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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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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향해 계속 달린다 9

[ 2018-09-27 17:29:02]

 
 운정 정정숙 교수의 자전 에세이


사당동 스승들에 대한 그리움 (2)

 
학문의 길을 격려해 준 사랑을 기억
인간적인 섭섭함을 세월에 흘려보내고

세월은 가도 그리움은 남는다. 스승들의 가르침으로 오늘의 내가 있고, 그들의 사랑으로 이렇게 잘 지내고 있다. 지나간 세월, 고마움과 섭섭함이 있기 마련이지만 섭섭함은 모두 씻어버리고 고맙고 감사함만 가슴에 소중하게 간직하려고 한다. 이제는 모두 떠나버린 옛 스승들을 추억해 본다.


 
최의원 박사: 묵묵한 구약신학자

신학교 공부가 시작되었다. 명성만 듣던 교수님들의 강의는 우리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었다. 다른 과목이야 한글로 된 것이니 그냥 열심히 준비하고 좇아가면 되지만 헬라어와 히브리어 과목은 외국어이니 학생들이 모두 힘들어 했다. 특히 히브리어를 가르치는 담당교수는 최의원 교수였는데, 그는 유대인 대학교인 드랍시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분이고 외모도 호리호리하고 큰 키로 냉철한 학자풍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동료들은 모두 공부를 시작하기도 전에 첫 시간부터 주눅이 들어 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헬라어와 히브리어 과목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이 과목들을 열심히 공부하면 원어성경을 읽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요즘처럼 단어장이나 사전이 있는 시절이 아니었으니 스스로 단어장을 만들어 가며 열심히 익히고 암기하며 공부를 했다.

특히 히브리어는 생전 보지도 못한 글이었고, 그것도 영어나 헬라어와 달리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고 읽어야 하는 글이니 정말로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그래서 앞으로 원어로 성경을 읽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예습과 복습을 열심히 하고 버스 안이나 길을 걸으면서도 단어와 문법을 열심히 외웠으며 수업에도 빠짐없이 참석하여 교실 앞자리에 앉아서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공부했다.

그런데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이 통합 측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는 구약 전공자는 히브리어를 필수로 공부하고, 신약 전공자는 헬라어를 필수로 수강하는데 우리 학교는 왜 두 과목을 필수로 수강해야 하는가?를 놓고 논하다가 나중에는 그 불똥이 나에게로 튀었다. '정 선생은 목사도 못되고 설교할 기회도 없을 여자인데 골치 아프게 헬라어와 히브리어 공부는 왜 하느냐?'고 했다. 처음에는 웃고 지나갔지만 같은 말을 자꾸 들으니 그것도 말이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최의원 교수의 연구실을 찾아갔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처음 대화를 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친구들이 말하던 대로 여학생이 히브리어를 필수로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가 궁금하다고 질문했다. 최 교수는 필자에게 '공부는 실용성을 따져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가 될 것도 아니고 설교를 하지는 않는다고 할 지라도 어학을 깊이 연구하여 성경주석을 했으면 합니다. 내가 볼 때 정 선생은 좋은 주석 책을 저술할 수 있다고 봅니다.'라고 하셨다.

학교의 모든 교수들로부터 '기독교교육학을 전공하여 교수가 되라'고 권유는 많이 받았지만, 성경신학을 연구하여 성경주석을 하라는 권유는 처음 받았기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나에게 '성경주석을 쓰라'고 하신 주토(朱土) 최의원 박사(이하 주토라함). 지금도 여자는 목사가 아니기 때문에 신학대학원 교수가 될 수 없는 상황인데, 60년대 초반에 강단에서 가르칠 수는 없어도 주석책을 집필하라고 가능성을 제시하던 우리의 최 교수님.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실용성 보다는 제자의 가능성을 내다보고 학문적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던 그분을 생각하며 그려본다.

