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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에 우리는 무얼해야 하나 ③

[ 2017-04-27 14:16:05]

 
 조정칠 목사 (뉴욕 필라 블루벨 한인교회 설교목사)

2장 개혁의 대상
 
설교 개혁의 대상은 성경본문 선택과 설교화술 그 두 가지만 대상으로 삼으려 한다.
설교학을 이미 공부한 전문가들이 목사이다. 다른 것은 재량에 맡겨도 충분할 것으로 믿는다. 먼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제한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더구나 설교자에게는 크나큰 문제이다.
'말씀'이라고 하면 아무 이의도 없고 아무 거부도 할 수 없는 절대적 권위에 있는 위력이 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목사들이 독점하여 전용물로 남용한다. 그런 사례가 도를 넘어 벼랑에 섰다. 이렇게 계속 가면 추락할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 설마 그럴까 싶을 것이다.
본래 말씀은 듣는 것이고 보는 것은 아니다. 듣는 말씀과 보는 말씀은 많이 다르다. 내용이 다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작용하는 데는 다르게 된 구조다. 듣는 말씀은 귀로 듣는 직접적이다. 그러나 보는 말씀은 문자를 통해서 보는 간접적이다. 이런 점을 잘 소화하여야 좋은 설교자가 될 수 있다. 성경은 읽는 문자로 책이 되었다. 책이 곧 말씀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말씀을 듣는 효과로 기록한 책을 말씀처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책으로 분류하면 곤난하다. 그렇다면 성경은 말씀이다 라고 해도 틀린 것은 아니다. 그렇다 해도 정확하게 말하면 말씀의 정체는 소리라 해야 맞다. 그 이유는 소리는 단순하고 오류가 없다. 문자는 복잡하며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하나님은 항상 말씀을 단순하게 하셨다. 말씀을 문자로 기록하여 볼 수 있게 한 후로부터 복잡하게 된 것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성경전문가들이 많았다. 그들 중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르게 받아들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성경을 손에 들고 정면으로 하나님과 대결하여 그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참살했다.
그렇다면 성경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성경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듣는 말씀과 보는 말씀의 중간에 거쳐야할 관문이 있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게 될 것 같다.
성경을 읽을 때 문자에 의해서 말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문자가 눈이라는 문을 거쳐서 의식을 했다면 내 마음(영혼)문을 통과하여 말씀으로 기억에 저장되는 순간에 말씀이 되는 것이다. 듣는 말씀은 기억에 담는 것이다.
그러나 보는 말씀은 기록에 담는 것이다. 기록된 문자는 의식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데 완전하다. 잘못 들어서 다시 듣거나 재차 말씀하지 않는다. 기억에 담은 말씀은 손실이 없고 착오도 없다. 하나님이 그 사람의 기억에 저장했으므로 절대로 변함이 없다. 모세가 오경을 기록하기 이전까지는 말씀을 듣기만 했어도 하나님의 모든 뜻과 경영이 아무 문제가 없었고 차질이 생긴 적도 없다.
그러니까 설교자라고 성경을 마음대로 취급하면 범죄가 될 위험이 크다. 각별히 조심 할 일이다. 설교자들의 아주 나쁜 습관이 몸에 베어 있다. 그것은 성경을 읽으면서 마치 참고서로 읽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성경은 성령의 영감에 의해서 이해되는 것밖에 다른 책은 방해만 된다. 참고서는 보면 볼수록 성경이 더 어렵게 된다는 것이다. 성경이 기록되기 전에는 신앙에 갈등이 없었다.
그 원인은 간단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므로 지극히 단순하다는 것이다. 단순한 것과 간단한 것은 다르다. 단순하다는 것은 확실하여 더 말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간단하다는 것은 짧다는 표현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실 때 철저한 보안 장치 안에서 1:1로만 하신다. 그리고 그 1:1이라는 상대는 신뢰가 전제된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할 때도 사라는 제쳐놓고 단독으로 하셨다.
