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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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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향해 계속 달린다 4

[ 2018-04-30 14:15:36]

 
 운정 정정숙 교수의 자전 에세이
 
나의 대학 시절, 바른 배움의 축복

바른 배움은 내가 받은 최고의 귀한 복
바롬 선생의 생활교육 통해 세계관 형성

 
사람이 이 땅에 살아갈 때 누구를 만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며 그 만남에 따라 서로 영향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기 때문에 만남은 개인의 일생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특히 어떤 스승 밑에서 배우는가에 따라서 그의 가치관과 세계관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는다.
대학시절에 만난 교수들 중에 바롬 고황경 박사, 이효재 교수, 김경동 교수, 아그네스 데이비드 교수 등이 기억에 남는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영향을 받은 분이 바롬 선생이다. 바롬 선생을 빼놓고는 대학시절을 생각할 수 없다.
한 평생 동서양의 여러 스승들을 만나서 귀한 가르침을 받은 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큰 축복이었다. 그 스승들 중의 한 분으로 귀한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는 분이 바로 대학시절에 만난 바롬 고황경 박사이다. 고 박사는 나의 삶에 큰 영향을 주신 분이며, 구체적으로는 시간 관리와 올바른 판단력과 기본에 충실한 삶을 살도록 가르쳐 주신 분이다. 다른 말로 한다면, 그는 신학적인 용어는 사용하지 않으셨지만 개혁주의 실천신학의 적용을 제시해 주신 분이다. 그의 가르침을 따라 평생 동안 실천하며 살아온 것이 오늘의 나를 있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황량한 광야를 개척하듯이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을 때 4.19가 일어났다. 그때는 민주주의에 대한 학생들의 염원이 활화산처럼 타오르던 시기였다. 이승만 정부가 무너지고 민주당 정권이 들어섰으나 데모로 해가 뜨고 데모로 해가 지던 절망의 시대였다.
이때 여자대학을 신설한다고 학교 소개를 하기 위하여 서울시내의 여자고등학교를 다니며 순회강연을 하던 고황경 박사를 내가 다니던 서울여고 대강당에서 처음 만났다. 그분의 강연 요지는 '기독교 여성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당시 이화여대나 숙명여대와는 구별되는 여자대학을 신설하니 여러분들이 많이 지원해 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 강연에 매료되어 대학 진학의 방향을 새로 설립되는 '서울여자대학'으로 결정하였다. 한 시간의 강연에 매료되어 대학의 선정을 결정한 것은 어찌 보면 황당한 모험 같기도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인도하심이었다고 생각된다.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1961년의 봄은 매우 추웠다. 지금은 고급 주택가가 되었지만 당시의 서울여자대학(현재의 서울여자대학교) 주변은 먹골배 밭뿐이었고, 학교 앞에는 화랑대역이라는 기차역과 육군사관학교가 위치해 있었고, 학교 뒤로 산등성이 하나를 넘으면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이 위치해 있었으며,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에 태릉이 위치해 있었다.
나는 서울여자대학의 사회학과 1학년으로 입학을 했고, 우리 신입생은 정체성교육과 관계교육 및 실천교육을 통한 기독교 인성교육을 시킨다는 건학이념이 좋아서 몰려온 학생들 중 엄선된 4개 학과에 98명 입학생 중의 한 명으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우리는 신설된 기독교여자대학의 1기 입학생으로 학교의 교육방향에 따라 무()에서 유()를 만들어가는 새 역사를 쓰면서 황량한 광야를 개척하는 개척자의 길을 갔다.

바롬 선생과의 만남

 
서울여자대학은 장로교총회(통합) 여전도회의 후원으로 세워진 학교이지만 초대학장이요 설립자인 바롬 고황경 박사의 교육철학에 따라 운영되는 학교였다. 우리 학교는 당시에 '여자사관학교'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렸다. 1961년에 제1기 신입생 98명 전원이 기숙사에 입사하여 생활하였고, 아침 6시 기상, 7시 아침식사, 8시 예배, 9시부터 오전 수업, 12시 점심식사, 1시부터 오후 수업, 6시 저녁식사, 7-9시 야간 수업 혹은 Quiet Time, 9시 방별 기도회, 10시 취침이라는 군대처럼 정해진 스케줄 속에서 단체생활을 했다. 우리는 이웃에 위치하고 있는 육군사관학교의 기상나팔 소리를 들으며 기상하여 하루 일과를 시작했고, 10시의 취침나팔 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
바롬 선생은 기독교 정신에 의한 한국 여성 지도자 교육을 꿈꾸며 3년간의 전원 기숙사 생활과 1년간의 카테지(실습주택) 생활을 통해서 공동체 훈련을 시켰다. 24시간 생활 교육을 통해서 숙식을 같이 하며 함께 살다보니 전인(全人)교육과 인성교육이 이루어져 갔다.
3년간의 기숙사 생활을 기초로 하여 졸업반이 되면 실습주택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한 집에 8명이 한 식구로서 공동생활을 하면서 당번제로 식사준비, 청소, 가정관리 등을 훈련하고 밤마다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했다. 그 가운데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식사준비였는데, 두 명으로 구성된 식사당번이 오후 수업 후에 영양사가 짜주는 식단과 조리법 및 음식재료를 받아와서 그 조리법대로 준비를 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그날그날의 식사 한 끼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며, 그것을 준비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과 마음가짐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는 밥하는 법(그때는 전기밥솥이 없었음)과 반찬 만드는 법을 비롯하여 동서양의 요리를 식단과 조리법에 따라서 실습했고, 각종 김치 담는 법도 배울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 출신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해도 밥도 못한다는 당시의 유행어가 해당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신부수업이 잘 된 며느리 감이라는 찬사도 받을 수 있었다.
새로운 여자대학의 설립