나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친구 몇 명과 주토 선생의 집으로 감사 인사를 갔었다. 재학 중에 가면 성적 올려달라고 외교하러 가는 것 같아서 졸업 직후에 갔었다. 1학년 때 여학생이 히브리어를 필수로 배우는 것이 의미가 있는 일인가? 를 문의하러 연구실을 찾아간 후에 첫 번째 방문이었다.

주토 선생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셨고 사모님이 과일을 대접해 주셨다. 주토 선생은 우리의 장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조언해 주셨고, 특히 나에게는 학문의 길로 가라고 권하셨다. 유학 시절의 외로움과 어려움, 학문을 하는 기쁨과 교수로서의 즐거움과 보람 등에 관한 말씀을 하시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진로 선택의 중요성에 대해서 조언을 주셨다. 함께 갔던 친구들은 수업시간의 근엄함과는 다른 자상함과 제자들을 위한 배려에 매우 놀라면서 감사했다.

주토 선생은 은퇴 후에도 연구를 계속하고 72세에 히브리어에서 한글로 구약성경 번역을 시작하여 80세에 번역을 마쳐서 총 1,500면에 달하는 <새즈믄 우리말 구약성경>을 간행했다. 이 일은 '사역성경'의 압권이며 어느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집념과 열정이며 구약학계의 큰 공헌이다. 조용하지만 올곧게 외길을 걸으신 우리의 스승 주토 최의원 박사를 가슴 깊이에서 존경하며 기억한다.

김희보 목사: 사당동의 기틀을 닦음

 
신학자라기보다 목회자의 이미지가 강했던 김희보 목사가 19723월에 총신대학 학장으로 부임하면서 오늘의 사당동 캠퍼스의 기초가 닦아졌다. 지금도 학교에 가면 좁은 땅에 아름다운 나무들이 자리잡고 있는 것에서 김희보 목사의 섬세함을 느낄 수가 있다.

내가 19663월에 총회신학교 신과(오늘의 총신대 신대원)에 입학하였을 때 김희보 목사는 서울 성도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면서 총신의 구약신학 강사로 출강하고 있었다.

그분은 단아하고 온화한 선비형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주어진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집념과 강인함이 있었으니 한마디로 외유내강의 성품을 가지신 분이라고 생각된다.

그의 삶을 추적해 보면 중고등학교 교사, 교목, 목사, 교수 등의 가르치는 사역으로 일관되었다. 그의 교수는 카리스마적인 외침이 아니라 조용한 가운데서 설득하는 스타일이었다.

김희보 목사는 학장으로 재직하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정치적 사안과 교수임용, 행정문제 등에 휘말려 일부 이사들과 일부 학생들의 퇴진 압력을 받기도 했지만 그의 외유내강한 성품으로 잘 인내하고 넘어갔다.

김희보 목사의 최대 업적은 구약 소선지서 주해 10권을 완간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지금까지의 어려운 주석과는 달리 원문번역, 주석, 적용이라는 형태로 성경을 연구하여 목회에 적용할 수 있게 한 점이다.

나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나 하자. 나는 총회신학교를 졸업한 후 이화여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총신대학교 종교교육과 강사가 되었다. 직함은 '임시전임강사'였다. 정관에도 없고 학교의 직제에도 없고 교육부(당시의 문교부)에도 없는 직함을 가지고 매주 15시간 이상을 강의하였다(참고로 그때나 지금이나 교육부가 요구하는 전임교수의 한 주간 필수 강의시간은 주당 10시간이다). 전임교수의 필수 강의 시간보다 많은 강의를 하면서 찾아오는 학생들을 상담하고 개인지도를 하였다. 강사실이 따로 없어서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었고 상담이나 개인지도는 캠퍼스 안의 잔디밭이나 빈 교실에서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고 조언을 하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이런 세월을 필자는 19733월부터 19768월까지 보냈다. 그 당시 K학장과 K교무처장의 입에서 나온 말은 '외국 유학을 하지 않아서 전임을 시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후 나는 결혼과 자녀출산과 양육으로 미루어 두었던 미국 유학을 떠나서 리폼드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교육학석사(M.C.E)학위를 받고 귀국하였다. 이때 주어진 직책이 '전임대우'였다. 당시의 총신대학의 사정은 종교교육과(오늘의 기독교교육과) 교수는 나 한 사람뿐인 극히 비정상적인 상황이었다.

