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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에 우리는 무얼해야 하나 ②

[ 2017-03-24 13:31:08]

 
 조정칠 목사 (뉴욕 필라 블루벨 한인교회 설교목사)

설교 개혁 이렇게

1장 설교 개혁의 당위성

한국교회 역사가 100년이 넘었다. 그 동안 많은 발전을 하였다. 교파가 늘고 교세가 늘고 규모가 커지고 순수하던 초기교회는 모습을 감췄고 이해가 엇갈리는 경쟁이 전쟁처럼 치열하게 진행되기도 했다. 초기교회에서 하던 설교가 계속되어 오면서 각각 양상은 조금씩 변화가 되었으나 깊게 개혁적인 변모는 없었다. 각기 소속교단을 중심으로 단속이 엄격하여 수평 이동마저 순조롭게 되지 않아서 적대감정을 유발하게 되면서 갈등을 초래하기도 했었다.
같은 장로교가 두 갈래 세 갈래가 되었을 때는 그런가 싶었다. 그러더니 무슨 까닭인지 핵분열처럼 갈라져서 그 수를 헤아리기도 어렵다. 가끔 소속교단을 물을 때면 대답하기조차 얼굴이 뜨거워진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그런 것은 개혁을 모르기 때문일 것 같다. 계속 이대로 가면 끝은 파멸뿐이다. 교회가 분열하는데 조국통일을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시겠는지 대답은 양심에 물어야 할 것이다.
지금쯤은 대폭적인 개혁을 할 때이지만 그 또한 서로 얽힌 것이 많아서 쉽지 않을 것 같다. 내가 하면 되고 남이 하면 싫은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인간의 속성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나이는 단순한 숫자의 의미가 아니다. 인간의 나이는 값이라는 것이 있다. 나이 값을 한다고 말을 들었을 때와 나이 값도 못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감정은 극과 극으로 엇갈린다. 어렸을 때는 아무것도 문제삼지 않는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나 깨닫는 것이 달라져야 한다. 당연히 어른다워야 된다고 할 것이다. 그렇게 간단하게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어른답게 되기 전에 통과의례가 있다. 그것은 필수이고 어른스럽다기보다 더 중요한 절차이다. 성경적 논리의 정답은 어린아이의 짓거리를 버리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그렇게 고백했다. 내가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라고 천명했다.
얼른 보면 말장난 같지 않을까 싶겠지만 그렇지 않다. 어른답게 되려면 당연히 어린아이같지 않는 성숙미가 나타나야 한다. 어른이 되면 저절로 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착각이다. 어른이 되어도 유치한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참 신기하게도 유치한 것을 버리지 못하는 어른이 많다. 어른이 단번에 순간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어린아이의 일을 한 가지씩 벌이는 과정이 어른이 되는 과정이다.
그래서 조금씩 어린아이의 쓰는 용어를 버리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어린아이가 생각없이 조건 반사적인 행동반경을 벗어나는 것이 보인다. 그러면서 판단력이 생겨서 버릴 것과 취할 것을 구별하는 가치관이 돋보인다. 그러면서 어른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이 같은 발육의 과정은 개인차가 있기는 하지만 대동소이 하다. 인간에게 성장은 절대적이다. 늙어서 죽을 때까지 성장하는 것이 인간이다.
모든 생물은 발전이나 성장이 한계가 있다. 인간은 그렇지 않아서 만물의 영장이라고 한다. 당연히 인간이 하는 일이 무한적인 발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도 인간의 문명은 계속 발전할 것은 자명하다. 그것은 인간의 특권이며 인간의 사명이다. 교회가 그 범주 안에 들어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500년 전 종교개혁이 그랬었으니 지금은 큰 폭의 발전과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사회적 변화는 환경이 가져다 주는 현상일지 모른다. 그러나 종교적 발전은 그보다 훨씬 앞서거나 강렬한 자극적인 영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 할 수 있다. 한국 기독교는 그런 과정을 확실하게 증명을 해주고 있다. 3.1. 독립운동 때 기독교의 역할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오늘의 교세에 비하면 턱없이 열악한 때였다. 지금 같은 교세라면 우리는 낮잠을 잔다고 해야 될 것 같다.
그런 것만 보아도 개혁은 때를 넘겼다고 해야 될 것 같다. 너무 늦은감이 있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적기일 수도 있다. 오늘의 교회 규모 외관 인력 재력 뭣하나 모자람이 없다. 그런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은 개혁정신이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중심에는 개인주의가 팽창한 때문이다. 자기 교회만 잘 되면 그만이다. 거기에다 피나는 경쟁을 교회끼리 교파끼리 목사끼리 하다니 정말 꼴불견이다.
이러고도 개혁을 기피한다면 자폭하자는 것이나 다름 없다. 백 가지 개혁보다 한 가지 설교만 개혁하면 모든 것은 따라간다. 왜 너 혼자 그러느냐고 욕할 것이다. 뭉쳐서 하려면 뭉치는 데 기운 다 허비하고 개혁은 불발한다. 대통령 연설 원고 수정 시비가 불거지는 바람에 이 나라의 지붕이 날아갔다. 목사들 설교 원고 개혁하라는 신호 같아서 이런 글을 쓰게 되는지 모르겠다. 한국교회 설교놀이 이쯤에서 멈추자.

