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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100주년사에 기록된 3.1운동과 한국교회를 돌아본다

[ 2019-02-28 15:21:00]

 

< 김남식 목사 >

 

3.1운동과 한국 기독교

3.1독립운동 전개에 있어서 기독교의 역할은 지대하였다. 처음에는 독립선언을 고종 황제의 국장일인 33일에 하기로 하였으나 31일로 바뀐 것도 같은 맥락이다.

첫째, 도쿄 유학생들이 28일에 독립을 선언하였고 또 국내 학생들의 독립선언이 임박했기 때문에 더 늦출 수가 없었다. 둘째, 국장일인 33일에 거사하는 것은 붕어한 고종 황제에게 불경한 일이라 피할 필요가 있었고, 국장에 참여하기 위하여 상경하는 수많은 지방민을 참여시켜야 하는데 32일은 일요일이라 기독교측이 피하자고 해서 결국 31일로 확정된 것이다.

31일 오후 2시에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하기로 하였던 예정을 바꾸어 같은 시각에 태화관(泰和館)에서 발표키로 하였는데, 이것은 그날 학생측의 연락을 받고 학생과 군중이 탑골공원에 모이게 되었으므로 혹시 불상사가 생기지 않을까 염려한 때문이었다.

독립선언서 원고는 오세창을 통해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보성사 인쇄소 사장 이종일에게 전달되었으며, 이종일은 공장감독 김홍규와 함께 227일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21천 장을 인쇄하였다. 인쇄된 선언서는 전국 각지로 즉시 전달되었다. 그 내용은 천도교측에서 안상덕에게 2~3천 장, 김홍렬에게 3천 장, 인종익에게 2~3천 장, 이경엽에게 1천 장, 그리고 기독교측의 김창준과 함태영에게 2~3천 장, 김성국에게 2천 장 내외가 배분되었다. 그중 이갑성은 서울에서 배포하기로 하고, 김성국에게 선언서를 승동예배당으로 가져가 그곳에 모인 학생대표들에게 전달하여 서울 각 곳에 배포케 하였다.

해외에 전하는 독립선언서는 주로 기독교측에서 담당하였다. 미국 대통령과 파리 강화회의에 보내는 호소문의 발송은 현순과 김지환이 담당하였는데, 현순은 상하이로 가서 인편이나 우편으로 보내기로 하였다. 이 일은 이승훈과 함태영이 감리교 목사인 현순을 보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국내에서 조선총독 하세가와에게 독립의견서와 독립선언서의 전달을 담당한 사람은 이갑성이었다. 그는 31일 민족대표가 태화관에 모였을 때에 그 문서를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서영환에게 주어 총독부에 전달하도록 하였다.

31일에 민족대표 29(길선주,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 등 4인은 지방에 있었음)은 태화관에 모여 간소한 점심식사를 마치고 독립선언 시각인 오후 2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오후 2시가 가까워오자 최린은 태화관 주인 안순환에게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민족대표 일동이 여기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나서 축배를 들고 있다고 통고케 하였다. 이 통고를 받은 일본 경찰 80여 명은 10분도 채 못 되어서 태화관을 포위하였다. 이때 민족대표들은 독립을 선언하는 한용운의 간단한 식사(式辭)를 듣고 그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한 후 연행되어 갔다.

 

독립선언서의 앞부분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야 인류평등의 대의를 극명하며 차로써 자손만대에 고하야 민족자존의 정권을 영유케 하노라. 반만년 역사의 권위를 장하야 차를 선언함이며 2천만 민중의 성충을 합하야 차를 표명함이며 민족의 항구여일한 자유발전을 위하야 차를 주장함이며 인류적 양심의 발로에 기인한 세계개조의 대 기운에 순응병진하기 위하야 차를 제기함이니 시일천의 명명이며 시대의 대세이며 전 인류 공동생존권의 정당한 발동이라 천하 하물이든지 차를 저지억제치 못할지니라.'

