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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길을 걸어온 신학자들

[ 2015-10-15 15:32:31]

 

●사당동 총신의 개혁신학의 전통을 계승하여

●자기 분야에서 독보적 위치를 확보한 학자들

 

학문을 탐구하는 길은 마치 등산과 같다. 정상을 목표로 하여 나아가는데 달려간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꾸준히 앞을 향해 전진해야 한다.

젊을 때부터 공부하고 싶고 이 길에 평생을 투자하고 싶은 열정과 재미가 있었다. 그래서 계속 앞을 향해 나아갔지만 돌이켜 보면 아쉬움이 없는 것도 아니다. 총신의 동문으로, 선후배로 학문의 길을 걸었던 친구들 몇 사람을 소개하려고 한다.

 

이종윤 박사

 

단아한 신사의 모습으로 제 길을 가고 있는 이종윤 박사는 필자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동기 동창이다. 그와 나는 허허로운 사당동 골짜기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연세대학교 신학과 출신으로 이미 신학의 맛을 알고 입학한 분이었다.

그가 처음 예수를 믿은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다. 그는 당시에 담임선생이었던 김선운 목사(필라델피아의 헌팅턴벨리 장로교회 원로)의 전도로 친구 신성종과 함께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한국교회에 큰 흔적을 남긴 신학자와 목회자가 되었다.

그는 김선운 선생의 인도를 받아 충현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으며, 당시 충현교회는 고신측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 교회에서 그의 신앙이 형성되고 훗날 이 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다.

그는 총회신학교(오늘날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와서 그의 성격대로 조용한 학창생활을 했다. 그의 성격대로 동급생들과 살갑게 지내지 않아서 '거만하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그는 조용히 공부하며 연세대학교 신학과에서 함께 총신으로 왔던 신성종과만 친하게 지냈다.

그는 그렇게 총신 신대원에서 2년간을 함께 공부한 후 졸업반 때 미국 유학을 떠나서 남아있던 대부분의 학생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그 후 미국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그는 신약신학을 공부하면서 목양의 열정을 품고 있어서 필라델피아제일장로교회를 설립하여 목회하였고, 그의 후임으로는 김만우 목사가 시무했다.

그는 그 후에 스코틀랜드의 세인트 엔드류스(St. Andrews) 대학교에서 신약신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그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교수로 사역하였고, 할렐루야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목회를 통해서 신학이론을 현장에 접목시키는 실험을 계속하였다.

그 후 전주대학교 총장이 되어 기독교대학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이때 그는 할렐루야교회에서 목회를 병행하였으니 이것이 그의 사역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그 후에 충현교회 제2대 목사로 부임하였다. 이 시기는 그에게 영광인 동시에 아픔의 시간이었다. 그는 결국 한국교회에 '세습목회'라는 회오리의 진원지인 충현교회에서 사임을 하게 된다. 여러 가지 풍설이 난무한 가운데서 그가 사임하여 서울교회를 개척한 여러 해 후에 김창인 목사는 자신의 세습작업을 사과하고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종윤 목사는 충현교회를 나와서 그를 따르는 교인들과 '서울교회'를 설립하여 교회의 진정한 모델이 무엇인지 보여 주려고 노력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국내외 목회자를 위한 월요강좌 'KIMCHI 세미나'였다.

필자는 그의 초청으로 'KIMCHI 세미나'에 초청강사로 가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필자의 강의 제목은 '목회자를 위한 치유상담'이었는데, 기억에 남는 것은 그가 제일 앞줄에 앉아 강사의 강의를 열심히 기록하는 모습이었다. 이것은 지도자의 모범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대치동에 새 예배당을 건축할 때 온 정성을 쏟았다. 못자국 하나, 의자 하나에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필자는 외국서 손님이 오면 한국 교회의 모델적 교회로 서울 교회를 소개하고 이곳을 견학시킨다.