 
고황경 박사는 여성교육 그것도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여성교육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1958년에 학교법인 정의학원을 설립하여 서울여자대학 설립 작업을 하였다. 통합 측 총회의 결의와 여전도회의 지원으로 태릉에 새로운 여자대학을 개교하였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 믿음과 열정으로 사역을 시작하였고 제1회 입학생이 그의 뜻을 따르는 '생도'들이었다.
그의 화려한 학력과 경력은 사람들을 주눅 들게 하였다. 그는 따뜻한 성품의 소유자라기보다는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원칙주의자였다. 그는 학생들이 배운 대로 실천하는 것을 기대했고 그것이 실천되지 않으면 해당 학생을 불러서 꼼짝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훈계하고 설득하여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스스로 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평소에 시간과 약속을 지키는 것, 공중도덕을 지키는 것, 사용 후에 수도와 전기를 끄는 것 등을 강조했을 뿐 아니라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면서 의자를 밀어서 제자리에 바로 놓지 않고 나가는 학생이 있으면 그리스도인 숙녀의 자세가 아니라고 깨우쳐 주었다. 이 모든 것이 잘못된 습관이기 때문에 좋은 습관을 들이는 것이 중요하며 그것이 평생을 간다고 강조했다.
바롬의 꿈은 기독교 여성교육이었고, 사치와 낭비를 금한 것은 물론이고 남녀평등 사상을 고취했다. 그는 또한 기독교여성 지도자가 평등하게 함께 일을 할 뿐만 아니라 존중받는 여성의 삶을 위해서 갖추어야 할 능력과 덕목에 대하여 강조했다. 그 일환으로 우리는 영어실습 교육과 농촌을 부요케 하기 위한 4H클럽운동, 나무와 가죽 등의 재료로 각종 공예품을 만드는 것, 걸스카우트 훈련 등을 저녁시간에 받았고, 지금 화랑초등학교와 한샘중학교가 위치하고 있는 그 자리에 농촌과학과의 실습농지가 있었는데 그 논에서 모심기 실습을 하고, 방학 동안에는 농촌 계몽운동 등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체육시간에는 한 학기에 한 종목씩의 운동을 가르치고, 여름방학에는 수영을, 겨울방학에는 스케이팅 등을 배워서 서울여대 졸업생들은 10종목의 운동에 능숙해야 했다. 그래서 연중행사로 체육시간에 배운 자전거타기를 통하여 서울시청 앞에서부터 홍릉 임업시험장까지 해마다 자전거 행진을 했으며, 여름방학에 배운 수영훈련이 끝나면 테스트를 통하여 통과된 자에게는 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하는 자격증을 적십자사로부터 받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는 괴한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호신술도 필요하다고 하여 유도까지 가르쳤으나 일부 학부형들의 반대에 부딪혀서 몇 달간 배우다가 중단하기도 하였다. 우리에게 체육을 4년 동안 가르치던 체육 담당 교수님은 육군사관학교의 교관이셨는데, 무척 친절하고 덕망 있는 분이셨다. 그 교수님은 학생들의 실력에 대한 기대수준이 높아서 성적도 pass(통과) and fail(탈락)으로 주시면서 passA이고 failF라고 하셨다. passA라고 하는 것은 A의 수준만큼 되어야 pass를 시킨다는 의미라고 하셨다. 모든 학생들이 그 교수님을 존경하며 열심히 배웠고, 체육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나도 10종목의 운동을 무난히 pass하여 평생 동안 운동을 즐길 뿐만 아니라, 적십자사로부터 받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하는 자격증도 받았다. 나는 평생을 살아오면서 사용할 기회는 없었지만 지금도 그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그의 열정은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달되어 기본에 충실하고, 자기의 맡은 일에 충실한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될 뿐만 아니라 근검절약을 미덕으로 알고 섬김과 나눔의 삶을 사는 원칙주의자들이 되었다. 나의 경우도 그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교육은 한마디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한 실천이었다. 공허한 사변적 논리 전개가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적용되는 일상의 교육이었다.

