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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헌신한 여선교사들 ⑥

[ 2021-02-26 09:33:43]   

 

정정숙 박사

(11) 켐벨(J. P. Cambell), 배화학당을 설립하다

 

'감부인'으로 불리며 '여성교회' 설립

배재학당에서 철저한 신앙교육 실시

 


많은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근대 여성교육기관이라고 하면
'이화학당'만을기억합니다. 그 외에도 많은 여성교육 기관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이화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학교가 있었는데 그것이 배화학당입니다.

배화학당은 켐벨(J.P. Cambell)에 의해서 설립되었습니다. 그의 한국 이름은 강모인(姜慕人)으로 사람들은 '강부인'이라 불렀습니다.

강 부인은 185841일 미국 텍사스에서 출생하였고, 캠벨 목사와 결혼하여 슬하에 남매를 둔 유복한 어머니였습니다. 그러나 1880년 어느 날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몇 해 안에 딸과 아들이 세상을 떠나는 충격적인 일을 당했습니다.

좌절하고 있다가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다가 온전히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886년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로 중국에 파송 받고 상해와 소주에서 10여년을 사역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중국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조선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남감리교회에서는 조선 여성을 위한 사역에 강 부인을 투입하였습니다. 강부인은 1897109일에 수양녀인 여또라(余小姐)를 데리고 조선으로 왔습니다.

강 부인이 조선에 와서 사역한 일이 많지만 그것을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전도사업입니다. 1 회 선교연회가 모였을 때 강 부인은 여선교회 대표로 참석하였고, 처음으로 남감리회 조선여선교회를 조직하여 여성전도와 여성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둘째, 교회 설립입니다. 그는 여러 교회를 세웠는데 특이한 것은 서울 종교교회입니다. 강 부인의 노력으로 세워진 이 교회는 여성들만을 위한 󰡐여성교회󰡑입니다. 지금은 남녀 공용의 '종교감리교회'로 성장하였으나 그 시작은 여성들만을 위한 특이한 교회였습니다.

셋째, 교육사업입니다. 강 부인의 사역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일입니다. 강 부인은 조선에 오자마자 1898102일에 서울 내자동 75번지에 집을 구입하고 다섯 명의 여자 아이를 데리고 학교를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학교 이름을 '캐로라이나 학당'이라 했는데 미국 사우스 캐로라이나(South Carolina)의 소년 소녀들이 정성껏 모금하여 후원금을 보내준 것이 인연이 되어 이름을 그렇게 지었습니다. 그러나 윤치호의 작명으로 '배화학당'이 되었습니다.

그때는 이화학당이 세워진 지 이미 10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화와 배화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화는 교육선교가 목적이었고, 배화는 교회와 사회의 지도자 양성이 목적이었습니다. 학생 모집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스크랜톤은 비교적 상류층 가정의 자제들의 자발적 입학을 권하였고, 강 부인은 고아와 부랑아 등을 모아서 교육하였습니다.

초기의 배화는 학당이라기보다 탁아소 같았습니다. 6-8세 어린이들이 대소변을 가릴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강 부인은 이들을 돌보았습니다.

1903년에는 재래의 서당식에서 중학 예비과로 바꾸고 교명도 '배화학당'으로 바꾸었습니다. 철저한 신앙교육을 하였고 동양의 풍속을 강조했습니다. 교사는 신자여야 하고 남자교사는 나이든 기혼자, 여자교사는 처녀나 과부여야 했습니다.

강 부인은 어려움 속에서 학교를 이끌었습니다. 몸이 약해져서 1918년에 휴양차 본국에 갔다가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죽어도 한국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면서 한국으로 돌아와서 19201112일에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향년 62세로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습니다.


(12) 마율리(Julia A. Martin), 목포의 이모

섬 선교와 청소년 한센인 돌봄

35년간 목포지방 사역으로 '이모'라 불림

 

미국 남장로교는 보수적인 교단으로서 그들의 선교사역도 성경 중심의 원리를 중심으로 삼았습니다. 189211'7인의 선발대'에 의해 시작된 남장로교의 선교사역은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선교방법은 다양하지만 사경회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호남의 모든 교회와 사역자들이 참여하는 대사경회, 지역별로 개최하는 중사경회, 각 교회가 주관하는 소사경회가 연례적으로 실시되어서 신자들을 훈련시키는 일을 하였습니다.

많은 선교사들이 헌신하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마율리라는 한국 이름을 가진 줄리아 마틴(Julia A. Martin, 1869-1944)이 있습니다.

그는 18691023일 미국 캔사스 주 하이랜드(Highland)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무디성경학원에서 성경과 신학을 배웠습니다.

그는 남장로교의 한국 선교사로 19089월에 목포에 도착하였습니다. 다른 선교사에 비하면 늦은 나이인 중년에 한국에 왔으나 놀랄만한 일을 했습니다.

그는 목포를 중심으로 섬 선교에 헌신하였고, 농어촌 교회를 돌보았습니다. 그는 청소년의 선생이었고 한센인들의 친구였습니다.

당시 목포에는 양동교회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양동교회 주변 저습지대는 만조가 되면 바닷물이 들어와서 통행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에 양동교회는 창평동, 무안동, 남교동, 동명동, 온금동, 죽동 등지에 사는 교인들을 배려하여 따로 예배 처소를 허락하였습니다.

마율리 선교사가 남교동 76번지 초가집을 매입하여 1923410일 수요기도회를 시작으로 목포 지방 교회사에서 처음으로 분립교회인 목포중앙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마율리 선교사는 이렇게 지역교회를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마율리는 한국에 도착한 1908년에 정명여학교 제4대 교장에 취임했습니다. 남장로교 선교부가 세운 정명여학교는 이 지역 여성교육의 효시였습니다. 그는 이 학교에서 성경과 음악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1922년에 희성유치원을 설립 운영하여 목포지방의 유아교육을 시작하여 어린이교육을 통해서 복음의 확산을 도모했습니다.

마율리는 남장로교 선교 프로젝트인 한센인들을 돌보았습니다. 광주와 여수 등지의 한센인들을 수용하고 치료하는 병원을 세우는 일에 적극 동참하였는데 이 병원이 오늘의 여수 애양원입니다.

마율리는 함평, 무안 등지를 순회 전도하였고 특히 젊은이들을 각성케 했습니다. 이 순회 전도에 윤치호가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그는 40세의 중년 나이에 한국에 와서 35년을 목포 지방에서 사역하였습니다. 그의 별명은 '목포의 이모'였습니다. '목포의 눈물'이라는 이난영의 노래가 목포 사람들을 눈물나게 한다면 '목포의 이모'는 따뜻한 사랑의 바람이었습니다.

목포 사람들의 누나였고 이모였고, 목포와 결혼하여 한 평생 독신으로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역을 펼치다가 일제 강점기 말에 선교사들의 강제 추방으로 1942 년 미국으로 귀국하여 194491 일에 영원하신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한국을 위하여 특히 목포 지방을 위하여 헌신한 줄리아 마틴, 그보다 한국 이름 마율리로 더 잘 알려진 그는 한국 교회가 기억해야 할 소중한 신앙과 헌신의 유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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