그는 서울교회를 개척한 후에 교단을 통합 측으로 옮겼다. 이것을 보고 필자는 아까운 인재를 포용하지 못하고 잃어버리는 우리 지도자들의 작태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이제 은퇴하였으며, 서울교회에서 은퇴하면서 후임으로 총신 신대원 출신의 목사를 청빙했다. 물론 통합 측의 젊은 목사들이 부글부글 끓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평생을 통해 다음과 같은 귀한 사역을 감당했다. 첫째, 신약신학자로서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였다. 이 분야에서 그의 연구서들의 학문적 가치는 귀하게 평가받고 있다. 둘째, 그는 목회자로서 성경적 교회 모델을 정립하고자 노력하였다. 유학시절의 필라델피아제일장로교회, 귀국 후의 할렐루야교회, 충현교회, 서울교회 등에서 그의 목회적 비젼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했다. 셋째, 저술가로서 전문서적과 일반 평신도용 서적을 균형있게 간행하여 사람들에게 귀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넷째, 선교운동에 대한 헌신이다. 그는 로잔위원회의 책임을 맡는 등 선교운동에 열정을 쏟았다.

자주 만나지는 못하나 들리는 소식에서 그의 건투를 알고 있다. 남은 세월 더욱 강건하기를 바라고, 오가는 소식이 아름다워지기를 기대한다.

 

정성구 박사

 

최근 들려오는 소식에 정성구 목사의 건강이 여의치 못하다는 것을 듣고 그의 쾌유를 기도하고 있다. 정 목사는 필자보다 2년 선배이다. 그러나 필자가 입학하던 무렵에 총신신대원에 오늘날의 M.Div.과정(당시에는 신과)이 생겼으니 나이 차이는 별로 없다.

나이 이야기가 나왔으니 몇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하려고 한다. 정 목사가 총신대 학장으로 있을 때다. 미국 킹스칼레지의 총장이 한국을 방문하여 우리 집에 묵었다. 남편이 그를 모시고 총신에 가서 정 목사를 소개했는데, 정 목사를 만난 후에 백발의 정 목사를 보고 󰡒한국에서는 저렇게 나이가 많아야 학장이 되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남편이 정 목사는 본인보다 한달 늦게 태어난 동갑쟁이라 하니 '자기는 65세인데, 자기보다 많은 줄 알았다며 믿을 수가 없다'고 하여 웃었던 기억이 있다.

그는 젊을 때 이미 백발이 되어 나이를 짐작할 수 없게 만들었고, 본인도 '청년 노인'이 되었다. 30대에 총신 학장이 되었고, 백발의 흰머리, 진중한 행동 등이 그러했다.

그는 38세에 파격적으로 총신대학교 학장이 되었다. 어느 이사가 신성종 목사에게 '신 교수, 신 교수를 학장시키려 하였으나 너무 젊어서 시킬 수가 없었어. 적어도 정성구 목사쯤은 되어야지'라고 하더란다. 실제로는 신 목사가 다섯 살 위였으나 그렇다고 할 수도 없어서 웃어버렸다고 한다.

정 목사를 볼 때마다 그의 집념에 놀라게 된다. 그는 한평생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칼빈에 관한 자료를 모아 '칼빈박물관'을 만들었다. 이것은 미국 칼빈대학의 헨리 미터 연구소,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칼빈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칼빈박물관'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 자료들을 총신에 모아 세계적인 칼빈연구센터가 되게 하여 이것이 우리 모두의 정신적 유산이 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 굶주려 가면서 자료를 모았고 유학시절이나 해외여행 때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칼빈'이었다. 그의 연구로 인해서 이 땅에 칼빈주의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었다.

정성구 박사는 경북 안동 태생으로 포항에서 자랐다. 고신측 교회의 학생신앙운동(SFC)에서 신앙훈련을 받았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에 시골교회에서 설교하는 '애기 조사' 노릇을 할 정도였으며, 좋은 설교자가 되기 위하여 포항 바닷가에서 목소리를 가다듬기 위한 훈련을 했다고 한다.

