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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향해 계속 달린다 7

[ 2018-07-23 16:05:56]

 
 운정 정정숙 교수의 자전 에세이

헐떡고개

'금녀'의 장벽 뚫고 신대원 첫 입학생이 되다
함께 공부한 학우들 한국교회의 원로로 남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당시의 명칭은 총회신학교.


총회신학교를 가는 길은 지금은 대로가 되어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지만 그때는 소나무가 우거진 오솔길이었고 학교 앞은 파밭과 마늘밭 등의 채마밭이었다. 시내버스도 숭실대학교 앞의 로타리가 종점이었고, 비가 많이 올 때는 장승백이까지만 버스가 운행되었다. 그러니 그곳에서 숭실대학교 로터리를 지나 솔밭이 우거진 오솔길로 이어진 고갯길은 험산준령이었다. 혼자 다니기가 무서워서 여럿이 모여서 찬송을 부르며 그 길을 넘어 다녔다. 우리는 이 길을 '헐떡고개'라고 불렀다. 배는 고프고 길은 험하니 숨을 몰아쉬며 헐떡거리며 넘어다닌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미 반세기가 지난 옛 이야기가 되었으나 처음 보는 사당동 교사는 창틀은 있으나 창문이 없고 시멘트 바닥도 손질이 되지 않고 신축공사가 마감이 안 된 건물 한 채가 전부인 그야말로 황량하기 그지없는 학교였다. 당시의 사당동 캠퍼스는 용산에서 막 옮겨와 내부 공사는 물론 외부 공사도 마감하지 못한 상태로 신입생을 받고 공부를 시키는 어쩌면 열정적이고 어쩌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학교였다.

 
당시에는 여학생의 신학교 입학은 곧 여전도사가 되는 코스로 생각되던 시절이었다. 그 신학교에는 신과와 본과가 있었고 필자는 신과(오늘날의 M.Div. 과정)의 여학생으로는 첫 입학생이 되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긴 사연이 있다.

 
나는 경북 문경 출신으로 고등학교부터 서울에서 공부하였다. 신설된 기독교대학인 서울여자대학교에 다니면서 신앙훈련을 받았다. 그때 새로 설립된 대학생선교회(C.C.C.)의 초기 멤버가 되어 열심을 내었다. 당시 C.C.C. 총무였던 차남진 목사가 C.C.C.를 떠나 서울 자하문 밖의 부암동에 삼애교회를 개척하였는데 필자도 그 교회의 초창기 교인이었다.

 
차남진 목사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총회신학교의 교수요 부흥사였다. 그의 지도 아래 신앙을 키워나갔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통합 측 총회가 추진하는 도시산업선교의 사역자가 되어 영등포 공장에서 공원들과 함께 일하며 전도하였다. 그러니 요새말로 하면 '평신도 전도자'였던 셈이다.

 
공원들과 함께 먹고 함께 생활하며 하루에 12시간을 일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러나 성경을 가르치고 삶을 지도해야 하는데 결손가정이나 병든 부모를 모시고 동생들을 돌보아야 하는 절대적 빈곤 속에서 하루 일을 쉬면 식구들이 하루를 굶어야 하는 그들에게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교회에 출석케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보다 효율적인 전도방법론과 성경을 공부하여 제대로 된 전도자의 길을 가고 싶었다. 그래서 총회신학교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당시의 생각으로는 신학교에 가면 성경을 많이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특히 우리 담임목사님이 신학교 교수이고 성경에 박식하기 때문에 나도 신학교에 가면 그렇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고, 목사님이 총회신학교 교수이니 선택의 범위도 총신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여학생은 오늘날의 M.Div.과정인 신과에 받지 않고 전수과(오늘날의 총회신학연구원)에만 받는다는 것이다. 학교의 학칙이 이렇게 규정되어 있으니 총회신학교의 입학은 원천적으로 막힌 상태였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담임목사이면서 총회신학교의 교수인 차남진 박사는 매월 모이는 교수회에서 여학생의 입학 허락을 제안했으나 늘 부결되는 이런 논의가 반복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0월 교수회에서 차남진, 박윤선, 명신홍 교수가 여학생 입학 허락을 합의하고 교수회에서 각각 제안, 동의, 제청을 하여 여학생 입학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물론 이런 내용은 입학 후에 듣게 되었고, 담임목사님은 신학을 공부하겠다는 나에게 6개월 동안 기도를 해보고 생각에 변화가 없으면 찾아오라고 했고, 6개월 후에 다시 찾아갔을 때 3개월 더 기도를 해보라고 권했으며, 3개월 후에 다시 찾아갔을 때 가정예배에서 하루 30분씩 밤10시에 기도를 해 줄 테니 그 시간에 맞추어 하루에 30분씩 기도하라고 하여 1년 동안 기도로 준비를 시키셨다.

