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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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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향해 계속 달린다 8

[ 2018-08-29 15:21:39]

 
 운정 정정숙 교수의 자전 에세이

사당동 스승들에 대한 그리움


열악한 교육환경 속에서 하나님만 추구
개혁신학의 골격을 형성케 해준 스승들


나는 19663월에 총회신학교 신과(오늘의 총신대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였다. 험한 골짜기를 힘들게 지나가면 희망의 땅이 있을까? 헌신의 꿈을 안고 모여든 신학도들에게 '헐떡고개' 너머에 있는 완성되지 못한 사당동 캠퍼스는 너무나 황량했고 미완의 공간이었다.
학교 주변은 모두가 논밭이었고 찻길이 없는 소나무가 무성한 산골짜기의 연속이었다. 버스는 숭실대학교 앞 로타리가 종점이었고, 그것도 여름의 장마철에는 이화약국 앞 로타리까지 밖에 가지 않아서 그곳에서 사당동까지 걸어야 했다. 그리고 우리들은 모두 20대의 혈기 왕성한 청년들로서 기본적인 식생활이 부실했기 때문에 너무 배가 고팠었다.
그런 형편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소명'을 앞세우고 역경을 헤치고 학문을 추구했다. 이 길에 귀한 안내자들이 있었으니 제때에 월급조차 받지 못하면서도 앞장서서 헌신하는 우리의 스승들이셨다.
세월이 흘러 그 스승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했으나 그 가르침, 그 훈기를 통해서 오늘의 내가 존재한다. 여기서는 그들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스케치해 보려고 한다(이들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정정숙지음, 삶의 길목에서 만난 사람들, 도서출판 베다니, 2016에 수록되어 있다).
내가 만난 사당골의 스승으로는 박형룡 박사, 박윤선 박사, 명신홍 박사, 이상근 박사, 차남진 박사, 최의원 박사, 간하배 박사, 김의환 박사, 김득룡 교수, 박아론 박사 등이 있다. 그 가운데서도 내게 신학적 골격을 만들어 주신 분들을 대표하여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박사, 명신홍 박사와 이상근 박사에 대하여 간단하게 살펴보려고 한다.

 
박형룡 박사: 총신의 지주

 
박형룡 박사는 수업 시간마다 '호명합네다'로 출석을 부르면서 수업을 시작했다. 강한 평안도 액센트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조그만 키의 교수님을 보고 ', 저 분이 박형룡 박사님이구나'라고 감탄하는 것으로 죽산(竹山, 박형룡 박사의 호)과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때 죽산은 70을 바라보는 원로 학자였고,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총회신학교 (오늘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신과에 갓 입학한 20대 초반의 여학생이었다.
그때까지 총회신학교에서는 M.Div. 과정에 여학생을 받지 않았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1년을 기다린 끝에 학칙이 개정되어 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3명의 여학생이 M.Div. 과정에 입학하였는데 한 분은 재학 도중 부산의 어느 목사님과 결혼하여 도중하차하고 안춘진 권사와 내가 3년을 계속하여 같이 공부하였다.
당시에는 명신홍 박사가 교장직을 맡고 있었으나 어느 모로 보아도 총신의 지주는 교의신학을 전공한 죽산이었다. 그로 말미암아 총신이 일구어졌고 또 이끌어져 왔다.
이렇게 시작된 신학공부에서 죽산과 연관된 이야기부터 하려고 한다. 1년 선배였던 김충남 전도사(현재 미국 산호세 순복음교회 목사)'고학생 자활회'를 만들었다. 김충남은 재학 중에 진달래 필 때 가버린 사람이라는 주기철 목사의 일대기를 저술하여 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가 얻어온 일거리는 죽산의 한문투성이의 교의신학원고를 책으로 출판하기 위하여 200자 원고지에 정리하는 일이었다. 그 원고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쓰는 편지지에 철필로 잉크를 찍어서 기록된 죽산의 강의안이었다. 이것은 죽산이 강의 준비를 하면서 해마다 보완을 하여 끈으로 맨 부분은 크기가 일정하지만 보완하여 첨가한 부분은 크기가 커져서 배가 불룩하게 나온 것이었다.
모두가 가난했지만 가난하다고 모두 원고를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고학생 자활회에 소속되어서 함께 죽산의 원고를 정리했던 사람들은 지금 53년의 세월이 흘러서 이름이 모두 기억이 나지 않지만 홍정이, 정정숙, 박종구 등이 이 일을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원고들은 한문투성이었기 때문에 젊은 우리는 이두문자를 해독하듯이 독해하였다. 어려운 한문은 한글로 표기하고 그 옆의 괄호 안에 한문을 넣고 문맥과 토씨를 고쳐서 원고지에 옮겨쓰는 작업이었다. 수고비는 원고지 한 장에 1환이었든가? (당시 기숙사의 점심값이 한끼에 20환이었다). 그러니 김충남이 죽산에게서 원고를 받아 와서 일하는 속도와 분량에 따라서 나누어 주면서 일을 시켰는데, 이렇게 정리된 책이 교의신학 서론교의신학 신론이었고 이 책들은 우리의 재학시절에 책으로 출판되어서 후배들은 이 책을 교재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 후 김충남과 홍정이는 죽산의 집에 입주하여 죽산의 일을 돕는 조수가 되었고, 우리는 계속하여 학교 공부에 매진하였다. 또한 당시에는 죽산의 책이 없었기 때문에 학우 중에 정길성 목사가 죽산의 교의신학강의안을 방학 중에 철판에 긁어서 프린트판 교재를 만들었고 매학기 초에 우리는 그 프린트 판을 사서 한 학기 동안 공부하였다.
죽산의 강의 방법은 그의 강의 노트를 그대로 읽는 방식이었다. 우리는 프린트판 교재에 밑줄을 치면서 죽산이 읽는 것을 따라갔고, 간혹 질문을 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웅변보다는 새로운 지식에 목말라서 침묵을 택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죽산으로부터 교의신학 서론, 신론, 인죄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등의 과목을 중심으로 3년에 걸쳐서 교의신학 전반의 교육을 받았다. 어떻게 보면 무미건조한 교육방법이었지만 총신의 신학적 근간을 확립한 면에서 그의 신학은 우리에게 개혁주의 신학의 골격을 세워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박윤선 박사: 정암의 열정적 기도와 강의

