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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회 역사와 전통을 버린 자는 처벌해야
신구약성경은 정확무오한 유일한 법칙이다

[ 2020-11-03 09:17:23]

 

<새에덴교회와 35개 거점교회에서 화상회의로 모인 105 총회>

교권도 정치도 권징도 이 법도에 의존해야 한다

 

총회역사위원회가 제105회 총회에 배부하려고 <장로교 역사와 신앙>이라는 교회역사와 교리를 담은 서적을 발간한 바 있다.

동 역사와 전통이 담긴 서적은 교계에 역사학에 조예가 깊은 교수와 학자 7명이 집필하였다.

그 면면을 보면, 고려신학대학교의 이상규 교수(󰡐6.25전쟁과 한국교회󰡑), 본 총회의 장로회역사학회 회장 김남식 박사(󰡐6.25 한국전쟁과 순교자󰡑), 개혁신학자 주도홍 교수(󰡐개혁신학으로 본 통일신학󰡑), 총회역사학회 신종철 목사(󰡐개혁주의 입장에서 본 6.25 한국전쟁과 한국교회󰡑), 총회역사학회 박창식 목사(󰡐총회신학교와 대구시절 연구󰡑), 대신대학교 역사학 교수인 김병희 목사(󰡐십자군 의용대󰡑), 총신 명예교수 심창섭 교수(󰡐한국전쟁 이후의 기독교󰡑) 7인이 필을 들어 6.25전쟁과 한국교회의 신앙역사를 각각 집필하여 제105회 총회 총대들에게 배부하려고 계획하였다.

이 책자는 총회에 소속하고 있는 총회역사위원회의 기획작품이었고, 또한 제105회 총회에 배부할 역사서로서 총제목은 <장로교 역사와 신앙에서 6.25전쟁 70주년과 한국교회>이며, 6.25전쟁에서도 꿋꿋하게 지켜온 우리들의 신앙을 소개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 역사학을 전공하는 교수와 학자들은 처음부터 역사적 사건을 경험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것이 신앙이다󰡓고 소개할 만한 글을 게재한 것은 사실이다.

대개 논문을 작성할 때 순수하게 자기의 마음과 머리로 글을 작성할 수는 없으며, 기왕에 통용되고 있는 선배들의 논문과 책자를 중심으로 글을 작성하게 되는 바, 대신대학교의 교수 김병희 목사는 6.25전쟁시에 있었던 󰡐십자군 의용대󰡑라는 글로서, 6.25전쟁의 비사와 기독교인들로 구성된 십자군의용대를 소개한 것은 실로 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줄만한 글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총신대학교의 부총장을 역임하고 명예교수직으로 있는 심창섭 교수는 그릇된 역사 증언으로 결국 그가 속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교단의 역사를 훼손했을 뿐 아니라 교단 전체를 크게 욕보이고 말았다.

이에 본보는 2020915일자로 발표하려 했던 심창섭 교수의 논문과 그에 비견될 만한 여러 글들을 비교하려고 한다. 1997년도 통합 광나루 장신의 총장 김인수 교수의 글 2004년도 박용규 교수의 글 2006년도 홍치모 교수의 글 2012년도 통합측 역사학자 김수진 목사의 글 2013년도 장로교역사학회 회장 김남식 박사의 글 등을 제시한다.

이 글들을 비교해 볼 때 심창섭 명예교수는 분명, 역사를 왜곡한 글이요 결국 우리 교회를 분열시키는 글이 아닐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도 우리 총회는 교회와 교단을 분열시키는 글을 너무 관대하게 대하고 있다. 현 총회역사위원회와 현 총회장과 임원 등이 심창섭 교수의 교단을 어지럽히는 글이 실린 책 자체에 대해 배부를 중지하게 했고, 문제 부분을 심 교수가 다시 기록하게 하여 수정본을 만들어 배부한다고 하는데, 이렇게까지 용납하고 관대하게 대하여도 되는지 알고 싶다.

