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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향해 계속 달린다 2

[ 2018-02-28 10:01:15]

 
 운정 정정숙 교수의 자전 에세이
가족이라는 둥지
 
가족은 우리의 모판이며 귀향의 처소
아픔과 기쁨이 직조되어 꿈을 이룬다

우리에게 가족이란 무엇일까? 가족은 울타리이며 삶의 둥지이다. 어느 시인은 가족에 대해서 쓴 시에서 '건망증에 걸린 사람들'이라고 재미있게 표현한 것을 본 일이 있다. 다시는 보지 않을 것처럼 싸우다가도 돌아서면 언제 싸웠느냐는 듯 히히거리는 건망증에 걸린 대책 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가족은 소중하다. 우리를 키워낸 모판이요 연어의 귀향처럼 회귀의 처소이다. 가족은 우리에게 아련한 그리움을 남긴다. 비록 아픔의 흔적이 있을지라도 서로 포용하며 감싸주는 그리움의 사람들이다.
나에게 가족도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유명인사도 아니고 큰 부자도 아니지만 소박한 시민들로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들이었다. 세월이 흘렀으나 그리움도 증폭되고 옛 고향에서의 어린 시절이 오늘 내 모습에 오버랩 된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

손주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이름을 기억하기보다는 그냥 '할아버지, 할머니'로 존재한다. 나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주신 분은 부모가 아니라 조부모이다. 그들은 당신의 첫 손주인 나를 하나의 분신처럼 여기고 병아리를 품듯이 지키고 키우셨다.
나의 호적등본을 살펴보니 내 삶의 원류가 흐르고 있었다. 가족의 역사는 나의 역사이고 내 삶의 모판이다.
할아버지는 청주(淸州) ()씨이고 함자가 두영(斗永)이셨다. 1902년에 출생하셨으니 아득한 옛날의 희미한 흑백 사진 같은 기록이다.
할아버지는 문경군 호계면 막곡리에서 정 씨 문중 집성촌의 어른이셨다.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에 우리는 긴장하였고 그의 웃음소리에 우리의 마음은 따뜻했었다. 그 시대 할아버지들은 따뜻한 정을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하기보다는 근엄함이 하나의 이미지였다.
할아버지는 머슴을 두고 농사를 지을 뿐만 아니라 소금 전매소를 운영하였기 때문에 가게뿐만 아니라 집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우리 집 사랑방에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고 할머니로 하여금 그 사람들의 끼니를 해결하는 식사수발을 들게 하셨다. 춘하추동 사계절에 집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음식 접대를 하지 않고 그냥 돌려보내는 사람이 없으셨다. 그러면서도 그는 본인과 식구들에게는 근검절약하면서 논과 밭을 조금씩 사들였다. 어린 나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하였으나 훗날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유산 분배 문제가 나왔을 때 논과 밭, 산의 목록을 보고 놀랐다. 이 많은 땅들을 사 모우시면서 그토록 많은 손님접대를 하느라고 당신들은 얼마나 근검절약하였을 것이며 후손들의 터전 마련을 목적으로 힘쓰고 애쓰셨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오늘에 와서 유산을 생각해보면 어느 집이나 선대의 유산이 가치 있게 사용되고 있는지에 의문이 생긴다. 후손들은 자기의 노력이 아닌 '공돈'으로 인해 유산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옛말에 '십년 가는 권세가 없고, 삼대가 가는 부자가 없다'고 한다. 어쩌면 이 말이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할아버지'라고 하면 큰 기침 소리가 기억난다.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는 외출에서 돌아오셨다는 신호이기도 하고, 아침 기상을 알리는 소리이기도 하며, 사랑방에서 안방 문 앞에 와 계신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기침소리는 엄격함의 위엄이었고, 집안 어른으로서의 권위였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거역할 수 없는 무서운 존재이면서도 잠잘 때 안방에 건너 오셔서 이불을 덮어주시는 자상함을 알기에 비빌 언덕이기도 했다. 나의 유년기는 할아버지의 근엄함과 자상함의 그늘에서 피어난 꽃이었다.
나는 늙어 가면서 이따금 할아버지를 생각한다. 내 삶의 롤 모델이 된 할아버지가 그립다. 옳은 일과 원칙이 아닌 길은 가지 않고 정도를 지키는 삶을 사는 것, 웃음소리가 울타리 밖을 넘어가지 않는 조용함과 조신함,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말을 천천히 또박또박 하는 것, 근검절약과 사치하지 않는 규모 있는 생활, 가난한 사람들과 약자를 돌보는 삶 등은 할아버지의 삶의 철학이 나의 DNA처럼 되어서 나도 모르는 사이 삶의 스타일을 형성하였다.
할머니는 같은 호계면 가도리 출신으로 열여덟에 할아버지에게 시집을 오셨다고 한다. 그때 할아버지는 열여섯으로 할머니 보다 두 살 아래였다. 할머니는 십리가 떨어진 이웃 마을로 시집을 와서 아들 둘, 딸 셋을 낳고 그 많은 가사노동과 살림살이를 관장하였다.
할머니의 함자는 김계매(金季梅). 그러니 '매화의 계절'이라는 의미이다. 할머니의 이름을 써 보기는 처음이다. 나에게는 그냥 '할머니'였고, 나를 키워준 '사랑의 보호자'였다.
아버지가 직장을 따라 서울로 가시고 나는 고향집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함께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다. 그러니 나의 유년기의 기억은 할아버지, 할머니로 집중된다. 그분들은 당신들의 첫 손주를 끔찍이도 사랑하고 보호의 울타리가 되어 주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숙모, 미혼인 고모 둘, , 머슴 둘 등의 9식구와 살림살이를 돌보기 위해, 또 끊임없는 수많은 손님들의 수발을 위해서 일 속에 파묻혀 살았다. 그래서 늙어서는 허리가 꼬부라졌다. 어릴 때는 할머니의 굽은 허리를 노화현상 정도로 이해하였으나 지금 생각하니 농촌 주부들의 격심한 가사노동의 결과였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맏아들로 함자는 정대화(鄭大和), 어머니는 채창수(蔡昌秀)이다. 아버지는 산북면 종곡리 출신의 한 살위인 규수와 결혼하였다. 아버지는 직장관계로 서울에서 살았고 어머니는 고향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살았다. 몇 년후 어머니도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갔다.

