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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길로 간 사람들 [13]

[ 2023-03-03 09:34:40]   

 
 
세상 영화보다 주님만 바라보고


정정숙 박사

(25) 성경적 개교회주의자 백영희 목사


한국교회사에서 백영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는 다양한 대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극보수적인 신앙공동체 지도자라고 자리매김 하고 있습니다.

백영희의 삶과 사상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그것은 드러내기를 싫어하는 그 공동체의 특성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의 생애와 사상을 연구한 책이 두 권 있습니다. 생애를 다룬 전기로는 박선혜, 이 시대를 위해 주신 하나님의 사람 백영희 (상)(하)(여수: 백영희목회연구소, 2014)가 있고, 사상을 연구한 책으로는 김남식, 백영희 연구(서울: 도서출판베다니, 2015)가 있습니다.

백영희는 1910년 7월 29일 경남 거창군 주상면 도평리 1045번지에서 백남칠과 정판임의 7남매 중에서 2남으로 태어났습니다. 9세 때(1918년)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고, 11세 때에 야학에서 2개월간 신학문을 배우다가 웅양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5학년 2학기까지 공부하고 가정 사정으로 중퇴했습니다.

그는 1926년에 일본으로 가서 3년간 탄광, 공장 등에서 노동자로 일하다가 1928년 11월에 귀국하여 개명리의 이경순과 결혼했습니다. 1920년 9월에는 탁주제조업 면허를 받아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백영희가 신앙을 접하게 된 것은 1936년 6월에 부인 이경순을 농산교회에 먼저 보내고 그도 뒤따라 교회에 나갔습니다. 1937년 1월 31일에 호주장로교 선교사 토마스 코드렐(한국명 고도열, 1903-1982)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성경을 배우고 싶어 진주성경학교에 입학해 예과와 본과 1학기를 공부한 후 건강 문제로 중단했습니다. 이 짧은 기간에 최상림 목사와 권임함(Frank William Cuningham) 선교사의 감화를 받았습니다.

신사참배 강요의 바람이 불자 그가 나가던 농산교회에서 목회자로부터 교인들까지 모두가 신사참배를 하였습니다. 믿은 지 얼마되지 않는 그는 무어라고 말할 처지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가 살고 있는 동리에서 전도한 10여 명이 교회까지 20여 리 길을 가기 어려워서 1939년에 개명교회를 개척하고 그가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교회 출발은 10명 안팎이었지만 신사참배 탄압의 기간에 장년반 40명에 주교생이 많았으나 모두 참배하지 않았습니다.

백영희의 신앙 형성과 헌신에는 주남선 목사(수진성도, 거창읍교회)의 영향이 컸습니다. 백영희는 1949년 5월 1일 위천교회에 부임했습니다. 여기서 ‘위천교회 주일학교의 국기배례 환란’을 겪었습니다.

이 사건은 한국교회사의 중요한 사건입니다. 1948년 9월 - 1950년 4월 기간에 국기배례를 강요했고 위천교회 소속 주일학교 학생들이 이를 거부하자 사회적 문제가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은 후 1950년 4월 25일 국무회의에서 국기배례를 ‘국기에 대한 주목으로 바꾸고’  ‘관보 제355호 국무총리 훈령 제430호’로 발표했습니다[이 사건의 전말에 대해서는 이영인, 위천교회 주일학교의 국기배례 환난: 국법을 바꾼 주일학교(n.p.: 도서출판 명법, 1997)과 김남식, 교회와 국가의 갈등 : 국기 문제를 중심으로(서울: 도서출판 베다니, 2018)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백영희는 1950년 6월 고려신학교에 입학하고, 1952년 7월에 부산서부교회에 부임하여 새로운 사역의 장을 열었습니다. 그는 1954년 6월에 고려신학교 제8회로 졸업하고 강도사 인허를 받았습니다. 그는 성도간의 세상 법정소송을 반대하여 고신 측 교회 지도부와 갈등이 노골화되고, 1959년 4월에는 강도사 해임, 이어서 서부교회 해임, 고신 측에서 제명되었습니다.

백영희는 ‘개교회주의’를 지향하였고 이것을 발전시켜서 ‘예수교장로회 총공회’라는 독특한 교회정치 형태를 형성했습니다. 서부교회가 발전하자 이단 시비에 휘말렸습니다.

백영희가 ‘한번 중생 된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이 흔들릴 수 없다’고 하자 그의 제자 중 한 사람인 한종희가 이단이라 주장하여 그 파장이 컸습니다. 그러나 한종희는 후에 친필 사과문을 보내어서 지난날의 주장을 취소했습니다(그 사과문의 사본이 우리 한국상담선교연구원 연구실에 있습니다).

백영희의 사역은 확장되어 나갔습니다. 지리산의 여름수련회에는 매회 4~5천 명이 참석하였고, 주일학교는 매주 2만 명이 모이고 교통순경이 교통정리를 할 정도였습니다(이 사실을 조갑제 기자가 국제신문에 보도했습니다).

백영희는 1989년 8월 27일 주일 새벽 5시에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다가 한 괴한의 칼에 찔려서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백영희의 삶은 하나님만 바라보는 하나님 중심주의였습니다. 시작도 하나님이고 마침도 하나님입니다. 그는 성경주의자였습니다. 성경의 권위에 따르고 말씀만을 선포하였습니다. 184권으로 출간된 <목회설교록>에서 그의 성경중심 신앙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는 교회정치를 싫어하였고, 성도간의 법정 송사를 반대했습니다. 그의 검소한 삶은 헌신의 징표였습니다. 그러나 오해도 받고 이단시비도 당했습니다. 그는 이런 시를 남겼습니다.

