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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향해 계속 달린다 3

[ 2018-03-28 15:29:40]

 
운정 정정숙 교수의 자전 에세이

강변을 달리다
 
양계를 통해서 삶의 지혜를 배우고
목표를 향해 계속 달려 꿈을 이룬다

옛사람들은 상선약수(上善若水)라고 하면서 지극히 선하고 다툼이 없는 존재인 물에 대해서 깊은 경의를 품었다. 허준은 <동의보감>에서 물의 품성을 33가지로 분류할 정도였다.
내 고향 막곡은 영강(永江)이라는 낙동강의 상류를 품에 안고 있다. 마을의 뒤는 산이고 앞은 강이 흐르는 아름다운 고장이다.
이 강의 물줄기가 흐르고 흘러서 새로운 물줄기와 만나기를 거듭하면 기어이 강이 되고 바다에 이를 것이다. 나의 삶도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왔다.
강의 추억

나는 어릴 때에 영강에 자주 나갔다. 친구들과 어울려 강에 가서 물장난도 하고 물고기를 잡기도 하고 다슬기를 줍기도 하였다. 이 강은 단순한 자연의 한 풍경이 아니라 마음속에 꿈을 자라게 하는 희망의 강이었다.
내 가슴 속에 깔려있는 외로움과 그리움을 흘려보내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세월이 흐른 후에 생각해 보니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기에 강가에 나가 있는 시간이 많았던 것 같다. 그 당시의 놀이라면 학교운동장에 가서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과 강에 나가서 노는 것, 그리고 소를 몰고 산에 가서 산등성이에 소를 풀어놓고 소가 풀을 뜯어먹는 동안에 소꼴을 한 소쿠리 해놓고 자연 속에서 책을 읽는 것이 고작이었다.
강은 물의 공급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도구가 된다. 여기에 절대자의 예정과 섭리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화시키기 위하여 고통의 물속에 던지기도 하시지만 익사시키지는 않으신다.
강둑에 핀 이름 모를 들꽃들을 바라보며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다가오는 계절에 대한 기대를 하게 한다. 꽃잎을 따서 책갈피에 끼워서 말리기도 하고 메뚜기도 잡고,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의 모양을 관찰하기도 했다. 하늘의 구름 속에는 멀리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 있었다. 사람마다 제각기 긴 사연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내 어린 시절은 가슴 밑바닥에서 솟아나는 외로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외로움이 그리움으로 변하기도 했고 원망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혼자서 강가에 앉아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지금도 어쩌다 강을 지나게 되면 고향의 영강이 생각난다. 그 강물은 흐르고 흘러서 바다로 갔겠지만 아직도 그리움의 여운은 그 강가에 남아있다.

