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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향해 계속 달린다 5

[ 2018-05-21 14:27:42]

 
 운정 정정숙 교수의 자전 에세이
대학 시절의 신앙 훈련

서울여대와 CCC에서 신앙훈련
삶으로서의 신앙 통한 헌신의 길에

우리에게 '신앙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히브리서 111절을 들어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대답한다.
나에게 신앙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나는 불신가정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해온 우리 가정의 아브라함 세대이다. 따라서 가족의 신앙적 도움 없이 핍박 속에서 연단을 받으며 신앙생활을 해왔다. 내가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이다. 물론 중학교 때 읍내에 살고 있는 절친한 친구가 그리스도인이어서 기독교에 대한 좋은 인상은 가지고 있었지만 우리 집안이 불교집안이고 할아버지가 종손이어서 교회 출석은 생각할 수도 없는 분위기였다. 또한 우리 마을은 정씨들만 모여 사는 집성촌인데 우리 마을에서 교회에 출석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몇 사람 되지 않았으며, 그들은 가난한 과부나 산지기 등의 극빈층의 부녀자들이었고 그 자녀들 역시 학교에서 공부를 못하는 축에 드는 아이들이어서 교회에 대한 인상이 별로 좋지 못했다.
그러나 중학생이 된 후에는 절친한 친구의 선한 영향과 기도가 교회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했다. 그리고 서울에 와서 생활하던 고등학교 때는 그리스도인이었던 음악선생님이 진로문제와 인생의 존재에 관한 철학적인 명제를 놓고 고민하고 있던 내게 수업시간의 가르침을 통해서 좋은 방향제시를 해 주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집에서 가까운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예배실 앞면에 걸려있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는 말씀에 위로를 받고 쉼을 받게 되었다. 그 후 믿음대로 살기 위해서 서울여자대학을 선택 하고 4년간의 고된 대학생활 속에서 신앙생활이 자리 잡아 가게 되었고 신앙이 성장하게 되었다.
나에게는 대학생활을 통해서 신앙을 성장 시켜준 두개의 물줄기가 있다. 그 하나는 서울여자대학교이고 다른 하나는 대학생 선교회(C.C.C)이다.
서울여대에서의 신앙훈련
서울여대에서의 신앙생활은 주중의 학교를 통한 교육과 교회를 통한 교육으로 나눌 수 있다. 학교를 통한 교육은 바롬 선생을 통한 정규적인 기독교교육 혹은 신앙교육이고, 교회를 통한 교육은 비정규적이고 자발적인 기독교교육 혹은 신앙교육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를 통한 신앙교육은 바롬 선생이 정한 커리큘럼에 따라서 진행되었고, 교회를 통한 교육은 학교의 강당에서 시작된 태릉교회에서였다. 태릉교회는 주일에 학생들과 인근주민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고, 새벽기도회는 친구들과 어울려서 길 건너의 육군사관학교 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주말에도 기숙사에 남아있는 학생들은 태릉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찬양대와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했다. 새벽기도회에 참여하는 친구들은 열심 있는 친구들이었는데 그때 열심을 내어서 신앙생활을 했던 친구들은 지금 은퇴 선교사로, 사모로, 교수로 살아가고 있다. 나는 지금도 그 시절의 친구들과 소식을 주고받고 있다.
지난 호에 바롬 고황경 박사를 통한 서울여대의 교육을 상세히 기록했다. 그분에게서 배운 신앙의 감동은 나중에 신학을 전공하도록 만든 끝없는 지하수와 같다. 바롬 선생이 실시한 신앙교육은 두 가지로 집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매일 수업 시작 전에 한 시간씩 드린 채플이다. 우리는 매일 아침 8시부터 9시까지 예배를 드렸다. 교목이나 외부 강사가 예배를 인도하기도 하였지만 주로 바롬 선생이 설교하였다. 그의 설교는 매우 간결하였고 본문의 핵심을 정확하게 해석하고 우리의 삶에 적용토록 하였다.
지금도 기억나는 설교가 있다. '청년의 때를 소중하게 여겨라. 너희는 꽃 봉우리와 같다. 꽃 봉우리가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자기를 관리하는 지혜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시간 관리를 잘 해야 하고 좋은 습관을 들여야 한다'고 젊은 대학생들의 가슴에 시간 관리와 좋은 습관의 소중함을 가르쳤다.