만일 동시에 부부에게 말씀하셨다면 성사가 불분명할 것은 불을 보듯 훤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을 만한 사람과 단독으로 말씀하시는 원칙을 지금도 그렇게 지키신다. 성경을 왜 비밀로 감춰놓으셨는지 그 이유가 있다. 사람들은 뭉치면 사고가 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뭉치더니 하나님의 아들도 죽였다. 그러니 성경을 감춰 놓으시기를 잘하신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개혁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 몇 사람만 해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한 사람을 통해서 시작하셨다. 그래서 확률이 문제되지 않아서 패배가 두렵지 않다. 성경에는 수많은 숫자가 등장한다. 숫자는 차질이 나면 역효과가 막심하다. 그런데 한 번하신 말씀은 두 번 반복하지도 않고 단번으로 완성하셨다. 그것이 말씀의 힘이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은 말씀이라고 할 수 없다. 성경을 말씀이라고 믿으면 두 말하면 안 된다. 그런데 요즘 설교자들은 성경을 가지고 장난을 친다.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다. 여기저기 찍어다가 맞추는 것이 없다. 그런 누더기는 말씀이 아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으면 그 본문에서 답을 찾으면 충분하다.
그런데 가난이 어떤 것인지 잠언으로 가서 찾기도 하고 전도서에 가서도 찾는다. 그런 것은 설교라 할 가치도 없는 횡설수설이다. 말씀은 알송달송한 것이 아니다. 여기갔다 저기갔다 요란하고 소란스러운 것은 잡담이지 말씀이 아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나쁜 버릇을 배워 가지고 설교를 망가뜨린다. 그래서 반드시 개혁을 해야 한다.
본문을 봐놓고 10군데 넘게 성경을 끌어모아서 보탠다. 그것은 값싼 비지떡이다. 너희가 교회에서 남을 가르치려 하거든 다섯 마디 깨닫는 것으로 하라. 그것이 일만마디 방언으로 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가르쳐 주었건만 성경을 도무지 믿는 것 같지 않다.
교인들에게 설교시간에 성경 여러 곳을 들이대는 것은 교인을 고문하려는 악습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아니하도록 정갈하게 기록된 깨끗하고 선명한 말씀이다. 자기 멋대로 성경을 갖고 요리하는 것은 부끄러운 짓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신 그 말씀의 뜻은 그 본문 안에 100% 정답이 나타나 있다. 그래서 거기에 앉아서 듣던 사람들은 아무 의심도 않고 잘 들어서 충분히 알고 떡을 먹듯이 받아 먹었다. 그래서 마음에 허기를 해결할 수 있었다.
내가 여러 목사들이 마음의 가난이 뭔지 찾겠다고 별별 책을 찾는가 하면 성경어구 사전에서 가난이란 단어를 다 끌어모아 짜깁기를 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 것은 설교놀이다. 퍼즐게임 같은 장난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정확하기도 하고 풍부하기도 하여 찍어다 붙일 필요가 전혀 없게 되어있다. 그래서 완전하다고 한다. 성경을 구약 신약 1020곳 나열하여 교인들 앞에서 보란듯이 으스대는 목사를 보면 불쌍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성경 많이 보는 것 당연히 좋은 것이다. 뜻을 넓게도 보고 좁게도 보는 것 나쁘지 않다. 그런 것을 자랑하듯 하지는 말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갈기갈기 찢듯이 하는 것은 좋은 태도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 따로 말씀 따로 분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설교시간에 여기서 한 절 저기서 또 한 절, 구약에 갔다 신약에 왔다 그렇게 하는 것은 말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을 눈으로 읽으면 말씀이 마음에 들려야 한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라고 말씀하신 뜻이 있다. 말씀이 눈으로 보아도 된다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자기가 읽을 때 자기 소리를 듣는다는 소리는 아니다. 들리는 그 소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야 말씀이다. 여기에는 설명이 필요없다. 읽을 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을 많이 읽으면 된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더구나 설교자의 성경은 정중하고 선명하여야 한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설교자는 교인들에게 뭘 가르치고 명령을 하기보다 성경을 즐거워 하도록 감동을 시키는 것이 진정한 설교다. 열심히 가르치고 많은 것을 부담시키려고 강요하고 꾸짖는 설교는 즐겁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성경을 더 멀리 하도록 만들 수도 있다. 말씀이 즐거워서 주야로 묵상한다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 설교개혁으로 힘 있고 생산적인 설교를 하기 바란다.
허구한 날 성경을 여기저기 왔다갔다 하면서 성경 많이 아는 것처럼 자랑하지 말기 바란다. 목사는 성경 전문가다. 설교시간에 성경은 간단하고 명확하면 된다. 감동도 빠르고 기억도 잘 된다. 그러면 어디가서 전하기도 편리하다. 목사는 많이 보고 많이 참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 것을 교인들에게 공개하는 것은 여간 웃기는 것이 아니다. 전문가는 목사이지 교인은 아마츄어다. 교인들을 목사가 알고 있는 성경을 다 알라고 하면 프로의 만행이나 다름없다.
성경을 준비할 때 목사가 먼저 은혜를 받고 교인들은 간추려서 쉽게 한다. 그렇게 단순하게 설교하면 좋은 설교자다. 한국교회 목사들은 자기가 준비한 분량만큼 교인을 괴롭힌다. 설교자 자신이 말씀을 들은 증거가 있어야 설교자다. 듣지도 못한 말씀을 설교하자니 별소리가 다 나오는 것이다. 그렇게 한 설교는 짝퉁이라 해야 된다. 그런 목사를 본 것이 없는 자라고 한다.

