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1 image2 image3
로그인회원가입아이디/비밀번호 찾기
2023년 3월 23일
회사신문보기총회교계 기관교육 선교신학 신앙논단 기획 | 오피니언
 
회사소개 한국교회문제 협력상담소 상담게시판 공지사항

사설
방패
독자질의
이슈와 해설
PDF 신문읽기
포토뉴스
Home > 논단기획 > 기획연재
좁은 길로 간 사람들 [11]

[ 2022-12-20 10:59:11]   

 
 
세상 영화보다 주님만 바라보고
 
                                                                                정정숙 박사 (총신대학교 명예교수)                                                                                                       


(21) 죽음의 골짜기에서 살아난 방학성 목사


전쟁은 살상의 재를 온 세상에 뿌립니다. 1950년의 6.25 한국전쟁은 남북한의 전쟁인가 하면, 유엔 참전 16개국과 중국과 소련이 개입한 국제전쟁이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이 전쟁은 ‘사상전쟁’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의 불법 남침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는 비극의 소용돌이였습니다.

우리 교회들은 인적, 물적 피해를 입었습니다.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한 이들이 수 없이 많았습니다(6.25 한국전쟁의 순교자 명단에 대해서는 김남식, <6.25 한국전쟁과 순교자>, 서울: 도서출판 베다니, 2020 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도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구한 이들도 있습니다. 그중 한 분이 방학성(方學聖) 목사입니다. 

그는 황해도 송화에서 5만 평의 과수원을 경영하면서 무초리교회를 시무하고 있었습니다.
공산군들이 남침하였다가 유엔군의 참전으로 국군이 파죽지세로 북진할 때였습니다. 인민군과 빨치산들은 산으로 도망하면서 우익 인사들의 살해계획을 하였습니다. 인민군 1인당 우익 인사 20명을 살해하라는 분담 책임이 내려졌고, 학살 1순위가 기독교인들이요, 그 다음이 우익 인사들이었습니다.

공산당들은 교회와 병원들을 불사르고 목사와 의사들을 죽이려 했습니다. 이 정보를 미리 입수한 이들은 서로 연락하여 도피하였으나 정보를 듣지 못한 이들은 집에 있다가 한 밤중에 납치되어 달구지에 실려서 산속 광산 구덩이에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방학성 목사는 연락을 받지 못하고 집에 있다가 아침에 예배를 드리려고 교회당 종을 치자 무장 인민군 50여명이 몰려와서 교회를 포위하고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인민군을 인솔하고 와서 교인들을 일일이 지명하여 죽이게 하는 지휘자는 그 교회의 조 집사라는 자였습니다.

놀란 여전도사와 여성도들이 '조 집사님 이것이 어찌 된 일이요?'라고 물으니 묻는 성도들을 무조건 총살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18명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교인들은 방 목사를 옷장 안에 숨기고 이불로 막아 놓았습니다. 그때 방 목사의 아들이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일 년 동안 숨어 있었는데, 지붕 밑 다락방에서 빠져 나와서 지붕으로 도망가려다가 인민군의 총에 맞아 밑으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인민군들은 방 목사를 잡기 위해 온 집안을 수색하고 교인들을 폭행하고 죽이는 것을 보고 자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것이 가슴 아파서 숨은 곳에서 자진하여 나와 체포되었습니다. 그때 방 목사의 나이 66세의 노령이었습니다. 새끼줄에 묶여서 마을 인민재판장으로 끌려갔습니다.

인민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폭도들은 군중들을 향하여 '이 놈을 죽여야 좋소? 그게 나쁘오?'라고 묻자 교회에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청년 하나가 일어나서 '목사야 무슨 죄가 있소?'라고 하자 그도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습니다.

군중들이 '죽이라'고 외치자 사형이 결정되었고, 방 목사를 논두렁에 끌고 가서 그 교회 장로 1인, 집사와 남전도사, 그리고 불신 청년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하고 수류탄 심지를 뽑아놓고 그들은 도망쳤습니다.
방 목사는 마지막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 같은 것도 순교자의 반열에 참여케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 순간에 수류탄이 ‘꽝’하고 터졌습니다. 방 목사는 그대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순교자의 반열에...'

