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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길로 간 사람들 [3]

[ 2022-04-05 10:32:22]   

 

세상 영화보다 주님만 바라보고


정정숙 박사


주님께서는
󰡐좁은 길󰡑로 가라고 하셨으나 우리는 넓고 편한 길을 택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좁은 길로 간 사람들󰡑의 모습을 정정숙 교수가 새롭게 추적합니다. (편집자주)


(5) 태양신과 싸운 이인재 목사

 
'온유한 성품의 진리수호자로 목회에 헌신'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남북한 연락임무 담당'

 

일제강점기에 한국교회가 겪은 가장 혹심한 고난은 신사참배 강요입니다. 일제는 한국민족말살전략의 일환으로서 국어 사용 금지, 창씨개명,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한국의 공교회들은 수난의 바람 앞에 굴복하여 훼절하는 부끄러움을 겪었습니다
. 그러나 여기에 굴하지 않은 '적은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북에서는 만주와 평안도, 남에서는 경상도를 중심으로 '신사불참배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들은 일본의 태양신과 싸운 이들입니다
. 일본이라는 거대한 바위에 계란을 치는 순교의 투쟁이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순교하였고 감옥에서 고난을 겪었습니다.

 

이들 중 동원 이인재(東苑 李仁宰) 목사가 있습니다. 신앙의 투사이면서도 한 마리 어린양과 같이 순진한 삶을 사셨던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동원 이인재 목사
(이하 '동원'으로 호칭합니다)190614일 경남 밀양군 상남면 마산리 779번지에서 이강환과 최순명의 10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동원은 다섯 살이 될 무렵부터 할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웠고
, 1941년 봄에는 죽림제(竹臨齊)라는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습니다.


이웃 면 소재지에 공립소학교가 개교하자 동원은
19223월에 그 학교를 찾아가 입학원서를 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다고 입학이 거절되었습니다. 그 학교는 8세에 입학하는데 동원은 16세였기 때문입니다.


1923
년 기산에 사립강습소가 생겨서 나이에 상관하지 않는 6년제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는 월반하여 6년제 학교를 16개월만에 졸업하고 검정고시를 거쳐서 밀양농잠학교에 입학하여 1926년에 졸업을 하였습니다.

 

동원의 고향인 마산리에는 이미 교회가 있었습니다. 1906년에 설립된 교회입니다. 어느 주일날 동원은 교회당 옆을 지나고 있는데 마침 예배당 종치는 소리가 들렸고, 그 종소리를 듣고 자기도 모르게 끌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음 주일에 교회당에 가게 되었고
, 박수민 영수(박손혁, 박치덕, 박정덕 목사의 부친)의 설교를 듣게 되었고, 예배 후 성경 한 권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동원은 야학교 교사가 되어 사람들을 가르쳤고, 면 서기가 되어 공무원의 첫 월급으로 18원을 받았는데 그 당시로는 큰 돈이었습니다.

 

1930년 차재선 전도사(김경래 장로의 장인)가 마산교회에 부임하여 동원과 가까이 지냈습니다. 그러나 차 전도사는 193310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차 전도사와 손양원 전도사 그리고 동원은 의형제가 되어서 서로의 가족을 돌보기로 했습니다. 차 전도사의 사위인 김경래 장로는 동원을 장인처럼 모셨습니다.

 

동원은 신앙생활에 몰두하면서 공무원으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신사참배의 광풍이 불어오자 동원은 13년간 하던 면서기직을 사임하고 신학교 입학을 준비하였습니다.

 

19383, 동원은 평양으로 갔습니다. 평양신학교 입학시험을 치루고 4월에 신학생이 되었습니다. 주일에는 주기철 목사가 시무하는 산정현교회에 출석하여 주 목사를 비롯한 민족의 거두들인 장로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극에 달하였고
, 1938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는 신사참배를 불법 결의하는 공교회의 훼절을 감행하였습니다.


평양신학교는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자진 폐교를 하였습니다
. 동원은 겨우 한 학기를 다니고 학교가 폐교되는 아픈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동원은 윤술용 전도사와 한상동 목사를 만났습니다
. 세 사람은 김해 무척산에 올라가서 기도했습니다(훗날 여기에 명향식 전도사가 '무척산기도원'을 세웠고, 지금은 고신대학교 경건훈련원이 되었습니다).


한상동 목사와 동원을 통하여 경남지방에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확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 동원은 19399월에 평양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이기선, 주기철, 최봉석 목사 등을 만나서 신사참배 반대 논의를 하였고, 김린희, 박의흠 전도사와도 협력했습니다.


동원은 각지의 신앙동지들과의 연락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 북으로는 철산, 남으로는 부산 등의 각지를 순회하며 동지들을 만나고 정보를 교환했습니다.

 

일제 경찰 당국은 1940920'일제검속'을 하여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 혐의자 193명을 체포했습니다. 동원은 그보다 먼저 1940513일 폐교된 평양신학교 기숙사에서 평양 종로경찰서 형사 2명에게 체포되었습니다.


1941
825일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어 해방될 때까지 수진성도(守眞聖徒)들과 고난을 겪었습니다(54개월 옥고를 치룸). 모진 고문으로 순교한 이들도 있었는데, 동원은 해방과 함께 석방되어 남하했습니다.