삼촌과 숙모 이야기

내가 유년기를 보내던 당시에는 대가족 제도여서 삼촌과 숙모도 미혼인 고모들과 함께 한 집에서 살았다. 내가 다섯 살 때 숙모가 문경읍 갈평리에서 시집을 왔다고 한다. 삼촌은 호계초등학교(그때는 초등학교라고 했다) 교사였다. 학교가 집 가까이 있어서 학교 운동장은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할머니의 친정 조카인 김만기 오빠가 교사로 있어서 두 선생님의 후광(?)으로 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학교 운동장이 놀이터였다. 이 오빠는 나의 일학년 때 담임이기도 했는데 몇 달이 못 되어 군대에 입대하여서 고급 장교가 되었으며 월남전과 수도경비사령부를 거쳐서 훗날 감사원 사무총장을 역임하였다.
삼촌과 숙모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한 집에 살았고 부모가 직장 관계로 서울에서 살았기 때문에 삼촌과 숙모는 부모처럼 나를 돌보아 주어서 하나의 가족적 유대감을 형성하게 해주었다.
가족은 함께 살아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삶의 지혜이며 가족은 부대끼며 살아야 정이 들게 마련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그것을 가르쳐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모들

나에게는 세 명의 고모가 있다. 지금 두 사람은 세상을 떠났고 막내 고모만 대구에 살고 있다. 이따금 전화로 문안하며 옛 이야기도 듣고 삶을 나눈다. 막내 고모는 나보다 네 살 위여서 자매처럼 같이 자랐다.
어렸을 때 세 고모는 나의 보호자였고 또 인도자였다. 그 가운데서도 큰 고모는 어머니처럼 자상하게 나를 돌보고 챙겨주었고 친정에 오면 내가 고모의 관심 영역 1순위였다. 큰 고모와 얽힌 에피소드가 많은데 그중에 한 가지를 소개하려고 한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나는 교과서를 전부 외우고 책장을 넘기는 것까지 정확했다. 어른들이 집안에서 일을 하면서 나보고 공부를 하라고 하면 나는 낭낭한 목소리로 유창하게 책을 읽었다.
그때까지 책을 다 외워서 낭송을 하였으니 어른들은 내가 공부를 썩 잘하는 줄 알고 있었다. 문제는 책은 외워서 잘 읽어 내려갔지만 글자는 배우지 않아서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친정에 온 큰 고모에게 책은 잘 읽는데 글자를 모른다는 것이 들통이 났다.
큰고모는 한지에다가 한글 자음과 모음을 써서 30분 동안 가르쳤다. 나는 큰고모에게 붙잡혀서 30분 만에 한글을 모두 익혔다. 큰고모는 다른 두 고모에게 30분만 투자하면 깨우치는 아이를 방치하고 한글을 가르치지 않았다고 야단을 쳤다. 이 사건은 고모들밖에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학교에 가서 선생님이 읽는 것을 듣고 외운 교과서 내용을 글자로 읽게 되니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 같아 학교생활과 공부가 더욱 재미있었다.
지금도 큰 고모를 생각하면 어릴 때의 한글교육이 생각나고, 그는 눈썰미가 좋아서 한번만 보면 그대로 만들어 내는 바느질솜씨와 음식솜씨가 기억에 남는다.
요즘은 어머님들의 과잉 교육열로 초등학교 입학할 때 한글은 말할 것도 없고 영어까지 가르쳐서 보내지만 옛날에는 자기가 알아서 해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집안에 교사인 삼촌과 상급학생인 두 고모가 있었는데도 나는 입학해서 몇 달이 지날 때까지 한글을 깨우치지 못했다. 그 당시에는 초등학교 일학년 학생 모두가 거의 비슷했고, 나는 기억력이 좋아서 한번 들으면 모두 외워버렸기 때문에 부끄러운 것도 몰랐고 스스로 똑똑한 줄 알았다.
막내 고모는 나이 차이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서로 싸우면서 성장했다. 그는 교수 부인으로 한 평생을 보내면서 공부만 아는 남편으로 인해서 살림살이를 이끌어 나갔다(고모부는 물리학 전공으로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장을 역임하고 은퇴하였다). 지금도 그 고모는 신앙생활에 열심이고 집안 대소사를 돌아보는 어른 노릇을 하고 있다.
