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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 최재화 목사와 독립운동 (2)

[ 2019-04-29 14:17:15]   

 
한국기독교와 3.1운동100주년기념세미나

김남식 박사 (한국장로교사학회 회장)

서울에서 며칠 묵은 최재화는 신의주를 거쳐 중국으로 갔다. 그러나 국제도시 상해는 그가 생각한 것같이 평온한 곳이 아니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는데 그 해 9월에 일본군이 산동반도에 상륙하여 중국군을 공격하였고, 19155월에는 21개조 불평등조약에 중국이 서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원세계가 정권을 잡고 제정(帝政)을 실시하자 이에 반대하는 남경 정부가 독립을 선언하는 등 중국은 혼란의 도가니였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에 도착한 최재화는 미국으로 가는 배편을 구하는 것은 고사하고 생명을 유지하는 것조차도 힘든 판국이었다. 그를 맞이한 상해 주재 미국 선교사들은 사태가 진정된 후에 길을 찾으라고 권면하였다. 이런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최재화는 청도, 대련, 산동을 거쳐 다시 고국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고국에 돌아온 최재화는 실의에 찬 시간들을 보내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일본 유학에의 길을 모색하였다.
1916년 봄, 최재화는 관부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힘들기는 하겠지만 동경에서 고학을 하면서 공부를 하려고 했다. 동경으로 간 그는 일본대학 법학과에 등록을 하였다. 그러나 우유배달, 한약방의 일 등을 하면서 공부하는 것은 결코 생각만큼 쉽고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2년간 고학으로 버틴 그는 1918년 봄, 더 이상 공부할 형편이 되지 못하여 귀국하고 말았다. 그러나 짧은 유학생활이지만 일본에서의 2년간은 최재화에게는 연단의 기회였고, 세계를 향한 눈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귀국 후 최재화는 경신학교를 방문하여 언더우드 선교사를 찾아갔다. 언더우드는 최재화에게 경신학교 교사가 되어 후배들을 지도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리하여 최재화의 새로운 인생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2. 3.1
운동과 최재화

신임 교사 최재화에게 곧 놀라운 일이 일어났으니 이것이 곧 1919년의 3.1독립운동이다. 어느날 최재화는 경신학교의 선배인 세브란스 의전의 이갑성으로부터 만나자는 전갈을 받았다. 종로 2가의 YMCA에서 만난 이들은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고 곧 있을 3.1독립운동의 방향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갑성은 그에게 경신학교 졸업생으로 영남출신이니 대구지방의 독립운동을 맡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의기투합한 최재화와 이갑성은 대구 남성정교회(오늘의 대구제일교회) 이만집 목사를 설득하기 위해 세브란스 학생인 이용상과 함께 독립선언서 4백 매를 가지고 대구로 갔다. 이렇게 하여 대구의 독립만세운동은 38일에 일어났다. 이 날은 마침 대구의 장날이었기 때문에 만세를 부르기에 좋은 여건이었다. 만세운동에는 학교와 교회 그리고 온 민족이 함께 하였다.
대구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최재화는 10일 밤, 대구를 탈출하여 고향 선산으로 갔다. 선산의 독립운동을 또다시 주도하기 위해서이다. 선산으로 간 최재화는 선산 지방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191943일에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만세운동에는 남녀노소 없이 모두가 거리로 나와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일본 경찰의 체포 작전이 격심해지자 최재화는 고향을 탈출하였는데 55명의 동지들은 일경에 체포되었다.

3.
1, 2'최재화 사건'