그후 고려신학교를 제
1회로 졸업하였고 목사가 되어서 여러 교회를 개척하였으며, 19746월에 미국으로 이민가서 많은 교회를 개척하다가 2000430일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1980년대의 일입니다. 미국 필라델피아의 한 한국식당에서 동원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동원은 나의 남편의 친구인 강신의 목사의 외삼촌이기에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습니다. 그때 하신 말씀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쉬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니 쉬어 가면서 일하시게.' 그의 순수한 모습이 그립습니다.

 

(6) 도암의 성자 이세종 선생

 

'한국 영성운동의 중요한 물줄기 형성'

'동광원을 통한 실천적 영성 운동 펴'

 

이 세상에는 '성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이들은 세속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자신을 드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기인(奇人)이라고 밖에 다른 이름이 없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만 의지하고 이 세상과는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 이들은 '예수님께 미친 사람들'이기에 진정한 행복을 누리고 살아가는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이들 중 대표적인 사람은
'도암의 성자'로 불리우는 이세종(李世鍾)입니다. 그는 1880년 전남 화순군 도암면 동광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40세가 될 때까지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면서 아끼고 아껴 모은 돈으로 논밭을 사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40세에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너무 기뻐서 밤낮으로 성경공부를 하며 성경 암송을 하고 전도하는 일에 매진하였습니다.


그의 신앙생활이 소문이 나자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그곳에
'동광원'이라는 신앙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동광원'은 한국식 수도원이라고 부를 수 있는 특별한 삶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 공동체는 중세의 수도원처럼 성경공부
, 노동, 순결생활을 실천하였습니다. 신기한 것은 이세종이 누구에게 성경을 배운 바가 없으며, 남의 집 머슴살이로 신학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연구와 기도생활을 통해서 성경을 스스로 깨달아 가는 특이한 공동체를 운영해 갔습니다.

 

이세종은 그의 삶에서 성경공부를 최우선으로 삼았습니다. 제자들과 성경공부를 하고 있을 때는 아무리 반가운 손님이 찾아와도 인사를 받지 않았습니다. 성경공부가 끝난 후에 인사를 했습니다. 밥 먹는 것도 성경공부가 끝난 뒤에야 먹었습니다. 그는 '성경공부는 공사(公事), 음식 먹는 것은 사사(私事)인데 이제 공부가 끝났으니 사사로 돌아갑시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는 예수를 믿은 후 성경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 자기에게 빚진 마을 사람들을 불러다가 빚을 모두 탕감해 주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빚문서를 모두 불태웠습니다. 그는 또 자기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이들 부부는 산속에 들어가서 쑥을 뜯어 밀가루에 반죽해서 먹으며 살았습니다.

 

동광원 식구들은 자신들이 먹을 것을 농사지어서 자급자족 하였고, 부부가 같이 살아도 부부관계를 하지 않는 순결생활을 하였습니다. 어찌보면 극단적인 집단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세종의 아내는 배움이 없는 여자였는데 부부가 남매처럼 순결생활을 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이웃 마을의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 아내가 떠나는 날 이세종은 아내의 짐을 지게에 지고 아내가 가는 그 남자의 집에 져다 주었습니다.


이세종은 아내에게
󰡒예수 잘 믿고 언제든지 회개하고 돌아오고 싶을 때 돌아오라󰡓고 타일렀습니다. 다른 남자에게 간 아내는 얼마 살지 못하고 옛 남편인 이세종에게로 돌아왔습니다. 그 아내는 두 번이나 다른 남자를 따라 갔다가 이세종에게 돌아왔고, 이세종은 그러한 아내를 받아 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현대판 호세아 선지자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사람만이 아니라 금수, 곤충, 초목까지도 사랑하였습니다. 산길을 걸어가다가 길에 칡넝쿨이 뻗어나서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것을 보면 반드시 옮겨놓고 지나갔고, 자기 발밑에 개미가 밟혀 죽는 것을 보고 서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마을 아이들이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으면 돈을 주고 사서 다시 물에 놓아 주었습니다
. 한 번은 부엌의 구정물 통에 쥐가 빠졌는데 나뭇가지로 사다리를 놓아 주어서 쥐가 도망치게 했습니다. 부엌에 들어온 독사를 죽이지 않고 슬슬 몰아내 쫓으면서 '큰 일 날 뻔 했다. 내가 아니었으면 너는 잡혀 죽을뻔 했다'면서 살려 주었습니다.

 

이세종은 말년에는 산중에 움막집을 지었습니다. 겨우 한 사람이 누울 정도였고, 문은 기어들어 갈 정도의 좁은 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믿는 일은 좁은 문으로 지나가는 일이다. 좁은 문도 그냥 말고 십자가를 지고 들어가는 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1942
년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제자들에게 사다리를 만들게 하여 그 위에 눕히고 그대로 묻어달라고 유언하였습니다. 곁에서 울고 있는 아내에게 󰡒울음을 그치시오. 내가 예수님을 따라 가는데 울어서야 되겠소󰡓라고 한 후 󰡒올라간다. 올라간다, 올라간다󰡓고 세 번 크게 외치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떠난지
80년이 되었습니다. 그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형편이지만 '동광원의 영성'은 이 땅에 자생적인 수도원 즉 신앙공동체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신학적 이론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으나 그들나름대로 성경적 순수신앙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 이들은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가르치고, 성경대로 사는' 신앙인들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성경해석과 적용에 지나친 문제점이 있으나 하나님을 바로 믿고 성경대로 바로 살려고 노력하는 순수한 열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이들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이들이 '이단'이니 무어니 하고 비판하는 모습들이 안타깝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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