 
가르침의 배꽃 같은 향기

 
바롬은 학장으로서 학교 경영에 주력하면서 학생지도에 정성을 다하였다. 이미 50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그 때의 가르침이 배꽃 같은 향기로 남아 있다. 그 꽃향기는 느끼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나 나의 가슴 속에 남아 있는 향기를 다시 맡아 본다.

첫째, 채플의 향기이다. 우리는 매일 아침에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8시부터 9시까지 예배를 드렸다. 교목이나 외부 강사가 예배를 인도하기도 하였지만 주로 바롬 선생이 설교하였다. 그의 설교는 매우 간결하였고 본문의 핵심을 정확하게 해석하고 우리의 삶에 적용토록 하였다.
지금도 기억나는 설교가 있다. '청년의 때를 소중하게 여겨라. 너희는 꽃 봉우리와 같다. 꽃 봉우리가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자기를 관리하는 지혜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시간 관리를 잘 해야 하고 좋은 습관을 들여야 한다'고 젊은 대학생들의 가슴에 시간 관리와 좋은 습관의 소중함을 가르쳤다.

둘째, 기숙사 방별 기도회였다. 저녁마다 방별로 예배를 드렸는데 바롬은 매일 저녁마다 각 방을 순회하며 예배 인도를 하고, 학생들의 얼굴과 이름을 익히고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불편한 사항은 없는지를 살피며 학생지도를 하였다.
이것은 오늘날의 말로 표현하면 영성 훈련이었고 집단 상담이었다. 학장이 학생들의 방을 순회하면서 매일 저녁 예배를 인도하고 학생들의 문제를 상담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바로 여기에서 사제 간의 사랑이 오가며, 일체감이 생기고 공동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는 동지적 관계가 형성되지 않겠는가?