총회역사위원회와 총회 임원회가 중심이 되어 교단의 명예를 크게 실추시키고 후대에 씻지 못할 왜곡된 역사관을 주입시키려 한 심창섭 명예교수에 대해 󰡐해직󰡑(解職)은 물론 총회 역사위원회에서 󰡐축출󰡑(逐出)하고 총회와 총신과 관련된 모든 부분들에서 관계를 󰡐단절󰡑(断絶)하도록 해야 한다(심교수는 권징조례 제3조 제42조의 죄에 해당한다).

총회가 바로 서려면 신학과 신앙과 역사가 바로 서야 참다운 세움의 교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020915, 심창섭 교수의 󰡒한국전쟁 이후의 기독교󰡓] - 105회 총회에 배부될 예정이었던 책자 중에서

 

(중략) 전쟁 후 한국교회의 분열의 또 다른 요인은 신학교 원조 물자로 인해 발생하였다. 미국 정부의 수억 달러에 해당하는 원조물자와 미국교회의 도움으로 인해 한국교회는 치명적인 물질적 시련을 겪게 되었다. 외국의 원조물자가 교회분열의 사회적 원인이 된 것이다. 스코필드 박사의 말은 다음과 같다.

󰡒한국교회가 그 시초부터 민족교회로서 자립하고 자치하고 자조하여 왔으며 신학적으로 독립하고 또 6.25의 비극이 없었던들, 부패와 이에 따른 교권의 분열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6.25가 가져온 교회의 비극은 바로 한국교회가 자립할 수 없었으며 피해 교회로서 전적으로 선교비에 의존하게 되었다는 점이며, 이것은 결국 교회분열의 결과까지 초래하였다는 사실이다. 교회 통합의 문제는 경제적 자립의 문제와 직결된다는 것은 식자와 교회지도자들의 상식이기도 하다.󰡓

스코필드 박사는 초기 선교사들의 한국교회 선교의 네비우스의 3자 정책이 동란으로 인해 와해되었으며 동란 이후에 쏟아진 해외의 구호금과 구호물품이 한국교회 분열을 초래한 한 원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남산 신학교의 부지 매입을 둘러싼 3천만 원 사건을 한 예로 들 수 있다.

당시 신학교 교장이었던 박형룡 박사는 박호근의 말을 믿고 선교부로부터 받은 3천만 원을 이사회의 허락도 없이 단독으로 신학교 부지 매입을 위해 지불하였다. 박호근으로부터 영수증도 수령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신학교 부지도 불하받지 못하고 돈도 없어지게 되자 박 교장은 이사회에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은 구호금으로 인해 신학교의 분열과 교단의 분열을 가져온 비극이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을 통해 한국교회의 분열을 야기한 주된 이슈는 WCC의 신학적 문제가 더욱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박형룡은 박호근에게 사기 당했다고 증언하지만 박호근은 문교부로부터 대학 인가를 받기 위해 로비 자금이 필요하다고 이미 그 사용처를 박형룡에게 알렸다는 것이다. 박호근의 말이 사실이라면 박형룡도 공범인 것이다. 그리고 박호근은 또한 박형룡이 자신에게 미국에서 온 1만 달러를 암시장에서 환치기를 하도록 지시했다고 폭로하였다. 3천만 원이 거기에 포함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박호근의 주장대로 박형룡 박사가 불법 환전을 지시했다면 실수를 한 것이다.

195837일 대전에서 열린 이사회에서 박형룡 박사의 사표 수리를 두고 20명의 찬성과 17명의 반대파가 격돌하였다. 반대파들은 박형룡의 교장직 사임을 반대할 뿐 아니라 3천만 원의 변제 조건으로 청파동 사택 반환도 반대하였다. 박형룡 박사를 지키려는 반대파는 보수신학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이었다. 박형룡을 밀어내는 것은 곧 보수정통을 밀어내고 신학적 진보세력이 득세하는 것으로 보았는데, 그중에서도 에큐메니컬과 용공사상을 들고 나온 것이다.

