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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길로 간 사람들 [12]

[ 2023-01-27 10:24:22]   

 
 세상 영화보다 주님만 바라보고
                                                                                    정정숙 박사

 

(23) 반공운동의 중심에 선 최희천 목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공산주의에 대하여 태생적으로 반대합니다. 그것은 공산주의가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을 부인하는 인간적 사상체계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공산주의가 스며든 것은 1930년대에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지식인들 사회에 퍼져 나갔고, 8.15 해방 이후 소련의 후원을 받은 공산주의자들은 북한 땅을 점령하고, 한반도를 적화 통일시키기 위해 1950년 6.25 한국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공산당이 지배한 해방 공간의 북한에서 교회의 청년들이 힘을 합쳐서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주일 선거를 반대하는 운동을 하다가 박해를 당했습니다.
 
그중에 함경도 함흥 태생의 최희천(崔熙天)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 청년들을 모아서 반공운동을 하다가 소련군에게 체포되어 함흥 감옥에서 옥살이를 했습니다.
 
그때 함께 한 동지들은 김성원(후에 장로가 되고 건국대학교 농대 학장을 역임했습니다), 오약백, 전영영 등이었습니다. 이들은 관북지방 청년들로 물불을 가리지 않는 한창의 나이였습니다.
 
최희천은 감옥에서 풀려난 후에도 동지들과 반공애국운동을 계속했습니다. 전쟁이 터지면서 사태가 악화되어 공산당에게 체포됩니다. 이들에게 사형언도가 내려졌고 손목이 묶인 채 사형장으로 끌려갔습니다.
 
수레에 실려서 사형장으로 가다가 후미진 곳에서 최희천은 수레에서 뛰어내려 도망을 갔습니다. 호송하던 인민군이 추격하려고 해도 수레에 탄 다른 사람들이 소동을 일으키자 최희천을 쫓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최희천은 38선을 넘어서 남하를 했습니다. 6.25 한국전쟁에서 국군이 북진하여 함흥을 수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 오약백 등 피 끓는 관북 청년 80명을 이끌고 도보로 함흥으로 갔습니다.
 
이들은 각자 두 개의 수류탄을 허리에 차고 갔는데 하나는 적에게 던지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폭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북진 도중에 국군 낙오병 30명을 만났고, 국군 소령의 지휘 하에 함께 북진을 하였습니다.
 
함흥에 도착한 이들은 유엔군에 협조하여 치안을 유지하며 행방불명이 된 애국인사들을 찾는 활동을 하였습니다.
 
국군의 북진으로 후퇴하는 공산군들은 갖은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함흥 감옥에 애국인사들을 수감시켜놓고 불을 질렀습니다. 애국인사들은 산 채로 불에 타죽었습니다.
 
함흥 감옥 뒷마당의 우물에는 애국인사 남녀 70여명을 무더기로 포개어 넣고 그 위에 돌로 눌러 놓았습니다. 총알을 아낀다고 도끼나 쇠뭉치로 뒤통수를 때려죽인 시체가 가득한 참혹한 참상이었습니다.
 
그 버려진 시체들 속에 함흥의 기독교여성지도자 김경순 전도사도 있었습니다(김경순 전도사의 순교에 대해서는 정정숙, 한국기독교여성인물사<서울: 도서출판 베다니, 2020>, 241-243면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공산당들의 만행은 악랄하였습니다. 함흥에서 덕산으로 가는 니켈 광산 구덩이 속에도 애국청년들을 무더기로 죽인 시체가 가득하였고, 그들을 묶었던 쇠사슬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최희천과 동지들의 활동도 잠깐이었습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쟁은 역전되기 시작했습니다.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오자 유엔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피난민들은 함흥과 흥남 부두로 몰려오기 시작했으나 그들을 수송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종을 예비하여 두셨습니다.
 
유엔군 사령관 아몬드 소장의 통역이요 민사고문이었던 현봉학 박사(의사, 현항국 목사의 차남)의 노력으로 5천명의 기독교인들이 미군 수송선을 탈 수 있었습니다.
 
최희천 등의 청년들은 함흥 황금정을 통해서 흥남 항구로 갔습니다. 피난민과 후퇴 군용 차량으로 인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흥남 부두에 5만 명의 피난민들이 모여서 노숙생활을 하며 기다림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세계전쟁사에 유례가 없는 ‘흥남철수작전’이 전개 되었습니다. 이미 여러 번 영화화 된 기적의 사건입니다. 이들은 미군 수송함을 타고 거제도로 왔습니다.
최희천 일행도 거제도로 왔고, 최희천은 서울에 와서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습니다. ‘하나님의 군사’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입학했고, 후에 목사가 되어 서울의 천호동 가무나리교회에서 시무하다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유언으로 “괴로운 세상 버리고 천국으로 가는 것이니 장례식이라 부르지 말고 환송식으로 예배 드려 달라”고 했습니다. 그의 유언대로 장례식은 ‘최희천 목사 환송식’이라는 이름으로 드려졌습니다.
 
지금까지 한 젊은 청년의 삶의 자취를 그렸습니다. 공산당의 무신론과 싸우다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 평생을 바친 순박하고 철저한 신앙의 좁은 길로 갔습니다. 


