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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 신앙 ④

[ 2018-05-21 14:38:59]   

 
한국 순교자에 대한 역사적 고찰

2.
수난의 역사

한국교회, 특히 개신교의 수난은 초대 기독교회나 한국 가톨릭교회가 겪었던 수난과는 그 특성을 달리한다. 초대 기독교회나 한국 가톨릭교회의 수난은 국가에서 신앙을 금지하였으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신앙을 파수하려다가 당한 고난이다.
이것을 직접적 이유라고 한다면 한국 개신교회가 당한 수난은 간접적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즉 한국에 개신교가 전래될 때의 상황은 매우 어려웠다. 세계 열강들이 한국을 장악하려고 하였으며, 특히 일본, 중국, 그리고 러시아의 세력은 한국에서 각축전을 벌였다.

(1)
일제하의 수난
일본은 한국을 강점하게 되었고, 그들의 통치를 영구화하기 위하여 일시동인(一視同仁)이니 내선일체(內鮮一體) 또는 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을 내세워 동화론(同化論)을 주장하였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민족 차별을 계속하였다.
일본의 통치 기간 동안 새로운 구미문화(歐美文化)를 받아들여 나라와 민족의 갱생을 주장하는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중심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선교사들을 통하여 서양 문물을 배운 이들의 가슴속에는 민족의식이 싹트게 되고, 이것이 행동화될 때 일본 통치자들에게는 골치 아픈 존재였다.
이러한 바탕 속에서 일본은 한국의 교회들을 자기들의 통치에 대한 반항 집단 내지 방해하는 존재로 보았고, 기회만 있으면 교회에 대한 핍박을 하였다. 이들은 기독교 단체나 중심인물을 제거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사건들을 조작하였는데 그 대표적 예가 이른바 '105인 사건'이다.
1919년의 독립만세운동은 일본의 통치에 항거하는 민족의 한()의 표출이며, 민족의식의 행동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운동의 주동적 기관은 교회였고, 교역자들과 교인들은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세로서 앞장섰다. 일본의 통치자들은 교회를 더욱 적대시하였고, 많은 교회와 학교들이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박해는 일제말의 신사참배 강요에서 절정에 달하였다. 만주를 침략하고 이른바 대동아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한국 민족을 근본적으로 일본에 동화시키기 위하여 한국인의 말과 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이른바 '국어 상용(國語常用)'이라 하여 일본 글과 말을 강제로 사용토록 하였다. 또 한국 민족을 일본의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 만든다고 하여 한국 사람들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하였다. 이들은 국민서사(國民誓詞)라는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말을 외우게 하고, 일본 천황에게 경배하려고 천황이 살고 있는 동쪽을 향하여 절하는 이른바 동방요배(東方遙拜)를 강제로 시켰다. 일본은 그들의 민족 종교인 신사를 서울 남산을 비롯하여 전국의 면 소재지에까지 세우고, 학생들과 전 국민에게 참배를 강요하였다. 이들은 가정, 학교, 공장 심지어 교회에까지 그들의 귀신통(神柵)을 만들어 달게 하고, 여기에 절하도록 하였다.
일본의 이러한 박해와 학정에 대하여 많은 교역자와 신도들은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하거나 감옥에서 6-7년씩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일본은 기독교 신앙 자체를 반대하여 한국의 기독교회를 박해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군국주의를 확장하고 영구화하기 위하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다. 이것은 마치 네로를 비롯한 로마의 황제들이 기독교를 박해한 것을 20세기에 와서 다시 실시한 것이라고 하겠다.