이렇게 가족은 이루어지고 또 흩어진다. 가족은 우리의 삶의 둥지이지만 가깝기에 무심하기 쉽다. 가족들을 돌아보는 것이 우리에게는 사랑의 실천이며 삶의 노력이다.
내 고향 문경에서는 시집간 딸들을 부를 때 남편의 성을 따라 '김실이' 또는 '고실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하나의 칭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유대감을 형성하는 네트워크가 된다.
미국에서는 초등학생들에게 Family Tree(가계도)를 그리게 하여 가족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하게 한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형식은 있는데 내용은 없는 교육을 하고 있는 형편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삼촌과 숙모, 고모들이 나의 유년기의 길잡이였다. 그러나 나의 고향 막곡은 양지마을에 정씨, 아랫마을에 황씨, 건너 마을에 김씨 등의 집성촌으로 이루어져서 옆집이 촌수보다 더욱 깊이 얽힌 가족적 유대가 형성되어 살아왔다.
모두가 한 집안 같은 친척들이다. 그러니 우리는 같이 자랐고 모두가 한 집안 식구였다. 지금도 촌수에 관계없이 얼마나 자주 만나느냐에 따라서 친소관계가 형성된다. 이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나는 막곡리 양지마을의 정씨 집안 맏딸로 태어나서 한 평생을 살아오면서 이따금 고향과 가족들을 생각한다. 어릴적 이야기가 하나의 동화가 아니라 내 삶의 뿌리가 되었고 오늘의 나를 이루는 바탕이 되었다.
나도 이제 늙어서 길을 가다가 어린이들을 만나면 '우리 요한이만 할까?' '유리보다 조금 크겠지?, 혹은 작겠지?'하면서 아이들을 보는 기준을 요한과 유리에게 두는 '손주 바보 할머니'가 되었다.
나의 할머니도 지금의 나와 같았을 것이다. 옛날 사람이어서 입으로는 표현하지 않았으나 마음은 같았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야 할머니의 손주 사랑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날은 가족해체가 다반사가 된 시대이지만 가족은 우리의 둥지이고 울타리이다. 이것을 소중히 여기고 가꾸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책무이고 축복인데 우리는 가족의 소중함을 깊이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
이제 어른들은 거의 세상을 떠나고 윗대라고는 막내고모 정도가 남았다. 하기야 고모도 나와 네 살 차이이니 나도 같은 세대가 되었다.
가족이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이 복을 귀하게 여기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하나의 메시지가 있다. 그것은 '가족은 네 얼굴이다'라는 메시지이다.
최근에 읽은 책 가운데 기억에 남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사회학 교수가 그의 부모의 이야기를 쓴 책인데, '막이 내리고 비로소 시작되는 아버지, 어머니의 인생 이야기'를 담아서 <인생극장>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 저자인 아들은 '우리 모두가 인생극장의 주인공입니다'라고 외치고 있다.
작고 평범한 인생의 조각들이 모여 한 시대를 이룬다. 특별하지 않은, 그래서 더욱 보편적인 인생들의 이야기처럼 나의 가족도 그러하리라.
가족이라고 하면 가슴 따뜻한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리고 가슴 아픈 이야기도 있다. 이것이 날줄과 씨줄이 되어 거대한 형태를 이룬다. 이것이 꽃피는 들판이 되고 혹은 눈 덮힌 산야가 된다. 나의 가족들, 윗대는 거의가 세상을 떠나고 나의 후손들이 새로운 가족으로 가계도를 만들며 자라나고 있다. 그 나무의 열매들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를 그려본다.

