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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한국전쟁 비사, 김일성의 폭풍작전

[ 2017-06-26 15:42:16]

 

< kbs1 방송에서 인터뷰하는 본지 발행인>

육해공군, 브래들리 잭슨 부대, 민부대도 버린 포항을 지킨 학도병을 생각한다
김만규 목사 (발행인)

 
67년 전 북괴 김일성의 6.25침공에서 잊어버린 6.25전쟁 비사로서 소위 김일성의 작전특명 '폭풍 계획'이 있었다.
김일성은 195062538선을 돌파하여 대한민국을 점령하는 데 45일로 설정하여 소위 '폭풍 계획'이라는 작전명령을 중국의 8로군 출신 김무정 중장에게 하달한다.
북괴군 제2군단장 김무정은 '폭풍 계획'8.15 전 부산을 함락하라는 김일성의 특별명령을 수행키 위해 중국군 8로군 출신 장병들을 주력으로 하는 인민군 제12사단, 5사단 그리고 866특공부대를 동부전선에 배치한다.
인민군이 38선을 돌파하여 불과 1개월만에 남한 땅 4분의 3을 점령하고, 남은 것은 대구와 영천, 경주 그리고 포항을 남겨두고 최후의 작전명령인 8.15 전 부산 함락이라는 폭풍계획을 수행하다가 이 전투에 실패하자 김일성은 8로군 출신 김무정을 총살하게 된다.
 
당시 필자가 인민군에 포로가 되어 오진우 대좌에게 들은 말은 '동무들같은 악질분자는 없소. 동무들은 학생들인데 개딱지같이 땅에 납작 엎드려 해방군에게 막대한 상처를 입혔소. 위대한 인민군 해방동무들이 38선을 돌파하여 한 번도 정면 조우를 하지 못하였소. 그런데 개딱지같이 땅에 딱 엎드린 학생동무들 때문에 우리의 폭풍 계획을 망치고 말았소.'라고 외쳤다.
사실 인민군 2군단의 김무정 군단은 동부전선의 최후의 보류인 포항을 탈환하고 3,4일 뒤에 부산에 입성하겠다고 김일성에게 보고해놓고 포항에서 복병을 만나 인민군의 남진을 두 시간 지연함으로써 전 전선이 깨지는 결과를 낳았다.
거기에는 김무정의 2군단과 김일성의 폭풍계획은 국군이 아닌 학도병에게 패하게 되었다. 그 후 인민군은 포항을 아홉 번 침공하였으나 아홉 번 모두 패전하고, 결국은 195010138선까지 돌파하여 패전에 이르는 쓰디쓴 패전의 역사를 남기게 되었다.

그런데 1950811일 인민군이 포항을 침공할 때 포항을 사수하기 위해 미 해병대의 브래드리 잭슨 부대와 민기식의 민특공대 그리고 육해공군과 경찰방위군 등 3000여명이 있었으나 막상 인민군이 침공하니 모든 군대가(육해공군, 경찰방위군, 브래드리잭슨 부대, 민기식의 민특동대)까지 다 도피하고 텅빈 포항에는 훈련도, 무기도, 전쟁경험도 없는 학생(학도병) 71명만이 밀려오는 인민군과 11시간 30분을 사투하였다.

다음은 학도병 6.25참전사의 일부이다.

<6.25
한국전쟁 비사 김일성의 폭풍계획>

1950
811일 학도병 포항전투

1. 1950
625일 새벽, 북한 인민군 10개 사단이 38선을 돌파하고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한 후 김일성이 인민군 2군단장인 김무정 중장에게 '8.15 전 부산을 함락하라'는 폭풍 계획을 전달한다.
당시 포항에는 국군 3사단 후방 사령부와 육해공군 각 1개 중대 및 경찰방위군 3,000명이 주둔하고 있었고, 20만 명의 피난민이 모여 있었다.
인민군은 포항 침공을 위해 인민군 5사단, 12사단 그리고 유격 766부대(당시 부대장은 오진우로 그는 포항 출신임)를 투입하니, 5사단은 안강 쪽에서 12사단은 영덕 방면에서, 유격 766부대는 원산에서 배를 타고 포항에 상륙하게 된다.
이때 미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포항을 사수하기 위해 미국의 브래드리 잭슨 특수부대와 한국군 민기식 소령의 특동대를 배치하는 한편, 1950810일 학도병 71명에게 M1소총과 실탄 250발을 배부하고, 여기에 경찰방위군과 육해공군과 해병대의 전신 해군육전대를 배치한다.

