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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없는 외침들, 언론인의 모습 - 김만규 목사․양원 장로․민병문 장로

[ 2016-08-30 13:21:10]

 

 "역경 속에도 정론을 주장하고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려고 노력"

 

우리 주변에는 정보의 홍수가 넘쳐난다. 신문이나 방송 매체들이 이 사회에 주는 영향력은 그 어느 시대보다 막강하다. 그래서 가히 '언론 왕국'이라고 불러도 좋을 지경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 언론도 이에 못지않다. 100여개의 크고 작은 언론기관들이 있어 순기능적인 영향과 역기능적 영향을 아울러 가지고 있다.

필자는 지금까지 언론에 민감한 위치에 있었다. 남편이 언론인 출신이고 지금도 󰡐논설고문󰡑이라는 직함으로 매주 글을 쓰고 있으니 필자도 여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니 지금까지 많은 언론인들이 주변에 있었으나 그중에서 몇 사람과의 교우록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이들과는 오랜 세월동안 교류하면서 지낸 이들로 이른바 미운 정 고운 정이 든 사람들이다.

 

불굴의 사람 김만규 목사

 

오래전 이야기이다. 근래에 통합측 총회장을 역임한 손달익 목사가 전화하여 남편에게 '김만규 목사가 누구냐?'고 질문했다. 남편의 대답은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려운 분인데 탁 모씨가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손 목사는 무슨 말인지 알겠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김 목사에게 하니 '하나 더 보태야 한다. 탁 모씨가 500만원인가를 가지고 와서 살려달라고 한 사람이다'라고 해서 한 바탕 웃었다.

김 목사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냈으나 아직도 펄펄하다. 그는 충북 영동 출신으로 대구에서 자랐다. 교단이 위기를 당할 때는 늘 교단을 지키는 위치에 섰다. 중학생 때의 일이다. 그가 출석하던 대구제일교회에서 총회가 모였을 때 기장측이 이탈할 분위기였다. 교회 부목사는 학생들에게 자리를 정해주고 임무를 부여했다. 김만규의 임무는 본당 전기 스위치 담당으로 총회장소에서 싸움이 나면 전기 불을 끄는 것이었다. 그래서 싸움이 일어나자 부여받은 임무대로 전기 스위치를 눌러서 암흑세계를 만들었다. 이 일이 그에게는 교회정치 참여의 첫 번째 사건이었다.

그의 중학생 시절의 특이한 기록은 학도의용군으로 자원하여 포항전투에 참전한 것이다. 이 전투는 한국전쟁사에 길이 남는 것으로 김만규는 <학도병아 잘 싸웠다>라는 수기를 간행하였고 이것이 영화화되어 <포화 속으로>라는 영화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의 삶은 파란만장해진다. 학도병으로 전쟁에 참전하였다가 포항전투에서 인민군의 포로가 된다. 포로에서 탈출하여 다시 학도병에 합류하여 북진하는 대열에 참여한다.

어린 학생이 학도병에서 인민군 포로, 탈출하여 다시 학도병이 되는 기막힌 체험을 하였다. 이것이 그의 '찬란했던' 시절이다. 그후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집으로 돌아왔다.

대구의 한 기독교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우리는 그 학교를 명문교라고 놀린다) 신학의 길에 헌신한다. 대구 지역에서 사역했고 목사가 되어서는 교단정치 일선에 참여한다. 그래서 오해도 많이 받고 욕도 많이 먹었다.

김만규 목사는 1979년 대구동부교회에서 총회가 모였을 때 스스로 총회 준비위원장이 되어, 이른바 비주류 인사들이 총회를 장악하기 위하여 500여명의 청년들을 동원하여 대구동부교회당에 진입하려 할 때 경찰과 정부의 도움으로 출입구를 막았다. 총회 장소에 들어오지 못한 비주류 측이 총회를 이탈하여 개혁측 교단을 형성하였다.

그 후 그는 <기독신보>를 창간하여 정론지가 되기 위해 발버둥 쳤다. 후원자 없이 혼자서 신문을 운영하는데 혼자 발로 뛰어다니며 정보를 수집하여 거의 모든 기사를 혼자서 썼다. 그는 신문 원고를 쓸 때는 하루에 2시간만 자고 밤을 새워가며 원고를 쓴다고 한다.

필자 내외도 <기독신보>의 기고자가 되었다. 이 책 '삶의 길목에서 만난 사람들' 이라는 필자의 교우록 시리즈는 <기독신보>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의 글은 투박하고 공격적이다. 그의 표적이 된 이들은 그를 싫어한다. 그러나 그는 나름의 원칙을 지킨다. 󰡐법과 원리󰡑에서 벗어나면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여차 없이 공격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뒤에서 욕할지언정 앞에서는 깍듯이 예의를 지킨다.

