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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헌신한 여선교사들 ⑬

[ 2021-10-07 10:20:33]   

 

정정숙 박사


(25) 노라 (Nora), 성공회의 수녀 선교사

 

성공회 감독 수녀로 고아원 개설

강화도 지방 선교의 견인차 역할


많은 사람들은 성공회
(Anglican Church)가 신교가 아닌 줄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교회 제도가 가톨릭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당을 성당이라고 하고 성직자들을 목사라고 하지 않고 신부와 수녀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영국의 종교개혁으로 생긴 개신교 교단입니다.


성공회에서 한국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 1889년 영국 캔터베리 교구에서 코프(Charles Corfu, 한국 명 고요한) 주교를 한국 최초의 주교로 임명하여 파송했습니다. 이때 코프 주교는 수녀들의 도움이 없이는 여성 선교가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영국을 떠나기 전 성 베드로수녀회의 프랜시스(Sarah Frances) 원장에게 한국에서 선교할 수녀들을 파송해 줄 것을 청원하였습니다. 또 서울에 도착해서도 수녀 파송을 요청하는 편지를 거듭 보냈습니다.


이때 성 베드로수녀원은 인도
, 스리랑카로부터 선교 수녀의 파송을 요청받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코프 주교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서 최초의 해외 선교 지역을 한국으로 정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노라
(Nora) 수녀를 비롯하여 로잘리, 마가레타, 알마, 로이스, 웹스터 수녀 등 6명의 선교사를 1891년에 선발하고, 6 개월간 런던의 성 죠지병원과 메트로폴리탄병원에서 간호교육과 선교사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들은
1892614일 카타지호를 타고 앨버트 항을 출발하여 긴 항해 끝에 114일에 한국에 도착하여 한국 최초의 성공회 수녀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노라는 초대 주관
(감독) 수녀가 되어서 복음 선교와 고아원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1893년부터 성공회 주교의 요청으로 버려진 아이들을 모아서 고아원을 개설하고, 그들을 양육하고 신앙 교육을 시켰습니다. 아이들이 세례를 받을 때마다 수녀들은 돌아가며 대모(代母)가 되었습니다.


고아들은
1895년에는 5명이었으나 1899년에는 2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이때 고아원 영아들의 사망률이 50%나 되었기 때문에 수녀들의 또 다른 일은 장례를 치루는 일이었습니다.


1913
년에는 고아원이 24명의 고아들을 양육하였고, 1913722일에는 고아원을 수원으로 옮겼습니다. 19211030'피득보육원'이라는 고아원 전용 건물을 수원 교동 11번지에 건축하여 제대로 된 육영사업을 하였습니다.


노라 수녀는 제
1대 주관(감독) 수녀로서 고아원 사업을 주관하였고, 강화도 지방의 선교 사역에 앞장을 서서 헌신하였습니다.

성공회 수녀 선교사들은 간호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의료선교의 귀한 사역을 감당하여 한국인들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선교 활동을 시작한 지
10년째 되는 1902년 성탄절에 노라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10년 전 성탄절에는 성탄의 기쁨을 나눌 사람이라고는 우리 집 중국 요리사와 부인 그리고 아이들 몇 명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성탄절(1902)에는 많은 교인들과 세례준비자로 교회가 꽉 찼고, 또 오후에는 여자들과 아이들을 데리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노라는 그 후에도 여러 가지 임무를 감당하면서 관절염으로 고생을 하다가 1919113018년간의 선교사역을 끝내고 암으로 세상을 떠나서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먼 영국에서 건너 온 수녀 선교사들의 헌신의 열매가 지금도 각지에서 맺히고 있습니다
.


(26) 우에노 다끼고(上野), 한국 고아들을 돌본 일본인


한국 고아들을 위해 헌신한 일본인

교회 사역과 함께 사랑의 실천자 되다


한국과 한국 교회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을 꼽자면 주로 미국이나 서양 사람들을 꼽습니다
. 그러나 한국을 위해서 헌신한 일본인 사역자가 있으니 신기할 정도입니다. 그의 묘지가 양화진 제1 묘역(-8)에 있습니다.


그는 소다 가이치
(Soda Gaichi, 曾田嘉伊智)입니다. 40년간 수천 명의 고아들의 아버지로, YMCA 교사와 원산교회 전도사, 그리고 가마쿠라보육원 원장으로 헌신하였습니다.


그의 헌신을 기려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인에게 처음으로 문화훈장을
1962428일에 추서했습니다.


소다 가이치는
18671020일 일본 야마구찌( 山口) 현 소바무라(曾根村)에서 출생했습니다. 오까야마(岡山)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습니다.


1893
년 노르웨이 선박 선원으로 홍콩에 체재하다가 대만으로 가서 독일인이 경영하는 공장의 사무원 겸 통역으로 일했습니다. 그 후 방랑생활을 하다가 1899년에 술에 취해서 길에 쓰러져 거의 죽게 되었을 때 한 한국인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구했습니다.


그 후 자기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의 나라인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 서울 YMCA에서 일본어 교사로 일하면서 월남 이상재 선생의 감화로 기독교인이 되었고, 백만인구령운동에 가담하고 경성 일본인 감리교회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3.1운동과 105인 사건 때 한국인 청년지도자들을 석방시키기 위해서 노력하였고, 가마쿠라 보육원장으로 고아들을 돌보았습니다. 8.15광복 후 194711월에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일본에 있으면서 한국에 다시 가고자하는 열망을 안 아사히
(朝日)신문과 영락교회의 한경직 목사의 주선으로 1961515일 다시 한국에 왔습니다.


서울의 옛집인 영락보린원에서 고아들과 지내다가
196232896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식은 196242󰡐사회단체연합장󰡑으로 시민회관에 2천여 명의 조객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습니다.


그의 아내 우에노 다끼고
(上野)1878년 일본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나가사끼 기독교학교를 졸업하고 1896년에 한국에 와서 일신(日新)소학교 교사가 되었습니다.


1908
30세 때 41세의 소다 가이치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숙명여학교의 영어교사로 일하다가 1926년 퇴직하고 남편이 운영하는 가마쿠라보육원의 보모로 아이들을 돌보았습니다.


1943
년 남편 소다가 원산에서 전도사로 사역할 때 서울에서 고아원을 운영하였습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도 귀국하지 아니하고 고아들을 돌보다가 195011474세로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일본인 부부의 헌신은 이 땅의 수천명 고아들의 부모가 되었고
, 사랑을 통해 믿음 안에서 한국과 일본이 하나가 되는 모형을 보여 주었습니다.소다의 묘비에는 '소다 선생은 일본 사람으로 한국인에게 일생을 바쳤으니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으로 나타냄이라. 1913년 가마쿠라보육원을 창설하여 따뜻한 품에서 자라난 고아가 수천이러라. <중략> 95세인 5월 다시 한국에 돌아와 영락보린원에서 1962328일 장사하니 향년 96세라'고 쓰였습니다.


부인 우에노 다끼꼬의 묘비에는
'언손 품어주고, 쓰린 가슴 만져주어, 일생을 길다 않고 거룩한 길 걸었어라. 고향이 따로 있든가 마음 둔 곳이어늘'이라는 주요한의 시가 쓰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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