한국교회 부흥 소문이 한국교회 추문으로 끝날 위험이 크다. 어떤 목사의 가슴 아픈 쓴소리에 정신이 멍해졌다. 한국교회 안에 미신적 요소가 두 자리수라는 것은 거저 해보는 소리가 아니었다. 이런 미숙한 현실은 반드시 개혁이 되어야 마땅하다. 우리 한국교회가 좀 세련되게 보일 나이가 되었다. 그럴려면 먼저 버릴 것부터 챙겨야 한다. 그 첩경이 설교다. 옛날 방식으로 낮은 수준인 걸 인정해야 한다. 거기에다 많은 설교자들이 자기 발 아래서 설교를 듣고있는 교인을 얕보는 태도는 시대에 맞지 않는 유치한 모습이다.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닌 사람은 교회가 익숙하여 아무 거리낌이 없다. 그러나 성년이 된 후에 교회에 발을 드려놓은 사람들에게서 듣는 공통점은 사람을 대하는 수준이 너무 낮다고 한다. 친절한 것은 좋은데 대화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은 말하는 데서 모든 것이 드러난다.
설교도 엄연히 한국말로 하는데 어쩐지 한국말이 낯설게 들린다고 했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가지 이름 등은 생소하겠지만 다른 말은 그래서는 안 된다. 한국사람을 앉혀 놓고 설교하는데 한국말이 서툴다면 문제가 크다. 목사들 다 모아서 국어 공부 다시 할 필요가 절실하다. 만약 남북이 통일된다면 설교가 모든 말중에 표준이 되어야 교회가 살아남게 되고 교회가 사회를 지도하게 되는 탄력을 얻는다.

한국말과 교회말이 따로 있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한국교회는 말씨도 개혁해야 된다. 문화의 발전과 생활방식이 옛날과 많이 다르다. 하루가 다르게 세상은 발전하고 있다. 유독 교회만은 항상 그 자리에 맴돌고 있다. 그중에서 목사의 설교만은 바르게 들려야 교회가 사람을 환영한다고 느끼게 된다. 말이 이상하게 들리면 사람을 쫓는 꼴이 된다는 것을 교회는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시대가 바뀌면서 교회의 인식도 많이 개선되었다. 교회가 좋다는 것을 믿고 찾아올지도 모른다. 오늘과 같이 문호가 열려있는 시대가 일찍 없었다. 비싼 값을 내지 않고도 찾아갈만한 곳이 교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이 찾아오게 말이 좀 통하면 좋겠다.

요즘 젊은이들은 불교신자가 아니라도 불교사원에 가서 이야기를 듣는 사례가 많다고 들었다. 교회도 볼거리든 들을거리는 좀 있었으면 좋겠다.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마음이 공허하고 가슴이 갑갑한 사람들이 많다. 좋은 말을 듣고 싶어 찾아오는 시대를 열어야 미래가 있지 않을까 싶다. 다른 곳에서는 듣지 못하는 명언들을 교회에서 책임지고 좀 해줬으면 좋겠다. 낚시할 때 쓰는 밑밥처럼 말이다.

한국교회 안에 인재가 얼마나 많은가. 목사들의 수준이 얼마나 높은가. 설교개혁을 하면서 온 국민의 마음까지 흔들어 놓았으면 좋겠다.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조건이 되는데 때를 놓치지 말고 종교개혁 500주년에 맞춰 행동을 개시하면 될 것 같다. 현대인의 욕구는 생리적인 욕구보다 정신적 욕구가 단연 우세하다. 누가 할 수 있을지 생각하면 할수록 목사들이 가장 적임자 같다. 그런 고급인력은 활용하여야 한다.

