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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병의 6.25 참전기 (3)

[ 2020-07-31 10:11:22]   

 

허기와 부상으로 초죽음 상태에

 

다음의 글은 6.25전쟁 70주년에 국방일보에서 70년 전 학도병 참전사를 찾아 그때의 전황을 듣는 시간으로 20205256.25참전 학도의용군기념사업회 회장이며 1950811일 포항전투 생존자이며 3사단 학도의용군 회장인 김만규 목사를 통해 증언된 내용입니다(역자주).

 

포로 행렬은 계속되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다리를 허우적거리며 걷고 있는데 무엇이 이마에 콱 처박혔다. '아이쿠 눈이야'라고 외쳤다. 눈을 감고 졸면서 끌려가다가 포플러 가로수에 이마를 찧은 것이다.

정신을 확 차리고 다시 '딸소 딸소.'라는 말에 행렬이 계속되었다.

 

그즈음 멀리 동해 쪽에서 ''하는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고 그 뒤를 이어 '쉬쉬쉬'하는 소리와 함께 이곳저곳에서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포항 앞바다에 떠 있던 미군 함정에서 함포 사격이 시작된 것이었다.

포탄은 반경 50m 정도의 웅덩이를 만들 만큼 그 파괴력이 엄청나서 포로를 붙잡고 있던 인민군들은 모든 일을 중단하고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인민군 대좌는 '동무들, 딸소.'라고 하며 포로들을 이끌고 포항 북쪽 달전동 방향으로 급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10여 명의 포로가 인민군 10여 명에 둘러싸여 포항 북쪽 달전동 고개를 넘고 있었다.

그때 달전동 고개에서 인민군의 T33 탱크 10여 대가 굉음을 울리며 포항 시내로 진격하고 있었다. 탱크는 포항전투에서 학도병 때문에 사투를 벌이던 인민군을 돕기 위해 출동 중에 있었다.

 

포로들이 영일 만을 끼고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을 때, 높은 하늘에서 UN군의 전투기(함재기) 8대가 날아왔다. 인민군들은 황급히 '항공'이라고 소리지르고는 논두렁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면서 '동무들, 뛰기요. 날래 뛰기요.'라고 하며 포로들을 독려하였다.

 

인민군들은 포로들을 끌고 영일군 기계면 미현동을 일차 목표 삼아 계속 행군하였다. 당시 거기에는 경주 이씨들의 큰 재산이 있었고, 인민군들은 그곳을 집결지로 삼았던 것이다.

지리를 모르는 인민군이 그곳을 향해 가면서 수십 번 길을 물어 영덕 쪽으로 가다가 방향을 안강 쪽으로 옮겼다.

안강 쪽으로 가는 길목마다 미군의 시체가 즐비했고, 그 시체는 이미 부패가 심하게 진행되어 고약한 냄새를 풍겨내고 있었다. 특히, 총상으로 퉁퉁 부어오른 흑인병사의 시체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악취는 형언하기 힘들 정도였고 구역질날 만큼 불쾌한 냄새였다.

 

그런 길을 걷고 있을 때 또다시 'UN' 글자도 선명한 전투기가 날아들었고, 예외없이 인민군들은 '항공'을 외쳤다. 그곳은 논두렁 밭두렁 등 몸을 피할 만한 은폐처가 없었다. 피할 곳은 미군 흑인병사의 시체뿐이었다. 인민군도 학도병도 시체 옆에 엎드려 쓰러져 마치 죽은 시신인양 위장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비행기는 우리 일행을 향해 포격하지 않고 몇 번을 선회하더니 먼 곳으로 날아갔다. 한참을 그렇게 죽은 시체와 산 시체가 한데 어울려 있었다. 그 끔찍한 시간 동안 이곳저곳에서 토악질을 해대었고,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음에도 포로들은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토해내고 말았다. 거의 빈사상태가 된 채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목적지인 영일군 기계면 미현동 경주 이씨 재실에 다다랐다.

 

그 재실 앞에는 <해방동무 임시수용소>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즉 야전 포로수용소라는 곳이었다. 이곳에 오니 벌써 먼저 온 손님들(?)100여 명이나 있었다. 이들은 국군 8사단과 수도사단에서 포로로 잡힌 국군들이었고, 거기에 미군 12명과 우리 일행 13명을 합치니 모두 130여 명이나 되었다.

그곳에서 우리를 맞은 것은 포항여중 과수원에서 우리를 환영했던 바로 그 대좌였다.

 

대좌는 '동무들, 잘 왔소. 고생 많았소다.'라고 말하고는 포로들에게 주먹밥 한 덩어리와 검은 빛깔의 된장에 풋고추를 제공했다. 그것이 포로수용소의 첫 번째 식사였다. 인민군들은 미군 포로들에게는 때마다 먹을 것(8월의 풋사과와 주먹밥이 전부였지만)을 제공했다. 하지만 국군과 학도병에게는 더 이상 식사가 제공되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 815일이 되었다.