(24) 실천적 신앙을 구현한 김현봉 목사


다른 하나의 흐름은 김현봉 목사와 그의 동지들입니다. 이들은 현실교회의 문제들을 보고 성경중심의 개교회주의를 주장하는 교회갱신운동의 실천자들이었습니다.
그 중심에 김현봉(金顯鳳) 목사(사진 왼쪽)가 있었습니다. 그는 1884년 경기도 여주군 가내면 건장리에서 태어났으나 자란 곳은 서울 서대문이었습니다(많은 자료에는 김현봉이 서울에서 태어났다고도 하는데 경기도 여주가 그의 출생지입니다). 그에게는 형과 누나가 있었습니다.

그의 형님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독립운동을 위해 러시아 지역으로 갔고, 누님도 시집을 갔으므로 그는 YMCA 무도관에 가서 검도와 유도를 배우면서 성장했습니다.

그는 22세 때인 1906년에 친구들과 함께 동대문감리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1912년 양정의숙을 졸업하고 배화학교 교사생활을 하다가 일제의 심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 월남 이상재 선생의 소개장을 들고 서간도지방으로 건너갔습니다.

그곳에서 학교를 세워서 조선인 어린이들에게 한국 역사를 가르치다가 러시아영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로 옮겨가서 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이때 훗날 남대문교회에서 시무한 오순영 목사(황해도 장연 출신, 일본 와세다대학교 졸업)를 만나서 함께 사역을 했습니다.

1923년 말에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국내로 이송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감옥 안에서 성령의 뜨거운 역사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누님과 생질이 신원보증을 서서 보석으로 석방된 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27년 제23회로 졸업하였습니다. 졸업 동기 중에는 오종덕 목사도 있습니다.

1923년에서 1927년까지 평양신학교 재학 중에는 평북 정주교회, 관악 보리말교회, 시흥 구읍교회 등지에서 조사로 시무하다가 1928년(44세)에 경기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김현봉은 1928년에 세브란스병원 간호사 박천선(당시 28세)와 결혼했고, 공덕리교회를 담임했습니다.

공덕리교회의 장로 가정에서 주일 성수를 하지 않는 일로 인해서 갈등이 생겼습니다. 김현봉은 1932년 3월 31일 아현동 37번지에서 일곱 사람이 모여서 개척예배를 드렸고 이 교회가 바로 그가 평생을 사역한 아현교회입니다.

그 당시 아현동 37번지는 공동묘지였습니다. 서울의 빈민들이 이곳으로 몰려와서 살고 있는 빈민촌이었습니다. 또 현지동에서 큰 불이 나서 많은 이재민이 생겼는데 이들도 이 동리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김현봉은 가난 속에서도 빈민들과 함께 살며 전도했고 기도생활에 몰입했습니다. 그의 기도생활은 특이했습니다. 저녁 9시쯤 산에 올라가 기도했고 다음날 새벽 6시에 하산하여 냉수마찰하고 8시에 심방을 나갔습니다. 나중에는 그의 기도생활의 패턴이 바뀌었습니다. 저녁 6시에 잠자리에 들고, 새벽 1시에 기상해서 식사하고 묵상하다가 통금이 해제되면 연세대학교 뒷산 병원사 쪽으로 기도하러 갔습니다.

이렇게 전도하고 기도생활을 하며 신사참배의 모진 광풍을 이겨내었습니다. ‘아현교회’는 이름만 있었지 교회 간판도, 종탑도, 십자가도, 의자도, 성가대도 없는 교회였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해방을 맞았습니다. 한국교회는 신사참배의 죄를 회개하기보다는 교권 다툼으로 인한 분열을 계속하는 것을 보면서 김현봉은 기성교회와 거리를 두고 노방전도에 매진했습니다. 6.25 한국전쟁 때에는 피난을 가지 않고 삼각산 어느 굴속에 숨어서 29일간 금식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는 개교회주의로 인해서 1953년에 총회에서 제명되었고(69세), 그 후 개교회주의를 강하게 주장하면서 성경을 열심히 가르쳐서 교회가 크게 부흥하였습니다.

김현봉은 아현동 주변의 집들을 한 채씩 사서 집 없는 교인들에게 주어서 살게 했습니다. 그렇게 산 집이 200여 채가 되었습니다.

김현봉은 여러 면에서 기인이었습니다. 작은 키에 땅땅한 몸매를 가진 그는 언제나 검정 무명 두루마기에 고무신을 신고 다녔고, 머리는 중처럼 빡빡 깎고 다녀서 별명이 ‘중목사’였습니다.

그는 기독교의 교권주의, 형식주의를 배격하고 예배당 건물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교인이 늘어나면 예배당 벽을 헐어서 넓혔고, 지붕도 벽도 손수 쌓아 올렸습니다.

예배드릴 때는 마루 바닥에 무릎을 꿇고 좌우로 정렬하여 정좌하여 드렸고, 보통 2시간씩 하는 설교를 모두 필기하게 하는 특수한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참석자가 1,100명이 넘었습니다.

그는 검소한 생활을 하는 목사로 유명했습니다. 1천명 이상이 모이는 대교회 목사가 검은 한복에 고무신을 신고 생활을 했습니다. 교인들 중에는 그를 따라서 한복을 입는 성도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는 사경회를 인도하고서도 사례금을 받지 않았고, 결혼식도 20명만 오게 하고 기도해 주고 ‘잘 살아라’는 한 마디로 끝이었습니다.

그는 1965년 3월 12일 9시 50분경 자택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81세). 그의 장례식은 그의 정신에 따라서 리어커에 시신을 싣고 가서 화장을 하였습니다. 그의 장례는 이병규 목사 (창전교회)가 집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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