양계하는 소녀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아버지가 6.25 한국전쟁으로 인해 1-2년 동안 고향에 와서 군청 산림계에 근무를 하셨다. 아버지는 그 당시의 유일한 교통수단인 자전거로 왕복 8km의 거리인 점촌 읍내에 있는 문경군청으로 출퇴근을 했다. 당시 군청에서는 농가의 소득을 올리기 위해서 로드아일랜드레드종(Rhode Island Red)과 레그혼종(Leghorn Chicken)이라는 이름의 갓 부화된 붉은 병아리와 하얀 병아리를 농가에 배부하여 키우게 했다.
그러나 농민들은 재래종인 토종닭에 대한 선호도가 높고, 새로운 품종의 닭에 대한 이해부족과 사육방법이 알려지지 않아서 사육을 위한 농가 지원자가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아버지는 담당 공무원으로서 추운 겨울날 아무도 원치 않는 병아리 몇 박스를 자전거 뒷좌석에 싣고 오셨다. 그러나 식구들이 모두 자기 일로 바빠서 집안에서 그 병아리를 키울 수 있는 사람은 초등학교 4학년인 나 한 사람뿐이었다.
아버지가 가지고 온 갓 깨어난 병아리 250수를 키우는 일은 녹녹한 일이 아니었다. 겨울 동안에는 따뜻한 방 한 칸에서 좁쌀과 물을 먹여 키우고, 가끔은 인삼을 달여서 그 물을 병약한 병아리들에게 먹이면서 회복과 면역력을 증진시켰다. 봄이 되자 마당에서 병아리를 키우고 두 손을 모운 것만큼의 크기로 자라나자 집안에 양계장을 만들어서 본격적으로 양계를 하게 되었다.
닭 모이를 주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사료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벼를 도정한 후에 나오는 미강(쌀겨)을 구해오고, 들판에서 크로바 잎과 아카시아 잎을 따오고, 영강에 나가서 다슬기를 잡아서 빻아 이 모든 것을 섞어서 사료를 만들어서 물과 모이를 주면서 길렀다. 날이 갈수록 닭은 커가고 먹는 양이 만만치가 않았다. 가을에는 겨울을 위한 사료 준비도 해야 했다. 그렇다보니 양계를 위한 나의 노력은 갈수록 힘겨워졌다.
졸지에 '양계하는 소녀'가 된 나는 바쁜 나날을 보냈다. 학교에 갔다 오면 닭모이를 준비하기 위해 들판으로 강으로 쏘다녀야 했다. 마주치는 어른들은 인사삼아 혹은 장난삼아 '정숙아, 닭 잘 커지? 잘 키우면 너 부자 되겠다'고 인사를 했다. 격려인지 놀리는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인사를 받으면서 나는 닭들을 먹여야 했다.
내가 키우던 로드아일랜드레드종은 미국의 로드아일랜드 주 원산의 계란과 육용의 겸용종으로서 깃털이 빨갛고 볏은 홑볏이거나 장미볏이다. 온순하고 튼튼하여 사육하기 쉬우며, 연평균 200여 개의 알을 낳는 품종이다.
또한 레그혼종은 이탈리아 원산의 산란용 닭 품종이다. 이탈리아 서해안의 항구도시 리보르노 원산이며, 레그혼은 리보르노를 과거에 영어로 부르던 명칭이다. 리보르노 원산으로 그 곳 항구를 통해 수출되어 영국과 미국에서 개량하여 전 세계로 보급하여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이 퍼진 닭 품종의 하나가 되었다. 성장 속도가 빨라서 어릴 때부터 알을 낳을 수 있으며, 암컷 한 마리가 연 평균 220개 이상의 많은 달걀을 생산한다.
훗날 생각해 보니 초등학교 4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의 내 생애 6년간의 양계는 나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 그 첫째가 책임감이었다. 군민들이 신품종에 대한 두려움으로 기피하는 로드아일랜드레드종과 레그혼종을 억지로 맡아 키우게 되었지만 맡은 이상 그들을 키워내야 하는 책임감이 필요했다. 어쩌면 나를 연단시키는 훈련 과정이었던 것 같다.
둘째는 생명에 대한 외경이다. 비록 병아리라고 할지라도 정한 시간에 모이와 물을 주어야 하니 이런 일상을 통해서 생명의 소중함을 배우게 되었다.
셋째는 심은 대로 거두는 원리를 배우게 되었다. 닭들은 정직했다. 내가 소홀하면 그들은 병약해지고 내가 정성으로 돌보면 그들은 건강하게 잘 자랐고 굵은 계란도 매일 수 십 개씩 거두게 해 주었다.
넷째로는 부지런함이 경제적 풍요를 가져 온다는 것이다. 우리 집의 닭들을 보면서 주변 농가에서 희망하는 사람이 늘게 되어 군내의 농가에 로드아일랜드레드종과 레그혼종이 보급되었고 그러면서 계란 값이 올라서 학비 충당이 될 뿐만 아니라 가계에도 보탬이 되었다.
나의 어린 날의 기억 가운데 '양계하는 소녀'의 경험은 많은 것을 교훈하였다. 상담학자로 평생을 살아온 내 인생에 첫 훈련이 양계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강변을 달리다

