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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김순호 선교사의 삶

[ 2018-08-29 15:34:24]

 

< 김순호 선교사>

나는 전도하다 죽으려고 지금 북으로 가겠습니다

여전도회 파송 첫 여선교사, 산동성과 만주서 사역
평양신학교 여교수로 후진 양성, 북으로 가 순교제물

 
[전도사, 선교사, 순교자]

가슴시린 이름들이다. 이 땅에서의 영화와는 거리가 먼 이들이지만 하늘나라의 가득한 상급을 품에 안은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몰라줄지라도 오직 그분만 바라보고 산 사람들이다.
하나의 이름만 있어도 영광이거늘 세 가지 칭호를 모두 가진 이가 있다. 그가 바로 '순교자 김순호'선교사이다.
당시 전국여전도회연합회가 단독 파송한 중국 선교사, 해방 후 평양신학교 여자부 교수 겸 사감, 한국전쟁으로 순교의 제물이 된 김순호이다.

 
[예비하신 길]
 
김순호는 1902515일 황해도 재령군 재령읍 재령동부교회 김두한 장로의 딸로 태어났다. 재령 지역은 원래 가톨릭 교세가 강한 지역이었으나 미국 북장로교 윌리엄 헌트(William Hunt, 한국 이름 한위렴) 선교사의 헌신적 사역으로 기독교가 왕성한 고장이 되었다.
그래서 윌리엄 헌트 선교사를 '재령 선교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그의 아들 브루스 헌터(Bruce Hunt, 한부선) 선교사 역시 한국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김순호는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았다. 재령의 명신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유학을 떠난다. 장로교회의 명문 여학교인 정신여학교에 입학하여 1921326일 제13회로 졸업하였다.
김순호는 정신여학교 재학중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여기에 적극 참여하였고 일본 경찰에 붙잡혀 심한 고문을 받았다. 이러한 환난 속에서 하나님만 의지하는 불굴의 신앙을 가졌으니 하나님의 연단의 방법이었다.
그는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요코하마 여자신학교에 유학하여 신학교육을 받는다. 졸업 후 함경북도 성진에 있는 보신여학교 교원으로 봉직하다가 고향 재령에 돌아와 재령동부교회 전도사로 4년간 시무하였다.

 
[선교사로서의 부름]
 
한국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로 발돋움하려고 노력하였다. 어린 교회이지만 복음을 해외에 선포하여야 한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감리교회에서는 인천내리교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이민을 보낼 때에 1902년 홍승하 전도사를 선교사로 파송한 바 있다.
장로교회에서는 1907년 독노회 조직 기념으로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하였고, 1912년 총회 조직 기념으로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고 1913년에 박태로, 김영훈, 사병순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계속하여 1917년 방효원 목사, 홍승한 목사, 1918년 박상순 목사, 1922년 이대영 목사, 1931년 김순호 전도사, 1937년 방지일 목사를 파송하여 1913년부터 1937년까지 5대에 걸쳐 8명의 목사와 1명의 여전도사를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19319월에 모인 전국여전도회연합회 제4회 총회에서 김순호 전도사를 중국 산동성 선교사로 선정하고 단독 파송하기로 결의하였다.
선교사로 선정된 과정에 이런 일화가 있다. 선교사로서의 영적 주장을 위해 황해도 재령의 장수산에서 산기도를 하였다. 기도를 하는데 큰 호랑이가 주위를 어설렁 그렸다고 한다. 겁에 질려 목사님께 호소하였더니 더욱 기도에 집중하라고 하였다. 날이 밝아 눈을 뜨니 호랑이는 물러가고 믿음의 담력을 얻었다고 한다.
중국에 가서 중국말을 배우는 데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언어의 어려움, 문화의 차이 등으로 고통을 겪을 때마다 기도로 이겨나갔다.
방지일 선교사는 '김순호 선교사는 여성 첫 선교사로서 비교적 과학적으로 어학을 습득하여 선교사 중에 북경 발음을 정확히 하였으며 기도도 많이 하셨다. 내가 중국에 갔을 때 중국인들은 金姑郞(김 처녀 라는 뜻)으로 애칭하였다. 부녀자 지도에 능하셨다.'고 기록하였다(방지일, 임마누엘, p.120).
김순호는 산동성 래양과 지미현에서 주로 사역하였는데 남자 선교사들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여성사역을 하여 많은 결실을 거두었다.
중국 선교 1기를 마치고 1936년에 안식년으로 귀국하여 총회에 선교보고를 하고 5개월은 휴식하고 6개월은 전국 교회를 순회하며 선교보고를 하고 산동 성경신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설파하고 기금을 모금하였다.
다시 중국에 가서 사역하다가 1938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방지일 목사가 사역하던 청도로 피난하여 그곳에서 주로 여성사역을 하였다. 단기 성경학교를 설립하여 성경을 가르쳤고 많은 집회를 인도하였다.
전국여전도회연합회는 1939년에 중일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김순호 선교사를 일시 귀국시켜 길림성 쌍양현에 다시 파송하여 선교사역을 하게 하였다.
1940년 안식년을 맞아 전국을 순회하면서 국내 전도를 하였다. 1942년에는 전국여전도회연합회에서 평양신학교 이사로 파송받고 일하였다.
1943년부터 해방되기까지 만주 용정을 중심으로 사역하였다. 일제 말기의 어려움 중에서 선교비 지급이 제대로 되지 못한 상황에서도 유창한 중국어 설교로 복음을 선포하며 '중국인의 신앙의 어머니'가 되었다.