 
추운 겨울에 입학시험을 치기 위하여 사당동 교사로 갔다. 난방도 되지 않은 교실에서 시린 손을 불며 입학시험을 치르고 나오니 옆자리에 앉아서 시험을 치던 한 입시생이 '여자는 목사도 못되는데 무엇 하려고 신학교에 왔냐?'라고 말을 건넸다. 이 말을 듣고 보니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리가 있는 말이기도 했다.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시험에만 몰두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학생이 바로 김태규 목사였다.

 
그의 이야기를 좀 더 하자. 그는 입학 후에 나에게 '정 선생, 나이가 동갑이지만 내가 먼저 났으니 오빠라고 부르고 오빠 대접을 하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오빠라고 부르지도 않았고 오빠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30년 동안 자칭 오빠 행세를 했다.

 
그런데 30여년 후에 주민등록을 대조할 기회가 생겼는데, 사실은 내가 2주인가를 먼저 태어난 것이 판명되었다. '30년간의 자칭 오빠'가 졸지에 동생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김목사는 꼭 누님이라고 부르고 나의 남편에게도 '자형'이라고 부른다. 김 목사는 이 이야기를 나의 은퇴문집 <그리움의 묵향>에 실어 모두를 웃게 만들었다.


다시 입학 때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비포장도로인 헐떡고개는 장화 없이는 다닐 수 없는 길이었다. 그래서 숭실대학교 앞의 로타리에서 문방구를 하던 박00 집사님이 경영하던 가게에 신발과 장화를 맡겨놓고 등교 시에는 장화로 바꾸어 신고, 하교 시에는 다시 신발로 갈아 신고 다니기도 했다.

신과에 입학한 여학생은 3명이었다. 간호사 출신의 안춘진, 약사인 김경자(?)와 나였다. 그 가운데서 김경자는 2학기인가 공부를 하다가 부산의 최진도 목사와 결혼하여 떠났고, 안 권사와 나만 끝까지 공부하여 졸업을 했다. 안 권사는 지금도 부군인 장로님과 함께 건강하게 교회를 잘 섬기고 매월 모이는 동창모임에도 잘 참석하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그런데 신과에 입학한 여학생들은 알게 모르게 남학생 중심의 학교 분위기 속에서 억압과 압력을 받았다. 수업 시간에 질문을 해도 여자가 무슨 질문을 하느냐고 하고,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해야 하니 신학교에서도 잠잠해야 하고 봉사만 하면 된다는 식이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나는 신학공부가 너무 재미있고 좋아서 열심히 공부하였고 그 결과로 3년 동안 전교 수석을 유지해 나갔다. 그러다보니 지금은 먼저 천국으로 간 장00 목사는 얼굴을 마주하고 '여자가 1등을 하니 남자 체면을 깎아서 기분 나쁘다'고 말하기도 하고 나중에는 외면을 하고 다니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일련의 크고 작은 일들을 겪으면서 실망도 하고, 이 길이 가야 할 길이 아니라면 길을 막아달라고 새벽기도 시간마다 기도하면서 학교생활을 계속했다.

 
내가 입학할 때는 신학교는 천사들이 모인 곳인 줄 알았는데 막상 학교생활을 하면서 보니 천사는 없고 사람들 그것도 연약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사실상 성경을 체계적으로 배우려고 학교에 입학을 했는데 내가 원하는 것처럼 성경을 배우려면 신학교 대신에 성경학교에 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저런 갈등과 고단함 속에서 신학교 생활은 계속되었다.

 
나는 불신가정에서 예수 믿고 신학공부를 하였기 때문에 집에서 재정적 지원을 받지 못하여 자급자족을 해야 할 형편이었다. 그래서 방과 후에 초등학생들을 모아서 과외수업을 하였다. 학교에서 자취방으로 돌아와 그룹과외로 저녁시간을 보내고, 수업을 마치고 그 학생들을 돌려보낸 후 저녁식사는 밤 12시에나 하게 되고, 수요일과 주말에는 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고등부 학생들을 가르치며 봉사를 하였으므로 늘 시간에 쫓겨서 학교생활을 했다.