그는 총회신학교에 진학하여 박윤선 목사 밑에서 동산교회 전도사로 목회 훈련과 개혁신학 훈련을 받았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평생 '칼빈주의 탐구'의 길을 가게 하였다.

그는 총신대학과 총신신대원을 졸업한 후 군목으로 갔다. 그는 군목으로 있으면서 청계천 헌책방에서 <화란어 문법책>을 구해 혼자 공부하고 이것을 번역하여 프린트판으로 <화란어 문법>책을 간행하였다. 그 후에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화란어과를 세우고 주한 화란대사 부인을 교수로 청빙했으나 한국어 교수가 없었다. 수소문 끝에 <화란어 문법책>을 출판한 젊은 군목을 교수로 초빙했는데, 정 목사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렇게 하여 그는 외국어대학과 총신대학에서 화란어를 가르첬다.

그는 사당동 골짜기에서 학생, 강사, 교수, 학장에 이르기까지 평생을 보냈다. 여러 가지 재능을 가진 그는 이 땅에서 귀한 사역을 감당했다.

그는 명설교가이며 프로급의 노래 솜씨, 전문가적인 글 솜씨, 미술대회에서 대상을 받을 정도의 화가이기도 하다. 또 장서 분야에서도 탁월하여 한국장서가협회 회장을 맡을 정도였다.

그는 한평생 글쓰기에 힘을 쏟았고 30권의 전집을 간행하였으며, <은총의 포로>라는 회고록을 내기까지 했다. 하나님의 뜻은 알 수 없지만 지금 그가 떠난다면 너무 이르다는 생각이 든다. 친구로서의 바람은 그가 가진 재능을 활용하여 후대를 위하여 좋은 작품을 더 많이 남기면서 남은 세월을 더욱 셈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정 박사와 필자는 학교 선후배로, 동료 교수로 사당동에서 한평생을 같이 보냈다. 그의 딸 정신애 박사와 필자의 큰딸 김성혜 박사는 초등학교 동기 동창이기도 하다. 이렇게 사람의 인연은 대를 이어가면서 계속되는 것 같다.

'칼빈과 칼빈주의에 미친 사람'이라고 불리우는 그는 우리 시대의 보배이다. 수집하고 정리하는 그의 일상이 오늘의 거대한 자산을 만들었다. 칼빈을 해석하고 아브라함 카이퍼를 소개한 그의 노력으로 이 땅에 개혁신학의 열정을 꽃피웠다.

그가 아프다는 소문이 건강해졌다는 소식이 되어 전해졌으면 좋겠다. 그의 풍성한 자산들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되기를 바란다.

 

박형용 박사

 

사람들은 그의 이름 때문에 혼란을 겪는다. 우리의 스승이신 조직신학자 박형룡 박사와 우리의 친구인 신약신학자 박형용 박사는 한글로도 한문으로도 이름이 다른 사람이다.

박형용 박사는 필자보다 총신에 한 해 늦게 입학한 후배이다. 필자가 62회, 박 박사가 63회, 옥한흠 목사가 64회 졸업생이다. 필자의 선배로는 정성구 목사가 60회, 서철원 목사가 61회이다. 해병대가 아니니만큼 기수가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같은 학교, 같은 캠퍼스에서 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라는 의미일 뿐이다.

그는 총신을 마치고 미국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으로 유학을 가서 신약신학 전공으로 Th.M. 학위를 받았고, 남부의 에모리대학교에서 Ph. D.학위를 받았다. 그 후 그는 미국장로교회(PCA) 선교사 신분으로 한국에 와서 총신에서 교수생활을 시작했다.

필자와는 동료 관계로 총신에서 가르치는 사역을 하다가 합동신학교가 분리되어 나갈 때 박윤선, 신복윤, 윤영탁, 김명혁 교수등과 함께 나갔다. 교단 분열에는 명분이 있어야 하지만 분열한 학교 이름이 '합동'이니 아이러니하다. 공식적인 이유는 많이 있겠지만 바닥에 깔려있는 것은 인사 문제였다. 38세의 '젊은' 정성구 목사가 학장이 되자 원로, 중견 교수들이 반발하였고, 이러한 이사회의 독단 내지 횡포에 항거하여 세워진 것이 합동신학교임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선후배요 동료였던 우리들은 이렇게 하여 갈라져서 서로 다른 신학교에서 사역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교류의 기회가 적었고 각자 자기의 길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들려오는 소식들을 통해 그의 건재함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의 사역을 지켜보면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본다.