1979년에 비주류 측이 이탈하여 박아론 교수를 교장으로 하는 방배동에 총신과 동일한 이름의 '총회신학교'(=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를 세웠다. 이탈한 인사들이 교수 확보를 위해 필자에게도 자리 보장을 약속하면서 교수로 합류하라고 권하였다. 그러한 제의를 받고 남편과 함께 박병진 목사를 만나 상의하였다. 그분은 비주류 측의 핵심 인사였으나 평소에 우리 가정과 가까이 지내는 사이였다.

박 목사님은 의외의 말씀을 하셨다. '정 교수, 이쪽은 사람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것도 경상도 출신 교수가 시급히 필요하다. 그러나 정 교수는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총신에 남아 있으라. 정 교수는 사당동의 주인이 아닌가?' 박 목사님은 계속해서 '이북 사람들이 구박해도 무조건 참아라. 학자는 학문으로 승부를 하는 것이니 계속 연구하라'고 격려하셨다.

그 무렵에 총신대학 이사회에서 나의 교수 임용 문제가 거론되었다. 지금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이사회에 참석한 학장이 '결혼한 여자가 어떻게 교수를 하는가?'라는 말을 하면서 반대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 어리둥절한 것은 4년제 대학밖에 나오지 않은 그분의 딸은 당시에 총신대학 음악과에서 교수를 하고 있었고, 옛날에 신세진 분의 딸은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 한 주간 만에 전임강사로 임용되어 가르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논리와 현실이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라는 절망감이 있었다. 그러나 이사회 석상에서 이사들의 항의가 쏟아졌다. '왜 정정숙의 교수 임용서류는 없느냐?'라고 학장과 교무처장을 질책하였고, 그 자리에서 교무처장이 우리 집으로 전화하여 이력을 물어서 즉석 이력서가 작성되었다. 그 이사회에서 조교수로 제청된 최낙재 목사와 내가 모두 전임강사로 임용되었다.

그분이 학장직에서 퇴임한 해에 크리스마스 직전에 사과 한 상자를 차에 싣고서 숭실대학교 건너편에 있는 사택으로 처음으로 인사를 하러 찾아갔다. 그토록 열심히 찾아오던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외면하였을 때 우리들의 방문은 그분에게 충격이었을 것이다. 신발도 신지 않은 채로 양말 바람으로 마당까지 뛰어나와서 우리 부부를 맞아주었다. 나는 여기서 권력의 무상함과 인간의 간사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 후 김 목사님의 가족과 우리 가족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소통하였다. 김희보 목사의 말년에 감사한 사람을 들라면 지금은 고인이 된 성실교회의 우희영 목사이다. 그는 김 목사를 아버지처럼 모셔서 교회 협동목사로 예우하고 성경을 가르치게 하였다. 김희보 목사는 성실교회에서 1987-2002년까지 장년부 교인을 대상으로 소선지서 강해를 하면서 성도들과 후배 목회자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그뿐만 아니라 어른을 어른으로 모시면서 배움을 받은 우희영 목사와 성실교회의 정성이 감사하고 감사한 일이다.

 
 
김의환 박사: 개혁신학의 지평을 넓힘

 
내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당시 총회신학교 신과) 2학년이었을 때 새로운 젊은 교수가 부임했다. 그는 호리호리한 키에 약간 대머리였던 30대 중반의 김의환 교수였다.

그는 짧은 시간에 학생들을 휘어잡았다. 그의 달변의 강의, 명필(?)의 판서 특히 한자(漢字) 판서는 일품이었다. 또한 채플시간의 열정적 설교는 신학생들의 가슴에 뜨거운 불을 지폈다.

내가 총신에서 만난 은석 김의환(이하 은석이라함)은 지금까지의 교수들과는 다른 새로운 스타일의 교수였다. 우리가 총신 교수라고 하면 박형룡, 박윤선, 명신홍으로 이어지는 '1 세대 교수'의 이미지가 그대로 남아있다. 그러나 은석은 지금까지의 스타일에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새로운 변화와 충격을 주었다.