폭도들이 도망친 후 교회의 여신도들이 그 논두렁에 와 보니 다른 시신들은 가족들이 다 찾아갔는데 방 목사의 시신만 그 자리에 남아 있었습니다. 여신도들이 들것을 만들어서 방 목사의 시신을 옮겼습니다.
옮기면서 보니 방 목사의 손가락이 움직였습니다. 여신도들은 너무 기쁘고 놀라서 '목사님이 살아 계신다.'고 외치고 사택으로 모셨습니다. 

방 목사는 왼쪽 다리가 수류탄 파편으로 상하였습니다. 교인들은 의사도 없고 약도 없는 형편에서 2개월간 정성을 다하여 치료해서 방 목사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방 목사의 아들도 총에 맞고 지붕에서 굴러 떨어졌는데 죽은 줄 알고 버려두었다가 폭도들이 확인하러 와서 보니 죽지 않고 있었으나 총알이 아깝다고 목을 조르자 혀가 내밀어진 것을 보고 죽었다고 그냥 갔는데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살아나는 기적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방 목사 부자가 죽음의 문턱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 백성을 불 가운데서, 물 가운데서 구원하여 주십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6.25 한국전쟁의 3년 1개월간 전사자 수는 한국군 22만5천7백84명, 유엔군 총 26만4천5백20명에 달하였고, 부상자나 행방불명자, 유엔군 등을 합쳐서 총87만6천5명이었고, 민간인의 숫자는 헤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사람들 중에서 기적적으로 살려주신 역사가 있습니다. 방 목사의 구사일생은 하나님의 섭리요 사랑이십니다. 

(22) 포로로 끌려간 마리 마들렌 수녀

개신교에만 순교자나 수난 성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가톨릭교회에도 수난 당한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6.25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공산당에 의하여 수난 당한 이들 가운데 마리 마들렌 수녀를 소개합니다.
그는 프랑스 태생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무렵인 1940년에 서울에 와서 수유리에 ‘깔멜수녀원’을 세운 분입니다.

그는 6.25 한국전쟁 때 깔멜수도원 수녀 5명과 함께 공산군에게 체포되었습니다. 다른 수도회의 신부와 수녀들과 함께 북으로 납북되는 ‘죽음의 행진’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부와 수녀, 민간인, 미군 포로 등이 북으로 끌려가는데 평양, 초산, 만포, 중강진 등지를 추위 속에 행진했습니다. 많은 신부와 수녀들이 중도에서 죽었고, 깔멜수녀회의 수녀 2명도 죽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3년이 지나서 마리 마들렌 수녀가 용케도 살아 있다는 정보가 있어서 외교적 채널을 통한 교섭으로 석방되어 모스코바를 경유하여 프랑스 본국에 돌아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왔습니다. 

그는 그가 겪은 고난의 이야기를 정리하여 <귀향의 애가>라는 수기를 간행하였습니다.
그는 모진 ‘죽음의 행진’으로 시력을 잃었고, 어둠 속에서도 빛 되신 주님을 의지하여 이겨 나갔습니다. 그의 헌신적 사역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40년간 한국 수도원에서 봉사하다가 1979년 12월 5일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의 수기에 보면 고난의 행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1950년 여름부터 11월 17일까지 납북된 포로들이 북한의 최북쪽 중강진까지 죽음의 행진을 한 것은 인류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7백 명의 미군 포로가 맨 앞에 서고 그 뒤로는 신부와 수녀들이 둘 씩 짝을 지어 묵묵히 뒤따라갔습니다. 추운 밤에는 옥수수 밭에서 추수하고 남은 옥수수 마른 잎사귀를 모아다가 깔고 자야 했습니다. 아침이면 남자들의 수염에는 서리가 하얗게 내려 있었습니다.

