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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병의 6.25 참전기 (2)

[ 2020-07-02 10:01:22]   

 

< 포항여중 자리에 세워진 현재 포항여고>

'아이쿠 하나님'

다음의 글은 6.25전쟁 70주년에 국방일보에서 70년 전 학도병 참전사를 찾아 그때의 전황을 듣는 시간으로 20205256.25참전 학도의용군기념사협회 회장이며 1950811일 포항전투 생존자이며 3사단 학도의용군 회장이 김만규 목사를 찾아 증언을 듣게 한 것입니다(역자주).

 

처음 군부대로 가서 배속된 곳이 안동의 수도사단 사령부에 속한 학도대였다. 수도사단에는 학도대, 호림대, 영남대, 백골대 등 특별기동대가 있었다. 당시 안동은 적의 포탄이 이곳저곳에 떨어지고 수도사단 전체가 괴뢰군의 공격 앞에서 퇴각하는 상황이었다.

그 즈음 우리 학도대는 사단장에게 부대 도착 신고를 하고 현역 상사의 구령에 의해 38, 99식 소총, 또 중대전투와 소대전투에 대해 설명을 들은 후 곧이어 보급품을 지급받았다. 일제 소총에 큼직한 군복과 발에 전혀 맞지 않는 군화를 신고 그야말로 병아리 우산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정식 군복을 입었으니 진짜 군인이 된 것이었다. 서북청년 출신 형들이 부르는 노래 '학도병아 잘 싸웠다. 승리의 길로. 역적의 공산당을 때려 부셔라. 밀려오는 괴뢰군을 때려 죽여라.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며 가자.'라는 노래를 목이 터져라 따라 불렀다.

그때 우리 학도병은 열세에 몰린 국군의 한쪽 모퉁이에서 적진을 살피고 전쟁터에서 보초를 서는 정도였다. 그래도 우리는 견적필살(見敵必殺)의 기백으로 전장에 참여하여 의성 지방 삼거리쯤 왔을 때, 사단장 김석원 장군이 갑자기 3사단장으로 전보 발령을 받게 되어 포항으로 이동해갔다.

당시 북괴 김일성은 중공군 8로군사령관 출신 김무정에게 8.15 전에 부산을 함락하라는 특명을 내려 동해안 특히 포항을 침공하려 했고, 이를 막기 위해 8로군을 백전백패시킨 김석원 장군을 3사단의 포항으로 전보시킨 것이다. 그 결과 우리 83명의 학도병들은 하루 아침에 부모 잃은 고아 신세가 되고 말았다. 결국 후임 백인엽 사단장으로부터 무장, 군복 해제를 당하고 전장의 고아가 되어, 버려진 떠돌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우리는 묻고 물어 의성에서 경주로, 경주에서 포항까지 갔으나 사단장은 없고 포항여중(지금의 포항여고)3사단 후방사령부로서 병력을 인수할 책임자도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사단 작전처 김치련 대위에게 도착 신고를 하였다.

 

당시 포항은 3사단의 육군과 해군의 육전대(그해 11월에 해병대로 개명), 공군 등 각 1개 중대와 경찰방위군 3천명, 여기에 워커 미8군 사령관의 직속부대인 브래드리 잭슨의 특수부대, 한국군 민기식의 특동대가 있었다.

이에 대적하는 북한군은 김무정의 2군단 5사단, 12사단, 유격 766부대를 투입했는데 유격 766부대는 북한군의 첫 번째 유격부대로 부대장은 오진우였다. 그는 포항 사람으로서 그의 부대는 포항 침공을 위해 특수 유격훈련을 받고 원산을 출발 포항에 직접 상륙하였다.

1950. 8. 10. 3사단 사령부의 김치련 대위는 전황이 점점 불리하니 학도병에게도 무기를 지급하겠다고 하여 학도병들은 오천 비행장에 있는 미 해병 병참부대로 가서 M1소총과 1인당 250발의 실탄을 보급받았다. 생전 처음 M1 소총의 분해 소제와 실탄 장전, 방아쇠를 당기고 사격하는 등의 기술을 배웠다.

바로 그날 학도병은 숙소를 포항국민학교에서 포항여중 강당으로 옮겨 밤 12시경에 잠이 들었다.

 

1950. 8. 11. 새벽 3시경 포항 시가지에서 따발총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면서 비상이 걸렸다.