 
 
 


필자 정정숙 교수

정정숙 박사는 서울여자대학교에서 사회학 (문학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신학석사), 이화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교육학(교육학석사), 미국 리폼드신학대학원(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에서 기독교교육학(기독교교육학석사)을 전공하였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소재한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상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목회상담학박사)를 받았다. 또 미국 로욜라대학교(Loyola College of Maryland)에서 이상심리학을 전공하였고( (Ph.D.Cand.), 남아프리카공화국 스텔렌보쉬대학교(University of Stellenbosch)에서 기독교상담학을 전공하여 신학박사(Th. D.)학위를 받았다.
그후 정교수는 36년간 총신대학교 기독교교육과 상담학 교수로 _상담대학원장_교육대학원장_사회복지대학원장_도서관장_기독교교육연구소장 등으로 섬기다가 은퇴하였다. 정교수는 또한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의 실천신학 Adjunct Professor로 섬겼다. 정교수는 또한 한국성경적상담학회장, 한국인간발달학회 이사, 미국상담학회(ACA)와 미국 심리학회(APA), 그리고 미국기독교상담학회(AAPC)의 정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뿐만 아니라 정교수는 서울 역삼동에 한국상담선교연구원을 개원하여 목회자와 사모, 평신도를 위한 상담교육과 실천에 힘써왔으며 계간학술지 상담과 선교를 창간하여 84호까지(2014년 겨울호 현재) 발행해 왔다. 정교수는 또한 2012년 월간<창조문예>의 신인작품상 현상모집 수필부분에서 신인작품상을 수상해 수필가로 등단했다.
저서와 논문 및 수상으로는 운정 정정숙 전집(45)과 기타 10권의 저서와 34권의 역서 간행 및 111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 가운데서 기독교상담학은 기독교출판문화상 신학부문 최우수상을 받았고 일본어로 번역 출판되었고(일본 생명의 말씀사)중국어로 번역이 끝나 중국과 대만에서 출간 중이다. 인간발달과 상담,Ⅱ」는 총신학술 최우수상을 받았으며 은퇴 시에는 대한민국 근정포장 및 훈장(이명박대통령상)을 받은 바 있다. 정교수는 또한 월간 <창조문예>에서 수필부문에서 신인작품상을 받았으며, <운정팡세>로 제2회 총신문학상(수필부문)을 수상했다.

현재는 총신대학교에서 명예교수로 섬기면서 일본 고베신학교의 초빙교수로, 한국상담선교연구원 원장으로, 한국성경적상담학회 회장으로 사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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