그는 교회법의 전문가이다. 교회법을 보지 않고도 몇 장 몇조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법률 자문을 받는다. 특히 어려움을 겪는 교회나 목사들이 찾아온다. 여기서 소문이 생긴다. '얼마를 받았다'는 풍문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실속 없는 일이다. 집 가까이의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하면서 2-3시간을 자문을 해주고 어떤 때는 서류까지 만들어 준다. 찾아온 사람은 '연락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서 가버린다는 것이다. 남편은 그에게 정당한 상담료를 받으라고 권했고 그는 <기독신보>에 교회법 상담소에 대해 광고하고 상담료를 밝혔지만 상담을 하고 상담료를 안 주는 것을 어찌 받느냐고 한다.

이것이 소문과 실상의 차이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런 일 하지 말라고 하지만 '어렵다고 찾아와서 도와달라는데 어찌하느냐'고 한다. 어쩌다가 그렇게 교회법에 정통하게 되었느냐고 하니 '내가 살려고 법을 공부하다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필자가 그를 알게 된 것은 정치가로서나 언론인으로서의 그가 아니라 학부형으로서 그를 만난 것이다. 그의 맏아들이 총신대학교 종교음악과에서 기독교교육과로 전과를 해서 필자 밑에서 몇 년간 공부를 했다. 그의 맏아들은 기억에 남는 얌전한 학생이었고 그의 아버지의 이미지와는 상반되는 사람이었다.

한번은 몇 가정이 중국 산동성으로 함께 여행을 한 적이 있다. 필자는 '무서운 사람'이라는 그의 이미지와는 달리 다정다감한 그의 성품을 보고 놀랐다. 이런 모습은 그의 아들에게서 본 성품과 통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최근에 그는 신문기사로 인해 큰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그 후 그의 건강이 몹시 나빠지고 건강 때문에 신문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신문 발행이 그의 힘이고 칼인데 이것을 사용하지 못하니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그로부터 멀어져 간다.

우리는 이런 형편에 처한 그와 교류하면서 인간의 이기적이고 양면적인 모습을 보게 된다. 속히 건강을 회복하고 남은 힘을 다하여 정론을 펴기를 기대한다.

 

뚝심과 배짱의 사람 양원 장로

 

전화벨이 울리면 '형수'하고 부르는 경상도 사투리가 튀어나온다. 부산에 있는 신문 <크리스챤 타임>의 양원 장로이다. 양 장로와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난 그의 부인 전영선 권사와의 관계는 50년이 되어간다.

양 장로는 거제도 태생으로 통영에서 자랐다. 통영 문화동에 있는 충무교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현재 합동 총회 총무인 김창수 목사와 죽마고우로서 자랐다. 전 권사는 그 교회 전 장로의 딸로서 어릴 때부터 교회 중심으로 살았다.

이들의 연애는 사람들의 눈에 띨 정도로 요란하였다. 이들이 성장해서 결혼하려고 하니 전 장로가 강력히 반대했다. 양원은 새벽기도에 나가서 전 장로 뒷자리에 앉아 큰 소리로 '주여 주여' 하였으나 응답이 없었단다. 할 수 없이 이들은 비상수단을 써서 결혼할 수밖에 없도록 했단다.

필자가 이들을 처음 만난 것은 1969년 여름 충무교회에서 모인 전국 학생신앙운동(SFC)대의원 수양회에 참석하였을 때이다. 그때 강사는 차남진 목사, 윤재수 목사, 그리고 김남식 목사였다.

양원은 어느 날 필자의 남편이 자취하는 집으로 밀고 들어와서 같이 살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50여년의 긴 여정이 형성되었다. 그래서 '형님, 형수'로 불리게 되었다.

양원은 부산에서 언론에 투신하고 있다. 코리아 헤랄드라는 영자신문과 연합통신 등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다가 일간지의 부산지사를 맡는 등 활동 방향을 바꾸다가 기독교신문을 만들게 되었다.

그러니 남편이 그 신문의 고문격이 되어 신문의 논지를 잡아주고 글을 쓰게 되자 필자도 관여하게 되어 매주 연재를 하게 되었다.

아들 둘만 있는 그의 가정에 큰 아들이 목사가 되었다. 그래서 자칭 '목사의 아버지'이다. 아들이 목사가 되니 교회에서도 행동을 조심하게 된다고 했다.

큰 몸집의 그에게도 어려움이 왔다. 위암으로 수술을 받고 위기를 이겨내었다. 그 후 그는 사경을 헤매며 여행한 이야기를 농담삼아 이야기 한다. "요단강을 갔더니 배가 고장나서 건널 수가 없게 되자 천사가 내게 와서 배를 고치는 데 시간이 걸리니 세상에 가서 기다리다가 오라고 했다. 돌아서려고 하니 먼저 간 이경원 목사가 강 건너에서 보고 '양 장로 건너와서 같이 놀자' 하더란다. '배가 고장 나서 못 건너간다'고 하자 '그러면 역삼동 형님(필자의 남편을 가리킴) 빨리 좀 오라고 해라. 물어볼 것이 있다'고 하자 그는 '그 형님, 생기는 것도 없이 동네 반장하느라고 바쁘다. 너 혼자 놀아라'고 했다"고 너스레를 떤다.

양 장로는 정치 성향이 강하다. 전국 남전도회장을 하였고, 전국장로회 총무를 연임하였다. 지금은 영남지역장로연합회 회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그런 그가 신문 만드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오자(誤字)가 나면 필자의 남편에게 야단을 맞으면서 신문을 만들어 나간다.