(2) 6
25 한국전쟁의 수난
일본의 박해에서 벗어난 이후, 한국은 강대국의 정치적 흥정에 의하여 남북이 양단되었고, 19506월에는 민족상쟁의 전쟁이 일어나 3년간 한국 반도를 황폐케 하였다. 북한에 진주한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공산당 신조대로 무신론을 주장하였고 교회를 박해하였다. 그들은 한국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군인과 시민들, 나아가서 세계 여러 나라의 젊은이들이 한반도의 이름 없는 봉우리나 계곡에서 죽게 한 비극의 역사를 엮게 하였고, 교회를 불사르며,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을 북쪽으로 납치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한국교회 수난의 특이성을 보여준다. 이것은 한국 민족이 겪어온 정치적 불안에서 파행된 것으로, 정치적 지배에 대한 방해 요소의 제거와 민족 전쟁으로 인한 피해 등은 간접적 수난 요인이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수난 속에서도 계속적으로 그 생명을 유지하였으며, 수많은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 되어 오늘날과 같은 성장의 열매를 거두었다.
'수난과 부흥'이라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민족의 등불로서의 사명을 다하여 왔고 또 계속하여야 할 한국교회는 선교 제2세기를 맞아 수난의 터전 위에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들을 맺어야만 할 것이다.
625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많은 순교자들이 나왔다. 그 수는 우리들이 정확하게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심지어는 한 교회에서 수십 명의 순교자가 나오는 슬픈 영광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만이 순교자의 전부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625 한국전쟁 중 북한군과 공산당에 의해 순교한 기독교 교직자는 이름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사람만 176명이 확인되었고, 납북된 교직자는 194명으로 피살과 피랍 피해자를 합하면 희생자는 370명에 이른다. 이는 정부가 전쟁이 끝나기 전에 조사, 작성한 '피살자 명부', '피납치자 명부', 대한적십자사가 1956년에 희생자 가족들로부터 자진 등록을 받은 '실향시민 등록자 명부''목사', '장로', 천주교의 '신부' 등으로 교직이 명확히 밝혀진 기독교인들과 기독교의 여러 조사자료를 종합한 숫자다. 여기에 피살 또는 납북된 이름 모를 일반 신도를 합친다면 그 숫자는 크게 늘어날 것이다. 전쟁이 끝나지 않았던 1952625일자 한국기독교신문에는 4백 명의 목자(牧者)가 희생되었다는 기사가 있었고, 남한의 피해와는 별도로 북한에서만 장로교 교역자 240, 감리교 46명이 순교 또는 행방불명된 것으로 알려졌다.
기독교 연구자들의 조사로는 피살 또는 납치된 개신교 교역자는 정부가 조사한 숫자보다 훨씬 많았다. 장로교 177, 감리교 44, 성결교 11, 성공회 6명이라는 연구도 있었고, 가톨릭에서는 남북한을 합쳐 한국인 52(교구장 1, 신부 40, 수녀 7, 신학생 4)과 외국인 98명을 포함하여 150명이 희생되었다.
 
. 한국 교회의 수난의 특징

한국 교회, 특히 개신교의 수난은 초대 기독교회나 한국 카톨릭 교회가 겪었던 수난과는 그 특성을 달리한다. 초대 기독교회나 한국 카톨릭 교회의 수난은 국가에서 신앙을 금지하였으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신앙을 파수하려다가 당한 고난이다.
이것을 직접적 이유라고 한다면 한국 개신교회가 당한 수난은 간접적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즉 한국에 개신교가 전래될 때의 상황은 매우 어려웠다. 세계 열강들이 한국을 장악하려고 하였으며, 특히 일본, 중국, 그리고 러시아의 세력은 한국에서 각축전을 벌렸다.

1.
국가신도주의의 핍박

일본은 한국을 강점하게 되었고, 그들의 통치를 영구화하기 위하여 일시동인(一視同仁) 이니 내선일체(內鮮一體) 또는 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을 내세워 동화론(同化論)을 주장하였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민족 차별을 계속하였다.
일본의 통치 기간 동안 새로운 구미문화(歐美文化)를 받아들여 나라와 민족의 갱생을 주장하는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중심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선교사들을 통하여 서양 문물을 배운 이들의 가슴 속에는 민족의식이 싹트게 되고, 이것이 행동화될 때 일본 통치자들에게는 골치 아픈 존재였다.
이러한 바탕 속에서 일본은 한국의 교회들을 자기들의 통치에 대한 반항 집단 내지 방해적 존재로 보았고, 기회만 있으면 교회에 대한 핍박을 하였다. 이들은 기독교 단체나 중심 인물을 제거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사건들을 조작하였는데 그 대표적 예가 이른바 '105인 사건'이다.
1919년의 독립만세운동은 일본의 통치에 항거하는 민족의 한()의 표출이며, 민족의식의 행동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운동의 주동적 기관은 교회였고, 교역자들과 교인들은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세로서 앞장섰다. 일본의 통치자들은 교회를 더욱 적대시하였고, 많은 교회와 학교들이 피해를 입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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