 

이후의 계속되는 내용은,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으며, 무력의 시대가 가고 도덕의 시대가 오고 있음을 확신하고, 엄숙한 양심의 명령으로 자신의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고자 하며,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으며, 진리가 우리와 함께하며, 억만대의 조상님들의 신령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우리를 돕고 있으며, 온 세계의 새로운 형세가 우리를 밖에서 호위하고 있으니, 시작이 곧 성공이라는 자신감을 표명하고 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의 명단은 아래와 같다.

 

손병희, 길선주, 이필주, 백용성, 김완규, 김병조, 김창준, 권동진, 권병덕, 나용환, 나인협, 양전백, 양한묵, 유여대, 이갑성, 이명룡, 이승훈, 이종훈, 이종일, 임예환, 박준승, 박희도, 박동완, 신홍식, 신석구, 오세창, 오화영, 정춘수, 최성모, 최린, 한용운, 홍병기, 홍기조 (참고, 표는 기독교인 16/ 표는 불교인 2/ 표가 없는 이름은 천도교인 15)

 

민족대표 중 기독교 16, 천도교 15, 불교 2인이라는 비율은 당시 천도교의 신도가 100만 명이 넘었으며 기독교 인구가 20여 만 명에 불과한 것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것이다. 이는 기독교 인구가 전체 국민 1,700만 명 중 1.3%에 불과하였지만, 그 영향력은 매우 컸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불을 지핀 3.1독립운동은 서울과 전국 각 지역에 열렬하게 타올랐다.

이날 정오경부터 탑골공원에는 서울의 중등학교 이상 남녀 학생 4~5천 명이 몰려와서 엄숙한 독립식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2시 정각이 되자 식장인 팔각정에 민족대표가 예정을 바꿈으로써 나오지 않자 군중의 한 사람인 경신학교 졸업생 정재용이 한 장의 선언서를 주머니에 꺼내어 들고 단상으로 올라가서 읽었다. 이로써 서울 장안에 독립만세의 함성이 울려퍼지게 되었다.

기독교가 주동이 되었던 평양에서는 서울보다 약 1시간이 앞선 오후 1시에 남산현교회와 장대현교회에 약 2천 명이 모여 고종 황제의 봉도회(奉悼會)를 개최하다가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3.1독립선언을 종교인들이 주도하였던 만큼 운동의 전개과정도 종교인들이 중심이 되었다. 19196월 일제 헌병대의 한 보고서에 의하면 전국 13도 중에 충청남북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은 대체로 기독교, 천도교, 불교 등 종교인들이 시위를 주도한 것으로 나타난다. 즉 경기도는 기독교, 천도교, 불교가 연합하였고, 전라남도 경상남북도 평안남북도 함경북도는 기독교가 주동하고 천도교가 협력하였으며, 강원도와 함경남도는 천도교가 주도하였고 기독교가 협력하였으며, 불교는 경상남북도와 전라북도에서 협력한 것으로 나타난다.

기독교인이 주도한 사례로, 먼저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유여대 목사는 지방 시위를 주도하기 위하여 서울의 선언식에도 불참하였다. 그는 의주 지역에서 김창건 목사, 김이순 전도사, 안석홍, 김두칠 등을 규합하여 31일 의주 서부교회당 공터에서 7~8백 명의 사람들을 모아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를 지휘하다가 체포당했다.

당시 장로교 총회장이었던 김선두 목사는 이일영, 김이제, 강규찬 목사, 정일선 전도사 등과 함께 평양에 있는 6교회가 연합하여 선언식과 시위를 계획하고 31일에 숭덕학교 운동장에서 약 1천 수백 명을 회집시켜 김선두 목사 사회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그는 사회자로서 '구속되어 천 년을 사는 것보다 자유를 찾아 백 년을 사는 것이 의의가 있다'는 연설을 하여 군중을 열광케 하였다. 그는 그 날로 체포되어 그 해 10월에 열리는 총회에도 참여치 못하고 복역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부득이 부회장인 마펫이 총회를 주재하였다.