 
정암 박윤선 박사와의 첫 만남은 강의실에서 이루어졌다. 그때 정암은 60세 전후였을 것이다. 성경신학을 강의하는 그는 열정적으로 강의하였고 그러다 보니 때로는 말을 더듬을 정도였다. 그는 강의뿐만 아니라 설교나 기도 역시 이 세상에서 마지막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처럼 간절하게 절규를 하였다. 나에게 있어서 정암의 수업시간은 늘 부흥회 시간이었고 사경회 시간이었다. 정암은 때때로 학교 뒷산에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다가 새벽이슬 맞은 모습으로 아침 햇살을 받으며 내려오곤 했다. 우리는 그 모습에 큰 은혜를 받았고 존경하는 자세로 수업에 임했다.
꿈과 열정으로 가득한 신학생들은 열악한 교육 환경 속에서 정암의 설교와 강의에 힘을 얻는 연단의 시간을 가졌다. 우리는 그를 바라보며 힘을 얻었고 말씀의 소중함이 무엇인지를 배우며 헌신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의 많은 제자들이 그의 신앙 인격에 감복하여 그를 사랑하면서 그의 뒤를 따르고자 했다.
그는 우리에게 성경을 읽고 연구하라고 늘 강조했고, 어느 날은 하교 길에 상도동에서 버스를 같이 타게 되었는데 인사를 드렸더니, 나의 이력과 신상을 자세히 기억하고 불신가정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애로사항에 대해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교수가 학생의 이름만 기억해 줘도 감격할 일인데 그렇게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해주는 정암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정암은 또한 내가 결혼을 할 때 결혼 주례를 해주시기로 약속을 했는데, 결혼식 10여일 전부터 급환으로 갑자기 정동의 고려병원에 입원하게 되어 주례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후 10여 년간 사당동 캠퍼스에서 만날 때마다 '정 교수, 정말 미안해. 내가 주례를 해 주었어야 했는데정말 미안해'라고 하셔서 도리어 내가 미안하고 송구스러울 따름이었다. 정암은 그런 분이었다.
나는 지금도 총신에서 정암의 학생으로 공부한 것을 자랑과 영광으로 생각하고 감사한다. 총신을 졸업하고 몇 년이 지난 후에 내가 총신의 신참 교수로 임용이 되어 같은 학교에서 같은 교수의 반열에서 은사 교수의 모습을 닮아가며 함께 사역을 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고 참으로 감사하다. (나는 1970년대 초반에 <일간 스포츠>의 요청으로 <나의 스승 박윤선 목사>라는 제목의 글을 한 페이지 특집으로 게재한 바 있다).