죽음의 행진에서 죽어간 미군 포로들의 시체가 여기 저기 버려져 있었습니다. 그들을 인솔하고 가는 ‘호랑이’라는 별명의 지휘관은 '행진 대열에서 낙오되지 말라. 병자뿐만 아니라 시체까지도 끌고 가야 한다.'고 포로들을 위협했습니다.

수녀들은 서울에서 수녀원 안에서 신던 여름용 샌들을 신은채로 끌려갔습니다. 어떤 수녀는 철사로 꿰맨 신을 신고 가면서 걸을 때마다 찔렸고, 어떤 수녀는 나막신을 신고 있어서 얼어붙은 겨울 산의 험한 고개를 미끌어지면서 끌려갔습니다.

숨이 차서 빨리 걷지 못하면 감시병들이 총대로 찌르며 짐승 떼 몰고 가듯이 하였습니다. 사소한 명령이라도 반항하는 자는 즉석에서 총살당했습니다.

끌려가는 이들 중에 77세의 수녀원장이 있었습니다. 노령으로 인해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죽어가자 젊은 수녀가 민가에 가서 따뜻한 물 한 그릇을 구걸하였으나 물 대신에 욕만 얻어먹었습니다.

수녀들은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허리에 달고 있는 생명 같은 묵주와 십자가도 무거워서 여러 수녀들의 것을 다 모아서 어느 이름 모를 길가에 묻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길가에 버리고 가는 미군 시체를 보면 신부는 기도해 주고 떠났습니다. 이런 비극은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라 한국 전쟁이 낳은 비극의 역사였습니다.

77세의 수녀원장은 손발이 붓고 심장병 증세가 심해져서 길가에 주저앉았습니다. 감시병이 일어나라고 독촉하니 평소의 온화한 태도로 '나는 더 이상 못 가겠습니다. 정말 못 가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수녀원장을 버려두고 일행은 떠났는데 감시병은 그를 총살했습니다. 이름 모를 북한의 어느 산골, 그 추운 날에 이 땅에 와서 섬김의 사역을 감당하던 수녀원장은 그렇게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수녀원장의 임종을 지켜보던 신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 당신께 가기 위해서는 얼마나 고통을 더 겪어야 하겠습니까?' 이 신부도 그 다음날 순교하였습니다.

영하 30도의 추위 속에서도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순교의 제물이 된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이들이었습니다. 공산당의 총칼이 이들을 이기지 못하며,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바라본 사람들이었습니다.

마리 마들렌 수녀는 영하 30도의 추위 속에서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심한 영양실조와 육체의 고난으로 실명을 하여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육신의 시력은 잃었으나 영안은 더욱 밝아졌을 것입니다.
마리 마들렌은 모스크바를 거쳐서 프랑스로 갔습니다. 그는 몸을 추스른 후에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한국은 그에게 ‘고난의 땅’인 동시에 ‘기적의 땅’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까지 섬김의 삶을 살았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 기독신보 (http://www.ikidok.org)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최근인기기사
S교회 무엇이 문제였나?..
제103회 총회 둘째 날 ..
이단감별사의 거짓증언은..
교회법과헌법해설
포토뉴스
사진으로 보는 제106회 총회
공지사항
정정합니다
시스템 점검
기독신보사 ∥ 등록번호: 서울,아 01362 ∥ 등록(발행)일: 2010.09.29. ∥ 인터넷기독신보 ∥ 발행인 및 편집인: 김만규
청소년 보호정책이메일 무단수집 거부개인정보취급방침 ∥ 개인정보 및 청소년보호책임자: 김만규
서울시 구로구 오리로 1197, 118-406 (오류동, 금강수목원@) ∥ 메일주소: ikidok@naver.com ∥ 전화번호:(02)2684-1736 ∥ 팩스:(02) 2684-1737
Copyright ⓒ 기독신보. All rights reserve. 기독신보의 기사 등 모든 컨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