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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같은 길을 걸어온 혜강 김남식 목사와 평금 박종구 목사의 우정

[ 2020-01-31 09:25:41]

 

< 혜강 김남식 목사 >


       평금 박종구 목사

 

혜강 김남식(이하 혜강): 인간 사회에서 만남이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평금과의 만남이 꼭 50년이 되었다. 1969년 초 내가 합동총회 기관지 기독신보(현 기독신문)에 입사했을 때 평금은 <크리스천 헤럴드> 편집국장으로 있었다. 이렇게 만나 50년의 세월을 언론, 문학, 교회 등 비슷한 분야에서 사역하였다. 오늘 <총신문학>을 위한 특별대담이니 내가 질문자의 입장에 서겠다.

평금 박종구(이하 평금): 긴 세월을 가까이서 멀리서, 같으면서도 다르게 우리의 길을 달렸다. 이제 황혼에 든 두 사람의 가슴을 열어보자.

 

혜강: 평금의 어릴 적 이야기부터 하자. 평금의 고향이 전남 순천이고, 나는 일본 와까야마이니 거리적으로 멀지만 바닷가 마을의 공통점이 있다. 어릴 때 문학 소년의 꿈을 열어보자.

평금: 1960년대 보통고시 응시 자격은 학력 제한이 없었다. 보통고시 합격자는 고등고시 예비고시를 거쳐서 고등고시를 응시할 수 있었다. 나는 중1 때 자퇴하고 이웃 마을 통장 정래훈과 함께 보통고시 독학에 들어갔다. 516 후에는 응시 요강이 변경되어 이 꿈이 무산되자 고입 검정고시로 순성고에 입학하였다.

이때 순농고의 오순택과 함께 시화전을 열었다. 마땅한 전시장이 없어서 한 다방의 실내 벽면에 작품을 진열했다. 매일 관람자가 붐볐다. 그때의 작품들은 순천 홍수 때 모두 분실되었다. 고교 졸업 후 영화감독이 되고자 시나리오 작법에 몰입하였다. 종합예술의 영역에서 나의 이성을 펼쳐 보리라 꿈꿨다.

 

혜강: 소년 시대의 꿈은 그리움의 시대이다. 영화를 꿈꾸던 소년이 영적 세계의 지형도를 그리고 있으니 모두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다. 신앙의 체험은 어떠했나?

평금: 내가 주일학교 부장을 맡고 있는 순천장천교회에 담임교역자로 최선재 전도사가 부임하였다. 신학교를 갓 졸업하고 첫 부임지로 온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김정기 목사에 의해 순천만 대대교회 주일학생이 된 이래 교회 출석을 꾸준히 지속해 왔다. 고교 졸업 후 한 해 동안 영화감독 수업에 영일이 없던 어느 날 저녁, 최선재 전도사의 설교 시간이었다. 한 섬에 앞을 못 보는 여성도가 새벽기도회에 참석코자 예배당을 찾아오는 모습을 이야기 했다. 두 손으로 돌담을 짚으며 '험한 시험 물 속에서 나를 건져 주시고…'의 찬송을 부르며 예배당을 오고 간다고 했다. 이 찬송을 최 전도사가 부르는 동안 나는 온 몸의 뜨거움과 큰 바위가 나를 짓눌리는 위력을 느꼈다. 그리고 이내 모든 사물이 새로운 빛으로 밝아 옴을 체험했다.

그 후 최 전도사의 주선으로 총신대에 진학하게 되었다. 영화감독의 꿈은 속절없이 사라졌다.

 

혜강: 평금이나 나는 어릴 때부터 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실속 없는 것에 빠져든 것 같은 젊은 날이었으나 이것이 우리의 꿈이었다. 평금은 어떠했나?