이 외에 만세 시위를 교회의 지도자뿐만 아니라 일반 기독교인들이 앞장 선 예도 있다. 은세공을 하던 유봉진을 비롯한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318일 강화읍내 장날에 일으킨 시위는 참여 인원이 1만 명을 상회하였다. 이 시위가 대규모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사전에 교회조직을 통한 치밀한 연락과 준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3.1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기에 그에 대한 보복으로 교회가 많은 피해를 당했다. 수많은 살인과 방화, 악독한 파괴의 만행을 저지르고도 일제가 그것을 기만과 거짓으로 덮으려 한 일도 한 둘이 아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수원의 제암리교회 방화와 살인사건이다. 이는 수원 지방의 만세 시위를 주도한 교회를 비롯해 일대 지역을 토벌하기 위한 일본군의 만행이다. 415일 일본 헌병 아리타 중위가 이끄는 군인 11명과 순사 1명은 제암리에 도착하여 마을 성인 남자들을 교회로 모이게 한 후 밖으로 문을 잠그고 불을 질렀다. 밖으로 나오려는 사람은 창검으로 무참히 살해하였다. 이 일로 29명이 죽임을 당했다.

3.1운동으로 인한 기독교의 피해는 엄청났다. 체포된 자가 3,804, 체포된 목사, 장로가 134, 기타 기독교 지도자로 체포된 자 202, 감금된 남자 신자 2,125, 감금된 여자 신자 531, 매 맞고 방면된 자 2,162, 사살된 자 41, 매 맞고 죽은 자 6, 파괴된 교회당 12곳으로 보고되었는데 실제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191931일 독립운동을 시발점으로 이후 1여 년에 걸쳐 조선 국내뿐만 아니라 간도, 중국, 시베리아, 일본, 미국, 멕시코 등 조선인이 거주하는 동아시아 전 지역, 나아가 미국 지역에 걸쳐 광범위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조선의 독립투쟁을 압살하기 위해 철저한 무단정치를 시행하고 있었던 조선총독부는 일본에서 파견된 증원 부대와 함께 군대와 헌병을 투입하여 독립운동을 잔악하게 탄압했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31일부터 5월말 사이에 일제에 의하여 7,019명의 사망자와 15,961명의 부상자가 나왔으며, 검거된 자도 46,948명에 달했다고 한다. 3.1운동에 자극받아 같은 해 일어난 중국 5.4운동과 비교해도 엄청난 희생을 동반한 이 거국적인 민족 독립운동에 한국교회의 참여는 엄청난 것이었다.

3.1독립운동은 조선이 1910년 일본의 식민지로 완전히 전락한 지 9년 만에 일어난 거국적인 민족독립운동이었다. 일제의 철저한 무단통치 아래에서는 모든 집회와 결사가 금지되어서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기독교는 19191월말 경부터 각각 3개 그룹으로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였다. 특히 기독교의 영향력이 가장 강했던 서북지방에서는 남강 이승훈과 양전백, 김선두 등이 중심이 되어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었고, 서울에서는 박희도를 중심으로 한 YMCA 계통의 기독교 청년 학생그룹과 이갑성을 중심으로 한 세브란스의전 등 시내 전문학교의 학생그룹이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었다.

당시 장로교 선교사들은 선교본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의심의 여지없이 일제는 기독교를 소요의 가장 큰 원인으로 간주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적극적으로 이 운동에 가담하고 있다. 그들은 기도를 해보니 세계 역사 가운데서 지금과 같은 특별한 시기에 시민권적 자유뿐만 아니라 종교적 자유까지 확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투쟁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여겨졌다고 했으며,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총회장 길선주 목사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3.1운동에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이 대거 참여하였고, 보다 적극적으로 그 운동을 추동해 갔다. 이러한 형태는 한국교회와 한국 기독교인들에 대한 처절하고도 가혹한 박해와 탄압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체포되는 바람에 여러 곳의 교회가 텅비어갔다. 피에터스(A.A.Pieters)는 재령 지방에 있는 두 교회를 이렇게 묘사했다.

'이곳 두 교회의 남자들은 대부분 시위에 참가했다. 대부분 체포되었고 체포되지 않은 남자들은 도망가고 지금은 오직 여성 교인들만이 교회에 나온다. 전남에서는 교회지도자 63명이 체포되었고 전북에서는 목사 3명이 사망했으며 100여 곳 이상의 교회지도자들이 감옥에 갇혔다.'