 
명신홍 박사: 겸손과 섬김의 사람

 
우리가 재학 중일 당시의 총회신학교 교장 선생이었던 명신홍 박사님도 그의 수업 시간에 참석하여 처음 뵈었다. 훗날 우리들이 안 일이지만 그분은 건강에 심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학교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계셨다. 아담한 체구의 인자한 모습이 전형적인 목회자요 교수였다.
당시에 우리 총회신학교는 맥킨타이어 박사의 도움으로 용산의 교사를 마련하였고, 백남조 장로의 헌납으로 사당동 부지를 마련하였다. 모금을 위해 교장인 명신홍 박사가 앞장을 섰다. 당시 그의 건강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직장암 수술 결과로 옆구리에 배설물 주머니를 차고 다녀야 하는 처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몸을 이끌고 미국으로 건너가 개혁파교회(CRC)들을 순방하며 모금하였다. 그랜드 래피츠의 칼빈대학 기숙사에서 자취하며 순회 설교를 하여 3만달러를 모금하였다. 이 후원금을 기초로 하여 총회 산하 교회들이 뜻을 모아 지금은 사라진 본관 건물을 건축하게 되었다. 우리(총신신대원 62회 졸업생)는 그렇게 해서 골조가 완성된 미완성의 캠퍼스의 첫 입학생이었고 그 캠퍼스에서 3년간 공부를 하고 졸업을 했다(졸업식 장소는 승동교회였다).
그는 그날그날의 일을 일기에 기록하였다. 그 일기를 읽어보면 당시의 정황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그리고 미국 교회를 방문하여 설교한 내용이 조그만한 수첩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기막힌 일이 세월이 흐른 후에 나타났다. 그가 피땀 흘려 모금한 돈으로 건축한 본관은 그 자리에 종합관을 건축한다고 헐어버려서 우리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뿐 아니라 그의 설교 노트와 각종자료들이 사당동 캠퍼스 쓰레기 소각장 옆에 버려진 것을 (아마도 역사를 모르는 도서관 직원이 그 낡은 수첩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버린 모양이다.) 소각 직전에 어느 졸업생에 의해 수거되어 우리 집 자료실에 보관되어 있다. 이러한 역사의 기록은 어느 날엔가 전시될 때가 있을 것이다.
내가 신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할 때까지 명신홍 박사는 교장으로 시무하고 있었다. 당시에 내가 매학기 마다 계속하여 전교 수석을 하자 하루는 나를 교장실로 불렀다.
'정 선생, 공부하는데 힘들지? 이번에 내가 미국 침례교신학교의 전액 장학금을 얻어 왔는데 정 선생이 미국 가서 공부를 했으면 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이제 우리도 여자교수를 키워야 하는데 정 선생이 헌신 하시게'라고 하셨다. 너무나 감사하고 황공스러운 말씀이었다. 나는 감사하다고 인사드리고 기도하면서 가족들과 의논한 후에 말씀드리겠다고 하고 교장실을 나왔다.
이것은 꿈같은 이야기였다. 미국이라는 곳이 어디인가? 그것도 전액 장학금이라니! 사실상 나는 대학을 졸업한 후에 영등포 공장에 들어가서 통합측 전도부 산하의 산업전도위원회 소속으로 도시산업 선교를 하면서 성경과 전도방법론을 배우기 위하여 총신에 입학했기 때문에 입학 당시부터 모든 교수님들로부터 계속 공부하라는 격려를 받아오기는 했지만, 그때까지 한 번도 유학을 놓고 기도한 적이 없었다.
명 박사님의 유학 권유를 받고 나서부터 이 문제를 놓고 본격적인 기도를 하면서 동시에 가족들과 의논했다. 집안 어른들의 반대는 격렬하였다. 그것도 그럴 것이 60년대 초반에, 아무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 가정에서, 20대 초반의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가 혼자서 미국 유학이라니, 가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식구들이 모두 심하게 반대를 하였다.
결국 나는 미국 유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명 목사님을 찾아가서 부모님의 반대를 알려 드리고 귀한 기회를 주셨는데 받아들이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명 목사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내가 졸업할 때까지 그 후에도 두 차례나 더 전액 장학금을 얻어 주셨다. 그러나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반대를 물리치고 유학을 떠날 수는 없었다. 그 장학금들은 후에 임택권, 장영춘, 여운세 목사들에게 주어져서 그들이 유학을 떠났다고 들었으며 훗날 그들은 미국에서 한국인 교회들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명신홍 박사는 총신에서 기독교 윤리학과 설교학, 설교 연습 등의 과목들을 가르쳤다. 연약한 육체로 인해 그의 교수가 학생들에게 큰 감동을 주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그의 개혁주의 신학과 삶을 보면서 사랑과 존경을 아끼지 않았다.
하나님이 하신 또 다른 놀라운 일은 졸업식날 일어난 일이다. 내가 신학교를 졸업할 때 전교 수석으로 노진현 이사장상을 받게 되었는데, 그 소식을 전해들은 고향 교회의 설립자인 황우호 장로님이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졸업식에 참석하여 축하해 주셨다. 그날 알고 보니 황 장로는 명신홍 목사의 전도로 예수 믿고 대구 서문교회의 장로로 시무하면서 나의 모교회인 경북 문경군 호계면 막곡리에 소재하고 있는 막곡교회를 개척하였다. 졸업식을 마치고 명 목사님과 황 장로님을 만나서 옛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사연을 듣게 되었다. 알고 보니 명신홍-황우호-정정숙으로 믿음의 계보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은 일이 없었고 황 장로님도 그날 처음 만나서 얼굴을 뵈었다.
우리 세 사람은 기념 촬영을 하였다. 이름 하여 '신앙 3'였다. 이 사실을 좀 더 일찍 알았다면 가까이서 뵈올 수 있었을 것인데, 우리 세 사람 모두 졸업식 날 알게 되었으니 아쉽기 그지없었다. 명 목사님은 자신이 뿌린 씨앗이 열매를 거두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고 감사하셨다.
명신홍 박사님, 우리에게 사라진 이름이 되어간다. 그의 자녀들의 후원으로 정성구 교수의 손에 의해 전기가 간행된 것이 여간 다행스럽지 아니하다. 그는 갔으나 그의 땀 흘림은 우리에게 진한 여운으로 남아있다. 그는 우리에게 그리움이면서도 아쉬움이다.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명 목사님을 통하여 깨닫게 하신다.
지금은 무너져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버린 총신대학교 사당동 캠퍼스의 본관을 생각하면 아련한 물안개 같은 그리움이 몰려온다. 우리는 그곳에서 추위에 떨며 공부하였고, 졸업 후 아쉬움을 안고 떠나왔다. 옛날 본관을 그대로 살릴 지혜나 방법이 없었을까? 아쉽고 답답하다.

