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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길로 간 사람들 [5]

[ 2022-06-13 14:46:33]   

 

세상 영화보다 주님만 바라보고

정정숙 박사

 

(9) 진리운동에 앞장선 김의홍 목사

이기선 목사와 함께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헌신

성결교 출신으로 혁신 복구파에서 목사안수 받아

 

많은 한국교회사 책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진리운동을 전개하다가 순교의 제물이 된 분이 있습니다. 그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분인데, 일본 선교사로 오랫동안 헌신한 임석윤 목사가 <이기선 목사와 동역자 김의홍 목사의 생애>(서울:마루뫼, 2007)를 저술하므로 김의홍 목사를 새롭게 조명하게 되었습니다.


임석윤 목사는 이기선 목사의 제자로서 북한에서 혁신복구운동에 참여하였고
, 월남하여 고신 측 목사로서 목회하다가 일본 선교사로 헌신한 분입니다. 임 목사의 노력으로 김의홍 목사에 대한 관심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김의홍은
1932년에 경성성서학원(오늘의 서울신학대학교)을 졸업했습니다. 그의 동료들은 모두 목사가 되었으나 그는 목사 장립을 받지 않고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러나 해방 후 이기선 목사의 독노회에서 심을철, 방계성 등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김의홍은 평북 정주군 대전면 운산동교회 전도사로 사역하였습니다. 그는 신학교에 가기 전에 항일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5, 6차례 투옥되기도 하였고,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신사참배 반대로 여러 번 투옥되기도 하였으나 해방이 되자 운산동교회에 부임하였습니다.


일제 말기에는 감옥에서 석방되어 친척의 과수원을 관리하며 은거생활을 하였습니다
. 이때 많은 청년들이 찾아와서 성경을 배우게 되고 특별히 '말세학'을 강의했습니다. 모여든 청년들을 위해서 마르다신학교를 졸업한 사모가 헌신하였습니다. 이때 공부한 사람 중에는 부산 송도교회를 시무하다가 세상을 뜬 최천구 목사도 있습니다.

 

해방 후 이기선 목사를 중심한 부흥운동이 일어날 때 운산동교회는 산정현교회와 함께 진리운동에 앞장을 섰습니다. 해방 후 공산당 천하가 되자 핍박의 강도가 심해졌습니다. 주일 성수 문제가 가장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113일 주일을 총선거일로 정하자 주일성수 신앙을 가진 성도들이 이를 거부하여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또 강양욱이 만든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자 미국 제국주의 추종자로 몰아서 박해를 계속했습니다.

 

운산동교회는 김의홍을 중심으로 단결하자 공산당들은 기독교에 의한 반공부락이라고 규정하고 동리를 불태워버리려고 탱크를 몰고 온다고 하였습니다. 교인들은 교회 지하실에 모여서 '죽으면 죽으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공산당의 탱크가 오지 않았습니다
. 알고보니 그 탱크가 마을에서 4km 떨어진 수로에 추락하는 사고가 일어나서 운산동교회는 불바다가 되는 위기를 면했습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 당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김의홍은 어느 목사에게 신사참배를 거부하자고 권면하니 그 목사는 '우리는 식구가 10명인데 내가 투옥되면 큰일난다. 당신처럼 부부만 사는 사람과는 문제가 다르다. 남의 딱한 사정을 생각하지도 않고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김의홍은
'목사님의 사정이 나보다 나쁘다고 하는 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목사님이 죽으면 자녀라도 있어서 대를 이을 수 있지만 나는 죽으면 자녀도 없이 망하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답변하였답니다.

 

운산동교회는 목회자와 교인의 관계가 모범적이었습니다. 운산동교회 교인들은 목사를 '하나님의 사자'로 접대하고 다른 교회들이 흉내낼 수 없는 최고의 예우를 하였습니다.


