위를 시작하였다. 학생들의 대열에 여학생도 참여했고, 고종의 인산(因山)을 보기 위해 상경한 시골 노인들도 끼어 있었다.
파고다 공원을 쏟아져 나온 수만의 군중들은 독립만세를 부르며 두 갈래로 나누어졌다. 한 무리는 종로를 거쳐 덕수궁 앞에 이르러 독립만세를 소리높이 외치고, 대한문 안에 들어가 삼국궁(三鞠弓)의 예()를 행하고, 다시 대한문 앞에 나와 독립 연설을 하였다. 다른 한 무리는 광교를 지나 남대문 정거장(오늘의 서울역) 광장을 거쳐 의주통으로 꺾이어 프랑스 영사관으로 향하였다. 여기서 또 한 갈래는 대한문으로 다시 와서 미국 영사관에 이르렀을 때 미국 영사는 문을 열고 나와 환영하며 동의를 표하였다. 각국 영사관을 한 바퀴 돌며 독립선언의 뜻을 설명한 뒤 시위행진은 다시 종로에 모여 연설회를 개최하였다. 신촌의 연희전문학교 부근에서는 학생들이 밤 11시경까지 해산하지 않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32일에도 학생들이 모여 시위하였다.
31일에 있는 대규모 시위를 지휘했던 학생 대표들은 다시 35일에 시위를 하려고 하였다. 이 날을 택한 것은 고종의 인산을 마치고 지방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자극하여 만세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
학생 간부들은 만세 시위를 준비하기 위해 34일 밤에 배재고보의 기숙사로 모였다. 35일 오전 9시에 서울역 광장(당시에는 남대문역이라고 하였다)에 모여 시위운동을 전개키로 하였다. 인쇄와 배포는 배재고보의 김병호가, 모든 지휘는 보성전문의 강기덕과 연희전문의 김원벽이 맡았고, 서울 시내의 각급학교 학생대표들에게 통지하였다.
35일의 아침이 밝았다. 8시가 되자 서울역 광장에는 사람들이 홍수같이 밀려오기 시작하였다. 수만의 군중들 앞에는 김원벽과 강기덕이 인력거를 타고 지휘하였고, '조선독립'이라고 쓴 기를 가지고 군중을 지휘하였다. 군중들은 남대문 방면으로 행진하면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병헌의 삼일운동 비사에 의하면, 이날 일본 경찰과 헌병들에게 연행된 학생들은 남자 71, 여자 4명이라고 하였다.
35일의 만세 시위는 독립만세운동을 전국에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날부터 서울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모든 여관과 하숙은 경찰의 검색을 받게 되었다.
만세운동에는 공사립(公私立)을 불문하고 모든 학생들이 일어났다. 삼일운동으로 말미암아 일본 경찰에 체포된 최초의 여성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오늘의 경기여중고)의 최은희였다. 또 경성고등보통학교(오늘의 경기중고교)에서도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예심종결을 받은 사람이 27명이나 되었다. 그중에는 소설 상록수로 유명한 심훈도 끼어 있었는데, 그는 3학년 학생으로서 최일선에서 활동하였다.

방방곡곡에서의 절규

3
1, 서울에서의 시위운동과 때를 같이하여 평양, 원산, 선천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있었고, 2일에는 정주, 중화, 인천, 대동, 황주에서, 3일에는 개성, 함흥에서, 4일에는 강서, 군산, 해주, 의주, 용천에서, 7일에는 시흥, 철산에서, 8일에는 대구에서, 10일에는 광주, 강경, 당진, 성진에서, 11일에는 부산에서, 12일에는 아산, 마산에서, 13일에는 전주, 동래, 강화에서, 15일에는 고창, 통영에서, 18일에는 봉화에서, 19일에는 괴산, 진주에서, 23일에는 상주에서, 24일에는 풍산에서, 26일에는 회령에서, 28일에는 조치원, 수원에서, 29일에는 영동, 제령에서, 42일에는 밀양에서, 4일에는 김제에서, 18일에는 출포에서 만세시위가 있었다. 이것은 요원의 불길이었고, 백의민족의 피맺힌 절규였다.
각 지방에서의 만세운동은 학생들이 중심이 되었다. 31일 오후 220분경, 선천에서는 보성여학교 학생 60여명과 신성학교 학생 수백 명이 '조선독립단'이라고 쓴 깃발을 앞세우고 시위를 시작하였다. 시위대가 군청 앞에 도달하였을 때 일본 수비대에서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일본의 공식 기록에도 12명의 사상자가 생겼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삼일운동의 첫 학살 행위였다.
같은 날 평양에서의 만세는 학생들과 기독교도 그리고 천도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불렀다. 숭덕학교 교정에서 고종황제 붕어추념식을 거행한다는 개회 선언이 있은 후, 뒤이어 김선주 목사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숭덕학교를 출발하여 서문 거리를 지나 형무소 쪽으로 시위대가 방향을 돌릴 때 숭실전문학교의 악대가 애국가를 연주하기 시작하였다.
이 군중들 속에는 소복을 한 숭의여학교의 학생들이 있었고, 숭의여학교의 교사 박현숙(무임소장관 역임)의 지휘 하에 송죽결사대가 태극기를 만들어 비밀리 운반하였다.
평양에서의 만세운동에 대하여 당시 평양에 주재하던 선교사들이 보낸 보고서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영문 타자로 133페이지에 달하는 이 보고서는 <삼일운동 발발보고서> (Korean Independence Outbreak Beginning March 1st, 1919)라는 제목으로, 삼일운동의 직접 목격자들에 의하여 기록된 보고서로 역사적 가치가 있다. 이 보고서가 미국 장로교회의 <장로교 역사학회>(Prebyterian Historical Society)에 소장되어 있는 것을 김용복 박사에 의하여 발굴되어 <기독교사상> 198012월호부터 번역 게재되었다.
이 보고서에 평양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진상을 볼 수 있다. 일본의 폭력과 고문 앞에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조국의 해방을 외친 선각자들의 피흘림은 오늘의 자유를 누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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