조선의 기독교회 중 가장 큰 교파였던 장로교회의 191910<총회보고서>에 언급된 바에 의하면, 3동의 교회당이 전소되었고, 7동이 일부 소실, 22동이 파괴되었으며, 체포된 교역자만도 200여 명에 이르렀다. 감리교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평양 지방의 감리사였던 존 무어(John Moore)는 대부분의 교인들과 교역자가 투옥되었기 때문에 '올해의 지방회는 감옥에서 개회하면 좋을 정도'라고 보고하였다.

그런데 조선의 기독교인들이 이토록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일본제국주의 식민치하의 정치적, 사회적, 구조적 모순에서 연유한 바가 크겠으나, 기독교 신앙과 정신, 그리고 민족주의가 어떠한 형태로든 내면적으로 결합한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3.1운동에 참여했던 조선 기독교인들의 내면은 기독교와 민족주의적 전통,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라는 침략세력의 성격과 연관시켜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에 전래된 기독교는 근대 한국의 역사 전개과정에 있어서 다른 아시아나 아프리카 등 여러 나라에 전래된 서방 제국주의적 기독교와는 달리 한국의 민족주의와 쉽게 결합될 수 있었다. 이는 한국의 경우 기독교를 전해 준 미국에 의해서 식민지화 된 것이 아니고 이웃의 비기독교국가인 일본에 의해 침략을 받았으므로, 성경을 통하여 정의자유독립과 평등의 사상을 체득한 기독교인들이 민족주의에 눈을 뜨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프래드릭 맥켄지(F.A.Mckenzie)가 천명한 바와 같이, 이는 일제하의 한국 기독교인들이 성경적 복음주의 신앙을 통해 폭정에 저항하는 민족주의를 성장시켜 갔음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터전 위에서 조국의 독립을 유지하려고 회복하려는 항일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으며 이들이 3.1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된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다음으로 당시 한국교회의 집회 시에 선포된 설교의 내용과 연관지어서도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님의 지팡이를 가지고 이집트의 바로에게 저항했던 모세에 대한 이야기와 거인 골리앗에 대항해 용감하게 싸운 소년 다윗의 이야기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구약성경 이사야 1024절부터 27절까지의 내용, '시온에 사는 내 백성들아 앗수르를 두려워 말라, 너희에게 품었던 노여움은 오래지 않아 풀고 내 분노를 터뜨려 그들을 멸하고야 말리라 그날, 그들이 지워준 짐이 너의 어깨에서 벗겨지고 그들의 씌어준 멍에가 너의 목에서 풀리리라'는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에 의해 이스라엘이 해방된 것같이 한국에서도 그것이 실현되기를 갈망했다. 정치적 저항의 언어를 박탈당한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나님께 탄원하는 이스라엘의 상황과 한국의 현실이 동일시되었던 것이다.

민족대표의 한 사람이었던 남강 이승훈은 구약성경의 예언서에 심취해서 당시 조선이 처한 상황을 이스라엘의 구원사와 비교해 해석하려고 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조선의 현실을 하나님의 세계 지배라는 기독교 사관에 비추어 인식하려고 할 경우, 다른 민족의 침략을 받고 있는 역사적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iustitia Dei)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훈은 '하나님의 공의'란 역사 단위로서의 개개 민족 내지 민족 국가가 본래 갖고 있는 특성을 충분히 발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그는 개인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것과 같이 민족도 그것을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의 민족이 다른 민족의 압제하에 있는 것만큼 커다란 악은 없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압제하는 쪽은 그 압제에 의해 스스로가 부패하고, 압제를 받는 쪽은 압제에 의해 원래의 성정(性情)을 잃어버림으로써 자유민으로서 그 생활을 영위한다고 하는 본질적인 '하나님의 공의'에 거스르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는 힘에 의한 강자의 논리가 상대화되며, 강자뿐만 아니라 약자의 정당한 권리이기도한 자유와 독립을 인정하지 않는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역사창조의 원리에 복종하는 행위로 여겨지게 된다. 여기서 '하나님의 공의'에 의한 세계지배에 따른다고 하는 조선 기독교인들의 신앙적 '복종의 원점'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그들의 정치적 '저항의 원점'으로 전환된다. 따라서 조선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3.1운동에 대한 참여는 단지 조선인에게 강요되는 정치적 굴종과 불이익에 항거하려는 민족적인 문제일 뿐 아니라, 신앙적 양심에 의거한 항거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구약성경이 조선 기독교인들의 역사관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하겠다.