화술
 
설교는 말로 하는 노동 같은 것이다. 한국교회는 설교가 노동 같다는 말을 이해하는 것 같다. 설교 횟수가 엄청나서 노동과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할 말을 다 하려니까 균형이 맞지 않아서 설교자도 힘들고 교인도 힘든다. 그래도 들을 맛이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설교내용은 좋은데 표현력이 조금 부족하다 해도 양해가 된다. 반대로 말은 번지르한데 내용이 실망스러우면 짜증난다.
설교는 그 양쪽이 다 만점을 받아야 정상이다. 여기서는 화술개혁을 말하려고 한다. 말이란 나오는 대로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때와 장소에 따라서 최선의 방법으로 듣는 사람에게 만족하게 들려야 한다. 말에는 3가지 법칙을 지키면 무난하게 할 수 있다. 첫째 문법, 둘째 어법, 셋째 예법이다. 설교자도 당연히 지켜야 할 원칙이다. 그런데 설교자가 성경에 집중해서인지 화법은 신경을 쓰지 않는 경우가 있다.
대다수 설교자는 그렇게 많은 결함은 없는 편이다. 그러나 설교에 누가될 좋지 않은 버릇이 많이 노출되는 것도 사실이다. 어떤 설교자는 문법이 엉망이다. 말에는 현재, 과거가 뒤죽박죽인 경우도 많다. 설교 외에 다른 데서는 그렇게 말에 신경을 쓰게 되는 경우가 없어서 좀 부끄럽게 느껴진다. 성경을 앞에 놓고 보면서 하는 말이 '여기에 보게 되면' 또는 '하게 되어진다'는 등의 시제가 '보면'이라고 하면 되고 '하면'이라고 간단명료한 문법을 비켜서 이상하게 할 까닭을 이해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한 것이다. 표현도 분명하여야 한다. 물론 뜻이 전혀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듣기에 거슬린다는 말이 빈번하다는 것은 설교에 적지않는 흠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도 고치지 않겠다면 청중을 무시하는 것과 다름없다.
설교란 청중이 들어준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왜 그런 고집을 부리는지 참 딱하다. 물론 본인도 노력하겠지만 노력하여 고친다면 더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완전하신 말씀인데 좋은 말씨로 전하는 것이 백번 타당한 일이거늘 어째서 잘못된 방법으로 말씀에 손해를 끼치는지 알 수 없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고치고 설교하면 듣는 자들이 그런 의지에 감동하여 설교에 호응도가 반전되어 은혜가 넘치게 될 것이다. 옛날 6.25 동란 때에 북한에서 피난온 어른들이 그런 말을 썼을 때는 상당히 운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시절 어른들은 다 돌아가셨다.
지금은 다른 시대이다. 현시대를 살고있는 교인들을 생각하여 좀 더 노력하는 설교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문법이 어렵다면 도리가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국사람이 자기 나라말을 바르게 못하면 설교자의 품위에 손상은 어떻게 하랴 걱정된다. 그리고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다 지적할 수는 없지만 언어에 아무 하자가 없는 설교자가 많으므로 설교라는 장르가 견고하게 될 것이다.
 