둘째는 바롬 선생은 요즘 말하는 기독교 세계관을 󰡐기독교생활철학'이라는 과목을 통하여 4년간 매학기 1학점씩, 매주 1시간씩 가르치고 삶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구체적인 내용을 모두 기억할 수는 없지만 한 학기는 예수님의 산상보훈을 가르치고, 다음 학기에는 주기도문과 십계명을 가르치고, 그 다음 학기는 사도행전을 가르치고, 마지막 학기에는 한국에 있는 기독교기관 대표자들을 초청하여 기관 소개를 해 주면서 사역의 비전을 넓혀 주었다.
졸업 후 나는 바롬 선생의 추천으로 그 기관 중의 하나인 통합 측 교단의 전도부 산하에 소속된 도시산업선교회에서 첫 사역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전도방법론을 배우기 위하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다.

셋째는 기숙사 방별 기도회였다. 저녁마다 방별로 예배를 드렸는데 바롬은 매일 저녁마다 각 방을 순회하며 예배 인도를 하고, 학생들의 얼굴과 이름을 익히고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불편한 사항은 없는지를 살피며 학생지도를 하였다.
이것은 오늘날의 말로 표현하면 영성 훈련이었고 집단 상담이었다. 학장이 학생들의 방을 순회 하면서 매일 저녁 예배를 인도하고 학생들의 문제를 상담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바로 여기에서 사제 간의 사랑이 오가며, 일체감이 생기고 공동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는 동지적 관계가 형성되지 않겠는가?
나는 서울여대에서 이런 교육을 통하여 '삶으로서의 신앙'을 배웠다. '신앙이란 삶이다'라는 명제가 일상생활을 통하여 적용 되도록 배웠고, 그 후의 삶은 배운 대로 믿고 살려고 노력하며 일생을 살아왔다.
대학생 선교회를 통한 훈련
서울여대의 신앙훈련을 '삶으로서의 신앙'이라고 한다면 대학생선교회(이하 CCC)를 통해서 배운 것은 󰡐사역으로서의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나와 CCC와의 연관은 김준곤 목사와 차남진 목사를 통해서이다.
우리 서울여자대학교에서는 학생들을 기독교 여성 지도자로 양성한다는 목표 아래 학생들의 신앙향상을 위해서 매 학기 초에 정기적으로 한 주간씩 신앙수련회를 개최하였다. 이것은 학생들을 위한 심령수련회였는데 1학년 1학기 초에 김준곤 목사와 차남진 목사가 강사로 초청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파격적인 강사 초빙이었다. 1959년의 장로교 총회 분열의 여파가 아직도 가라앉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비록 학생단체 지도자이기는 하지만 합동 측에 소속된 2명의 강사를 청하는 것은 고황경 초대학장의 리더십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김준곤 목사와 차남진 목사의 메시지 스타일은 매우 대조적이었다. 김준곤은 철학적, 문학적 감미로운 어휘 구사로 학생들을 매료시켰고, 차남진의 폭포수 같은 강론, 메아리치는 찬송은 우리의 가슴에 신앙의 열정을 불어 넣었고 큰 감동을 주었다. 이들은 막 시작된 대학생선교회(CCC) 대표와 총무로 사역하면서 대학생 선교에 새바람을 불어 넣었다.
나는 이 집회에서 그들이 시작한 신생 캠퍼스 선교단체인 대학생선교회(CCC)에 대해서 소개를 받게 되었고, 여러 학생들과 함께 이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유성(遊星) 김준곤 목사와의 첫 만남이었다.
집회가 끝난 후 나와 몇몇 학생들은 충무로에 있던 CCC집회에 정기적으로 매주 참석하게 되었다. 우리는 교리나 신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배우고 은혜 받은 대로 전도하는 순수한 신앙의 묘미를 만끽하였다.
 