셋째, 시간 관리의 훈련과 삶의 지혜이다. 아침 6시에 기상하여 밤 10시에 취침하는 스케줄 속에서 함께 먹고 함께 공부하는 공동생활 속에서 모든 것을 소화하는 훈련은 아주 철저하였다.
바롬 선생은 또한 공동체 생활을 위해서 '자율제도'를 만들어서 학생들로 하여금 학교와 기숙사의 규칙을 자율적으로 잘 준수하며 모든 일을 책임감 있게 수행하도록 하였다. 그는 해마다 모든 학생에게 동일한 자율점수를 부여해 주고 규칙을 지키지 못할 때마다 감점을 주었다. 그는 학기말에 자율점수가 높은 사람들 중에서 미스자율을 선정하여 표창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인 숙녀 양성의 목표를 달성코자 하였다.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수면의 중요성에 대한 그의 가르침이었는데, 그는 밥은 굶어도 잠을 자지 않고는 살 수 없음을 역설하셨다. 이것이 건강을 지키는 첩경이고 시간 관리를 잘하면 정해진 8시간을 잠으로써 능률을 올릴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나는 여성의 고등교육을 반대하는 불신가정에서 이 학교로 입학한 학생이었기 때문에 부모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스스로 학비와 기숙사비, 책값, 용돈 일체를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등록금은 성적장학금으로 해결하고, 기숙사비는 근로 장학생으로 일해야 했었다. 주중에는 매일 3시간, 주말에는 6-8시간씩 학교에서 일을 해야 기숙사비를 충당할 수 있었다.
이런 형편 때문에 나의 가장 큰 고통은 시간이 부족한 점이었다. 장학금을 받아서 공부하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성적은 탁월해야 했고, 숙식을 위한 경비는 근로장학금을 받아야 함으로 매일 근로를 해야 했으니 늘 시간이 부족했다. 그러다보니 효율적인 시간 관리를 연구하게 되었고 촌음을 아껴서 사용하는 지혜와 훈련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나에게는 같은 시간이라도 어떻게 효율적으로 활용하느냐가 중요한 과제였다.
다시 말하면 '24시간을 48시간으로 사는 지혜'가 필요했다. 그래서 기도하며 지혜를 구했고 촌각을 아끼는 훈련을 계속해 갔다. 이것이 몸에 배어있어서 평생 동안 시간을 아껴서 사용해 왔고 세월이 흘러서 은퇴를 하고서도 그때의 훈련 그대로 살고 있으니 교육의 효과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사상과 열정의 계승
1961년에 입학했던 1회 졸업생들은 이제 70세가 넘은 할머니들이 되었다. 할머니들이 되었지만 마음만은 그때의 숙녀가 되어 지금도 만나면 '광자야, 미자야, 정숙아'라고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
우리는 바롬 선생에게서 기독교 생활철학이라는 과목과 그의 일상의 지도를 통해서 기독교세계관과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를 배웠다. 서울여자대학교 개교 50주년이었던 2011년에는 '바롬사상'에 대한 재조명과 제2 창학의 새로운 도약을 기획하였다.
나는 바롬 선생에게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원칙주의, 근검절약, 시간 관리 등을 배워서 이것이 평생의 지침이 되었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그의 가르침이 나의 삶 속에 육화(肉化)되어졌다.
바롬의 가르침은 내가 대학 졸업 후 줄곧 받아온 신학교수들의 가르침과 달랐다. 나는 동서양의 수많은 신학 교수들에게서 다양한 이론과 학문을 배웠다. 이것이 나의 학문적 틀을 만들어 내는 데 큰 힘이 되었고, 이 가르침을 바탕으로 나의 학문세계를 형성해 나갔다.
그러나 몇 분을 제외하고는 그들로부터 신앙과 학문은 배웠지만 인격적 감화와 삶의 지혜를 배우지는 못한 것 같다. 이것이 가르침의 부족 때문인지 아니면 개인적 친밀감의 부족 때문에 배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바롬은 지식의 전달보다는 24시간의 공동체 생활을 통한 삶의 교육을 강조했다. 그는 요즈음 말하는 '생명신학'을 이미 실천하였다. 나는 그의 전공인 사회학과 학생으로서 그의 사랑을 받으며 그의 해박한 학문적 지식에 감동하고 존경하며 지식을 접했다. 그것이 나의 학문적 기초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내가 받은 보다 큰 영향은 그의 삶의 교육이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우리들을 데리고 논에 들어가서 함께 모를 심었고 농촌 계몽운동에 동참했으며, 오늘은 101호실 예배인도, 내일은 102호실 예배인도 하는 식으로 저녁마다 기숙사의 방마다 순회를 하면서 예배인도를 했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먹고 함께 웃었다. 당시의 우리들은 모를 심으며 거머리가 다리에 붙어서 피를 빠는 것을 보고 놀라서 질겁을 하기도 하고, 규칙적이고 엄격한 기숙사 생활이 힘들다고 아우성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하나하나가 추억으로 남는다. 기억이 모여 추억이 되고, 추억이 쌓여 전설이 되었다.
교육이란 정말로 중요하다. 바롬에게 배운 나는 지금도 서울의 도심지 한복판 옥상에 몇 개의 화분과 2평 남짓한 채마밭을 일구어 사계절 풍성한 푸성귀를 즐기고 있다. 금년에도 음식 찌꺼기를 썩혀서 퇴비를 만들고 상추, 고추, 깻잎, 피망, 토마토, 호박, 케일, 쑥갓, 치커리, 열무, 얼갈이배추, 쪽파, 부추, 완두콩 등을 심었다. 두 사람이 먹기에는 수확량이 많아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100% 유기농의 '무공해 채소'를 나누며 살고 있다. 이것은 물론 어깨 너머로 농사짓는 것을 배워온 어린 시절 고향에서의 풍경과 4년간의 기숙사 생활을 통한 바롬 선생의 가르침에 영향 받은바 크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나의 삶을 지켜보며 성장한 필자의 자녀들에게도 삶이 그대로 전수되고 있다. 미국 뉴욕에 살면서 프린스턴대학교 교수로 봉직하고 있는 둘째 딸은 아파트 베란다의 화분에 상추와 깻잎을 심어 자급자족하고 있고 그 깻잎으로 깻잎 김치를 만들어 먹고 있다고 한다. 또한 보스턴에 살고 있는 초등학교 5학년인 손자 요한은 토마토를 키우면서 아침저녁으로 열심히 물을 주고 있다고 한다. 일주일에 한 번씩 통화를 하면서 자기가 키우는 토마토는 두 개가 달렸는데 할머니가 키우는 토마토는 몇 개나 달렸냐고 묻곤 한다.
이것이 바로 교육이다. 강단 위에서 칼빈과 바르트를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속에 어떻게 적용시키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것은 더욱 중요한 교육이 아니겠는가?
내 기억에 남은 바롬 선생은 가까이 다가가기에는 어렵고 무서운 분이었으며, 따뜻하고 다정다감한 분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원칙이 있고, 학교와 학생을 사랑하는 열정이 있었으며 하나님 나라와 우리나라를 위한 헌신이 있었다. 그는 하늘나라로 옮겨 가셨지만 그의 향기는 지금도 내 가슴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언제 시간을 내어서 태릉에 다녀와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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