우리 한국사회에서 설교라는 말이 좋은 대접받지 못하는 것 모르는 사람이 없다. 설교는 듣기 싫은 잔소리의 대명사다. 누구든지 잔소리를 할라 치면 냅다 지르는 고성이 '설교 그만'이라면서 입을 틀어막는다. 그 책임이 우리 설교자 탓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문법탓이 아닌데도 주의해야 할 것은 예법에 어긋나는 것에 더 민감할지 모른다. 예법은 본인이 모르고 쓰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참으로 민망하게 들리는 말이라서 설교자에게는 독이 된다. 실례를 좀 들고 싶으나 해당되는 개인을 지목하는 것 같아서 조심해야겠다. 설교를 듣다보면 목사의 과거가 머리에 떠오를 때가 있다. 말의 앞뒤가 애매하던가 할 때면 그 목사가 과거에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겠다는 편견이 생긴다. 또는 했던 말을 계속 반복하여 지겨울 때는 자랄 때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제멋대로 자란 사람은 그럴 거라고 오해받는 것은 억울하다. 목사의 과거가 설교와 상관 있다는 증거는 없다. 말을 잘못하면 받지 않아도 될 모욕까지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과 가치를 나타내는 척도 같은 것이다. 설교자에게 예법에 어긋나는 말은 없어야 될 것이다. 화술에 있어서 예법은 상식선에서 이해하면 무난할 것이다.
종종 보는 바로는 반말을 하는 경우가 가장 흔하다. 어떤 설교자가 반말을 청중에게 하랴 싶겠지만 그렇지 않다. 반말이란 쓸데는 쓰게 되어 있는 정당한 나라 말이다. 단지 상대가 수용 가능할 때만 그렇다. 설교의 청중은 반말이 해당되지 않는다. 그래서 쓰면 안 된다. 반말 외에도 혐오스러운 말, 잔인무도한 말, 엽기적인 험담 같은 언사는 피하여야 된다. 가끔 예를 들 때 실화를 너무 정직하게 옮겨오느라고 그런 말을 쓸 때가 있다. 그래도 좋은 것은 아니다.
목사의 입은 말씀이 담겨 있다. 말씀에 누가 되지 않게 최선의 어휘가 적당하다. 그중에 반말을 조심하여야 된다. 다른 험담은 조심하면 억제가 된다. 그러나 반말은 불쑥 나오기가 쉽다. 설교자가 좋아서 흥분하면 자기도 모르게 반말이 튀어나온다. 반말은 두 가지다. 우리말은 높이고 낮추는 데 높여야 할 때 높이지 않으면 반말이다. 그것은 누구나 아는 반말이다. 그 다음에는 말을 하다가 도중에 잘라버리는 반말도 있다.
모든 말에는 머리가 있고 꼬리가 있다. 시작과 끝을 완전하게 해야 말이 된다. 올리려다 말든가, 시작하여 그만 두든가 그러면 듣는 사람은 불쾌하여 화가 난다. 설교자는 언제나 시간의 압박을 받는 편이다. 그래서 조금 생략하는 수가 있다. 그럴 때도 반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높일 때 제대로 올려서 말하고 말은 끝이 분명하게 맺으면 된다. 어쩌면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쉬울 수도 있다. 반말은 가끔 재미있는 것이 유혹이 된다.
예법에 통과되어도 한 가지 더 추가할 것이 있다. 그것은 어감이다. 모든 것 완벽하다고 말이 잘 된 것 아니다. 듣는 사람이 어떻게 들었는가. A급도 있고 C급도 있다. 거기에 가장 높은 화술이 결정된다. 사람들마다 아침인사를 굿모닝이라고 한다. 단 한 명도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느낌은 다 각각이다. 그 느낌은 상대방이 안다. 설교 다 잘하고 원고 완벽하고 내용 충실하고 인상 나무랄 것 없다 해도 듣는 사람 가슴에 남아있는 설교자의 주는 여운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설교를 듣는데 성경 생각보다 잡념이 더 많이 떠오르면 설교자에게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재래식 설교는 설교학적으로 잘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개혁을 하면 하나님이 설교를 어떻게 들으시고 어떤 결과로 이끌어 주실지 거기에 맞추게 되는 설교가 될 것이다. 설교를 좀 많이 듣게 되는 젊은목사가 있다. 물론 잘하니까 그럴 것이다. 듣다보니 말이 좀 실증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매주 한 번씩 듣던 설교인데 한참 듣지 않았다. 나는 좀처럼 그런 일은 없었다. 그 설교자는 말이 똑부러지게 분명하다. 그런데 어휘가 너무 좁아서 했던 말이 반복되어 항상 새로운 표현이 없었다. 어휘 부족이라기보다 변화의 맛이 없었다. 좋으면 좋은대로 다르게 표현해야 즐거움이 증폭된다. 많은 연구 없어도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은 좀 그렇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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