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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향해 계속 달린다 6

[ 2018-06-21 14:22:47]

 
 운정 정정숙 교수의 자전 에세이

영등포 여공들이 부르는 눈물의 노래

 
고황경 박사 추천으로 영등포 공단 전도 사역
그들과 함께 일하며 노래하며 소통과 삶을 나눠

지금도 그들의 애절한 노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옛날 미국의 흑인 노예들이 목화밭에서 일하며 부르던 노래들을 우리는 '흑인영가'라고 부른다. 그것처럼 이 땅의 소녀들이 생존을 위해서 이른바 '여공'이라는 이름으로 처절하게 살아가면서 그들의 슬픔을 노래로 풀어나갔다.

 
1950년의 6.25 한국전쟁은 37개월의 기간 동안 이 땅을 초토화하였다. 수많은 사상자와 전쟁미망인 그리고 전쟁고아들은 하루하루의 생존을 위하여 발버둥을 쳐야 했다.

 
1960년의 4.19 혁명 그리고 1961년의 5.16 쿠테타는 이 땅의 생존방식을 바꾸어 놓았다. 군사정부는 산업정책을 공업 분야로 방향을 돌려서 여러 곳에 공단을 세웠다. 생존의 위협을 받던 농어촌 소녀들이 이 공단으로 모여들었다. 10대 후반의 그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지금은 '가사 도우미'로 불리지만 그때는 '식모'로 불리는 일자리를 구하거나 좀 더 나은 경우에는 버스 차장(버스 안내양)이 되어서 돈을 벌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 생겨난 공단들은 소녀들의 희망의 등대였다. 그래서 고향을 떠난 이들이 연줄을 찾아 공단으로 모여들었고, 그들은 열악한 근로여건 속에서 거의 매일 12시간 이상을 일하였다. 그렇게 번 돈을 고향의 부모들에게 보내서 가계를 돕거나 동생들의 학비를 조달하는 '현대판 심청'이가 되었다.
1960년의 한국교회는 이런 사회적인 여건 속에서 이들에게 전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훗날 '도시산업선교'라고 하여 인권운동과 선교운동의 선봉이 되기도 했으나 처음에는 '공단 전도'의 차원에서 각 공장마다 전도하는 운동과 공장단위의 예배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런 사역을 대한예수교 장로회(통합) 총회 전도부에서 시작하였다. 이들은 영등포 지역을 중심으로 이 사역을 전개했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귀국한 오철호 목사가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슬로건을 걸고 새로운 현장에서의 전도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 전도운동에 내가 참여하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서울여자대학의 학장인 고황경 박사는 4년 동안의 커리큘럼 속에서 매학기 '기독교생활철학'이라는 과목을 개설하여 직접 강의 하거나 국내외의 저명인사들을 모셔와서 강의를 진행하였다. 요즘으로 말하면 '기독교세계관' 혹은 '실천적 칼빈주의'같은 과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학기마다 그 과목의 내용은 사도신경, 십계명, 산상보훈, 등등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관한 강의를 하였다.
이 과목은 1학년 1학기부터 4학년 2학기까지 8학기 동안 8학점의 강의였으며, 매주 한 시간씩 수업이 진행되었다. 7학기 동안은 이론 수업이고 졸업학기인 4학년 2학기에는 기독교기관 대표들이 와서 자기 기관을 소개하였다. 예를 들면 YMCA, YWCA, CCC, IVF, 기독교절제회, 전국여전도회연합회, 기독교신문사 등 등 많은 기관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통합 총회 전도부 소속의 산업전도위원회도 있었다.
나는 매주간의 수업에 참여하면서 각 기관의 사역에 대한 강의를 들으면서 매시간 마다 '귀한 하나님의 사역이고 저런 귀한 사역에 종사하는 분들이 계시는구나'라고 생각했다. 학년이 끝나갈 무렵에 나는 당시에 잘 나가던 무역회사에 이미 취업이 되어서 졸업 후 196532일부터 출근을 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귀한 사역은 나와는 거리가 먼 일이라고 생각하고 학기가 끝난후 졸업식을 할 때까지 머물 계획으로 고향인 문경에 내려가서 성탄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19651월 초순경에 '급히 상경하여 학장실로 오라'는 바롬 고황경 박사의 전보를 받았다. 나는 놀라서 영문도 모르는 채로 서울로 올라와서 고 박사를 만났다. 이 만남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고 박사는 내게 산업전도위원회에 가서 일하라고 하였다. 이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제안이었다. '제가 꼭 가야 하는가요? 이미 저는 취업이 되어있는 상태고 그것을 기뻐하시며 축하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라고 물으니 '그렇다. 그런데 너밖에 보낼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나는 기도한 후에 답변을 하겠다고 한 주간의 말미를 얻어서 학장 공관을 나섰다. 그 후 한 주간 동안 물도 마시지 않고 금식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물었다. 기도의 응답은 '넓은 길은 가는 사람이 많고 좁은 길은 길이 협착하여 가는 사람이 적다'는 말씀이었다. 이것이 오늘의 내가 있게 한 사역의 첫걸음이었고 하나님 제일주의의 우선순위에 따르는 순종이었으며 내 사역의 첫 선택이었다.
그렇게 나는 고 박사의 말을 따르기로 하고 그 다음 주 월요일부터 종로2가 기독교서회 빌딩 4층에 있는 산업전도위원회 사무실에 출근을 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사무실 간사나 직원의 일이 아니라 영등포에 있는 각종 공장의 근로자들에게 같이 일하면서 전도해야 하는 현장 전도자 사역에 관하여 훈련을 받는 일이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1970년대 이후 이른바 운동권 학생들이 공장에 위장 취업하여 노동운동을 조직하고 인권운동을 하던 그런 일이 아니었다. 1960년대에는 생존이 급급하던 시기여서 근로자의 인권문제가 제기되지도 않았고 근로자들은 힘들고 고된 일을 하면서도 불평할 여지도 없이 그날그날의 식구들의 입에 풀칠하기가 바빴다.
나는 우리 사역의 본부인 종로의 산업전도위원회 사무실에서 한 달동안 기독교교리, 전도방법론, 대인관계론, 노동법등의 기초적인 훈련을 받았으며, 양평동에 있는 영등포 산업전도위원회에 배치되었다.