박형룡 박사를 연구한 장동민 교수는 흥미로운 접근을 시도하였다. 그는 3천만 원 사건 이전과 이후에 박형룡 박사의 에큐메니컬에 대한 태도의 변화에 대해 언급한다. 박형룡 박사는 3천만 원 사건 이후 에큐메니컬에 대해 더욱 강경파로 돌아섰으며 에큐메니컬 운동을 용공세력으로 단정했다는 것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3천만 원 사건은 한국장로교회의 분열과 논쟁의 불씨가 되었고 분열을 가속화시켰음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동란 후 해외에서 한국교회에 밀려온 구호금 유입이 한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초기 선교정책이었던 자전, 자립, 자치의 네비우스 3자 정책이 유지되었더라면 이런 불상사는 없었을 것이다. 신학논쟁은 동란 이전부터 발생하였지만 박형룡 박사의 3천만 원 사건이 신학논쟁을 심화시켰고 이것은 한국교회 분열의 한 요인이었다.

논자의 견해는 신학논쟁은 상존해 오던 갈등의 요인이었고 박형룡 사건이 없었더라도 한국 교회 분열의 불씨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신학논쟁은 결코 외부의 요인에 의해 해결되거나 심화되는 것이 아닌 본질적인 신앙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양편에서 박형룡 사건을 핑계 삼은 것은 서로 자신들의 신학을 고수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1997, 󰡒장로교회의 통합(統合)과 합동(合同)측의 분열] - 김인수, 한국기독교회의 역사, 장신대출판부, 1997.

 

1950년대는 분열의 비극이 연속된 시기였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남북이 나뉘어 동족간에 피흘리는 비극을 세계 앞에 노정시키고 말았다. 전쟁이 남기고 간 유산은 민족과 강토의 나뉨뿐만이 아니라 민족과 강토가 나뉘면서 교회도 나뉘었다.

특히 장로교회가 50년대에 세 번씩이나 나뉜 것은 실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51년에 고려파가, 53년에는 기장이 갈려나가더니 59년에는 소위 통합, 합동이라는 두 개의 교단으로 나뉘게 되었다. 불과 10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에 반세기 이상을 하나로 내려오던 교회가 세 번씩이나 분열을 하였으니, 이것은 분명히 교회를 분열시키는 마귀의 역사가 아닐 수 없다.

 

1. 분열의 도화선 - 3,000만 환 유용사건

 

전술한 바와 같이 대구에서 개교한 장로회신학교의 교장이었던 감부열(A. Campbell) 박사가 교장직을 사직하자 이사회는 19538월 박형룡 박사를 후임 교장으로 결정하였다.

휴전이 되어 서울로 모두 상경하게 되었으므로 신학교도 일부는 대구에서 수업을 하고 일부는 서울로 올라와 남산(지금의 어린이회관 자리)에서 수업을 하였다. 이곳은 전에 조선 신궁이 세워져 우상을 숭배하던 곳이었으므로, 이곳에 신학교를 세우는 것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학생들의 수에 비해 장소는 비좁았다.

신학교 부지를 물색하기 위해 여러 곳을 다니다가 서대문 지나 무악재 방면에서 적당한 곳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대지가 너무 커 신학교 단독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어, 서울여자대학 설립 기성회측과 교섭하여 같이 그곳에 나가 신학교와 여자대학을 세우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여자대학측이 이를 거절하자, 신학교는 어쩔 수 없이 현재 사용하고 있는 장소를 정부에 교섭하여 불하받도록 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정부와의 교섭을 어떻게 시작하느냐라는 문제를 강구하고 있을 때, 박호근이라는 인물이 부상하였다. 그는 자기가 이재학 국회 부의장과 인태식 재무장관을 잘 알고 있다고 허풍을 떨면서 신학교 부지를 불하받도록 해 주겠노라고 호언하였다. 신학교는 그가 남산에 있는 숭의학교 터를 불하받을 때 힘을 써 준 실력 있는 사람이라는 숭의학교 교장 이신덕 여사의 말을 믿고 그에게 신학교 부지 불하, 건축허가, 신학교의 대학 인가 등의 일을 위임하게 되었다.