60년을 친구로, 부부로 지낸 전 권사가 세상을 떠났다. '드는 정은 몰라도 나는 정은 안다'는 것이 인생인데 혼자되고 나니 위로할 말이 없다. 어떻게 지내냐고 하면 낮에는 신문사 일로 분주하다가 저녁에 집에 들어가면 그 적막감을 무엇에 비유할 수 없단다. 그래서 사람 소리가 그리워서 보지도 않는 TV를 크게 틀어놓고 밤을 보낸단다. 그래서 우리집에 전화하면 '형님, 있을 때 잘 하소'라고 한다. 아마 이것이 그의 진솔한 고백일 것이다.

그런 그가 재혼을 하였다. 서로 의지하면서 말년을 보내기를 바랄 뿐이지만 그는 지금도 동서남북을 휘젓고 다닌다. 남편과 그는 비슷한 점이 많은 사람이다. 서로 욕을 하다가도 히히거리는 철없는 어린이들 같다. 두 사람 모두 필자와는 많이 다른 사람들이지만 남편을 봐야 하니까 그도 볼 수밖에 없다.

그는 병중에 있는 노모도 돌보아야 하고, 아들들과 새 부인의 눈치(?)도 보아야 할 것이다. 험한 고비를 당하여도 굳건히 이겨내며 지금까지 왔는데 앞으로 남은 세월을 우리 주님 안에서 귀하게 보내기를 바랄 뿐이다.

 

조용한 신앙인의 헌신 민병문 장로

 

민병문 장로는 한국기독교출판협회 회장이며 고신측 수도권장로회연합회 회장으로 묵묵히 맡은 일에 충성하며 섬기는 사람이다.

그는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조용한 가운데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필자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그를 안지 40년이 넘었다. 우리의 책은 모두 그의 손으로 만들었으니 그와의 역사의 탑은 매우 높다.

민 장로는 전남 해남 출신으로 어려움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그는 고신측 교회의 장로이며 연합사업에도 열심이다. 그러나 그는 언제 보아도 조용한 사람이다.

민 장로와 부인 권사 사이에는 아들과 딸이 있다. 아들은 미국에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삼성연구소에서 근무하고, 며느리도 상담심리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국내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딸도 부모님 곁에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으며 필자의 남편이 결혼 주례를 하였다. 딸네 식구들은 최근 인도에서 상사 주재원 근무를 하게 되었다.

그는 늘 차분하고 침착하다. 흥분하여 열내는 스타일이 아니고 조용히 자기 길을 헤쳐 나간다. 또 남을 비방하거나 욕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싫어하는 사람이 없다. 이런 성격의 사람은 조정자의 역할을 하는 데 큰 힘이 된다.

민 장로는 조그만 출판기획사를 운영한다. 우리는 원고가 완성되면 그에게 보낸다. 견적서나 그런 것이 없다. 책이 다 만들어지면 청구서가 온다. 돈이 있으면 다 주고 그렇지 않으면 조금씩 나누어준다. 이것이 우리의 거래 방식이다.

사업 이론에서는 말이 되지 않으나 정의 이론으로 이끌어 나간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이 인간관계이다. 눈앞의 조그만 이익 때문에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것은 너무나도 큰 손실이기 때문이다.

민 장로는 교회에서도 선임 장로 그룹이 되어 조정자 역할을 한다. 담임목사의 은퇴를 맞아 새 목사 청빙위원장이 되어 교회의 앞날을 염려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볼 때 교회의 기둥 같은 존재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연합사업에 관여하게 되고, 노회나 총회의 일을 맡게 된다. 자신의 사업을 생각할 때 여러 가지로 손해되는 일이 많으나 하나님의 나라 사역의 관점으로 볼 때에는 영적 투자의 측면이 있다.

교회나 단체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어도 화를 내거나 부딪치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속으로 삭이는 스타일이기에 힘들 때도 많겠지만 화평케하는 미덕을 세운다. 그런 그의 모습이 보기 좋다.

아들을 유학 보내놓고 여러 가지로 의논을 하였다. 필자의 딸들이 미국 대학에서 교수로 사역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경험을 얻기 위해서 이런저런 의문점을 의논해 왔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그는 40여년을 곁에서 지켜볼 때 시종여일하다. 그는 좋다고 끔벅 죽는 것도 아니고 싫다고 뒤돌아서는 것도 아니다. 조용한 미소 속에 모든 것을 담아내는 것이 그의 삶의 자세이다.

우리의 이런 관계가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계속되리라고 본다. 정치적 인물은 모든 것을 정치 논리로 풀어가지만 민 장로 같은 인물은 정의 논리로 풀어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책을 출판하려고 하면 민 장로의 회사를 추천한다. 믿고 맡길 수 있는 회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를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해남 양반 냄새가 나는 사람이다. 어려움 속에서도 굳건히 딛고 일어나 자수성가 하였기에 늘 감사가 넘치는 사람이다. 이런 귀한 사람들이 곁에 있으니 안심하고 책을 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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