당시 영등포에는 통합측의 조 목사님 (성함이 기억나지 않음)과 강경구 여전도사님이 이 사역을 하고 있었다. 나는 현장에 파송된 세 번째 일꾼이고 첫 번째 평신도 사역자가 되었다. 이 말은 나의 사역은 한국에서 처음 시도되는 평신도 공단전도 사역의 테스트 케이스였던 셈이다. 몇 년 후에는 여러 사람이 보충되어 영등포 산업전도위원회는 산업전도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나는 영등포의 강경구 여전도사님의 집에 하숙을 정하고 영등포 사무실에 첫 출근을 했다. 강전도사님과 같이 영등포 산업전도위원회 사무실에 들러서 조목사님을 만나서 인사를 나누고 현황설명을 들은 뒤, 그날부터 현장에 투입되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만22세의 아가씨가 사무실의 조목사님의 코치대로 중학교 졸업생이고 집이 가난하여 취업하러 왔다는 위장 이력서와 강전도사님의 코치대로 허름한 복장과 운동화를 신고 현장으로 갔다. 인력난 때문에 가던 길로 일을 할 수 있었다. 내가 제일 먼저 들어간 공장은 쉐타보세공장이었다. 무슨 인권의식이나 사회정의를 부르짖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근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는 열망으로 가득차서 기쁨으로 이일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전도의 벽이 너무 높았다. 그들은 생계를 위해서나 동생들의 학비를 위해서 시골에서 올라왔거나 본인이 가계를 돕지 않으면 안 되는 경인 지방의 빈곤한 가정, 혹은 결손가정의 10대와 20대 초반의 아가씨들이었다. 교육 수준은 경제적 빈곤이나 가정적 여건으로 인해서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갈 수 없는 형편의 청년전기의 아가씨들이었다. 하루가 지나자 조목사님과 강전도사님의 코치대로 복장과 이력서에 왜 위장이 필요한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당시의 근로조건은 한 마디로 열악했다. 오늘날의 근로 조건이나 복지 조건으로 본다면 공장을 당장 폐쇄해야 할 형편이었다. 공장 안에는 기침을 하거나 피곤에 찌던 환자 같은 아가씨들이 많은 이유를 하루 일과를 마친 후에 알 수 있었다. 아침 8시에 출근하여 저녁 8-9시까지 12시간씩 일을 해야 했고, 선적 기일을 맞추어야 할 경우에는 야근이 다반사이며 한 달에 한 두 번은 철야를 해야 할 형편이었다. 나는 각종 막일에서 시작하여 나중에는 쉐타가 잘 짜여졌는지를 점검하는 일을 했는데, 아침에 까만 쉐타를 입고 갔다가 저녁에 나올 때에는 먼지 때문에 회색 쉐타가 되어 있었고, 한 달 후의 내 모습은 첫 출근 할 때 보았던 그들의 모습처럼 심한 기침과 피곤에 짓눌린 몰골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3개월을 일을 했고, 다음에는 꽃을 만드는 공장으로 옮겨서 4개월, 그 다음은 방직공장으로 옮겨서 5개월간 일을 하면서 1년 동안 전도를 했다. 공장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쉐타공장과 꽃 공장은 공정의 순서에 따라서 몇 명이 조를 이루어서 큰 테이블 앞에서 하루에 12시간씩 같은 일을 계속하는 단순노동이어서 자연스럽게 노래를 부르면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당시에 유행하던 유행가여서 한 달 동안이면 그들이 부르는 유행가를 모두 익힐 수 있었다.
그들에게 전도를 하기 위해서는 소통이 필요하고 소통을 하려면 그들과 어울려야 하니까 그들이 부르는 노래에 익숙해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했다. 한 달이 지나자 그들의 노래를 앞장서서 리드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러자 범위를 넓혀서 동요와 민요 및 가곡을 부르고 그 다음은 주일학교에서 부르는 찬송가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으로 노래를 인도하게 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따로 가르칠 것이 없이 그 모든 영역의 노래들뿐만 아니라 찬송가까지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지금은 신앙생활을 하지 않지만 아동기 때에 주일학교를 다녔던 경험이 있는 청년들도 있었기 때문에 별 저항 없이 잘 따라왔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그들이 마음 문을 열고 대화가 이루어졌다.
훗날 선교학에서는 이런 상황을 '상황화' 또는 '현장화'라는 신학 개념을 정립하여 이론화 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이런 개념조차 없던 때였고 그냥 몸으로 부딪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따름이었다.
근로자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근로하여 얻은 수입을 주말마다 주급으로 받아서 고향집에 보내고 겨우 연명을 하는 그들에게 아무리 열심히 전도를 해도 이들은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들은 주일에 일하지 않고 하루를 쉬면 그 다음날은 굶어야 하는 절대 빈곤에 처해 있었고, 공장장 역시 그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나는 불평 없이 모범적으로 일을 열심히 하고 근로자들이 잘 따르게 되자 공장장과 임원들은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게 되고 대학졸업생이라는 신분이 드러나서 더 이상 그곳에 머물기가 어렵게 되었다. 쉐타 공장과 꽃을 만드는 공장에서는 동일한 일이 반복되었다. 이렇게 되면 그 공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그 다음에는 방직공장으로 일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는 근로 조건은 조금 나아졌지만 기본적인 여건들은 먼저의 두 공장과 별로 다른 것이 없었다.
1년간의 '영등포 공단의 생활'은 내게는 전혀 새로운 세계의 경험이었다. 성적 장학금과 근로 장학금으로 자급자족을 하며 어렵게 대학 4년을 공부했으니 안정되고 버젓한 직장에 가서 고생을 면했으면 좋았겠지만, 하나님은 내게 나보다 더 어려운 형편에 처해있는 젊은 청년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길로 인도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이었는데 그때는 정말로 육신적으로 힘들고 피곤한 나날이었다. 그곳에서 떠나고 싶은 마음이 일기도 했지만 하나님이 '좁은 길'로 인도하셨다는 생각과 어린 여공들이 내 손을 잡고 '언니, 도와 주세요.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아요?'라며 의논을 하고 의지하는 모습을 볼 때 그들을 떠나서 도망칠 수는 없었다.
이 사역을 하면서 나는 스스로의 부족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대학시절에는 친구들에게 '내가 만난 예수님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설명하고 너도 예수님을 믿어보라. 네 삶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지켜보라'고 전도를 하면 쉽게 전도가 되었지만,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살며, 그들의 어깨에 병든 부모와 동생들의 생계를 짊어지고 있는 그들에게 전도를 하여 함께 예배드리는 것은 너무 어려웠다. 그들에게 전도하고 상담하며 성경을 가르치는 좋은 방안을 배워야겠다는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내가 아는 것은 교회와 대학에서 배운 성경과 기독교 지식, CCC에서 배운 전도의 열망뿐이었다. 그래서 우선 급한 대로 영등포산업선교회 사무실에 보고하여 한주에 한 번씩 시간을 정하여 공장에서 예배드리는 일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불신 공장은 그것이 어려웠고, 여러 가지 제약이 많았다.
이들에게 제대로 가르치고 전도하기 위해서는 전도방법론과 성경과 상담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출석하고 있던 삼애교회 가까이로 이사를 하여 열심히 기도하고 주일과 수요일, 금요일의 모든 예배와 새벽기도에 출석하며 성경을 배우기 시작했다. 담임목사인 차남진 목사는 성경을 잘 가르치고 당시의 총회신학교(오늘날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의 교수였기에 신학교에 가면 성경과 전도방법론을 잘 배울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여 신학대학원에 가고 싶다고 진로 상담을 했다.