조선 기독교인들의 이와 같은 저항의 논리에는 몇 가지 특징이 엿보인다.

첫째는, 저항의 도덕적 정당성을 '하나님의 공의'에서 찾았다는데 있었다. 자신들의 존재가 공의를 촉진하는 하나의 세력이라 느꼈던 그들은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위하여 공의를 주장하는 것이라고 인식했다. 그들의 저항은 하나님의 정의로운 세계지배에 근거한 것이므로 강자에게는 없는 󰡐하나님의 공의󰡑를 자기 것으로 삼아 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독립선언문에서도 나타나 있는 비폭력 저항주의는 특히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강조되었다. '일본인을 모욕하지 말고, 돌을 던지지 말며, 주먹으로 때리지 말라'고 역설했던 것도 자기 자신들 편에 있는 '하나님의 공의'를 다치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다고 말할 수 있다.

둘째는, 패배의 결과에 대한 가치 판단의 역전과 최종적인 승리에 대한 확신이었다. 조선의 기독교인들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는 예수님의 교훈을 생각하면서, 3.1운동이 실패로 귀결되더라도 그것은 미래의 승리를 위한 불가피한 전제라고 보았다. 그리고 󰡒2천만이 죽음을 맹세하고, 10, 20회 독립운동을 일으켜서 '하나님의 공의'에 따르려고 노력한다면 독립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확신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공의'의 최종적인 승리는 때때로 패배를 계기로 해서 나타나기 때문에, 의로운 자의 패배는 잠정적인 것에 불과할 뿐 아니라, 미래의 승리를 위한 전제라고까지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는, 고난 가운데서도 신앙에 의해 정신적 균형을 유지했다는 점이었다. 시위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던 한 소녀는 '그때 나는 기도를 드렸다. 기도하면서 예수님을 본 것 같았다. 높은 곳으로부터 상당한 위안을 얻었다. 나는 주님이 이때 위안을 주신 것을 감사한다'고 고백했다. 그들은 이로운 자의 고난의 극치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고난의 한 가운데서도 자신의 고난을 예수의 고난에 빗대어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었다. 신앙이 고통을 방지해줄 수는 없다. 그러나 고통에 직면했을 때 그것의 의미를 창조적으로 해석해줌으로써 고통을 자기 성장의 적극적인 계기로 포괄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할 수는 있는 것이었다.

조선 기독교인들은 민족주의의 기독교적 근거를 '하나님의 공의'에 의한 세계지배에서 찾고 있었다. 또 그들은 패배에 대한 가치의 역전과 최종적인 승리의 보증과 현재의 고난에 대한 정신적 보상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읽어냈고, 그들의 삶에 투영시켰던 것이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종교인임과 동시에 외세에 의해 억압받는 민족의 구성원이었다. 특히 당시의 일본제국주의가 폭압적 식민통치를 하면서 종교적 자유까지도 억압하였음을 고려할 때, 이 두 측면은 서로 괴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해를 같이함으로 상보적(相補的) 상승작용을 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기독교인들의 종교적 신앙심은 민족의식을 강화시켰고, 민족의식은 신앙심을 더욱 심화시켰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제 강점하의 고난 속에서 단련되고 심화된 불가분의 신앙과 민족의식은 민족독립의 기회가 도래하였을 때 외연화(外延化)되어 비록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둔 타계적, 피안적 기독교인들이라 할지라도 민족을 위해서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같은 신앙사상적 전통은 현재까지 예배 시의 대표기도에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 내용이 그치지 않는 것을 통해서도 이어지고 있다. 진정 한국교회가 3.1독립운동을 주도함으로써 얻은 큰 상처는 한국교회가 우리 민족을 위하여 이민족(異民族) 일본에게 채찍질 당함이요,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생각나게 하는 영광의 상처로 기억함이 옳다.

(2013. 1. 20. 편집인 김남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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