박호근은 처음부터 교통비, 통신비, 접대비, 교섭비 등의 이유로 신학교 기금을 조금씩 타내어 가더니, 불과 두 달도 안 되는 기간에 무려 3,000만 환이 넘는 거금을 받아 모두 탕진하여 버리고 말았다. 물론 이 모든 돈은 교장 박형룡의 결재를 받고 지불된 돈이었다. 돈은 3,000만 환이나 지출되었으나, 그가 장담한 대지 불하도, 건축허가도, 신학교의 대학 인가도 얻어내지 못했다.

이런 사실이 밖으로 새어나가 문제가 비화되기 시작하였다. 신학교 부지를 불하도 받지 못하고 경비로 그 많은 돈을 탕진해 버렸으니, 문제가 안 될 수가 없었다. 교장 박형룡은 궁지에 몰리기 시작하였다. 우선 도의적 책임을 지고 교장직을 물러나고 자신의 집을 팔아 얼마라도 변제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언하는 이들이 있어 그대로 하려고 했다.

그러나 정규오, 박찬목 같은 소장파들이 일어나 교장이 돈을 쓴 것도 아니요, 아랫사람들이 잘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니 교장은 책임이 없다고 하면서, 교장직 사임이나 사택의 매각은 할 필요가 없다고 부추기기 시작하였다.

이즈음 박호근은 자기가 이 일로 제소당할까 봐 박 교장이 미국에서 온 돈 1만 달러를 암시장에서 교환한 것을 꼬투리잡아 먼저 박 교장을 걸어 제소하여 버림으로써 이 문제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결국 박 교장은 자기가 법정에 불려나가 심문당하고 망신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박호근에 대한 문제는 소를 취하하는 조건으로 적당히 얼버무리려 하였다.

그러나 신학교 이사회는 19583월 대전에서 이사회를 열어 박형룡의 사표를 수리하고 명예교수로 있게 하면서 43회 총회는 교장서리에 노진현 목사를 임명하고 학교의 내무는 계일승 목사로 담당케 하였다. 이렇게 되어 일단 3,000만 환 사건은 수습 단계에 들거간 것같이 보였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는 박호근에게 3,000만 환 이상 되는 돈을 사기당하고도 그를 고발할 수 없었던 이유이다. 박형룡이 신학교 기금 1만 달러를 암시장에서 교환하는 불법한 일을 자행함으로 해서 결국 그에게 1원 한 푼 변제시키지도 못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이나 교회기관은 어떤 경우에도 불법한 일을 행해서는 안 되고 진리대로 모든 일을 처리해야 된다는 교훈을 남겨 준 사건이다.

 

2. 경기노회 총대사건

 

신학교 부지사건이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혀가던 때에 이 문제를 더욱 어렵게 하는 사건이 터져나왔다. 소위 경기노회 총대 부정 시비의 문제였다. 사건의 대강은 이러하다.

1959년 대전중앙교회에서 모이는 장로회 제44차 총회는 한국 선교 75주년이 되는 해였으므로 내외에서 많은 손님들이 참여할 뜻깊은 총회였다. 총회가 모일 때마다 경기노회 선출 문제는 중요한 사안 중 하나였다. 그 이유는 경기노회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총대 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해 총회에서는 박 교장의 문제가 중심문제로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경기노회 총대 선출은 더욱 중요성을 띠었다. 따라서 박 교장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며 에큐메니컬운동을 지지하는 측과 박 교장을 비호하는 복음주의협회(NAE;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측은 각각 자파 세력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5월에 모인 경기노회 정기회에서 총대 투표를 한 결과 NAE측의 승리로 끝났다. 즉 총대 28명 중 NAE18, 에큐메니컬측 10명이었다. 노회가 끝난 후, 자기가 당연히 총대로 선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황금천 목사가 총대가 되지 못한 점을 이상히 여기고 여론을 환기하자 임원회의 결의로 투표지를 다시 검표하게 되었다.이때 황금천 목사가 80표를 얻어 당선이 확실하였는데, 그의 이름이 누락되었고, 당선자들의 득표수와 순위에 다소 차이가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러자 이 일에 대해 도의적 책임을 지고 당시 노회장 이환수 목사와 서기 서재신 목사가 사임을 하고, 부노회장 강신명 목사의 소집으로 다음 날 임시노회가 모여, 지난 번 정기노회 시의 총대 명부를 무효화하고, 다시 총대를 선거하였다.