고향 막곡에서 호계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0리 떨어진 점촌읍에 있는 문경중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문경중학교는 남녀공학이었고 우리 학년을 마지막으로 남자 중학교가 되었다. 그러니 우리는 문경중학교의 마지막 여학생이었고 그 다음 해 부터는 문경여자중학교가 개교함으로 남학생들은 문경중학교로, 여학생들은 문경여자중학교로 입학을 하였다.
한 학년 위에는 극동방송국에서 오랫동안 사역한 황영일 장로가 있었다. 황 장로의 부친 황장로는 점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육원을 운영하는 사회사업가였다. 황장로가 극동방송국에 근무할 때 선후배 관계인 것을 알게 되었고, 이따금 연락이 되면 고향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늙어가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아스라한 물안개처럼 남아있는 것 같다.
막곡에서 점촌읍의 학교까지는 왕복 8km20리 길인데 어린 소녀에게는 먼 길이었다. 지금처럼 마을버스나 다른 교통수단이 없는 때였고 고작 있는 것이 자전거였는데 자전거는 부잣집 아들들이나 탈 수 있는 것이고 여자들에게는 하늘의 별따기였다. 우리 호계초등학교 졸업생 중 대부분의 남학생들은 중학교를 다녔으나 여학생은 달랑 두 사람 뿐이었고 그것도 동리가 달라서 하교 길에는 2km 정도를 동행할 수 있었지만 같은 동리의 상급생 두 사람과 같이 등교를 했다. 이렇게 아들은 공부를 시켜야 하지만 여자를 공부시키는 일은 드물었고, 하물며 여자가 자전거를 타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한 시간 정도를 걸어서 4km의 거리를 걸어서 다녔다.
농촌은 시계를 보고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가 뜨면 기상을 하고 해가 지면 잠을 자는 생활인지라 봄과 여름은 학교에 가면 제일 먼저 등교를 하게 되지만, 가을과 겨울은 아침밥을 부엌에 서서 먹고 뛰어서 가도 선생님은 수업 시작을 위해 앞문으로 들어오시고 나는 뒷문으로 헐레벌떡 들어서는 꼴이었다. 그러니 가을과 겨울은 집에서부터 학교까지 강둑을 달렸다. 한 동네의 상급생이라도 만나면 길동무가 되어서 나았지만 혼자 달릴 때는 참으로 멀었다. 특히 장마철 비가 올 때나 겨울철의 찬바람 부는 날이나 눈 오는 날은 정말로 힘든 등굣길이었다.
이 길을 3년간 달렸다. 지금 기억으로는 걷는 시간보다도 달리는 시간이 많았던 것 같다. 이것은 칸트의 철학적 산책이 아니라 중학생인 한 시골 소녀의 배움을 위한 달음질이었다. 이 달림이 내 일생을 이끌어 가는 하나의 지침이 된 것 같다. 그래서 이 회고록의 제목을 <꿈을 향해 계속 달린다>고 하였다.
아침 등교 시간은 지각을 하지 않기 위해 아무런 생각 없이 달려야 했다. 그래야 시간에 늦지 않게 교실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목표를 향해 앞만 보고 달려가는 연단은 이때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달림의 연단은 나로 하여금 교내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게 하였고 운동으로 처음 상을 받게 하였다. 학교 정문을 출발하여 남자는 8km, 여자는 4km를 달리는 대회였는데 나는 이 교내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을 하였다. 이것은 매일 아침 등교시에 달리던 훈련의 결과였다.
그러나 하교 시간은 여유가 있었다. 강변을 따라서 걸으며 친구나 선배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고, 혼자일 때는 들꽃도 꺾고 산딸기도 따고 메뚜기도 잡으면서 계절의 변화를 지켜보고 흘러가는 강물에게 마음속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60년이 지난 지금 되돌아보면 그 강변에서 소녀의 생각은 끝이 없었던 것 같다. 나의 장래는 어떻게 될까? 앞으로 중학교를 졸업하면 할머니를 도우며 고모들처럼 이곳에서 농사를 지어야 할까? 고등학교를 갈 수가 있을까? 고등학교를 간다면 이곳에서 다녀야 할까? 아버지가 계신 서울에서 다녀야 할까? 나는 공부를 하지 않고도 살 수가 있을까? 앞으로 나는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될까? 등등의 생각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 영강을 걸으며 나는 '말없는 소녀의 사유세계'를 체험하였던 것 같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꿈속에도 살아있던 영강변을 모처럼 딸들과 함께 택시를 타고 고향집에 간 적이 있다. 차 속에서 '엄마는 이 길을 3년 동안 매일 아침, 저녁으로 걷거나 뛰어다녔다'고 하자 초등학생이었던 딸들은 '버스 타고 다니지 왜 뛰어다녔냐'고 하였다. 어린 세대가 그 당시의 형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여러 해 전부터 고향 중학교의 재경동창회가 모인다는 연락을 받았으나 학교일이나 교회일로 참석할 수가 없었다. 하교 시간마다 2km 정도를 같이 걷던 친구와 연락이 닿아서 그 친구의 계속된 전화로 동창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내 머리 속에 남아 있는 친구들은 10대 초반의 어린 모습이었다. 그런데 동창회 장소를 찾아가니 '할매 할배'로 가득했다. 어렸을 때의 그 모습은 다 어디로 가고 삶의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가까이서 인사를 나누면 '정숙아, 나 알아보겠냐?'라고 한다. 대부분이 중학교 졸업하고 처음 만나는 친구들이어서 옛 모습이 남아있는 몇 사람을 빼고는 얼굴을 다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모르겠다'고 할 수도 없어서 어물거리다가 이름을 듣고 자세히 얼굴을 들여다 보니 어렴풋이 옛 모습의 흔적이 조금씩 남아있었다. 그때 느낀 것은 '저들에게 내 모습도 꼭 같을 것인데 내가 내 얼굴을 볼 수 없어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이었다.
친구들은 덕담을 인사로 서로 주고받으며 '너는 조금도 안 변했다. 옛날 그대로다'라며 외교사령을 나눈다. 13-14세의 소년소녀들이 70대 노인이 되었는데 어찌 그대로일까? 아마도 마음은 그대로라는 뜻이리라. 옛 친구들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뿔뿔이 헤어져서 60여 년을 사는 동안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도 있었고, 살아온 날들과 근황을 소개하며 자주 얼굴보고 살자고 하였다.

