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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에 우리는 무얼해야 하나 ④

[ 2017-06-02 14:17:44]

 
 조정칠 목사 (뉴욕 필라 블루벨 한인교회 설교목사)
3장 개혁의 방법
설교개혁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신학교에서 웬만한 것은 목회현장에서 당황하지 않을 정도로 다 배우는 편이다. 설교학은 배우고 시험을 치고 실습까지도 교수들과 학생들 앞에서 직접 연출을 했었다. 훗날에 설교개혁을 할 것은 상상도 않았던지라 지금 이런 모험을 하자니 마음이 두근거린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다지 어려울 것 같지도 않다는 오기가 생기기도 한다. 그 까닭은 결과와 나는 별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글이 어느 세월에 독자들에게 닿으랴 싶기 때문이다. 그때쯤에는 내가 세상에 있을지 저 세상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설교개혁을 과감하게 했었던 경험자다. 설교를 좀 더 잘하겠다는 시도는 개혁이라 하지 않을 것 같다. 설교를 업그레이드 하려는 줄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다.
지금 우리는 설교를 준비하여 원고를 작성한다. 그것을 교회에서 발표하는 것을 설교라 한다. 사도들의 설교와 전혀 다른 형태다. 예수님이 그렇게 설교하라고 시킨 적이 없다. 내려오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설교는 그러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뿐이다. 이제 역사가 500년 또는 100년이 되었으니 총체적인 점검 내지 평가를 하고 다음 세대로 나가야 한다. 방법이 아니라 근본을 바꾸는 것이다. 아무 생각도 없으면 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잘하는 사람일수록 개혁을 하면 대변화가 있을 것을 확신한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믿는 목사라면 설교개혁을 마다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신앙은 원초적으로 모험이다. 어떤 설교의 대가라 할지라도 100점은 안 된다. 자기 스스로 채점을 한다면 어떨지 모른다. 그런데 0점을 받아도 상관 없다면 진정한 설교자다. 교인들은 매주일 설교를 채점한다. 설교자가 청중의 박수와 '아멘' 소리에 놀아나는 현실을 개혁하려는 것이다. 설교는 거룩한 사역 곧 성사(聖事). 인간은 평가할 수 없는 범주에 속한다. 설교는 평가할 데가 없다. 그 설교는 설교자만의 고유 권한에 있다. 그런데 지금 같은 연설형, 강의형 설교는 평가가 불가피하다. 이런 조건에서 벗어나려면 개혁이 아니면 방법이 없다. 개혁의 방법은 어떤 모델을 설정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그런데 그러기는 싫다.
오늘과 같이 기고만장한 목사 전성시대에도 설교의 모델이 될 만한 거장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모델의 역효과 쪽으로 이끌고 가려 한다. 그런 소극적인 방법은 실질적인 개혁의 효과 같아서 그렇게 해보고 싶다. 무엇이든 '누구처럼 하기'보다 '누구처럼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훨씬 반응이 좋을 수 있다. 목사들을 움직이는 것이 세상에서 어느 계열 사람보다 어렵다. 나는 목사들 움직이는 특효의 방법을 알고 있다. 그것은 목사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방법이다. 조금 별난 방법을 택하기로 할 생각이다. 한국교회의 샤머니즘 효과 이야기를 이미 언급했지만 한 가지 더 추가할 것이 생각났다.
샤마니즘보다 더 영향력을 가진 유교의 전통이다. 기왕 개혁을 하려면 급소 같은 곳에 타격을 가하면 반응이 예민하고 신속하다. 어떤 타격이라도 타격은 예쁘게 하는 법이 없다. 어떤 목사가 설교시에 입는 가운의 색상과 디자인이 울긋불긋한 것이 거슬린다는 소리가 들렸던 모양이다. 본인 귀에 들어가게 되어 다음 주일에 가운 일체를 설명을 했다. 학위에 따라서 다른 것일뿐 멋으로 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 다음 주일에는 당당하게 보란듯이 가운을 전보다 더 펄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설교시에 입는 가운은 목사 가운이면 족하다. 학위수여 때 입는 것을 설교시에 입을 이유는 없다. 이미 문제선상에 올랐던 그 가운은 교인들 눈에 밉상이 되었다. 교인 중에는 학위없는 사람이 절대 다수다. 다음 주일에도 신경전이 계속되었다. 분위기가 자꾸만 이상했다. 어느 교인이 메모지에 몇 자 적어서 앞으로 전했다. 쪽자를 받아본 목사는 가운을 벗어서 들고 나와서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면서 교인들을 달래주었다. 그 후로는 그 가운을 본 사람은 없었다. 쪽지에 뭐라고 썼을까 모두들 궁금했다. 그 내용은 즉시 밝혀지지 않았으나 결국 알아낸 사람이 발설을 했다. 거기에 여섯 자로 '무당옷 같데요'라고 써 있었다는 소문이 오래 교인들 사이에 돌고 있었다고 한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무릎을 쳤다. 목사는 자존심 상하면 한다.