중대장 김용섭은 연락병을 작전처로 급히 보내고 학도병 전원을 포항여중 운동장에 집결시켰다.

연락병이 작전처 김치련 대위로부터 전달받은 작전명령은 '학도병은 사단사령부를 사수하라.'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 71(도중에 낙오자는 빼고 안동에서 포항여중까지 온 숫자)2개 소대로 나뉘어 1소대(소대장 유명욱)는 왼쪽, 2소대(소대장 김일호)는 오른쪽으로 배치되어 자기 몸을 학교 울타리에 엄폐하고 '적이 가까이 올 때까지 발포하면 안 된다.'는 중대장 김용섭 형의 명령을 연락병인 필자가 전달하였다.

그리고 겨우 20여 분이 지났을 무렵, 포항 시내에서 포항여중 쪽으로 군인들이 행군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군복이요 군인들의 행렬이었다. 인민군은 따발총을 기본으로 중화기와 기관포까지 각종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다급했고 또한 시야에 들어온 괴뢰군을 그냥 둘 수 없다는 생각에서 누군가 '어머니'라고 외치며 방아쇠를 잡아당겼다.

간밤에 겨우 설명을 들은 M1 소총으로 적군을 향해 쏘아댄 것이었다. 그러자 사격 명령이 없는데도 이곳저곳에서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였다. 그 순간 대열을 이루며 이동하던 적군들이

'동무들 뒤로 물러가기요.'라고 소리치고 퇴각하였다.

적군은 38선을 돌파한 이후 처음 당하는 기습이었고(포로 된 후 들은 말) 우리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여 크게 당황하였다.

괴뢰군이 퇴각하자 승리의 기쁨보다 학도병 사이에는 더 큰 무서움이 다가왔다. 다음 차례가 무엇일까? 몇 명이나 덤벼들까? 과연 우리가 밀려드는 적들을 막아낼 수 있을까? 겁이 났던 것이다.

잠시 후 괴뢰군이 일렬 종대로 진격하더니 길바닥과 논두렁, 우측 철로 위에까지 횡대를 이루며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2차 침공이 시작된 것이다. 다시 사격이 시작되었다. 처음 쏘아보는 M1 소총의 위력은 대단했다. 그 무딘 개머리판이 어깨를 완전히 으깨는 듯한 충격을 주었다.

사령부 사수 명령을 받은 학도병들은 전진도 퇴각도 할 수 없는 진퇴양난의 지경에 점점 빠져들게 되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곳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용기를 내어 방아쇠를 당기며 밀려오는 적들을 방어하였다. 죽기살기로 덤비자 적들은 다시 기가 꺾여 퇴각 명령을 내리며 꽁무니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다 적군은 쓰러지듯이 땅에 엎드리고 좌로, 우로 나무를 굴리듯 이리저리 뒹굴면서 새롭게 전투대형을 이루어 따발총을 난사하여 세 번째 진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또다시 실패하고 포항 시내 쪽으로 물러났다.

그렇게 한 10여 분이 흘렀을까. 적막을 깨고 서쪽 철뚝 쪽에 있던 괴뢰군들이 흰 깃발을 흔들며 '동무들, 동무들. 우리는 김일성 장군이 보낸 인민해방군이오. 우리는 동무들이 손들고 나오면 김일성 장군 이름으로 환영할 것이오.'라면서 휴전을 제의해왔다.

그때 학도병들은 실탄이 거의 바닥이 난 상태였다. 그리고 어제 낮부터 밥을 굶은 상태였다. 잠깐 동안의 휴지기에 학도병들은 지혜를 모아 일부는 실탄 보급을, 일부는 식사 준비를 하고 주력은 앞에 오는 인민군을 경계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총성 없는 휴전의 흰 깃발은 학도병들을 오히려 더 어렵게 만들었다.

전우 중에 길안영이 '에잇' 하고는 벌떡 일어나 인민군에게 자진 투항한 것이었다. 그런데 인민군은 투항하는 길안영을 향해 총을 난사하여 사살하고 말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를 신호탄으로 4차 격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네 번째 시도는 그전과는 달랐다. 인민군이 포항여중을 동서남북으로 포위하여 박격포를 쏘고 탱크를 전진 배치시켜 밀고 들어왔다. 전면, 측면(좌우) 그리고 영덕선 철로를 통해 일제히 공격하며 포위망을 구축하고 조여들어 오다가 100m, 80m, 30m쯤 되니 다듬이 방망이 같은 것을 홱 던지는 것이었다. 동시에 엄청난 폭음과 함께 이곳저곳에서 우리 전우들이 나뒹굴며 떨어져 나갔다.