 
당시에 나는 신학교가 '성경을 가르치는 곳'인 줄 알았다. 차목사의 만류와 기도 해보라는 테스트로 1년간의 기도 후에 신학교에 입학을 하고 보니 신학교는 '성경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대하여' 배우는 것을 알고 크게 실망을 하기도 했다.
아무튼 영등포 공단의 전도사역은 신학적 용어로 표현하면 '디아코니아' '섬김'의 사역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인카네이션(성육신)처럼 그들과 동화되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그들과 비슷한 옷차림으로, 그들과 같이 먹고 마시며, 그들이 부르는 유행가를 부르며, 나중에는 동요와 가요와 가곡과 찬송가를 보급시켜서 같이 부르며, 매일 12시간씩 일을 하며, 선적기일을 맞추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하면 야근을 하면서, 휴일도 없이 그들과 함께 일을 했다.
이렇게 나는 '영등포'에서 1년 동안 가난한 삶의 실상을 체험했다. 당시의 나는 교역자도 아니고 신학공부를 한 사람도 아니지만 복음 전파의 열정을 안고 영등포 공장의 여공들의 친구가 되고 언니가 되었다. (최근에 이곳에서 일한 바 있는 인명진 목사가 <영문밖 사람들>이라는 영등포 산업전도 이야기를 책으로 출간한 바 있다.).