 

포로로 잡힌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인민군들은 그날을 광복절이라 하면서 포로들에게 특식을 제공하겠다고 알려왔다. 포로로 잡힌 후 먹는 두 번째 식사였다. 주먹밥 1개와 소고기 한 덩어리(거의 물렁물렁한 기름덩어리)가 전부였다. 그래도 반가웠다. 밥에다 소고기라니 생각지도 못한 환대에 모두들 기뻤다. 물론, 그 소고기는 인민군들이 주민들의 소를 수탈한 데서 나온 것이었고, 맛있고 좋은 부위는 자기들이 모두 차지하고 난 뒤에 남은 부산물이었다. 그래도 포로들은 즐거웠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먹어치운 특식. 하지만 뒤끝이 있었다(미군 12명은 예외였다). 나흘 동안 빈 속이었던 포로들에게 주먹밥과 기름낀 소고기는 무리였다.

식사를 마친 지 10분도 되지 않아 여기저기서 배를 움켜쥐고 뒷간을 찾기 시작했다. 뒷간은 하나였고, 수십 명의 포로들이 한꺼번에 배를 움켜쥐었으니, 사정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씨의 재실 주변을 돌아가며 이곳저곳에서 설사하는 소리가 장관을 이루었다. 삽시간에 포로수용소는 큰 화장실로 변하여 대변 냄새가 진동했다.

뒤로 내보낼 때는 시원한데 그놈의 변이 어찌 그리 독한지 수용소 담곁은 온통 뺑기칠(?)로 가득했다.

 

다음날부터 다시 굶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괴뢰군 여자 군관(장교) 둘이 수용소로 찾아왔다. 사람의 본능 중 식욕도 크지만 성욕도 괄시 못하는 것 같다. 굶어 눈이 쑥 들어간 괴물들의 시선은 날씬한 몸매에 모젤 권총을 옆구리에 찬 여자 장교에게 온통 쏠려 있었다.

평안도 사투리로 '해방동무들, 김일성 장군이 보내어 여러분들을 만나게 되었고, 이제 내가 부르는 노래를 따라 부르는 동무에게는 밥도 주고 김일성 장군도 만나게 해주겠소.' 하면서 선동하였다.

 

여자군관은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국 압록강 구비구비 피흘린 자국 …」,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이라는 알지 못하는 노래를 가르치려 들었다(이는 김일성 장군가와 북괴의 애국가였다).

여자 장교는 약속대로 노래를 따라 부르는 이들에게는 보리밥을 주었다. 이들은 위대한 인민군이 되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전선으로 배치되었다. 그 중에는 3사단 야전재무대 박상사와 그 일행도 있었다. 박상사 일행은 배탈약도 먹고 미군처럼 밥도 얻어먹었다. 그리고 박상사는 '위대한 김일성 장군에게 충성을 바칩니다.'고 혈서를 쓰고 인민군의용대로 가담하였다(나중에 꼬마 소년병이 포로지에서 탈출한 후 그 박상사를 다시 만나게 되는데, 그는 어느새 국군으로 변신해 있었고 그것도 별 두 개를 단 소장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필자는 배도 고프고 죽을 지경이라 도무지 그 노래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게다가 배탈로 배도 아프고 노래도 싫었다. 노래를 거부하자 인민군 여자 장교는 모젤 권총을 빼들고는 학도병들의 머리 위로 쏘았다. 놀란 경비병들이 달려왔으나 여자 장교는 '동무들, 가기요. 나 해방동무들을 교육 좀 시키는 것이오.'라고 했다.

그러면서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 학도병들을 향해 자기도 학생이라는 것과 인민군이 된 경위를 설명하고 '동무들, 함께 노래를 따라하기요.'라고 간청했다.

 

그날 저녁 포로수용소 밖에서 ', ' 두 발의 총성이 울렸다. 낮에 그 여자 장교가 총살에 처해진 것으로 전해졌다. 이유는, 자신의 신변 이야기를 함부로 발설한 것과 북한 정권에 대한 불만성 발언이 빌미가 되었던 것이다.

 

여자 장교들은 평양제2고보 학생인데, 623일 낮에 인민군대 트럭 10여 대가 학교에 밀어닥치더니 전교생은 '김일성 장군을 환영하러 평양역으로 간다'는 말에 군용트럭에 올라갔더니 그 길로 원산까지 달려가서 군복을 갈아입히고 인민군 군관이 되어 전선에 배치되어 세뇌공작을 담당하는 군관이 되었노라 하면서 자신들은 원래 학생들이라고 하였다.

덧붙여, 사실 여자 군관은 전선에서 인민군 고급군관들의 기쁨조(요즘 표현)가 되어 종군위안부 노릇을 한다는 사실도 들려주었다. 그리고는 진정 동무들이 나를 해방시켜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까지 서슴지 않고 해주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그곳 정치장교에게 보고되었고, 인민군 기밀을 누설하였다면서 반역자로 몰려 총살되었다는 것이다.

 

포로수용소 책임자는 대좌(대령)였으나 실제로 그곳에서 제일 센 직위는 정치군관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오늘날 북한인민군에 최룡해 정치부장이 가장 센 군인이듯이 인민군 체제에 제일 센 자가 참모총장이나 사령관이 아니고 정치군관인 것은 생명이 위태로웠던 그때에도 이미 증명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10일 동안에 꼭 세 번(3) 보리밥을 먹어보고는 강제로 금식하여 거의 다 죽게 되었다.

 

8월 삼복 더위, 밀집된 수용소의 탁한 공기와 고통스런 환경은 부상당한 내 눈과 손을 거의 썩게 만들었다. 게다가 허기와 부상으로 인한 고통으로 거의 초죽음 상태에 이르렀다. 그것 외에는 모든 것이 봉쇄되어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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