평금: 1964년도 총신대에는 성문과(聖文科)가 있었다. 나는 성경문학을 전공코자 성문과에 지원했다. 서울에서 만나는 문학 친구들은 모두 국어국문과나 인문학 계통이었고, 그 학교의 인맥을 통해서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나는 변방의 예비역이었다. 이 신학도의 반란은 197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동화가 당선되어 중앙 문단에 입성하였다. 이어 1976<현대시학>을 통해서 시단 데뷔로 기성문인이 되었다.

교계 매체에 내 시가 빈번하게 게재되고 순교지에 시비가 세우졌다.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에 <순교자>, 소록도 김정복 목사 순교지에 <선한 목자>, 77인 순교지 염산교회에 <우리는 천국 간다>를 비롯하여,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에 <처음 사랑>, 조동진선교기념관에 <기다림> 등이다. 특히 나의 모교 순천도사초등학교에는 동요비 <산새 들새>가 교정을 지키고 있다.

 

혜강: 우리의 이름 뒤에는 '언론인'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다. 나는 지금도 몇 개의 신문에 사설, 논설, 칼럼 등을 연재하고 있어 최고령 현역이 되었다.

평금: 나는 1960년 후반 조동진 목사께서 창간한 선교신문 <크리스천 헤럴드>의 초대 편집국장을 맡았다. 신문 편집이나 제작공정에 문외한인 나를 편집책임자로 발탁한 발행인의 모험은 위험 부담이 큰 도박이었을 것이다. 창간호가 발행되자 당시 기독교 언론계에서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도전적 타이틀, 파격적 디자인, 세계선교 특종기사 등은 타 주간지와 차별성을 보여 주었다.

이때 나는 활자 미디어의 매력에 빠졌다. 이른바 활자중독자가 된 것이다. 이 무렵 교분을 가졌던 교계 신문인들로는 채기은 목사, 박윤성 목사, 김태규 목사, 정종화 국장, 변순재 목사, 고환규 목사, 김원식 국장, 김남식 목사 등이다.

 

혜강: 평금을 볼 때마다 <월간목회> 43년을 기억하고 감사와 존경을 보낸다. 새로운 목회 지형도를 이룬 공로를 감사한다. 나도 계간 전문학술지 <상담과 선교>를 간행하다가 84호에 휴간하였다. 원고, 운영 등 도저히 계산에 맞지 않았다. 평금의 고통을 겪어 본 사람으로 어느 정도 이해한다.

평금: 1976년 목회전문지 <월간목회>를 창간하였다. 목회 자료와 정보 제공, 현대목회의 연구와 개발, 참 지도자를 통한 교회 부흥 촉구라는 사시를 내걸고 목회 종합지로서 43년을 오롯이 섬겨왔다.

이 잡지는 처음부터 적자경영이었다. 그러나 <크로스웨이>가 받쳐주어서 경영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한국교회의 급성장기에 목회자들과 호흡을 함께 했다는 자부심이 있는 반면, 필자들에게 고료 예우가 충분하지 못했고, 직원들의 급여도 만족치 못했다. 제작비 투입 또한 제한적이어서 아쉽다.

나의 반세기는 성경 사랑과 한국교회 사랑에 최선을 다했다. 이는 진솔한 나의 고백이다. 비록 사랑의 문법이 서툴고 투박했을지라도 쉬지 않고 달려온 반세기였음은 찬란한 슬픔이고저.

 

혜강: 나는 <월간목회>를 볼 때마다 기회가 되면 기독교서지학적 측면에서 이 잡지를 분석하는 논문을 쓰고 싶다. <월간목회>를 통해 이루어진 한국교회 목회 지형도를 어떻게 보는가?

평금: <월간목회>43년은 어떤 위상인가?

첫째, 한국교회 플랫폼의 역할을 위해 예민하고 신중했다. 1970년대의 한국교회는 분열의 트라우마가 극심할 때였다. 타교단과의 강단 교류가 금지되고, 반목질시가 무성하던 시절이었다. <월간목회>는 범교단지로서 교단 배경과 신학 입장이 서로 다른 집필진과 대담자를 지면에 초대하므로 피차의 상황을 주지케 했다. 이런 작업은 한국교회의 연합집회와 연합사업의 인프라 구축인 셈이다. 특집 대담과 지상 논쟁은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에 크게 기여했다.