보통 일반 교회들은 목사가 집회를 자주 가면 교회를 돌보지 않는다고 비난하면서 집회 인도의 기회를 제한합니다
. 그런데 정주 운산동교회는 당회를 위시하여 전교인들이 목사의 집회를 위해서 철야기도를 했습니다.


월요일은 당회원이
, 화요일은 남자 집사들, 수요일은 여자 집사들, 목요일은 청년회 회원들, 금요일은 여전도회 회원들, 토요일은 주일학교 교사들, 주일 밤은 전교인들이 담임 목사의 집회를 위해서 철야기도를 했습니다.


교인
3백명 정도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종이 되려고 헌신하는 사람이 수십명이 되고, 젊은 청년들에게 전도사 청빙이 오면 아낌없이 보내 주었습니다. 교회의 기둥같은 청년들이 빠져나가면 교회가 어려움을 겪을 것 같은데 반대로 더욱 부흥하였다고 합니다.

 

이기선 목사는 성경을 한 장 한 장 대소지로 분류하여 가르쳤는데(이기선의 대소지 성경연구가 최근에 이병규 목사에 의해 출판되었습니다) 김의홍은 성경 전체를 몇 가지 원리로 구분하여 연구했습니다. 그는 말세학 연구에 몰두하였고, 저서로는 <신앙상식론>, <요한계시록 및 다니엘서>가 있고 많은 유고들이 있습니다.


이기선 목사를 도와서 혁신복구운동을 전개한 김의홍은
1950년 한국전쟁 중 평양수복에서 1.4후퇴 사이에 평양 산정현교회, 황해도 심촌교회, 해주교회 등에서 사경회를 인도했습니다.


1.4
후퇴 때 피난하지 못하여 황해도 심촌교회 이춘식 장로와 함께 체포되어 해주 근교의 어느 강둑 밑에서 공산당에 의해 총살로 순교당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민족을 위해서 헌신한 하나님의 종을 우리는 잊어버렸으나 하나님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10) 옥문 밖 사람 이경석 목사



트럭 운전하여 번 돈으로 옥중 성도들을 섬기다

무대 뒤에서 이름없이 헌신한 섬김의 모델

 

20여년 전에 세상을 떠난 아동문학가요 전기작가인 심군식 목사가 이경석 목사의 전기를 쓰면서 '옥문 밖 사람'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또한 심군식 목사는
<이경석 목사의 생애>라는 책의 머리말에서 '주기철 목사를 안다면 이경석 목사도 알아야 한다. 손양원, 주남선, 한상동 목사를 안다면 이경석 목사도 알아야 한다. 드러난 사람들의 뒤안길에서 말없이 봉사한 산골에 피었다 시드는 야국 같은 숨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더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했습니다.


정곡을 찌른 말입니다
. 무대 위의 사람은 박수 갈채를 받지만 무대 뒤의 숨은 봉사자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세태입니다.


오늘은
'옥문 밖의 사람' 이경석 목사의 삶의 향기를 찾아 보려고 합니다.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도 섬기는 자의 삶을 산 그를 기억하는 것이 '이름없이 빛도 없이'라는 찬송을 부르는 뜨거운 가슴일 것입니다.

 

이경석은 190888일 울산시에서 이학기와 박봉화의 삼남사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어릴 때부터 고생을 하였고, 일곱 살 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서 고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학교도 가지 못하고 있는 그에게 일본 오사카 우메다
(梅田)에 간 두 형에게서 일터를 잡았다는 편지가 왔습니다. 이경석은 1925년 봄에 형들이 있는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자동차 운전사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8개월간 자동차 조수를 하면서 기술을 배워 면허시험을 치르고 운전사가 되었습니다. 그후 그는 택시 기사가 되었습니다. 당시 택시 기사는 수입이 좋은 인기 직업이었습니다. 그가 택시 기사가 되자 주인 집의 대우도 달라졌습니다.