 
이상근 박사: 온유와 겸손의 선비

 
이상근 박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은 이른바 '스타성'이 아니라 조용히 사명을 감당한 '온유와 겸손의 선비'이시다. 남 앞에 나서기 보다는 뒤에서 조용히 하나님만 바라보고 모든 사역을 감당한 분이다.
한국 교회 지도자 가운데 '백수'를 하신 분들이 있다. 방지일 목사가 백세를 넘어서 소천하셨고, 이상근 박사는 방지일 목사와 동갑으로 두 달 정도 늦게 태어나서 101세까지 장수의 복을 누리시다가 소천하셨다.
이상근 박사는 기독론, 인죄론, 구원론, 교리설교 등의 과목을 강의하였다. 말이 빠르고 경상도 액센트가 강해서 학생들이 그의 강의 내용을 노트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하루는 베드로 같은 성격의 소유자인 김태규 전도사가 '교수님, 너무 빨라서 못 받아 적으니 천천히 불러 주세요'라고 소리쳤다. 우리는 잔뜩 기대하고 기다렸는데 이 교수님은 더욱 빨리 자료를 읽기 시작했다. 우리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전달하고 싶은 내용은 많고 인쇄된 책이 없으니 마음이 바쁘셨던 것 같다.
<교회론> 과목 시간에는 세미나식으로 강의를 진행하셨다. 미국의 웨스터민스터신학교 교수인 카이퍼(R. B. Kuyper)<Glory of Christ>를 학생들이 한 장씩 번역해 와서 발표하고 토론을 하는 방식이었고, 교수님이 보충 설명을 해주셨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교수방법이었다. 우리는 영한사전과 씨름하면서 대학원 공부가 이런 것이로구나 하고 새로운 교수방법에 감탄했다.
이상근 교수는 죤 머리의 <로마서 주석>을 학생들에게 소개하였고, 우리들은 죤 머리의 깊이 있는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해석과 성경적 교리 설명에 감탄하였다.
<교리설교> 과목 시간이었다. 모든 학생들이 차례로 각자 5분간 교리설교를 하라고 하셨다.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것은 당시 학우 중에서 일류대학 출신의 이 전도사가 <사랑>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했다. 그 후에 이 교수가 강평을 하면서 '이 전도사의 설교는 강연이지 설교가 아니다. 강연은 각종 자료를 모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 이 전도사의 설교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다, 십자가가 없으면 설교가 아니다'라고 하셨다.
설교를 한 이 전도사는 당황해 했고, 우리들도 그 평가에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 강평의 내용이 설교의 핵심이라는 사실이 날이 갈수록 더욱 뼈저리게 느껴지고 이것을 일깨워 준 스승의 가르침을 가슴깊이 되새긴다.
먼저 가신 스승들의 가르침으로 인해 부족하지만 오늘날 이만큼이라도 서 있음을 감사하고 그분들의 '좋은 면'만 이어나가고 싶다. 나는 이분들의 가르침을 기초로 해서 개혁주의 신학을 계속 연구하고 그 위에 내 전공인 성경적상담학과 기독교교육을 연구하는 데 평생을 매진하고 있다. 이 스승들이 안 계셨다면 내가 평생 동안 연구하고 가르쳐온 총신에서의 개혁주의 성경적 상담학과 개혁주의 기독교교육학도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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