첫째, 그의 성격적 특성이다. 은석은 다정다감하고 활달하며 개방적이어서 학생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스타일이었다. 이것은 특별한 친화력으로 훗날 그의 활동 영역을 넓히는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둘째, 보수신학의 대변자 역할이다. 은석이 교수 생할을 처음 시작하던 1960년대 후반은 한국교회에 신학적 논란이 많았다. 이른바 사신신학, 새 신앙고백, 토착화신학 등 여러 가지 신학적 이슈들이 제기되었고, 보수와 진보 그룹의 신학논쟁이 계속되었다. 그때에 은석은 보수신학의 대변자 역할을 하였다.

그의 유려한 문장과 화려한 언변은 논쟁의 꽃이었고 자유주의자들의 공격을 막아내는 멋진 장군의 모습이었다. 이렇게 그가 가진 대중성은 그의 사역의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셋째, 교회의 목회자로서의 역할이다. 은석은 신학 교수를 하면서도 목회 사역을 병행하였다. 그것은 󰡐신학은 교회를 위한 학문󰡑이라는 전제론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새한교회, 에덴교회, 나성한인교회, 은퇴 후 말년의 교회 개척 등 항상 교회를 생각하고 아끼는 자리에서 섬김의 사역을 감당하였다.

넷째, 선교적 마인드이다. 은석은 교수보다 일본 선교사가 되고 싶어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한평생 선교지를 방문하여 그가 이루지 못한 꿈을 채우는 데 헌신하였다. 이것이 은석을 존재케 한 크나큰 기둥이었다고 생각된다.

다섯째, 국제적 감각의 소유자이다. 그는 여러 국제적 기관에 관여하고 주도하였다.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RES와의 관계, ACTS 설립의 주도 등에 깊이 관여하였고, 훗날에는 개혁주의 세계기구의 핵심 인물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인재를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인정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득룡 박사: 기독교교육의 초석

내가 총회신학교 신과에 입학한 것은 19663월이었다. 당시 교장은 명신홍 목사님이었다. 성도교회당에서 개강 집회를 하였는데 당시 교무처장이었던 송산 김득룡(이하 송산이라함)이 전체를 지휘하였다. 그때 송산의 인상은 작은 키와 우렁찬 목소리, 그리고 반짝이는 지혜였다. 이렇게 하여 송산과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나는 불신가정에서 신학교에 진학하였기 때문에 혼자서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해야 할 처지였다. 그래서 학생들을 모아서 그룹과외를 하면서 공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송산이 나를 불렀다. 그는 이미 면접 때부터 나의 형편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그는 나에게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던 송산의 두 자녀의 가정교사를 맡아달라고 하였다. 그것은 감사하기도 하였지만 부담스럽기도 한 제안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이미 맡아서 그룹과외를 시키던 학생들이 있어서 그 학기를 마무리 한 후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그의 두 자녀의 가정교사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매일 학교 수업이 끝나면 후암동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가서 두 아이의 공부를 맡아서 가르쳤다.

가정교사의 애환이란 어디서나 비슷한 것이지만 나 역시 열심히 가르쳤다. 한 아이는 성실하고 열심이어서 성과가 아주 좋았으나 한 아이는 가르칠 때는 다 안다고 했으나 다음날 시험을 치루면 전날 배운 것이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는 공부에 재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능에 재능이 있는 아이였다. 1년 이상 이렇게 가정교사로 있으면서 송산의 자녀뿐만 아니라 사모님과도 친밀하게 지냈고 세월이 지난 후 송산의 맏딸과도 가깝게 지냈다.

그의 맏딸은 평생을 이집트에서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고, 가정교사로 가르쳤던 따님은 오르간 교수로 사역 중이고 아들은 목사가 되어 송산의 뒤를 이어 사역을 하고 있다.