둘째, 이론과 실제의 플랫폼이다. 목회는 실천신학의 현장이다. 그래서 목회현장의 모습을 비춰주고, 신학이론의 내면화의 현장화를 위한 과제와 그 대안을 모색케 했다.

셋째, 질적 성숙을 견인했다. 한국교회의 폭발적 성장기에는 오직 양적 성장만이 지지를 받았다. 이 성장 논리, 번영신학의 폐해를 지적하며, 질적 성숙의 길을 제시하므로 균형적 부흥을 모색케 했다.

넷째, 연구 풍토가 조성되었다. <월간목회>를 통해서 목회자 정보가 공유되므로 연구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독서하는 목회자, 연구하는 목회자, 저술하는 목회작 속출하게 되었다.

다섯째, 말씀의 중요성이 보편화되었다. 산업사회, 정보사회의 격변으로 인해 교회 본질이 훼손될 우려가 짙을 무렵 성장으로 돌아가자는 캠페인과 함께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므로 본질 회복의 전략을 제시했다.

 

혜강: 평금의 사역 가운데 <크로스웨이> 성경연구운동을 주목한다. 한국교회에 획기적 성경사랑의 불을 지폈다.

평금: 종교개혁자들은 한결같이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다. 한국교회가 성경으로 돌아가기 위해 성경공부 프로그램이 필요했다.

1985년 해리 웬트 박사가 <크로스웨이>를 우리 <월간목회>에서 한국에 도입하였다. 국내외에서 100회가 넘는 신.구약 성경을 그리스도 중심의 구속사를 체계화하여 그림을 통해 전개하는 시청각 교재였다. 지난 34년간 한국교회에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 접근 시각과 그리스도를 닮은 섬김의 삶을 촉구하는 혁혁한 기여를 하였다. 또한 한국교회에 성경공부의 붐을 조성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혜강: 평금은 지금까지 28권의 저서를 내었다. 다양한 분야의 저서들이다. 그 특색을 어떻게 보나?

평금: 나의 28권의 저서들은 몇 갈래의 빛깔이 있다. 동화집 <은행잎 편지>를 비롯한 아동문학 부문, 시집 <그는>을 비롯한 기도문집, <스펄전 목사의 생애>를 비롯한 전기물, 선교논문 <세계선교의 도전과 갈등>, <5물결>을 비롯한 칼럼집들이다. 칼럼들은 크리스천 리더십, 미래는 어떻게 오는가 등을 주제로 다루었다. <성경 정상 오르기>는 나의 대표작이다. 성경신학의 24주제를 통전적 시각으로 체계화한 성경 탐험 코스다. 성경 공부 교재로 개발하였다.

 

혜강: 평금은 한국기독교출판 문화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평금의 폭넓은 활동이 한국출판문화사에 기록될 것이다. 여기에 비하면 나는 연합 활동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평금: 신망애출판사는 <사랑의 원자탄> 저자인 안용준 목사께서 설립하였다. 내가 2대 대표가 되었다. 안용준의 <사랑의 원자탄>, <태양신과 싸운 이들>, 안이숙의 <죽으면 죽으리라>, 박영창의 <정의가 나를 부를 때> 등을 펴냈다.

나는 김재권 목사, 한영재 장로와 <한국기독교출판협회>를 창립하여, 회원의 친목을 도모하고, 세미나 개최, 해외 교류 등을 주선했다. 또한 조선출 목사, 장하구 장로와 도서 공동구매 기구 설립을 추진하기도 했다. 김소영 목사, 최재분 장로, 김영진 장로, 탁명환 사장, 신조광 목사와 <한국기독교잡지협회>를 창설해서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한국크리스천문학가협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목양문학회><총신문학회>는 우리 회사 사무실에서 창립총회를 하였다. 내가 산파 역할을 한 셈이다.