그런데 이 임시노회에서 선출된 총대는 공교롭게도 NAE측에서는 목사 1, 장로 1인밖에 당선이 안 되고 나머지는 모두 에큐메니컬측에서 당선되었다.

 

[20041110, 󰡒에큐메니칼(W.C.C.) 논쟁과 통합합동의 분열󰡓] - 박용규 저 <한국기독교회사 2> 중에서

 

에큐메니칼운동을 두고 한국교회는 W.C.C.를 지지하는 이들과 반대하는 이들 사이에 대립이 피할 수 없을 만큼 깊어갔고, 이런 상황에서 열린 제44회 대전 총회에 어떤 일이 발생하리라는 것은 불 보듯이 뻔한 노릇이었다. 1959924일 오후7시 대전중앙교회(양화석 목사 시무)에서 노회 총대 261, 선교사 23, 284명 중 251명이 출석한 가운데 총회장이 개회를 선언함으로 총회가 개회되었다.

그러나 󰡒개회 벽두 경기노회 회원권 문제가 논의되자 5분도 경과하기 전에 안광국 목사는 회석에서 임원 불신임안을 제출하고 가부를 묻는 등, 회장을 끌어내라는 등 장내는 지극히 소란하게 되었다.󰡓 44회 총회 회록 촬요에 첫 날 󰡒경기노회 회원권 문제로 쌍방대립이 심각하여 장내가 소란󰡓하였다고 기록해 경기노회 총대 문제가 뜨거운 현안이었음을 말해 준다.

그 이튿날 25, 경기노회 회원권 문제로 회무를 처리하지 못하고 논쟁, 소란, 정회로 공전만 거듭하자 총회는 정기노회 측과 임시노회 측 각 2명씩 그리고 정기노회를 제외한 총 회원 중 각 1명씩 2명의 해명 발언을 들은 후 경기노회 총대권 문제를 가지고 󰡒임시󰡓, 󰡒정기󰡓라는 부호로 경기노회를 제외한 총대 전체 투표를 한 결과 124119, 기권 5표로 임시노회 측 총대를 받아들이기로 했으나 표상으로는 중립을 지켜야 할 선교사 23명이 찬성표를 던진 데에 대한 이의가 제기된 데다, 926일 오전9시 속회된 총회에서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사무결의 방식에 의한 이전 결의가 법에 위반될 경우 재론되어야 한다는 법 이론을 들어 경기노회 총대권에 대해 정기노회 측이 총대 선출 과정에서 󰡒그 위법성이 밝혀졌기 때문에 이를 묵과할 수 없음을 깨달아 총회는 정치부와 증경총회장 연석회의에 회부하여 소원을 회답하는 법의 정신에 의한 처결안을 위임하고 󰡐2시까지󰡑 정회했다. 따라서 경기노회는 권징조례 제9장 제91조에 의하여 양측 다 회원권을 상실케 되었다.󰡓

정치부와 증경총회장 연석회의에서는 이 문제를 매우 심도 있게 논의한 후 󰡒법으로 판결할 것이나 총회의 평화를 위하여 선교사 전원과 양측 동반수를 참석케 하자󰡓는 안에 합의하고 총회 제출 전 우선 정기 측 이환수 회장, 임시 측 강신명 회장에게 문의한 바 강 목사가 불응하는 바람에 다시 연석회의가 모여 이 문제를 논의했다.