몇 년이 지난 후에 나는 총신대 기독교교육과(당시는 종교교육과) 강사로 강의를 시작하였다. 기독교교육과의 전체 책임은 송산이 지고 있었고, 나는 그의 지도 아래서 강사, 임시전임강사, 전임대우, 전임강사 등의 이름으로 강의를 하였다. 처음에는 강사로, 그 다음에는 당시에나 지금이나 규정에도 없는 임시전임강사라는 이름으로 주당 15시간의 강의를 하였다. 강사와 임시전임강사의 차이는 강사는 학기 중에만 강의료를 주고, 임시전임강사는 방학 때도 그 이전 학기만큼의 강사료를 주는 것의 차이였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것은 강의 과목을 개강 1-2주간 전에 전화로 통보받는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한 학기 내내 정신없이 강의 준비를 하면서 가르쳐야 할 형편이어서 고3 수험생처럼 밤을 새우며 강의 준비에 메어 달리느라고 심신이 고달팠을 뿐만 아니라 우리 자녀들과 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다른 하나는 같은 학기에는 같은 과목을 계속하여 강의를 하도록 해주었으면 강의 자료를 보완하여 보다 좋은 강의를 할 수가 있었을 텐데, 학기마다 다른 과목을 강의하라고 하니 보다 양질의 강의를 할 수가 없어서 안타까웠다. 동일한 과목을 맡겨서 강의를 하도록 했다면 보다 양질의 강의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었을텐데하는 아쉬움이 지금도 남아있다.

지금도 나의 서가에는 그때 준비한 '거의 모든 교육학과 기독교교육학 과목의 강의 노트'가 보관되어 있다. 이것들은 나의 '연단의 기록'이요, '심신 혹사의 열매'라고 부를 수 있다.

왜 이렇게 하였을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으나 나를 훈련시키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고 감사의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나의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나는 우여곡절 끝에 전임대우를 거쳐 전임강사가 되었다. 처음에는 외국유학을 하지 않아서 안 된다(그 말은 '국내의 학위들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의미이며, 그러면서도 강사와 임시전임강사라는 이름으로 5-6년간 주당 15시간의 강의를 하게함)고 하였고, 그 후 외국유학을 마치고 오니 '가정을 가진 여자가 어떻게 교수를 하느냐?'고 반대하였다(그런데 기막힌 것은 당시에 행정책임을 맡고 있던 분의 딸은 4년제 대학만을 졸업하고도 총신대 음악과 교수를 하고 있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드디어 학교 이사회 석상에서 이사들이 문제를 제기하였고, 그 자리에서 실무를 맏고 있던 어떤 분이 나에게 전화로 확인하여 필자의 이력서를 작성하였고 그 자료를 놓고 토론을 한 후 임용대상자도 되지 못한 나와 조교수로 신청을 했던 최낙재 교수를 전임강사로 임용을 결의하였다. 우리 가족은 그 과정을 그 회의에 참석했던 이사회의 지도급 인사에게 모두 듣고 알고 있었는데, 그날 밤 어떤 분이 전화하여 이사들이 모두 반대하는 것을 본인이 강력히 주장하여 통과시켰다고 하였다. 나는 '감사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분의 순발력이 놀라웠고 총신의 정치적 풍토를 절감하게 되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나는 이사회로부터 전임강사로 임용된 후 6개월간의 전임대우를 거쳐서 전임강사가 되었다. 내가 전임이 된 후로 송산은 학교행정과 신대원의 실천신학 분야에 전념하게 되었고, 나는 대학과 대학원의 기독교교육 분야를 맡아서 교수와 행정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렇게 송산은 총신의 기독교교육 분야를 개척했고, 나는 2대 교수로 총신의 기독교교육 분야를 전담하면서 10여 년간 유일한 전임교수로서 시간강사들과 함께 기독교교육학과를 이끌어 나갔다.

사당골에 이러한 스승들의 짙은 향기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오늘은 힘센 자만 기억하는 세태이지만 그래도 그분들의 가르침은 우리의 가슴 속에 소망의 물줄기로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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