내가 농촌교회에서 목회할 때 한 청년이 자주 교회 앞으로 왔다갔다 하면서 기웃거렸다. 가까이 가서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자 그 사람이 교회에 다니고 싶은데 아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내가 당신을 알지 않느냐고 했더니 무척 좋아하는 기색이었다. 교회는 주일에만 가지 않느냐며 평일에 자기와 좀 놀아주면 잘 다니겠다고 했다. 나는 그러자고 했다. 무얼하고 놀아야할지 생각을 해봤다.
나로서는 마땅한 놀이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 청년은 바둑을 좋아한다고 했다. 나는 바둑을 놓을 줄 모른다고 했더니 자기가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한 청년을 전도하려고 나는 배우겠다고 했더니 당장 바둑판을 가져와서 마주 앉았다. 그 후로 매일 바둑이 일이었다. 싫은 내색을 않으려고 서툰 바둑을 고역처럼 감당했다. 9점을 놓고 대결을 하면서 배웠으나 워낙 취미가 없는 탓에 늘지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정이 들어서 많이 친하게 되었다. 마음에 품었던 고민을 하나씩 털어놓으면서 관계가 많이 발전했다. 일찍 모친을 여의고 계모 슬하에서 설움받던 아픔을 내가 달래주게 되었다. 신앙은 물론 사람이 달라지고 있었다. 지금도 그 청년은 나를 못잊어 한다. 목사가 교회밥을 먹는다고 교회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만인의 하나님이듯이 목사도 그렇다. 목사는 밥값만 해서는 안 된다.

목사는 설교자다. 설교는 예배용으로 쓰는 도구가 아니다.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설교는 제한이 없다. 한 번은 교회 가까이 화약공장이 들어섰다. 다이나마이트 제조공장에 종사하는 공원들은 대개 청소년들이었다. 철저하게 화기 엄금이다. 담배불 한 점 잘못 던지면 공장은 물론 공원들의 목숨이 위험하다. 그 공장 사장이 찾아와서 일주일에 한 번씩 설교를 해달라고 했다. 공장의 안전교육 차원에서 하는 일이었다.

나는 1년간 그 공장에서 교인 한 명 없는 곳에서 매주 월요일에 설교를 했다. 예배는 볼 형편이 아니어서 시작할 때만은 애국가를 부르고 나서 설교했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애국가를 찬송가로 생각했다. 반응이 좋아서 사장이 무척 좋아했다. 사고도 없었고 나도 그런 봉사가 좋았다. 그 후에 또 넝마주이 부랑아들이 천막에서 시청사회과의 보호를 받고 있는 시설에서 설교도 했다. 낮에는 어깨에 넝마 주워 담는 망태를 메고 거리를 다니며 쓰레기통을 뒤지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푼푼히 잔돈을 벌고 살았다. 일종의 고물상 같은데 거기에도 조직이 있었다. 학교에 다닌 적이 없는 무학자와 학교에 다니다가 그만 둔 빈민가 가출 소년들이었다. 철저한 통제하에 보호받는 아이들이 불쌍하다고 대학생들이 밤에 야학을 열어 주었으나 공부에 취미가 있는 아이는 거의 없었다.
아무 재미도 없고 아무 희망도 없는 아이들의 대책은 어디서도 책임질 기관이 없었다. 작업이 끝나면 잠을 자는 일밖에 아무 낙이 없이 사는 곳도 있었다. 거기서 노래를 가르치고 놀아주는 대학생들이 노래만으로는 되지 않겠다고 나보고 무슨 이야기라도 해달라고 요청을 했다. 아무도 돈 생기는 일도 아닌데 올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 곳에 갈 사람은 목사가 적격이었다. 나는 거기서도 이야기를 몇 달 했다.

이야기도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목사들은 웬만하면 할 수 있다. 나는 원래 이야기 전문가였다. 종일 이야기를 하라 해도 거부하지 않을 정도로 이야기 달인처럼 불려다녔다.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도 많으냐고 묻기도 한다. 나는 이야기는 얼마든지 만들면 된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설교도 일종의 이야기다. 성경을 풀어서 이야기하는 것을 설교라 한다. 이야기는 흥미가 효과다. 제발 좀 잘 해보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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