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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길로 간 사람들 [4]

[ 2022-05-03 10:45:01]   

 

세상 영화보다 주님만 바라보고

정정숙 박사

 

(7) 한국의 프랜시스 이현필 선생


한국의 프랜시스로 알려진 영성가

'탁발전도'를 통해 주님의 고난 체험

 

우리는 아시시의 성자 프랜시스를 기억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린 탁발 수도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가 책으로, 설교로 소개될 때 우리는 깊은 감동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삶을 산 분이 있습니다
. 화순 동광원의 이현필(李鉉弼) 선생입니다. 이현필은 1913128일 전남 화순군 도암면에서 태어났습니다.


이현필은 젊을 때 영산포에서 일본인 목사에게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 그러나 그에게 평생토록 감화와 영향을 준 스승은 '도암의 성자'라 불리는 '기인 이세종'이었습니다.


이현필은 청년시절 자기 집 고개 넘어 천태산 자락에 움막을 짓고 성경을 가르치며 수도사 생활을 하던 이세종 선생에게 매일 찾아가 성경을 배우고 특히 순결사상을 배웠습니다
. 이미 결혼한 그는 스승의 사상을 따라서 부부 생활을 끊고 부인을 누님이라 부르며 살았습니다.


예수를 잘 믿으려면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면서 스스로 자기 이름을
'헌신짝'이라고 불렀습니다. 양복과 구두를 벗어 던지고, 떨어진 낡은 옷을 입고, 겨울에는 맨발로 다녔습니다. 머리는 삭발하고 콧물을 손잔등으로 닦으면서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자기완성을 이루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런 생활은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하였습니다.


그의 감화력은 대단하였습니다
.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집회소에 모여 들었고, 그가 여러 곳을 순방하면 사람들이 그를 따라 왔습니다. 그들은 대부분이 가출한 사람들로 독특한 공동체가 형성되었습니다.


이현필은 나이 어린 소년 소녀들을 선별하여 깊은 산 화전민이 사는 남원 수지면 갈보리 동산과 서리내 산에서 쑥을 뜯어 먹으며 그들을 훈련시켜 영성운동의 기본 엘리트로 삼았습니다
.


한때는 그를 따르는 이들이 수 백명이 되었습니다
. 탁발을 하며 전도하고 겨울에는 맨발로 집집에 구걸다니는 훈련을 시켰습니다.


이현필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의 제자들이 독신생활을 하며 순결을 지키고 살면서 광주
, 함평, 진도, 곡성 등지에서 농사를 하면서 수도생활을 하였습니다.


이현필의
'탁발전도'를 현대화한 것이 대학생선교회(CCC)의 김준곤 목사가 시작한 '거지전도'입니다. 방학 때 대학생들이 여러 지방으로 흩어져 밥을 얻어 먹으며 전도하게 했습니다. 이현필의 방법을 오늘의 시대에 적용한 하나의 모델입니다.


이현필의 전도방법은 특이했습니다
. 선교학이나 전도학을 배워본 적이 없는 그는 성경을 연구하며 기도하는 중에 자기나름의 전도법을 실천했습니다.


한번은 자기 누님댁에 전도하러 가서 예수 믿으라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 그집 방구석에 앉아서 밤새도록 기도만 했습니다.


이현필은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섬진강을 수 없이 건너 산길을
3040리를 걸어다녔습니다. 그의 전도를 받은 사람들은 믿어도 진짜로 믿게 되었습니다.


이현필은 농촌 부흥과 절제 생활에 관심이 컸습니다
. 비누를 쓰지 않고 잿물로 빨래를 하고 도시 나들이를 할 때는 고무신이나 짚신을 신고 다녔으나 보통 때는 손에 들고 다녔습니다.


그는 길가의 돌이나 풀도 귀히 여겼습니다
. 어떤 물건도 천하게 여기면 자신도 천해진다고 가르쳤습니다. '사랑과 생명은 하나요, 사랑과 빛도 하나요, 십자가의 보혈은 사랑이며 생명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의 삶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에 '의한' 삶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 특별나다, 지나치다고 평할 수 있고 일부에서는 '이단'이라는 소리까지 했습니다.


그는 폐결핵으로 고생했습니다
. 각혈을 자주 하면서도 남의 부축을 받아 가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설교했습니다. 각혈을 하기 위해서 무릎을 꿇고 깡통에 토하면서도 주변에서 자리에 누우라고 해도 듣지 않고 설교와 가르치는 사역을 계속했습니다.


이현필은 경기도 벽제 계명산 수도처에서 임종하면서
'기쁘다. ! 기뻐 못견디겠다'고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이현필의 삶은
'탁발수도사' 같았습니다. 이런 형태의 영성운동에 대해서 여러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그리스도인들 특히 많은 목회자나 신학자들은 이현필의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현필의 영성운동은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도 있습니다
. 또 성경해석에 있어서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그가 신학자도 목회자도 아닌 전도자요 성경연구자라는 점입니다.


이세종에서 이현필로 이어지는
'동광원 영성'이 개혁주의 신학과 우리 시대의 형태로 재현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단순히 '별난 사람들의 별난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영성이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 속에서 우리의 삶속에 바로 적용되는 노력이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좁은 길로 간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의 모습이 송구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 힘든 시대에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순수한 영적 운동을 갈망해 봅니다.


(8) 순교자 박의흠 전도사

 

신사참배 반대로 13년형 받고 만주서 순교

이기선목사 제자로 성경적 신앙파수에 헌신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드리는 순교자의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의 모범이 됩니다.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 강요에 항거하여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한 이들이 50여명이나 됩니다.