그는 택시
1대로 하루 2교대를 하였는데 차 주인과 기사는 7.5 2.5의 비율로 수입을 나누었습니다. 하루 20원을 벌면 기사 몫이 5원이니 큰 돈이었습니다.


이경석은 그 돈을 저금하여
1천원을 모았고, 주인에게 1,500원을 빌려서 택시 한 대를 사서 차주 기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돈을 모아서 주인의 빚을 갚고 택시 두 대를 사고 운수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사고로 운수업은 망하였고
, 그 후 그는 술먹고 유도를 하는 등 주먹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362월에 울산보통학교 동창의 여동생과 혼담이 오고가다가 결혼을 했습니다. 신부 임두연은 예수 믿는 사람이어서 이경석의 삶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오사카에서 신혼생활을 하며 이경석은 자동차 운전을 다시 하였습니다. 부인을 따라서 오사카 조선인교회로 갔으나 부인은 예배당에 들어가고 그는 깡패로 알려져 있어서 입장이 거절되었습니다.


그때 그 교회 박경석 전도사
(당시 고베신학교 재학중)가 와서 '어떻게 오셨습니까? 여기는 유도장이 아닌데요'라고 하자 '나 예수 배우러 왔소'라고 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럼 저기로 들어가 앉으시지요'라고 하여 예배당에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의 신앙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 그는 술은 끊었으나 담배를 끊지 못해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후 고향인 울산으로 돌아온 후에도 신앙생활은 계속되었습니다.

 

1940년부터 신사참배 강요가 심해졌으나 이경석은 신사참배를 거부했습니다. 그때 많은 수진성도들이 고난을 겪었습니다. 부인 임두연이 신앙의 자유가 여기보다 나은 만주로 가자고 제안하여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그들 부부는 만주로 가는 길에 금강산에 들렀습니다
. 이만집 목사(인천 숭의감리교회 이호문 목사의 조부)가 세운 수양관에서 이만집 목사와 문말례 전도사를 만나서 신앙의 지도와 격려를 받았습니다.


평양에서 오정모 집사를 만난 후에 만주에 가서 운전을 했습니다
. 그는 주일에는 운전을 하지 않고 예배를 드렸으며 수입의 십일조를 매일 떼어놓았습니다.


어느 날 평양형무소에 수감중인 최덕지 전도사의 딸 김혜수가 찾아와서 평양 감옥에
40명 가까운 목사와 전도사가 수감되어 있는데 먹는 문제가 심각하다고 했습니다.


이경석은 그동안 모은 십일조와 다른 돈을 모아서 고등여학교 학생인 김혜수 편에 평양에 돈을 보내어 수진성도들의 사식비로 보냈습니다
. 오정모 사모(주기철 목사 부인)와 김차숙(한상동 목사 부인) 사모가 이것을 받아서 감옥 안에 사식을 차입하고 일본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는 김두영 학생(후에 소록도교회 목사)에게도 활동비를 전달했습니다.


그후 이경석에게 일감이 계속 몰려들었고 그 수입들은 수진성도들의 사식비로 계속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 사식을 받은 옥중 성도들은 '사식이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소?'하자 김차숙 여사는 '만주의 이경석 씨가 보낸 것입니다. 그 일 뒤에는 박인순 전도사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우리도 기도해야지요'라고 했습니다.


그는 만주에서 일하다가 평양으로 와서 계속 헌신하였고
, 다시 부산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는 박인순 전도사의 신앙 지도를 받으며 옥중 성도들을 섬겼습니다.


해방이 되자 순교자가 있는가 하면 출옥성도들도 있었습니다
. 이경석은 주변의 권유로 진해신학강좌에 참석하여 헌신자의 길을 갔습니다. 그는 그후 고려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는 한센인 정착촌에서 목회를 하기도 하였고 한때 고신대학교 재단이사장을 맡기도 했지만
, 그는 옥문 밖의 사람이었고 섬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숨은 봉사가 아름다운 향기로 퍼져 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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