계속 달린다

마라톤 선수들은 42km의 먼 거리를 완주하기 위해 쉼 없이 달리기 연습을 한다. 그들의 꿈은 손기정, 황영조 선수가 되는 것이다. 이 꿈을 이루기 위해서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며 계속하여 달린다.
우리의 삶도 그러하다. 특히 나는 쉬엄쉬엄 걸어온 것이 아니라 목표를 향해 평생 동안 꾸준하게 달렸다. 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를 할 때는 물론이고, 학업을 마친 이후에도 어떤 직무를 맡으면 그것이 끝날 때까지 집중적으로 매달렸다. 그러다 보니 내 몸이 피곤해지고 주변 사람들에게 여유를 주지 못하는 약점도 있다. 그러나 내가 살아온 삶의 훈련이 이런 삶의 자세를 만들어 낸 듯하다.
딸들이나 제자들이 '이제 일 그만하고 여행이나 하면서 좀 놀라'고 한다. 그 말이 옳다고 생각되어 놀려고 계획을 해 보니 놀아본 적이 없어서 놀 줄을 모른다. 2-3일 놀고 나면 시간을 허비한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다. 단조로운 삶 속에서 삶의 여유를 찾고 감사의 이유를 정리해 보는 것이 고작이다.
이 모든 시작이 내 고향 막곡의 영강변을 달리는 소녀의 삶에서 발원한다. 노인이 되어서도 무언가를 또 배우고 싶어서 체육관이나 문화센터를 기웃거린다. 어릴 때의 삶의 자세가 평생의 방향을 정하는 것 같다.
막곡을 떠난지 오래 되었다. 가 본다고 하면서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 가면 뛰어다녔던 그 강뚝을 뛰지는 못하지만 천천히 걸어보고 싶다. 오늘의 느낌이 그때와 같지 않겠으나 오늘의 렌즈를 통해 추억의 세계를 그려보고 싶다.
우리에게 달림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잘 달릴 수가 있을까?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달림에는 먼저,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 중학교 때는 등교 때 지각하지 않기 위해서 아침마다 4km를 달렸다. 이것이 나의 목표였다. 어른이 되어서는 나의 학문세계를 이루려는 목표를 가지고 계속하여 달렸다.
다음으로는, 꾸준함이 있어야 한다. 달리다가 멈추면 지각할 수밖에 없으니 꾸준히 달려야 한다. 제자들이 가끔 '교수님, 언제 그 책을 다 썼습니까?'라고 묻는다. 다른 사람들이 놀 때, 잠 잘 때, 드라마 시청하면서 즐길 때 계속하여 달린 결과물이다.
마지막으로, 체력이 받쳐줘야 한다. 젊을 때는 젊음 자체가 힘이 되었으나 나이가 들수록 체력 관리가 필요하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하게 살아왔지만 지금은 체력의 한계를 느껴서 운동과 섭생에 노력을 하고 있다.
소천한 고신 측의 박정덕 목사(부산 제일 영도교회 시무)의 말이 기억난다. '이단도 회개하면 목회하고, 계명을 범한 자도 회개하면 목회한다. 그러나 아프면 못 한다.' 병석에서 한 그분의 말을 오늘도 되새겨 본다.