대구와 선산의 독립운동 현장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최재화는 다시 대구에 잠입하여 계성학교 학생들을 규합하여 새로운 운동을 계획하였다. 그것은 관공리들의 사직을 촉구하는 경고장을 살포하는 일과 일본에 항거하는 의미로 각종 상점들이 폐점하기를 촉구하는 경고장을 작성하여 살포하는 일이었다. 일본 경찰은 이 사건을 '최재화 사건'이라고 명명하였다.
최재화는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하여 여러 개의 가명을 사용하였다. 그는 이러한 와중에도 제2차 최재화 사건으로 불리는 '무관학교 생도모집 사건'을 또다시 주도하였다. 당시 만주에서는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무력을 기르는 신흥무관학교가 있어서 독립군 양성의 근거지가 되었다. 19166월 중순,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변장을 하고 다니던 최재화에게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보낸 사람이 찾아와 대구 달성공원 벤치에서 그들은 비밀리에 접선을 하였다.
그의 요구는 독립운동을 위해 무관학교 생도를 모집하여 만주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최재화는 여러 명의 젊은이들을 만주에 보냈고 이들은 군사훈련을 받은 후 만주에서 독립군에 편입되기도 하고, 군자금 조달을 위해 국내에 잠입하기도 하였다. 그중 한 명이 군자금 모금을 위해 국내에 들어와 경북 왜관의 한 여관에 투숙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제2차 최재화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최재화는 이 사건으로 전국에 지명 수배되었다. 대구경찰서 고등계 형사의 추적을 피하여 여러 곳으로 피신하여 동지들과 연락을 취하던 최재화는 상주 역에서 결국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상주경찰서 유치장에 갇힌 최재화는 탈출할 기회를 노리다가 어느날 꾀병을 부려 유치장을 나와 형사들을 때려눕히고 도망을 쳤다. 국내에서는 더 이상 활동하기가 어렵게 된 최재화는 중국으로 망명하려고 하였다.
중국에 가려면 기차 편으로 신의주를 거쳐 가거나 인천에서 배로 가야 하는데 최재화는 전국에 지명 수배된 상태라 그 길로 갈 수가 없었다. 최재화는 일본을 거쳐 중국에 가기로 하고 일본 형사의 도움으로 여행증을 입수하여 부산을 거쳐 일본에 갔고 거기서 다시 중국 상해로 갔다. 최재화의 사역은 이제 중국 대륙에서 펼쳐진다. 그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너무나 놀라워 인간의 머리로는 측량할 수 없기에 그 역사 앞에 감사할 따름이다.
 
II. 목회자 최재화

최재화가 중국에 들어가 새로운 삶을 모색할 때에 일본 총독부는 이른바 제1, 2차 최재화 사건의 궐석재판을 실시하여 도합 징역 8년의 언도를 하였다. 징역을 언도받은 최재화는 당분간은 조국에 돌아올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1.
중국에서의 사역

상해에 도착한 최재화는 경신학교 시절의 은사인 김규식 박사를 만났다. 또 안창호, 여운형 등 민족 지도자들과도 교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상해의 독립운동가들은 각 계파에 따른 분열상을 보이고 있었고 실제적인 투쟁 실적이 없었다.
최재화는 외교 활동을 통해 독립을 얻으려는 계파의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려워 무력독립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김원봉, 양건호 등이 조직한 '의열단'에 가담하여 '힘은 힘으로'라는 행동적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이후 최재화는 의열단의 핵심 멤버가 되어 무력투쟁을 주도하였다.
그러던 중 의열단의 김원봉이 자금 사정의 악화로 공산당의 자금을 받으려고 하자 최재화는 이를 반대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의열단과도 손을 끊고, 상해에서 모이는 국민대회에 북경 한인교포회 대표로 참석하였다. 최재화는 의열단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상해의 김구 주석 휘하에 들어가 연락과 경비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최재화는 많은 심적 갈등을 겪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 하느냐 라는 문제를 놓고 깊이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최재화는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남경에 있는 금릉신학교를 찾아가 입학하였다. 그러나 생활비와 학비가 없는 상황에서 신학공부를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근근히 주변의 도움으로 공부하던 중 최재화는 좋은 조건으로 화북신학교로 전학하게 되었다. 산동성 화북신학교 부교장으로 전임하는 가옥명 교수가 주선하여 전액 장학금을 받고 전학하게 되었는데 이때가 19229월이었다.
화북신학교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경영하는 학교로서 보수적인 신학사상을 가르치고 있었다. 교수진은 당대의 유명한 신학자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학생들도 가족과 같은 분위기였다. 화북신학교의 한국인 학생은 최재화와 김경화 두 사람뿐이었다. 둘 다 남경의 금릉신학교를 다니다가 전학 온 학생들로서 나이도 동갑이어 그들은 형제같이 지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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