이 귀한 순교자들의 자취를 조명하고 우리 신앙의 귀감으로 삼아야 하는데 순교자들에 대한 우리의 시각에 너무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 어떤 사람은 국가의 훈장을 받고 국립묘지에 안장되는가 하면 어떤이들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잊혀진 역사'가 된 가슴 아픈 현실입니다.


오늘
, 우리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한 순교자를 소개합니다. 그의 이름은 박의흠 전도사입니다. 아마 처음 들어보는 이름일 것입니다. 박의흠은 19011113(음력)에 평안북도 의주군 고관면 용화동에서 대지주 부농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서 194343세에 만주 봉천(지금의 심양) 형무소에서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박의흠은 청년 시절에 난봉꾼으로 술을 먹고 부모의 속을 썩이고 했으나
30세가 되던 1930년에 형수가 이름모를 병에 걸려서 고생하던 중 토교교회 김성심 권사의 전도를 받고 온 식구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박의흠은 김 권사를 어머니처럼 모시며 돌보다가 교회의 권유로 선천에 가서 성경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는 성경에 몰두하고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전도사로 부름을 받아 천태동교회에서 사역하며
, 거기서 20리 떨어진 염방교회와 교회당이 큰 동로동교회 등의 3교회를 맡아서 사역을 하였습니다.


박의흠은 이기선 목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 이기선 목사는 압록강 하류에 있는 위하도에서 목회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한 유명한 곳입니다. 그 섬에 교회가 두 개 있었는데 남쪽은 북하동교회이고 북쪽은 상단교회였습니다. 이목사는 이 두 교회를 같이 시무했는데 북하동교회는 부흥하고 상단교회는 분규로 쇠락했습니다. 이 목사는 박의흠을 상단교회 전도사로 초청했습니다.


이기선 목사와 박의흠 전도사의 신앙적 사제관계가 형성되어서 함께 고난의 길을 가면서 신앙운동을 전개했습니다
.


이때 박의흠은 평양신학교
2학년이었으나 신사참배 문제로 학교가 폐교되자 심을철 목사와 함께 이기선 목사를 따랐고 상단교회를 담임했습니다. 이기선 목사는 많은 제자들을 키웠습니다. 심을철(순교), 박의흠(순교), 김창인(전 충현교회, 작고), 김정덕(작고), 이병규(창광교회, 작고) 목사등의 많은 일꾼들입니다.


박의흠은 상단교회를 맡아서 열심으로 사역하자 교인들이 늘어나서 한때는
900명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교인들이 흩어지고 박의흠은 교회를 사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박의흠은 김린희 전도사
(북한 재건교회 설립자), 김형락 영수 등과 연계하여 신사 참배 반대운동을 했습니다. 박의흠은 일부 교인들과 만주 봉천으로 이주하여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일본 경찰은 박의흠 체포자에게 일계급 특진의 현상을 붙였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의흠은 만주 각지로, 평양과 선천, 신의주를 방문하여 동지들을 규합하고 연락을 하였습니다. 평양재판소의 21인 예심종결서 중 이기선, 김린희 항목을 보면 박의흠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박의흠은 만주 안동에서 성도들의 신앙을 지도하던 중 만주 경찰을 앞세우고 신의주의 성도들을 체포하던 악명 높은 홍 형사가 나타나 체포했습니다.


박의흠은 체포되어 가면서 부인에게
󰡒남편인 나를 믿지 말고, 예수님만 굳게 잡고 이겨야 합니다󰡓라고 하고 작별했습니다. 그는 트럭에 실려서 연행되면서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내 주의 지신 십자가 우리는 안 질까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교인들도 그의 찬송 소리를 듣고 따라서 불렀습니다. 눈물 바다를 이루며 죽음의 길로 가는 그를 전송했습니다.


박의흠의 만주사역에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 그것은 <장로교인 언약서(1940)>입니다. 김윤섭 전도사가 작성하고 한부선 (Bruce F. Hunt)선교사와 박의흠이 교열한 한국장로교인의 역사적 신앙고백서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한국 장로교회 신학교의 한국교회사 시간에 이것이 가르쳐지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 아마도 교수들이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박의흠과 김윤섭은 안동
(지금의 단동)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검사가 김윤섭에게는 15, 박의흠에게는 13년을 구형했습니다. 재판장이 억울한 일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습니다. 박의흠은 벌떡 일어나 '재판장님, 억울합니다. 김윤섭도 신사참배 반대한 것은 마찬가지인데 윤섭이는 15년이고, 나는 13년 입니까?'라고 항의했습니다.


김윤섭 전도사에게
'윤섭아 너는 좋겠다. 나는 13년인데 너는 15년이니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크겠구나'라고 하자 김윤섭이 '형님 무엇이 좋겠소?󰡓라고 묻자 󰡒너는 나보다 2년이 더 많다'고 했습니다.


박의흠은 재판장에게 김윤섭과 같거나 사형언도를 해달라고 하자 재판장은 어이없어 하면서 구형대로 언도했습니다
. 이들은 봉천형무소에 수감되어 심한 고문으로 한 주일 간격으로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박의흠의 후손들
은 신앙의 아름다운 전통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딸 박신자가 김준채 목사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 김종길 목사는 칠레 선교사를 거쳐서 지금 부산 서면재건교회에서 목회하고 있고, 사위 정정민 목사는 부평재건교회 목사이며, 정정민 목사의 아들과 사위도 목사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참조, 김남식, 순교자 박의흠 전도사(서울: 도서출판 베다니,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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