 
[평양신학교 여교수로 사역]
 
김순호 선교사는 해방이 되자 만주 훈춘에서 함경북도 청진으로 왔다. 거기서 얼마있다가 19479월에 평양신학교 여자부 교수 겸 사감으로 부임한다.
평양신학교에서 여학생들을 지도할 교수를 물색하던 중 선교사 경력이 있는 김순호를 초빙하였다. 김순호는 예과 2학년을 담임하였고 성경과 교회사를 가르쳤다. 그때 배운 제자들 중에 이연옥, 주선애, 이동선, 조순덕, 이성훈 등 한국교회 여성지도자들이 있다.
김순호는 기숙사 사감으로 학생들의 생활지도를 하였다. 당시 여자기숙사생은 50명 정도였고 한 방에 보통 여섯 명씩 기거하였다.
김순호는 새벽기도회부터 인도하며 학생들을 철저히 가르쳤다. 그의 제자들이 여성지도자로서 사역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바른 지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사역에서 특이한 것은 신학교 바로 앞에 있는 서문밖교회에서 매일 아침 5시부터 7시까지 한 시간은 기도, 한 시간은 성경읽기의 특이한 집회를 하였는데 신학생은 물론 일반 성도들까지 참석하여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김순호의 제자인 이연옥은 한국교회 여성지도자로 우뚝 선 존재인데 그의 스승인 김순호를 '교회에서 봉사하도록 훈련하고 가르친 사랑의 실천자'라고 평가하여 그의 가르침을 사모하였다.

 
[순교의 면류관]
 
김순호가 좋아하는 성경은 베드로전서였다.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벧전 5:4)는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 앞에서의 상 주심을 사모하였다.
북한에 공산정권이 자리를 잡아가자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월남하기 시작했다.
1948년 초여름 여름방학을 하자마자 제자 이연옥과 조순덕이 비밀리 김순호를 찾았다. 같이 월남하자고 권하였다. 김순호는 '가다가 로스케(소련군인)를 만나면 뭐라고 하는가? 너희는 남한에 가서 많이 배워 훌륭한 지도자가 되어라.'고 권하였다.
공산당의 압제로 신학교가 문을 닫을 때 신의주제2교회에서 김순호를 전도사로 청빙하였다. 당시 북한교회의 목사나 교인들의 월남이 날마다 이어지고 있는 때에 김순호는 거꾸로 북쪽인 신의주로 가기를 결정했다.
주변에서 만류해도 '다 이 땅을 버리면 최후로 살아남을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나는 남겠습니다. 나는 전도하다 죽으려고 지금 북으로 가겠습니다.'고 했다. 다들 남으로 가는데 그는 북으로 갔다.
19496월 평양신학교 제44회 졸업식에 참석하고, 창동교회(채필근 목사 시무)에서 여전도회 주최 사경회를 인도하고 평양을 떠나 신의주로 갔다.
신의주제2교회 새벽강단을 지키다가 1951년 몰려든 공산당에 체포되어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그의 나이 49. 미혼의 몸으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다가 순교의 면류관을 썼다.
김순호전도사, 선교사, 신학교수로 사역하다가 마지막에는 순교자로 우리 곁을 떠났으나 그의 영맥은 지금도 살아 역사하고 있다.
<: 김남식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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