 


필자 정정숙 교수

정정숙 박사는 서울여자대학교에서 사회학 (문학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신학석사), 이화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교육학(교육학석사), 미국 리폼드신학대학원(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에서 기독교교육학(기독교교육학석사)을 전공하였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소재한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상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목회상담학박사)를 받았다. 또 미국 로욜라대학교(Loyola College of Maryland)에서 이상심리학을 전공하였고( (Ph.D.Cand.), 남아프리카공화국 스텔렌보쉬대학교(University of Stellenbosch)에서 기독교상담학을 전공하여 신학박사(Th. D.)학위를 받았다.
그후 정교수는 36년간 총신대학교 기독교교육과 상담학 교수로 _상담대학원장_교육대학원장_사회복지대학원장_도서관장_기독교교육연구소장 등으로 섬기다가 은퇴하였다. 정교수는 또한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의 실천신학 Adjunct Professor로 섬겼다. 정교수는 또한 한국성경적상담학회장, 한국인간발달학회 이사, 미국상담학회(ACA)와 미국 심리학회(APA), 그리고 미국기독교상담학회(AAPC)의 정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뿐만 아니라 정교수는 서울 역삼동에 한국상담선교연구원을 개원하여 목회자와 사모, 평신도를 위한 상담교육과 실천에 힘써왔으며 계간학술지 상담과 선교를 창간하여 84호까지(2014년 겨울호 현재) 발행해 왔다. 정교수는 또한 2012년 월간<창조문예>의 신인작품상 현상모집 수필부분에서 신인작품상을 수상해 수필가로 등단했다.
저서와 논문 및 수상으로는 운정 정정숙 전집(45)과 기타 10권의 저서와 34권의 역서 간행 및 111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 가운데서 기독교상담학은 기독교출판문화상 신학부문 최우수상을 받았고 일본어로 번역 출판되었고(일본 생명의 말씀사)중국어로 번역이 끝나 중국과 대만에서 출간 중이다. 인간발달과 상담,Ⅱ」는 총신학술 최우수상을 받았으며 은퇴 시에는 대한민국 근정포장 및 훈장(이명박대통령상)을 받은 바 있다. 정교수는 또한 월간 <창조문예>에서 수필부문에서 신인작품상을 받았으며, <운정팡세>로 제2회 총신문학상(수필부문)을 수상했다.

현재는 총신대학교에서 명예교수로 섬기면서 일본 고베신학교의 초빙교수로, 한국상담선교연구원 원장으로, 한국성경적상담학회 회장으로 사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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