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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 최재화 목사와 독립운동 (3)

[ 2019-05-03 16:26:19]   

 
김남식 박사 (한국장로교사학회 회장)
 

 이렇게 연단을 받은 최재화는 192412월에 화북신학교를 졸업하였다. 24명의 졸업생 중 한국인은 김경하와 최재화 두 명이었다. 이제 최재화는 헌신자의 삶을 살아야 했다. 자신의 장래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바치기로 결심하고 목회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산동성의 화북신학교를 졸업한 최재화는 새로운 사역의 길을 찾아야 했다. 형제처럼 지내던 김경하는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나 최재화는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김경하는 3.1독립운동으로 체포되어 신의주 지방법원과 평양복심법원에서 26개월의 징역 언도를 받은 바 있다. 최재화는 궐석재판에서 도합 8년의 언도를 받고 중국으로 탈출한 상태였다.
당시 일본 형법에는 26개월의 징역 언도를 받고서 형 집행을 받지 않은 자는 만 5년만 지나면 시효가 없어지기에 김경하는 귀국할 수 있었다. 8년 이상의 징역을 받은 자는 13년이 지나야 시효가 없어지기에 최재화는 앞으로 7년이 더 지나야 귀국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형편이라 그는 어쩔 수 없이 중국에서 사역해야만 했다. 최재화는 산동성 둬이쟝(多義講) 교회의 청빙을 받아 산동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산동지방에서 처음으로 목회를 시작하였다. 이 지방은 마적들의 침입이 많은 곳으로서 늘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할 정도였다.
둬이쟝 교회가 그로 인해 부흥되어 가자 중국 시골교회를 부흥시킨 것이 계기가 되어 최재화는 중국 각지의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었다. 1928년에는 흑룡강성 목단강시 목릉현에 있는 흥원진 교회의 청빙을 받아 만주 사역을 시작하였다. 최재화가 흥원진 교회에서 얻은 첫 열매는 한병혁이라는 청년이다. 그를 화북신학교에 보내어 공부하게 했는데 한병혁은 훗날 대구제일교회와 미국 로스엔젤리스 한인 복음 성서교회 목사로 시무하였다.

2.
대구에서의 사역

중국와 만주에서 10여 년을 살아왔던 최재화에게 대구제일교회에서 목사 청빙이 들어왔다. 꿈에도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가 헌신자의 새로운 영역을 넓혀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1931년 봄, 최재화는 만주를 떠나 고국행 기차를 탔다. 중국에서 사용하던 이름인 최묵을 버리고 최재화로 다시 돌아왔다.
대구제일교회는 안의와(James E. Adams) 선교사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대구제일교회는 경북지방의 모교회로서 선교와 교육, 그리고 의료 활동의 중심지였다. 이러한 대구제일교회의 문제가 생긴 것은 1923년에 이만집 목사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자치파 파동'이었다. 대구제일교회의 이 사건은 경북 지방 교회들의 사건으로 확산되었고, 선교사들과 함께 한 노회파와 이만집 목사의 자치파의 갈등은 매우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대구제일교회 예배당 쟁탈전으로 확대되었고, 10년 동안 법정 소송을 함으로써 1천여 명의 교인들은 사분오열되었다. 19314월에 노회파가 3심에서 승리하고, 뒤이어 193111월에 교회당 명도 소송에도 승소하였다.
이런 와중에 최재화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던 것이다. 이때 남은 교인수는 2백 명 정도에 불과하였다. 최재화는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해야 했다. 1931420일 주일에 첫 부임설교를 하였는데 '하나님을 바라며 영광을 돌릴 자'는 주제의 설교였다. 10년 동안 자치파에 예배당을 빼앗기고 그동안 YMCA나 회도 학교를 빌려 예배를 드리다가 19311115일 주일에는 교회당 명도소송에 승소 판결대로 원예배당에 들어가 입당예배를 감격 속에 드리게 되었다.
기나긴 재판이 끝난 교회는 새 목사를 모시고 잘 믿어 보자는 열의로 가득하였다. 흩어진 교인들이 조금씩 다시 모여들기 시작하자 새로운 예배당의 건축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다.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계속 늘어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자는 열정이 교인들의 가슴에 메아리쳤다. 그러던 1932123일 주일에 총건축비 30,000원을 예산으로 예배당 신축을 결의하였다.
1932226일부터 일주일 동안 김익두 목사를 강사로 모시고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교회당 건축은 많은 어려움 가운데서 추진되었다. 최재화는 교회당 건축을 위하여 벽돌 한 장 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붉은 벽돌 한 장에 1원을 하였다. 최재화는 자전거를 타고 경북노회 경내의 여러 교회를 순방하며 경북 지방 모교회의 건축에 동참하여 줄 것을 호소하였다.
기도와 눈물로 지은 교회당은 19339월 말에 붉은 벽돌 2층 건물, 연건평 448평의 웅장한 모습으로 그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였다. 1933108일 오전 11시에 신축예배당 입당예배가 드러졌는데 예배당에는 모두 3,500여 명의 교우들이 참예하였다. 이렇게 지은 예배당은 경북지방의 문화재로서 시간이 지날수록 역사적 가치를 더하였고, 어려움을 딛고 일어난 제일교회의 위상은 온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최재화는 대구제일교회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꿈꾸었다. 그중 가장 관심을 가진 부분은 인재양성이었다. 계성학교와 신명여학교는 제일교회와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최재화는 그 학교에서 설교할 때가 많았고, 학생들도 교회에 많이 출석하였다.
그는 계성학교 출신자들 가운데 소명 받은 학생들을 일본에 유학시켰고, 그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신앙지도를 하였다. 그 대표적인 학생이 훗날, 한신대학 학장을 한 이여진과 부산대학교 총장을 한 조민하이다. 최재화는 젊은이들을 육성하는 데 관심을 가졌고, 이들이 내일의 한국과 한국교회를 이끌어 나갈 인재임을 뼈저리게 느끼고 사랑으로 돌보았다.

김남식 박사 (한국장로교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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