첫째, 그는 교수로서 평생을 보냈다.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이 그의 책무였다. 총신과 합신 그리고 여러 신학교에서 교수로서의 직무를 성실하게 감당하였다. 그러니 그의 삶은 '선비의 삶'이었다.

둘째, 그는 교육 행정자로 봉사했다. 그는 합신 총장,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을 역임하는 등 󰡐전공이 총장󰡑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다른 경륜과 섬김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그에게 이런 장점이 있기에 어려운 신학교육 기관의 행정 책임자로 이 일을 감당해 왔다. 교육 책임자는 너무 앞서도 안 되고 너무 뒤쳐져도 안 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임을 감안할 때 그의 지혜가 놀랍다고 하겠다.

셋째, 그는 저술가로 헌신했다. 신약 주해서를 비롯하여 신약신학 관련 저서들을 통해 그의 연구실적을 구체화하였다. 이것은 그의 꾸준한 탐구의 결과이기에 우리의 소중한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근엄하거나 권위를 내세우는 스타일이 아니라 부담없이 소통할 수 있는 소탈한 성품을 가지고 있어서 이것이 그의 인간관계의 장점이었다고 기억된다. ◇


 


 

정정숙 박사(사진)는 서울여자대학교에서 사회학(문학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신학석사), 이화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교육학(교육학석사), 미국 리폼드신학대학원(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에서 기독교교육학(기독교교육학석사)을 전공하였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소재한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상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목회상담학박사)를 받았다. 또 미국 로욜라대학교(Loyola College of Maryland)에서 이상심리학을 전공하였고(Ph.D.Cand.), 남아프리카공화국 스텔렌보쉬대학교(University of Stellenbosch)에서 기독교상담학을 전공하여 신학박사(Th.D.) 학위를 받았다.

그후 정교수는 36년간 총신대학교 기독교교육과 상담학 교수․상담대학원장․교육대학원장․사회복지대학원장․도서관장․기독교교육연구소장 등으로 섬기다가 은퇴하였다. 정교수는 또한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의 실천신학 Adjunct Professor로 섬겼다. 정교수는 또한 한국성경적상담학회장, 한국인간발달학회 이사, 미국상담학회(ACA)와 미국 심리학회(APA), 그리고 미국기독교상담학회(AAPC)의 정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뿐만 아니라 정교수는 서울 역삼동에 한국상담선교연구원을 개원하여 목회자와 사모, 평신도를 위한 상담교육과 실천에 힘써왔으며 계간학술지 「상담과선교」를 창간하여 84호까지(2014년 겨울호 현재) 발행해 왔다. 정교수는 또한 2012년 월간 <창조문예>의 신인작품상 현상모집 수필부분에서 신인작품상을 수상하여 수필가로 등단했다.

저서와 논문 및 수상으로는 운정 정정숙 전집(전35권)과 기타 10권의 저서와 34권의 역서 간행 및 102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 가운데서 「기독교상담학」은 기독교출판문화상 신학부문 최우수상을 받았고, 일본어로 번역 출간되었으며(일본 생명의말씀사), 중국어로 번역이 끝나 중국과 대만에서 출간중이다. 「인간발달과 상담Ⅰ,Ⅱ」는 총신학술 최우수상을 받았고 은퇴시에는 대한민국 근정포장 및 훈장(이명박대통령상)을 받은 바 있다.

현재는 총신대학교에서 명예교수로 섬기면서 일본 고베신학교 초빙교수로, 한국상담선교연구원 원장으로, 한국성경적상담학회 회장으로 사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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