CCC 전도부 회원이 되다

대학에 입학하던 해에 5.16 쿠데타가 일어나고 이 땅에 새로운 질서가 강압적으로나마 형성되어 나갈 때 나는 CCC에 더욱 깊이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CCC는 영락교회 부근의 충무로에 있는 2층 빌딩을 사용하고 있었고, 경제적으로 어려웠으나 주일 3시 예배는 뜨거웠고 대학생들이 김준곤 목사의 강론을 사모하여 모여들었다.
당시의 서울의 교통 사정은 참으로 어려웠고 태릉에서 충무로의 CCC회관까지는 너무나 멀었고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 때 태릉에서 충무로로 오는 교통편은 요즈음으로 보면 서울에서 대전을 가는 것만큼 먼 길이었다. 30분에 한 번씩 오는 시외버스를 타고 태릉에서 청량리까지 가서, 또다시 30분마다 한 번씩 오는 시내버스로 바꿔 타고 미도파 백화점 앞에서 내려서 충무로 2가의 회관까지 걸어가야 했다. 그것보다 더욱 가난한 우리의 주머니는 겨울이 아니어도 찬바람이 심했다.
한국 CCC195810월에 유성 김준곤 박사가 미국의 빌 브라잇 박사를 만남으로 시작되었다. 미국의 CCC를 제외하고는 해외에서 처음으로 조직된 한국 CCC였다. 대표에 유성, 총무에 차남진 목사가 맡아서 조직을 이끌었다. 이것은 대학생선교단체의 시작이라는 차원이 아니라 민족복음화운동의 불쏘시게 역사를 하는 역사적 사역이었다. 이 땅에 복음의 역사를 이루려는 그 열정의 모판이기도 하였다.
나는 이 선교단체의 전도부에 소속되어서 새로 나온 신입회원들에게 참여해 준 것을 환영하고 계속해서 참여하여 주님을 위한 사역에 동참하여 달라는 전도 편지를 매주 마다 보내고 기도하는 등의 전도를 위한 봉사를 지속적으로 하였다. 그때 편지를 보냈던 그 학생들이 교회와 사회의 지도자가 되어있는 것을 볼 때 씨 뿌리는 자의 헌신의 결과를 볼 수 있다.
훈련과 봉사 사역

CCC를 통하여 많은 학생들을 배출하였으나 여기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유성은 함께 사역하던 차남진 목사와 갈라서게 되었다. 유성은 CCC 사역을 계속했고, 차남진 목사는 총회신학교 교수가 되면서 CCC 총무직을 사임하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부흥회를 인도하는 부흥사역을 감당하다가 자하문 밖에서 삼애교회를 개척하였다.
내가 대학 4학년이던 1964년에 차남진은 수도의대 학생교회에서 사역하고 있었다. 당시 충현교회에 나가던 유앵손 집사와 박석순 집사가 부목사 사임에 반발하여 수도의대 학생교회에 합류하였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자하문밖에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여 교회의 이름을 '삼애교회'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때가 19648월 첫 주일이었다. 우리 CCC 멤버들은 자세한 내막은 몰랐지만 교회를 개척했다고 하니 자연스럽게 차 목사가 개척한 교회에 합류하여 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많은 대학생들이 삼애교회에서 성가대로 봉사하면서 오전 예배를 드리고 예배당 옆에 있는 사택에서 라면을 끓여먹고 난 후 CCC회관의 3시 예배에 참석하였다. 물론 나는 자연스럽게 부엌봉사를 하게 되었다.
그 후 대학을 졸업하고 통합측 총회 전도부 산하의 산업전도위원회에 근무하면서 영등포의 도시산업선교회에 소속되어 공장에서 여공들에게 전도하면서 수요일과 주일에는 삼애교회에 출석을 하였다. 그러다가 차남진 목사의 주일저녁과 수요일 저녁, 금요일 저녁에 계속되는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의 말씀 강론이 좋아서 교회 가까이에 방 한 칸짜리 전세를 얻어서 이사를 했다. 이렇게 되니 주일과 수요일, 금요철야 예배는 물론이고 새벽기도회까지 빠지지 않고 집회 때마다 참석을 하여 예배드리고 꿀처럼 달고도 단 말씀을 사모하게 되었다. 그 후 총신 신대원에 입학하여 고등부 교육전도사로 3년을 봉사하였다. 나는 삼애교회에서 고등부 교육전도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청년부와 성가대로 봉사하면서도 CCC와 나사렛형제회 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유성은 대학생운동에 박차를 가하였고 국가 지도층을 위한 전도운동을 하였다. 그 일환으로 1965년에 국가조찬기도회를 창설하고, 1966년에는 국회조찬기도회를 통하여 국가와 지도자를 위한 기도를 하였다. 그는 CCC 졸업생들로 나사렛형제회를 조직하고, 전군신자화운동을 전개하며, 춘천성시화운동을 통해서 민족복음화운동의 횃불이 되었다. 이렇게 나는 이 두 기관에서 두 분 목사님의 활동상을 지켜보며 신앙훈련을 받았다.
차남진 목사는 몇 년 후 자녀 교육을 위하여 미국으로 이민을 가고 나사렛형제회의 활동은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계속되었다. 초창기의 나사렛형제회는 첫 월급 헌금하기 운동을 펼쳐서 정동회관 건립을 위한 마중물 역할을 했다.
내게 신앙적인 영향을 끼쳤던 바롬 고황경 박사는 2000112일 하늘나라로 옮겼고, 차남진 목사는 19797212110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유성 김준곤 목사는 2009929일 오전 1111분에 영원한 나라로 옮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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