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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한국전쟁과 기독교의 수난 (1)

[ 2017-06-26 15:50:16]

 

< 김남식 박사>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으로 순교의 피를 흘린
한국교회 순교신앙을 계승하여
교회의 바른 사명 감당해야"

김남식 박사

아직도 끝나지 않은 미완의 전쟁인 6.25 한국전쟁 기념일을 맞아 기독교의 수난에 대한 기록을 김남식 박사의 한국기독교수난사(서울: 도서출판 베다니, 2008)에서 발췌 게재한다. 신문 편집상 원문의 주()는 생략한다. (편집자 주)

[6.25 전쟁의 수난]

1. 6.25 전쟁의 배경

35
년간의 피맺힌 한을 단번에 풀어버린 해방의 감격을 맞이하고 나서, 우리 동족은 국제 정치의 비극적 현실 앞에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채 연합국들의 승전의 전리품처럼 얻어온 해방은 그렇게 쉽고 또 값싸게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원산항에 소련군이 들이닥치는 모습을 보면서 뼈아프게 깨닫게 되었다.
진주한 소련군은 젊은 장교 김일성을 내세워 공산정권을 세울 계획을 하고 있었다. 1930년대부터 교회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박해와 피흘리는 순교의 행렬이 시작되었는데 이제 본격적으로 교회가 수난의 길을 가야 하는 막다른 골목에 접어들었다.
공산주의자들은 한국전쟁을 일으켜 남한을 공산화할 계획을 치밀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1945년에 진주한 소련군은 김일성이 공산당 정권을 세우는 데 성공하자 194812월 철수를 완료하였다. 전략적으로 철수를 마친 그들은 남한의 미군 철수를 거듭 요구하였다. 남한의 미군 역시 UN의 감시 하에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동년 12월부터 철수를 시작하였다. 19495월에 10만여 명의 기독교인들이 서울운동장에 모인 가운데 주한미군 철수 반대집회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194812UN의 결의에 따라 동년 12월부터 철수를 시작하여 고문단 500명만을 남겨두고 이듬해 6월까지 완료하였다. 이는 북한 공산당이 남한을 공략하기 위한 호조건의 첫 번째 단추를 끼운 것이었다. 반공주의자로 명성이 높은 이승만 박사는 남북통일을 그의 생의 목표로 북진통일론을 줄곧 이야기하고 있었으므로 미국은 한국을 중무장시키면 북으로 쳐들어가게 되고 이것이 국제전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판단하고 한국군의 무장을 경계하여 겨우 소총 정도의 무기만 공급하고 대포나 탱크 같은 것은 전혀 제공하지 않았다.
1949년 중국은 모택동에 의해 완전히 공산화되어 북한의 김일성의 남침에 좋은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던 1950112일 그러니까 6.25가 발발하기 불과 6개월 전에 미국 국무장관 에치슨이 전국 기자클럽에서 "미국의 방위선은 알류션 열도,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을 잇는 선이며 한국은 이 방위선에서 명백히 제외되어 있어 한국에 군사적 공격이 생겨도 먼저 공격받은 국민이 저항하고 다음엔 유엔 헌장 밑에 전 문명 세계가 조치해야 할 것"이라는 발언을 했다. 이것은 곧 한국의 방위를 미국이 책임지지 않겠다는 말로서 우리의 운명과 직결되는 내용이었고 북한에게는 더할 수 없이 좋은 침략의 조건이 형성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던 발언이었다.
1950625일 주일 새벽, 보병 10개 사단, 전차 242, 항공기 211대의 정예부대로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들이 38선을 넘어 밀물처럼 남한으로 진격해왔다. 그러나 남한에는 보병 8개 사단에 전차는 한 대도 없었고, 항공기는 연습기 10대가 고작인 상태였다. 그러므로 6.25를 맞아 남한이 입은 피해는 필설로 다 형용하기 어렵다.

