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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대 총회장 백은 최재화 목사의 3.1운동 야사 ⑥

[ 2018-12-07 16:37:15]   

 
 김남식 박사
(
한국장로교사학회 회장)
선산에서의 만세운동

 
38일의 대구 시위를 기점으로 경북 일원에는 만세운동의 열풍이 요원의 불길같이 퍼지기 시작하였다. 대구의 큰 장날에 왔던 각지의 장군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대구에서의 일들을 이야기하고, 학교의 휴교로 귀향한 대구 학생들에 의해 만세 소리가 고을마다 일어나게 되었다.

일본의 고등경찰요사에 의하면 3월 중순에는 의성 지방에서, 317일과 23일에는 안동의 각 지방에서, 318일과 19일에는 영덕군 영해면 병곡과 창수 지방에서 시위운동이 일어났는데 시위 군중들이 난폭해져서 관공서를 파괴하는 등 광폭(狂暴)이 극에 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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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에는 성주읍내에서 대규모 시위가 있었고, 4월 중순부터는 잠잠해지다가 428일에 달성군 공산면에서 8명이 만세를 부르는 것을 끝으로 경북지방의 소요사태가 진정되었다고 일본 경찰은 기록하고 있다.

이들의 통계에 의하면 소요관계자 중 사법 처분에 회부한 자 1,823, 그 외에 검속처분자가 926명에 달하며, 중요한 사건은 곽종석, 장석영, 김창숙 등이 주범인 '독립운동청원사건'과 이시영, 김응섭, 남형우, 서상일 등이 주범인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사건', 김수길, 최재화가 주범인 '관공리 사직권고 및 폐점 협박 사건' 등이 있다고 하였다.

일본 경찰의 기록에 의하면 경북 각 지방의 만세운동(그들은 소요로 표현)102개처에서 120회에 달하였고, 가담한 사람은 총인원 20,178명이었으며, 진압을 위한 무기 사용이 8개소에 10(그중 6회는 발포), 관헌측 손해는 부상자 13명이나 되고, 폭민(暴民, 일본 경찰은 만세 시위자를 이렇게 불렀다)의 사상은 사망 26, 상해 69명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실상은 그 몇 배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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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대구의 만세운동에 참가한 후 고향 선산으로 간 최재화는 고향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동지 규합과 준비에 몰두하였다. 서울과 대구에서 불어오는 만세의 물결은 금오산 아래에 있는 고요한 고을에도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최재화는 고향에 돌아오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이 고향 어른들에게 인사하러 다녔다. 학교가 휴교하였기에 부모님도 뵙고 부인과 어린 아들도 만날겸 고향에 왔다고 말하였다. 일단 일본 경찰을 안심시켜야 모든 계획이 순조로울 것으로 보고 집안 일을 돌보면서 동지들을 규합하려고 노력하였다.
최재화는 칠곡군 인동면에 사는 친구 박진오에게 급히 만나자는 연락을 하였다. 박진오는 최재화의 어릴 때 친구로서 서로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이였고, 그도 예수 믿는 사람이기에 더욱 공감하는 바가 많았다.

고향에 돌아온 최재화는 농촌 소년 소녀들의 의식을 깨우치고 민족정신을 함양하기 위하여 야학을 시작하였다. 고급반, 중급반, 하급반으로 조직된 야학에서는 세계 각지의 문물과 우리 민족이 당하고 있는 고초에 대하여 시간 나는 대로 교육하였다.
고급반은 중학교 이상의 과정이었고, 중급반은 보통학교 상급반 정도였는데, 이 반에 최재화의 동생 유권도 다니고 있었다. 하급반은 기초반으로서 최재화의 여동생들이 다녔다.
이와 같은 야학은 만세운동을 하려는 전초 작업이었다. 특히 고급반 학생들에게 민족혼을 불어 넣는 데 주력하였고, 이들은 민족의 갈길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최재화는 고향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공부시킨다는 명목으로 야학을 개설하면서 만세운동의 준비를 진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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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밤, 박진오는 소리 없이 최재화의 집을 찾아왔다. 세상이 어수선하니 무언가 일이 있을 것을 예측한 박진오는 아무 눈에도 띄지 않게 산양동의 최재화 집으로 온 것이다.
하룻밤을 세우면서 최재화는 서울에서 손병희를 비롯한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과 학생들의 만세 시위 그리고 이갑성과 같이 이만집 목사를 만난 이야기, 38일에 있은 대구에서의 만세운동에 대하여 상세하게 이야기하며 우리 고향에서도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이야기하였다.
평소에 신앙생활을 통하여 민족애에 불타 있던 박진오는 이 일은 우리가 반드시 성취하여야 할 일임을 고백하고 함께 힘을 합하기로 굳게 약속하였다. 두 사람은 하룻밤을 꼬박 세우며 서로 마음을 줄 수 있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25일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새벽 미명에 박진오는 소리 없이 최재화의 집을 빠져 나갔다.
두 사람의 각오는 비장하였다. 이곳은 그들의 선대부터 살았던 고향 땅이다. 시위운동의 결과 그들의 가족, 친척과 이웃에게 말할 수 없는 박해가 오리라는 것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고난의 길이라 할지라도 민족의 대역사 앞에 비겁할 수 없어 죽기를 각오하고 이 일을 전개키로 하였다.

최재화에 의하여 거사에 참가하기로 결심한 동지들은 최종석, 최도원, 김갑술, 박병하, 노차돌, 박경하, 유정화, 한만술, 윤봉이, 김유출, 백태준, 김인출, 최용석, 최종호, 박임하, 김만출, 백유준, 김금심, 이송오, 노한영, 김진언, 조임득, 김용교, 이성기, 이소열 등이다.
동지들을 규합한 최재화는 각자에게 임무를 맡겼다. 비밀리에 일을 하여야 했기에 낮에는 농사일에 열중하였고, 밤이면 사랑방에 돌아가면서 모여 거사를 준비하였다. 순박한 농촌 청년들이라도 나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가득하기에 자신들의 목숨을 내어놓고 독립투쟁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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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년간 햇빛을 보지 못했던 태극기가 만들어지고, 교회 등사기를 빌려 독립선언서를 프린트하였다. 해평면을 중심으로 인근 각지에 연락망을 펴고 모두 함께 독립운동에 참여키로 준비하였다.
이들은 거사일을 43일 석양께로 잡았다. 농번기가 시작되느니만치 낮보다 저녁 나절이 사람들을 동원하기에 더 좋았기에 이런 시간을 정하였다.
최재화의 결심은 굳어졌다. 민족을 위해 피흘려야 할 때가 왔고,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부모와 처자, 형제와 친구들을 버리고 일본 경찰의 총탄에 죽어가야 할 자신임을 생각할 때 죽어도 대장부답게 죽고 싶었다. (계속)

 김남식 박사
(
한국장로교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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