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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헌신한 여선교사들 ③

[ 2020-12-01 16:17:30]   

 

기획시리즈

정정숙박사

 

(5) 와그너(Ellasue Wagner), 호수돈 여학교를 세우다

 

개성 최초의 여성교육기관 세워

잘 된 장학제도로 학생들 공부시켜

 


우리나라의 개화기에 선교사들은 교육선교의 방안으로 많은 학교를 세웠습니다
. 특히 여선교사들을 통하여 여자 학교들이 세워졌는데 감리교 선교사들의 공헌이 컸습니다.

당시 감리교는 북감리교와 남감리교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이들의 학교설립도 약간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북감리교 선교부에서는 인문 계열의 학교를 세운 반면에 남감리교 선교부에서는 실과와 사회사업 중심의 학교를 세웠습니다.

남감리교의 이러한 정책은 기독교가 영적 문제에만 관심을 거지는 것이 아니라 육적 문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관점에서 출발되었습니다.

남감리교 선교부는 1904124일에 개성에 여학교를 세웠습니다. 여선교사 갈월(葛月)(ArrenaCarroll)과 와그너(Ellasue Wagner, 한국 이름 왕래(王來))가 한옥 1채를 마련하고 12명의 여자 아이들을 데리고 학교를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학교 이름을 개성여학교(開城女學校)라고 하였으나 학교 개교 때부터 경제적으로 도움을 준 이의 이름을 따서 두을라학당(杜乙羅學堂 Dullulah Institute)이라고 불렀습니다.

학교가 발전하여 19064월에는 중학과를 설치하였고, 그 해 6월에는 스텔리 (E. Staley) 박사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기억하기 위하여 친구들과 거액을 모아서 개성의여자학교 교사 건축 기금으로 내어놓았습니다. 이로 인해서 학교 이름이 스텔라 박사의 거주지인 Holston을 한자 음역으로 바꾸어 '호수돈(好壽敦)'이라고 바뀌었습니다.

이 학교는 1909812일 학부대신의 인가를 받아서 고등과를 신설하였고, 927일에는 석조 본관 건물을 준공하였습니다. 이때 교장은 와그너(Ellasue Wagner)였습니다.

이 학교는 다른 학교와 달리 장학제도가 잘 되어있고,1913년부터학생들이 학비와 의복을 각자 부담하게 되었습니다. 그 해는 개교 9 년이 되는 해였는데 개교 9년만에 첫 졸업생 18명을 배출하였습니다. 졸업생 모두가 그리스도인들로서 졸업 후 지방학교의 교사, 교회 전도사 등 교회와 사회를 위해 봉사했습니다.

와그너 교장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호수돈에 모이는 학생들이 늘어났습니다. 1913년에는 등록한 학생이 109명이었고, 1915년에는347명이 등록하였는데 그중 109명이 고등과에, 나머지가 소학과 과정이었습니다.

와그너는 호수돈이 정규 인가를 받은 학교가 되도록 노력했습니다. 1918년 호수돈이 고등보통학교 인가를 받아서 학생들의 진로를 열어주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에기예과를 병설하였고, 1922년에 4년으로 교육연한을 연장하였습니다.

와그너는 미혼의 여선교사로서 호수돈의 발전에 심혈을 기울이다가 후에 예길수 선교사에게 교장직을 넘겼습니다.

오늘의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이 학교 졸업생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헌신하였다는 점입니다. 한 예를 들면, 1929년졸업생이 모두 212명이었는데 그들의 진로가 다음과 같습니다.

선교사 3 , 여자신학교 진학 39, 신문기사 1, 상업 1, 교사 60, 가정주부 91명이었습니다.

이들의 진로를 보면 호수돈의 교육이 어떠했는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사회 각 분야에서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헌신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학교 설립자 중 한 명이고 오랫동안 교장으로 헌신한 와그너의 땀 흘린 열매입니다.

 

 

(6) 갈월(Arrena Caroll), 누씨여학교를 세우다

 

여성교육의 황무지인 함남지방에 학교 세워

후원자의 사랑 감사하여 학교 이름 붙여

 

원산 지방의 기독교 여학교로 누씨여학교(LucyCunningim School)가 유명합니다. 원산은 1896년부터 북감리교의 선교지역으로 개척되다가 19011020일에 원산과 동해안 지역의 선교사업을 남감리교에 넘겨주었습니다.

함경남도 일대는 1930년까지 여성교육이 황무지 같았습니다. 1912년까지 관공립 여학교가 한 곳도 없었던 것을 보면 여성교육을 얼마나 등한시 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감리교 여성 선교사인 캐롤(Caroll, 한국 이름 갈월(葛月)과 놀스(Mary Knowles)가 원산에 여학교를 세우기로하고 여선교부의 후원을 받아서 19031119일 원산 산제동에 있는 초가집 한 칸에서 15명의 여자 아이들로 학교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캐롤이 교장, 놀스가 부교장을 맡았고, 여성교육에 눈뜨지 못한 시대 상황에서 학생모집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선교사들은 학생들의 학비는 물론 교과서와 숙식까지 학교가 제공하면서 15명의 학생을 모집하였습니다.

그 후 학생들이 늘어나서 1907년에는 학생수가 70여명이 되었습니다. 이 해에 마이어스(Mamie D. Myers, 한국 이름 마이시(馬義是)가교장에 취임하여 학년제 학교(a grade school)로 개편하고 1909년에 제1회졸업생을 배출하였습니다.

학생수는 늘어나는데 교실이 좁아서 어려움을 겪다가 미국 남감리교회 여선교부에 학교 교사 증축계획서를 보내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때에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 여선교회 회장 (President of North Carolina Conference)인 루시 컨잉김 (Lucy Cunningim) 부인이 학교 건축비를 부담하기로 작정하고 은행에서 융자를 받아서 원산에 직접 송금했습니다. 이들 부부는 매월 이자를 갚다가 세상을 떠나자 생명보험료로 은행 융자금을 다 갚았다고 합니다.

 

이 돈으로 원산시 산제동에 4층 석조건물을 학교 교사로 신축했습니다. 1913년에 이 학교는 사립 누씨 컨잉김여학교 (Lucy Cunninggim girl's School)로 설립인가를 받았습니다.

또한 루시 컨잉김 가족이 생명보험료로 은행 융자금을 갚고 남은 돈을 보내와서 1919년에 누씨컨잉김 유치원을 세웠고, 1921년에 제1 회 유치원 졸업생을 배출했습니다.

이 학교는 여성들에게 고등보통교육을 실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그리스도의 인격을 본받게 하며 부덕의 함양과 사회의 봉사자를 양육하는 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누씨여학교는 실습교육으로 유명합니다. 가사과 실습실, 이화학 실습실, 지력과 특별교실, 음악관에는 피아노, 오르간 교습실이 있었고, 원예 실습지가 있을 정도로 당시에는 꿈같은 시설이었습니다.

이 학교의 졸업생은 다양한 분야에서 헌신하였습니다. 1928년 졸업생인 <상록수>의 주인공 최용신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인연 깊고 정 쌓인 누씨 동산

교문을 떠나는 우리의 심정

기쁨과 애연한 느낌 없지 않다.

앞길이 결코 평탄치는 않으리

사회는 무엇을 요구하며

누구를 찾고 있는가

사회는 새 교육을 받은

새 일꾼을 요구한다

 

이렇게 여선교사의 헌신적인 노력과 먼 타국의 성도가 보낸 사랑의 손길이 이 땅의 여성들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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