목사를 보고 무당을 닮았다는 데 웃고 있을 목사는 없다. 아무리 박사가운이라도 그런 데미지(damage)를 참고 있기는 싫은 것이다. 그래서 나도 무당목사의 설교 몇 점을 들춰보려고 한다. 어째서 신성한 목사가 무당을 닮았다는 것인지 한 번 생각해 보자. 먼저 생각할 것은 무당이 자기에게 찾아오는 고객을 관리하는 태도이다. 무당은 초면에 만나는 고객에게도 고자세로 반말을 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자기보다 나이 많은 것을 알고 있어도 무당은 자기의 카리스마를 과시하기 위하여 허세를 부리는 것이다. 표현방법은 다르지만 목사도 자기 교인들 앞에서 하나님의 종이라는 위엄을 나타내려고 목에 힘을 주고 음성을 가식적으로 꾸미는 것이 흡사 무당의 카리스마 과시와 닮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객에게 대화할 기회를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줄줄 이야기를 주문을 외우듯 한다. 무당의 말이 맞든 틀리든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는 다 알고 있다는 식으로 줄줄이 비방을 쏟아낸다. 쪽집게로 집어내듯 하며 이렇게 하라 그렇게 하지 마라 지시를 한다. 목사도 교인들이 말을 하는 기회를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내가 다 잘 알고 있으니 내 말을 잘 들으라고 명령한다. 무당처럼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매우 닮았다. 기세나 눈빛이 좀 더 압도하는 신기(神氣)가 보이게 위선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도 비슷하다.
무당은 장사속으로 그렇게 하여 복채를 조금이라도 더 뜯으려고 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목사는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왜 고자세로 군림하고 싶어하는지 모르겠다. 무당은 말을 길게 하지 않는 편인 데 비하여 목사는 마이크를 잡았다 하면 시간을 마음대로 쓴다. 목사가 무당보다는 나아야 될 것 아닌가 싶다. 거드럼 없애고 사람 좀 존중하며 사람을 속이려고 말을 낭비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무당은 없는 것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그럴 방법이 없다. 그래서 아는 척 있는 척해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속임수를 무기로 쓴다. 목사는 성경에 있는 진리를 전하고 설명하는데 아는 척하지 않아도 아무 일 없다. 교회가 상당한 세속에 물이 든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속설에서 통하는 명언이 있다. '꿩잡는 게 매'라는 말이다.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말이 목사도 써 먹는다. 교회만 부흥되면 아무 문제 없다고 믿는 것이 같다.
그래서 무당을 흉내내어도 교인들만 좋다 하면 아무것도 가리지 않는 폐단이 이미 목사들을 오염시킨지 오래된 것 같다. 가끔 안수기도 한다는 목사들을 보면 영락없는 무당식이다. 더구나 여자목사들 중에는 이름만 목사이지 기도소리도 무당이 내는 소리와 흡사하게 들린다. 꿩 잡는 기술에 교회가 농락을 당하는 것을 개혁하여야 될 것 같다. 물론 설교를 따로 말하고 싶지만 별로 내키지 않는다. 목사가 안수기도로 병을 고친다는 공개된 현장을 보노라면 기도란 하나님의 은밀하신 은혜가 방편인데 기도하는 목사가 무슨 기술을 부리는 모양새다. 기도소리의 크기와도 상관없는 것이 기도인데 기도의 볼륨을 조작하는 모습은 무당과 무엇이 다른지 공포심이 생길 때도 있다. 여자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치유집회에 가면 목사와는 또 다른 분위기가 연출되는데 하나님이 들으실까 싶은 의구심이 생긴다.
무당 같은 목사도 그렇지만 훈장 같은 목사도 개혁이 절실하다.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는 선생을 훈장이라고 부른다. 아이들에게 호랑이처럼 가혹하다. 회초리를 들고 그침없이 아이들을 위협한다. 그러나 훈장은 폭력적이 아니다. 겁을 줘서 아이들을 통제한다. 그러자니 잔소리가 심하다. 아이들이 훈장을 반항하지 못한다. 오랜 관행이 잘 지켜지는 데가 서당이다. 오늘의 교회와 매우 흡사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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