“일획이 천지보다 무거운 권위를 가진 말씀!
인생구원에 유일이 되는 말씀!
이 가치를 누가 알대로 알고
이 땅을 통과하는 자 있으랴
다 알다가 갔고 다 알고 가신 분은 한 분 뿐이셨다.”


(26) 성경 강해에 집중한 최정원 목사

최정원 목사는 동양선교회 성서학원(오늘의 서울신학대학교) 출신의 성결교 목사로 사역했습니다.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서 한국성결교회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884년 의료선교사 알렌이 입국하고, 1885년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입국하므로 이 땅에 선교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여러 교파의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각 지방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성결교의 전래는 좀 늦었습니다. 1907년 3월 동양선교회가 운영하는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한 정준, 김상준이 귀국하여 그해 5월 2일에 경성 종로 북창동에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세운 것이 한국의 첫 성결교회이며 이것이 오늘의 중앙성결교회입니다.

성결교회는 초기부터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노방전도를 하였는데 한국에서도 이런 방법을 실시하여 많은 결실을 거두었습니다(김교신이 일본 도쿄에서 성결교회의 노방전도로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례가 있습니다).

성결교회가 경상북도에 처음으로 전래된 것은 1914년에 김천 지방이었고, 이어서 군위 지방에, 또 상주와 대구 지방에 전래되었습니다. 대구 지방은 1923년 6월 26일에 대구 덕산동 86번지에 있던 일본인 가옥 7평을 세를 얻어서 대구교회가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오늘의 봉산성결교회입니다.

최정원은 1912년 1월 19일(음)에 전남 고흥군 금산면 대흥리에서 부유한 가정의 유복자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의 신앙 속에서 자라서 14세 때에 시골교회 집사가 되었습니다.

최정원은 1935년(25세)에 대구 비산동교회를 개척하고 목회를 했다. 그 후 공평동성결교회를 담임하는 성결교회의 중견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 강요의 바람이 휘몰아쳤습니다. 최정원은 기도하는 가운데 ‘계시’를 받았습니다(최정원 목사 측에서 ‘계시’라고 표현하니 여기서도 그대로 사용함을 밝힙니다). 그가 받은 ‘계시’는 동양선교회 성서학원이 신학교로 인가를 받고, 일본인 교수가 부임하고, 성결교회가 신사참배와 재림신앙을 강조하기 때문에 일본 총독부에 의해서 해산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최정원은 교단 지도자들에게 ‘계시’의 내용을 설명하고,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성서학원의 문을 닫자고 진언했습니다. 그러나 교단지도자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신학교 인가를 받고, 일본인 교수가 부임하고, 결국에는 일본 총독부가 성결교회 교단을 해체시킴으로 성결교회가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신사참배 거부로 어려움을 겪다가 1943년에 중국 연변 지역으로 가서 전도하다가 1944년 7월경(32세)에 귀국하였습니다.
8.15 해방을 맞아 9명의 목사들이 인천 작약도에 모여서 교단 복구회의를 가졌고, 아현성결교회에서 복구총회로 모였습니다. 그러나 교단은 분규로 어려움을 겪었고, 1950년 6.25 한국전쟁의 위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최정원은 총회의 전시대책위원장과 신학교 부학장직을 맡고 있었는데 교단의 분규를 수습하려고 노력했으나 도저히 수습되지 않아서 성결교회를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1952년 4월 12일 대구 봉산성결교회에서 모인 성결교 총회 마지막 날 조용히 독립을 선언하고 나와서 ‘임마누엘 예수교’라는 새로운 교단을 세웠습니다.

최정원의 사역에서 몇 가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임마누엘 연경원 사역입니다. 연경원이란 ‘성경을 연구하는 곳’으로 성경학교 또는 신학교입니다. 그가 경성신학교(오늘의 서울신학대학교) 부학장의 경력을 가졌고,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잘 가르치는 사람으로 이름이 났습니다.

그가 가르치던 임마누엘 연경원은 정부의 법인 인가를 받은 단체입니다. 후에 이 인가를 합동 측 대구신학교(오늘의 대신대학교)가 이어받아 인가있는 학교로서의 바탕을 이루었습니다.

둘째, 인재 양성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최정원의 문하로 몰려들어 성경을 배웠습니다. 이들이 오늘날 대구와 경북 지방 합동 측 교회의 중심인물이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김덕신 목사(대구 동부교회, 총회장 역임), 미국의 홍의만 목사(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 근무), 장로로는 김추호(이 교단의 첫 장로, 대신대 이사장을 역임한 김신길 장로의 부친), 박기동, 우성기(서성로교회, 부총회장 역임), 정규만(서현교회) 등 막강한 인재들을 키워내었습니다.

셋째, 성경강해의 실시입니다. 최정원은 1983년 12월 4일, 서울 장충동의 대학문화원 강당을 빌려서 <연경회>를 시작했습니다. 그의 성경강해는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큰 감화를 주었습니다. 주일 오후의 집회에는 타교회에서 5~6백 명이 모여 들었습니다.

새벽, 낮, 밤의 모든 설교가 성경강해였습니다. 교인들은 성경을 열심히 읽었고 암송했습니다. 그래서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가르치고, 성경대로 사는’ 성경신앙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 교단이 오래 가지 못했던 것은 두 차례에 걸친 장로교회와의 합동운동으로 대부분의 교회들이 합동 측과 통합 측으로 가고 몇 교회만이 그 정신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2010년 3월 26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데 향년 99세였습니다. 분쟁과 혼란으로 가득한 오늘의 교회에서 성경신앙을 파수하기 위한 몸부림이 최정원의 사역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는 특이한 방식을 택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발견한 영원한 진리를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한 성경적 신앙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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