2. 1950
811일 새벽 3시에 영덕과 영천 방면 그리고 해안선을 따라 남침한 인민군 25,000명이 폭풍 작전의 일환으로 포항 침공을 감행하고 3사단 사령부인 포항여중에 진입하게 된다.
새벽 3시에 포항역 쪽에서 따발총 소리가 들려오자 전날 M1소총을 지급받은 학도병은 밤늦게까지 M1소총을 분해 소제를 하고, M1소총 발사 방법을 배우고, 또 실탄 250발을 지급받은 뒤 곤한 잠에 빠져든다.
그 시각 포항 시내 쪽에서 들려온 총성에 비상이 걸려 포항여중 사단사령부에 학도병 연락병이 달려가니 작전처 김치련 대위는 '학도병은 사단사령부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리고는 사령부에 주둔해 있던 국군 병력 1개 중대 군악병까지 약 100여명이 뒷산과 동쪽 바다로 급히 피신하였다. 그 후, 포항여중 사단사령부에는 사단사령부 사수 명령을 받은 학도병 71명만이 남아 밀려오는 괴뢰군과 4차에 걸쳐 전투를 전개하게 된다.
처음 사단사령부로 행군해오던 인민군은 학도병들이 쏘아대는 총성에 '동무들, 물러가기요'라고 하며 후퇴를 하였다가 다시 대오를 갖추어 포항여중 쪽에 있는 소로를 따라 일제히 따발총과 경기관총을 난사하며 진입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학도병은 한 사람도 동요함 없이 포항여중 울타리 방호벽에 몸을 숨기고 밀려오는 괴뢰군을 격퇴시키며 방어선을 굳건히 지켰다.
1, 2, 3차 공격에도 방어선이 무너지지 않자 인민군은 흰 깃발을 들고서 휴전을 제의하였다. 휴전 내용은 '김일성 장군 이름으로 해방한다'는 것이었다. 이때까지 전혀 요동치 않았던 학도병들 중에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사실 그 전날부터 밥을 굶어 모두가 기진맥진하던 차에 휴전 제의가 들어온데다, 몇 차례 밀려온 인민군대의 숫자가 엄청났기에 겁을 먹을만도 했던 것이다.
휴전을 제의하는 것도 잠시뿐, 포항여중 앞 도로와 논두렁으로 침공하던 인민군은 서쪽 영덕으로 가는 철뚝 위에, 동쪽 과수원 쪽에 그리고 북쪽으로 진입을 시도해왔고, 포항여중 뒷산 등에서 박격포를 쏘며 심지어 달전동 방면에서 탱크까지 동원하여 포항여중 앞길을 돌격해오며 최후의 결전을 벌일 기세였다.

이때 학도병들은 한 사람도 제자리를 비우지 않고 현장을 사수하였다. 인민군이 50m, 30m 앞까지 침공하여 따발총과 경기관총 그리고 방망이 수류탄을 투척하며 총공격을 감행하자 모두는 이 땅이 뉘 땅인데 인민군에게 빼앗길 수 없다. 이 땅에서 죽겠다며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결사항전의 태세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대규모 인민군의 따발총, 방망이 수류탄, 박격포탄 공격에 여기저기서 ', 어머니',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며 포화 속에서 부상을 입거나,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 숨을 거두는 전사자가 속출하였다.

3.
학도병의 포항여중 전투는 11시간 30분 동안 진행되었고, 1950811일 오후230분에 끝이 났다.
이 전투에서 학도병 48명이 전사하고, 13명이 포화에 부상을 당해 포로가 되었으며, 행방불명자가 10명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1950811일 학도병 포항전투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 6.25전쟁 당시 인민군은 9차례 포항을 침공하였다. 하지만 제1차 포항전투에서 어린 학도병들의 빛나는 투혼이 되살아나 국군은 9차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1950811일 포항여중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학도병 포항전투를 통해 300명을 사살하였고, 또 괴로군의 남침을 2시간 지연시켰으며, 영덕지구에 전투하던 3사단 전방부대를 무사히 철수시킬 수 있었고 포항시에 모여있던 피난민 20여만 명을 무사히 포항에서 탈출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일성의 폭풍 명령인 '8.15 전 부산 함락' 작전에 철퇴를 가하였다. 이 일로 김일성은 김무정에게 책임을 물어 김무정 중장을 총살시켰다고 한다. 그 외에도 포항전투는  양동 작전의 일환이었던 195092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그 동안 수세에 몰렸던 국군과 유엔군이 1950년 10월 1일 원한의 38선을 돌파하고, 이후  6.25전쟁의 큰 흐름을 급속히 바꿀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우리는 1950811일 포항전투에서 학도병으로 참전하여 전사한 김춘식 외 47주에 대하여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무명의 전사자 34명과 아직도 시신이나 행방을 알 수 없는 10명의 갸륵한 희생을 기억한다. 그리고 1950811일 포항전투에서 극적으로 생환한 전우 13명 중에 현재 생존하고 있는 3(손용길, 주천만, 김만규)의 증언을 길이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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