 
내가 학교 공부에 열심을 기울였던 것은 공부가 재미있고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오는 성취감도 있었지만 1등 학생에게는 등록금 전액이 면제되는 장학금도 무시할 수 없는 동기부여가 되었다. 그렇게 총신에서의 3년이 지나갔다. 이렇게 고단한 총신에서의 신학공부가 나의 개혁신학의 주춧돌을 놓게 되었고 인생의 지침이 되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기초 위에 개혁주의 기독교교육과 성경적 상담을 계속 연구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당시의 학교생활 중에 기억나는 일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는 나와 이름이 같은 동명이인(同名異人)이 있었다. 한문으로는 한 글자가 달랐지만 한글로는 같은 이름이었다. 그래서 때로는 내게 온 편지가 그에게 배달되기도 하였고 졸업식 때도 내가 받을 축하 선물이 그에게 잘못 전해지기도 했다.

 
그 동명이인인 정정숙 전도사님을 몇 년 전에, 그것도 미국의 워싱톤 D.C.에서 다시 만났다. 20131, 미국 오바마 대통령 취임식 전날에 워싱톤에서 모인 총신 재미동창회 총회의 특강 강사로 초청을 받아 갔다가 그 자리에서 은퇴한 목사님의 사모님이 되어 참석한 정정숙 전도사님과 그 남편 목사님을 만날 수 있었다. 48년만의 만남이었다. 그는 서로 자주 만날 수 있도록 미국에 와서 가까운 곳에서 살자고 제안했고 헤어지기 싫다면서 자기가 차고 있던 시계를 풀어서 선물로 내게 주기도 했다. 우정이란 이런 것인가도 싶었고, 많이 외로운가 보다는 생각도 들었다.

 
또 어느 해인가는 김정웅, 김태규, 조환 목사(당시는 전도사)등 몇 사람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서 한 끼에 20(?)인가 얼마를 하는 양은그릇에 밥 한공기와 콩나물이 두어줄기 떠있는 된장국과 김치 한보시기로 구성된 점심을 사다가 학교 뒷동산에 있는 무덤가에서 생일축하를 받고 감사했던 기억도 새롭다. 그 당시에는 점심을 먹을 수 있었던 학생들은 소수에 불과했고, 대부분이 학교 본관 뒤뜰에 있는 수도꼭지에 매달려 물로 배를 채우고 도서관이나 뒷동산에서 기도하며 점심시간을 보냈던 시기였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강원도 영월에서 텃밭을 일궈 가꾼 옥수수를 택배로 보내주어 옥수수 한 알 한 알에 담겨있는 사랑과 우정에 감사하여 목 메이게 했던 이준상 목사와 사모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세월은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지만 우리의 옛정은 살아 움직이니 이것이 사람살이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금은 노경에 접어든 옛 친구들의 얼굴이 춥고 배고프고 힘들었지만 주님을 향한 사랑과 사역을 꿈꾸며 사당동 헐떡고개를 넘는 젊은 날의 모습과 오버랩 된다.

 
사람살이에서 정()이란 무엇인가? 서로가 부대끼면서 그곳에서 꿈을 나누고 사랑과 미움이 교차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고운 정 미운 정'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20135. 우리 62기 동창들은 창대교회 버스를 타고 순천 정원박람회를 다녀왔다. 부부 동행의 이 모임에서 20대의 청년들이 노인이 된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행진을 보며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것이 다행스럽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오영호 목사가 '살면 얼마나 더 살 것인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주 얼굴 보자'고 했다. 정말 그렇다. 70을 모두 넘겼으니 앞으로 전해지는 소식은 '아프다, 갔다'가 아닐까?

 
이 글은 총신 신대원에 입학하던 1966년과 이 글을 쓰는 2018년을 오고 간다. 이것은 단순한 우리의 감성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온 흔적이고 자취이다. 그래서 옛 친구들이 소중하고 정겹고 허물이 없는 것이 아닐까?

 
나는 사당동 골짜기에서 한 평생을 보냈다. 학생으로 3, 교수로 47년을 보냈으니 공부를 한다고 외국에서 보낸 몇 년간의 세월을 빼고서는 20대부터 70대가 된 오늘까지 인생의 전부를 이곳에 쏟아 부었다.

 
지금은 자동차를 운전하여 학교에 강의하러 가지만 어떤 날은 낙성대 전철역에서 걸어서 학교로 간다. 30분이 소요되는 이 길에는 오르막도 있고 내리막도 있다. 이 길을 걸을 때마다 옛날 50여 년 전의 진흙탕의 헐떡고개를 생각한다.

 
우리 시대의 찬란한 꿈을 하나의 꽃으로 피우기 위하여 그 옛날 우리가 등하교하던 그 길을 생각한다. 삶이란 무엇인가? 함께함 즉 동행이 아닐까? 비록 우리가 서툰 몸짓으로라도 상대에게 발맞추는 삶의 예지를 그리워하여 본다. 세월은 갔으나 우리의 꿈은 강물같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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