 

어떤 이는 '아이쿠' 또는 '어머니 나 죽어' 하며 쓰러지는데 이번에는 필자 전면에서 달려들던 괴뢰군이 방망이를 던지는 것이었다. 도저히 피할 방법이 없었다. 다급한 김에 그 방망이를 도로 주워 급하게 되던졌다. '' 하고 적군이 나뒹굴었다. 기뻤다.

얼른 쫓아가 쓰러진 적군이 버린 따발총을 빼앗아 '이놈 죽어라. 죽어'라고 울먹이면서 닥치는 대로 쏘아댔다. 바로 그때 키 큰 괴뢰군이 나를 향해 총을 겨눴다. 내가 먼저냐 네가 먼저 쏘느냐 하는 찰라에 내가 이겼다. 그 옆에 괴뢰군이 또 덤벼들었다. '아이쿠 안 되겠다.'라고 판단되어 괴뢰군에게 급히 덤벼들어 총을 든 그의 손을 물어 뜯었다. 순간 괴뢰군은 '아야야 이러기 있소.'라고 외쳤다. 전쟁에 신사가 있을 수 없었다. 이기고 봐야 되기 때문이다. 총이 아닌 이빨에 물어뜯긴 괴뢰군을 다시 총으로 '따따따' 갈겨버렸다. 멀리서 나를 본 다른 괴뢰군 서너 명이 총을 쏘며 달려왔다. 겁에 질린 필자는 36계 줄행랑을 치면서 포항여중 교사 쪽으로 내달렸다. 이때 '땅땅땅' 경기관총 소리가 귓전을 스쳐갔다. '땅땅', '아이쿠 하나님', '땅땅', '아이쿠 하나님' 덮어놓고 하나님을 찾고 불렀다.

 

전쟁에 참전하기 전 필자는 대구 성광중학교(초창기)에 입학하여 3학년 쯤에는 제법 신앙을 갖게 되었고, 전선에 나갈 때는 <신편찬송>이라는 두툼한 찬송가와 쪽성경을 지니고 있었을 만큼 작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믿음에서인지 나도 모르게 총성 따라 자동적으로 '아이쿠 하나님'을 연발하였다.

 

참으로 이상하다. '아이쿠 하나님'을 외치는 한 총알이 나를 피해서 포항여중 담벼락에 커다란 원을 그리며 꽂혔다. "이거다. '아이쿠 하나님'을 부르면 사는 거다."라는 확실한 신념이 생겼다.

이후부터 그많은 죽음의 고비 때마다 '아이쿠 하나님'은 나의 다급한 신앙의 비상벨이요 구조 레퍼토리였으며, 전장에서 내가 즐겨 부르는 군호가 되었다.

학도병들은 11시간 30분간의 긴 전투 끝에 2/3 이상의 인원이 꽃잎처럼 쓰러져 전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1950. 8. 11. 학도병의 포항전투는 밀려오는 인민군의 전() 전선에서 남진을 3시간 지연시켰고, 퇴각하던 국군이 전열을 정비하여 38선을 돌파하고 북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또한 포항시를 위수한 경찰, 방위군, 국군, 피난민 10만 명을 구출하는 결과를 낳았고, 맥아더 사령관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당시 대통령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난중일기에는 1950. 8. 11. 학도병이 포항전투에서 많이 희생되고 죽어간다는 보고를 받은 이승만 대통령이 정일권 총참모장과 워커 미8군 사령관에게 즉시로 포항에 병력을 투입하여 학도병을 구출하라고 지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학도병 포항전투는 1950. 8. 11. 새벽 3시에서 오후 230분까지 11시간 30분간의 전투로 종결되었는데, 한국군의 공군 F51전투기가 포항에 출격한 것이 811일 오후 5시이고, 미군의 함포사격은 811일 오후 530분이었다. 학도병에게는 때늦은 도움이었다.

이 전투에서 71명의 학도병은 48명이 전사하고 6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10명이 적의 포로가 되었고, 4명이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리고 포항전투 이후 71명의 참전 학도병 중에 13명만이 생환하여 귀대할 수 있었다.

돌아오지 못한 학도병. 북한군에 포로가 된 무명의 학도병을 어찌할 것인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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