 
지금 그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모두 70이 넘은 노년이 되었을 것이고 생각하기도 싫고 진저리치는 고생이었다고 당시의 아픔을 되새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 모두 편안한 노년을 보내고 있으면 좋겠다. 그때 뿌려진 복음의 씨앗이 잘 자라고 있다면 더욱 좋겠다.
흑인영가 같은 여공들의 노래 소리가 지금도 아련히 들리는 듯하다. 이곳에 아무것도 모르는 22세의 아가씨가 복음을 들고 함께 하였다. 그 옛날의 아픔도 하나의 추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오늘의 나를 있도록 해준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사한다.

 


필자 정정숙 교수

정정숙 박사는 서울여자대학교에서 사회학 (문학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신학석사), 이화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교육학(교육학석사), 미국 리폼드신학대학원(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에서 기독교교육학(기독교교육학석사)을 전공하였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소재한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상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목회상담학박사)를 받았다. 또 미국 로욜라대학교(Loyola College of Maryland)에서 이상심리학을 전공하였고( (Ph.D.Cand.), 남아프리카공화국 스텔렌보쉬대학교(University of Stellenbosch)에서 기독교상담학을 전공하여 신학박사(Th. D.)학위를 받았다.
그후 정교수는 36년간 총신대학교 기독교교육과 상담학 교수로 _상담대학원장_교육대학원장_사회복지대학원장_도서관장_기독교교육연구소장 등으로 섬기다가 은퇴하였다. 정교수는 또한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의 실천신학 Adjunct Professor로 섬겼다. 정교수는 또한 한국성경적상담학회장, 한국인간발달학회 이사, 미국상담학회(ACA)와 미국 심리학회(APA), 그리고 미국기독교상담학회(AAPC)의 정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뿐만 아니라 정교수는 서울 역삼동에 한국상담선교연구원을 개원하여 목회자와 사모, 평신도를 위한 상담교육과 실천에 힘써왔으며 계간학술지 상담과 선교를 창간하여 84호까지(2014년 겨울호 현재) 발행해 왔다. 정교수는 또한 2012년 월간<창조문예>의 신인작품상 현상모집 수필부분에서 신인작품상을 수상해 수필가로 등단했다.
저서와 논문 및 수상으로는 운정 정정숙 전집(45)과 기타 10권의 저서와 34권의 역서 간행 및 111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 가운데서 기독교상담학은 기독교출판문화상 신학부문 최우수상을 받았고 일본어로 번역 출판되었고(일본 생명의 말씀사)중국어로 번역이 끝나 중국과 대만에서 출간 중이다. 인간발달과 상담,Ⅱ」는 총신학술 최우수상을 받았으며 은퇴 시에는 대한민국 근정포장 및 훈장(이명박대통령상)을 받은 바 있다. 정교수는 또한 월간 <창조문예>에서 수필부문에서 신인작품상을 받았으며, <운정팡세>로 제2회 총신문학상(수필부문)을 수상했다.

현재는 총신대학교에서 명예교수로 섬기면서 일본 고베신학교의 초빙교수로, 한국상담선교연구원 원장으로, 한국성경적상담학회 회장으로 사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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