공산군들이 파죽지세로 남한을 거으 다 점령하고 부산항 하나만 겨우 남아 있을 때 유엔군이 한국에 참전함으로써 남한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UN군 파병안을 미국이 UN의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다루게 되었을 때, 소련 대표 아담 말리크는 유엔이 중공의 가입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회의 참석을 보이콧하고 있었다. 말리크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거부권 '아니오'라고 말하는 대신 76일 모스크바에서 있을 협상에 참석하기 위해 롱아일랜드에서 편히 쉬고 있었다.
소련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덕에 안전보장이사회는 한국에 유엔군 파견을 결의하게 되었고, 따라서 세계 역사에 유례가 없는 16개국의 군인들이 UN군의 이름으로 한반도에서 전투를 한 기이한 역사를 기록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1953년에 이르러 3년 동안 동족들 간에 이데올로기 때문에 죽이고 죽는 전대미문의 전쟁은 그 슬픈 역사를 남기고 휴전선이라는 국경 아닌 국경을 경계로 휴전이 성립되어 종전이 아닌 휴전으로 포성은 일단 그쳤다. 한국은 휴전을 극력 반대했지만, 미국과 한미 상호안전보장 조약의 체결과 장기간의 경제 원조 및 한국군의 증강 등을 약속받는 선에서 어쩔수 없이 동의하고 말았다.