나의 문화사역의 기저에는 그리스도 중심 세계관이 흔들림 없이 흐르고 있다.

 

혜강: 평금은 민족통일운동에도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주도하였다.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통일운동이기에 주목을 받고 있다.

평금: 나는 독립운동가 조상항 장로에게서 민족 사랑을 배웠다. 그분의 장남 되시는 조동진 박사의 민족통일 운동과 민족교회 운동에 동참해 왔다.

조동진 박사는 1979년 미국 윌리암케리대학교 부설 고려연구소를 개설하여 국내외 통일문제 학자들과 학문적 교류를 증진하는 한편 민족해방기도회, 북한 고위층 지도자 미국 방문 등을 주선하였다. 지미 카터 대통령의 김일성 주석 방문도 성사시켰다.

1992년 내가 한국기독교출판협회 회장 재임 때 기독교도서 2,500여권을 김일성 종합대학교에 기증하였다.

1995년 사단법인 민족통일에스라운동협의회를 등록하여 내가 초대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창립대회 때는 북한 풍물과 문헌들을 전시하고, 통일포럼도 가졌다. 조동진 박사, 이상만 박사, 허문영 박사, 김병로 박사 등이 매월 <월간목회> 세미나실에서 통일문제연구발표회를 갖곤 했다.

UNDP 곧 나진선봉지역 개발을 위한 민간단체 출범 준비위원회 대변인을 맡은 나는 북경에서 북한 대표들과 기획회의를 진행했다.

2001년 북한 민화협 초청으로 김영진 장로, 고인경 장로, 이형규 장로와 평양을 방문하여 UN 산하 플랜코리아 평양사무실 개설을 고인경 대표와 함께 리서치하였다. 2002년 한기총 서기인 나는 북경에서 조그련 대표들과 한국교회와의 교류 및 협력에 관한 협의를 하였다.

<월간목회>를 통해서 통일문화 창달에 접근코자 했다. 조동진 박사의 <평양으로 간 목사>와 박요한 목사의 <평양의 낮과 밤>을 연재했고, 북한의 자연풍광을 천연색 화보로 소개했다. 기획특집으로 민족통일 문제를 비중 있게 다루었다. 통일대담의 진행자인 나는 <통일한국 경국책>의 이한빈 박사, <하나님 중심 세계관>의 이원설 박사의 지도와 편달을 받았다.

그 동안 수집해 온 통일 관련 자료와 북한의 문헌들은 내가 이사로 있는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관장 한동인 장로)에 기증하였다.

나는 통일 염원의 시와 기도문을 국민일보에 게재했고, 대한민국국가조찬기도회 공동기도문을 지난 3년간 매회 작성하면서 민족통일을 간구하였다. 통일의 아침은 언제 올 것인가. 이성적 판단은 한미동맹, 한일연대의 역학 구조 위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북의 변화와 무관한 통일의 노래들은 내치용 프로파간다일 수 있다. 평화, 민족, 복음을 위한 '광명의 천사'들이 활개 친다. 교회 안에도 이런 통일 거간꾼들이 있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는 한국교회와 한국정부가 돌이켜 바로 설 때 민족통일의 길을 열어 주시리라 믿는다.

 

혜강: 평금의 가족관계를 소개하라.

평금: 아내 조인숙 박사, 장녀 박은진 박사, 사위 강석영 박사, 외손자 강홍구, 장남 박철홍 목사, 자부 오은혜 사모, 손자 박성원.박지원, 이렇게 되어 있다. 이제는 손주들의 재롱이 그리워진다.

 

혜강: 우리의 남은 세월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꿈꾸는 사람'으로 살아온 우리의 삶이 멋진 마무리가 되기 바란다. 아프지 말고, 조금만 아프고 살자.

평금: 같은 길을 50년 걸어온 우리들이 우리의 지난날을 돌이켜 본다. '마음은 청춘'이니 힘차게 걷자. 매우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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