2.
교회의 수난과 순교자들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다시 없는 동족간의 대참살극은 어이없는 결과를 모든 분야에 남겨 놓았다. 그러나 그 어느 집단보다도 교회는 더 큰 상처를 입었다. 북한에서 월남한 교회 지도자들은 이미 북한에서 조선기독교도연맹을 만들어 공산주의를 지지하지 않은 기독교인들과 교역자들을 무참하게 학살했던 저들의 만행을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전쟁이 나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인민군이 서울에 입성하자 지하에 숨어 있던 공산주의자들은 제때를 만나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기독교인들을 색출하고 검거하는 데 기독교인들이 앞장섰다는 사실이 너무나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대목이다.
서울이 함락되었을 때, 경동교회 교인을 자처하는 김욱이 나타나 '기독교민주동맹'이라는 간판을 종로 YMCA 건물에 걸고 김일성 환영식을 준비한다며 떠들고 다니면서 교인들의 동원을 독려하였다. 그는 미처 피난가지 못한 교회 지도자들에게 79(주일)에 인민군 환영대회를 기독교측에서 열라고 협박하였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연락이 닿는 각 교파 목사들은 서울 감리교 중앙교회에서 인민군 환영준비위원회를 위해 모였고, 위원으로 장로교회의 유호준, 김종대, 감리교의 박만춘(납북), 그리고 기독교교육협회 협동총무 심명섭 목사 등이 위촉되었다. 예정된 날 환영행사를 열기는 했으나 인원이 제대로 동원되지 않아 환영대회는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잔류해 있던 목사, 장로들은 최문식이 나타났을 때 간담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최문식은 1933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으나 공산당으로 전향하였다. 그는 1946년 대구에서 일어난 철도 파업의 행동대원 노릇을 한 이재복 목사와 함게 주도하였다. 대구사건이 진압된 후 이재복은 총살형을 당했으나 최문식은 당시 미 군정청의 고급관리로 있던 김치묵 목사가 같은 동향인 연고로 김 목사의 주선으로 총살형을 면하고 풀려났으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다시 투옥되었다가 전쟁이 터지고 나서 인민군이 남하하자 출옥하였다. 그는 종로 기독교서회에 자리를 잡고 나서 은신하고 있는 목사들은 찾아내어 821일 김일성 정부를 지지하는 궐기대회를 열고 목사들을 여기에 강제로 동원시켰고, 목사들에게 자수서 제출을 강요하였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보낼 남북통일 호소문을 작성한다면서 목사들로 하여금 강제로 서명케 하는 일을 강행하였다.
끌려온 목사들이 적극성을 보이지 않자 이에 격분한 최문식은 목사들 색출 작업에 전력 투구하는 어처구니 없는 짓을 자행하였다. 그는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되자 밀려가는 공산군과 더불어 월북하였다. 한편 감리교회에서도 감리교인이며 인민군인 최택이라는 자가 성서공회 2층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자수서를 받아내고 있었다.
유엔군의 개입으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리에 이루어져 서울 수복이 눈앞에 오자 북한 공산당은 지하에 숨어 있던 목사들 검거에 혈안이 되었다. 김인선, 김윤실 목사는 유치장에서 순교하였고, 나머지 목사들은 대부분 납북되는 비운을 겪었다. 장로교회의 송창근, 남궁혁, 김영주, 유재헌 목사 등과 감리교의 김유순 감독을 비롯하여 양주삼, 방훈, 김하운, 조상문 목사, 성결교회의 박현명, 이건 목사, 구세군의 김삼석, 김진하 사관 등 60여명이 납북되어 현재까지 그 생사 여부도 알 수 없으니, 이것은 본인과 가족 그리고 우리 온 교회의 참담한 고통이 아닐 수 없다.
이름이 남아 있는 분들은 그나마 다행이고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학살당하거나 행방불명된 이들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전쟁중에 순교를 당한 이들도 적지 않았는데, 북한에서 조선기독교도연맹의 총회장까지 맡았던 김익두 목사도 저들에게 총살당하였다. 황해도 신천 서부예배당에서 새벽기도하던 중 공산당이 들이닥쳐 김익두 목사 외 6인의 교인이 총살당했고, 기독교도 연맹에 가담했던 많은 목사들도 결국 살해되었다.
장로회신학대학장을 지낸 박창환 목사의 부친 되는 박경구 목사는 황해도 장연 서부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다. 그는 평양의 숭실전문학교를 마치고 교육계에 투신했다가 늦은 나이에 목회를 시작하였다. 박 목사가 진남포 득신소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그 학교 교사로 있었고 숭실중학교의 동기생이었던 강양욱이 조선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하라고 협박하였으나 그는 끝까지 신앙 절개를 지키면서 이를 거절했다. 박 목사는 6.25가 터지던 날 주일 새벽에 체포되어 쇠줄로 양 손목과 양 발목이 묶여 끌려갔는데 후에 손가락과 발가락이 모두 무참히 절단된 시체로 발견되었으며, 같이 살해된 교인들은 입이 흙과 재로 틀어막힌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북에서 순교한 이들 중 기억해야 되는 인물 가운데 주기철 목사가 섬기던 산정현교회의 유계준 장로와 백인숙 전도사를 빼놓을 수 없다. 유 장로는 주기철 목사가 감옥에 있을 때 그 가족들에게 자비로 생활비를 계속 지급하였고, 해방이 되고 나서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구체화되어 가자 주 목사 가족들과 자기 가족들을 먼저 이남으로 피난시키고 혼자 교회를 지키다가 공산당으로부터 순교하였다. 백 전도사는 주 목사가 감옥에 있을 때 목사 없는 성도를 안정모 사모와 함께 심방하면서 돌본 믿음의 역군이었는데 결국 공산당에 의해 정일선 목사와 함께 순교하였다.
서울에서는 신당동중앙교회 안길선 목사와 김예진 목사가 순교했고, 서대문 감옥에서 주채원 목사 등 여러분들이 순교하였으며, 김응락 장로는 영락교회 앞에서 순교하였다. 김인룡, 김윤실 목사 등은 서대문 감옥에 갇혀 있다가 후퇴하던 인민군들에 의해 총살당해 순교하였다. 전북 옥구군 미면 원당교회의 교인 75명 중 73명이 한꺼번에 살해되는 처참한 살육이 감행되었다. 전북 삼례교회 김주현 목사는 그의 가족 7인과 함께 순교했고, 광주 양림교회 박석현 목사가 순교할 때 그의 장모, 부인, 외아들까지 함께 공산당에게 살해당하였다. 황해도 봉산의 계동교회 180여 교인 중 175명이 나무로 된 예배당 안에 갇힌 채 모두 태워 죽임을 당함으로써 순교의 길에 들었다. 대전형무소에는 남한 각지의 교역자, 평신도들이 수백 명 투옥되어 있었는데, 공산당들이 후퇴 직전에 감옥에 불을 질러 이들 모두가 불에 타 순교하였다.
6.25를 겪으면서 인적 피해뿐만 아니라 교회당의 파괴도 심각하였다. 장로교회 소속 예배당 소실이 152, 파손 467, 감리교 소속 예배당 소실이 84, 파괴 155, 성결교는 소실 27, 파괴 79, 구세군은 소실 4, 파괴 4동 등이었다. 이것은 통계에 나온 것의 일부일 뿐 실제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피해가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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