다시 회집된 정치부와 증경총회장 연석회의에서는 󰡒총회를 당분간 정회하고 경기노회에 맡겨서 개선케 하고 총회는 임원회에 맡겨서 적시에 소집토록 하여달라󰡓는 건의안을 제출했다. 하지만 󰡒총회는 그 후 여러 가지 연관된 문제 때문에 장내가 소란하여진 채 제4일인 일요일을 맞았다.󰡓

총회 4일째, 28일 아침 총회가 속회되었으나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총회장 노진현 목사는 󰡒총회를 1030분까지 임시 정회하고 증경총회장과 나에게 맡겨 주면 또 한 번 평화를 모색하여 보겠다󰡓 하여 총회의 가결을 얻은 후 증경총회장들과의 회의 결과 얻은 다음과 같은 안을 제시했다.

 

1. 현 총회 정세로는 회무의 원만 진행이 곤난하므로 1124일 화요일까지 정회하고 그 전으로 경기노회 총대는 개선하여 오게 하고 다음 속회는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한다.

2. 특별위원회를 정부총회장, 증경총회장, 각 노회장으로 구성하고 총회의 당면 문제를 수습토록 한다.

 

이 안은 󰡒한경직 목사가 부르고 명신홍 목사가 기록하여 총회장을 통하여 총회에 제출󰡓하였고, 󰡒이상의 건의안을 원안대로 받자는 강승찬 목사의 동의가 성안 가결 통과되어󰡓 총회장 노진현 목사는 󰡒오는 11월 그 정한 때까지󰡓 정회를 선언하고 기도까지 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총회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법적인 방법이자, 최선을 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총회의 분열을 막아보자는 차선 치고는 가장 좋은 차선이었다. 경기노회 총대 문제는 결국 뚜껑을 열고 보면 W.C.C.를 지지하는 이들과 반대하는 자들 사이의 문제였다.

총회장이 정회를 선포하고 기도하자 회원들이 하나둘씩 산회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도중 갑자기 에큐메니칼운동을 지지하는 안광국 목사가 총회장 회의석상 󰡒단 위로 뛰어올라 불신임안을 낭독하고󰡓 󰡒가하면 󰡐󰡑하십시오, 󰡐가결되었습니다󰡑󰡓라는 소리를 지르고 번개같이 하단했다. 이것은 전혀 예기치 않은 일이었다. , 마치 시한폭탄의 투석장과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회의장이 일순간에 수라장과 난투장으로 돌변하고 말았다.

에큐메니칼운동을 지지하는 자들은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한 대로 수순을 밟고 있는 듯했다. 회의가 정회되던 그날, 에큐메니칼운동을 지지하는 이들은 연동 측 149명의 총대들과 선교사들과 함께 대전 미락식당에 모여 증경총회장 전필순 목사를 회장으로, 김광현 목사를 서기로 하여 총회 속회 준비회를 구성한 후 1124일 화요일 새문안교회에서 속회하기로 한 결정과는 달리 29일 연동교회에서 총회를 속회했다.

총회장, 부총회장, 서기, 부서기, 회록 원서기, 부서기 1명도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전필순 목사의 사회로 총회를 속회하고 총회장 이창규를 선출했다. 이들은 󰡒우리는 분열을 원치 않으며 총회가 하나 되기 위한 노력과 수단을 아끼지 아니할 것이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노진현 교장서리를 해임하고 계일승 박사를 교장서리로 임명하고, NAE를 연구할 위원을 임명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929일 총회장은 전국 교회에 󰡒1129일 상오 10시 연동교회에서 모여 불법으로 조직한 집단이나 분파적인 여하한 언동에도 현혹됨이 없이 교회 설립 75주년의 전통과 순수한 복음진리를 파수󰡓해 달라는 성명서를 발표했고, 다시 30일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임원 일동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4회 총회 정회 후 신도께 보내는 멧세지󰡓를 전국에 발송해 동요하지 말 것을 부탁했다.

 

󰡒총회의 원만한 진행과 교회의 평화를 위하여 이상과 같이 정회한 후 소란한 틈을 이용하여 목사 안광국 씨는 강단에 올라가서 산회 도중의 회원을 향하여 소위 임원 불신임안을 낭독하고 소란을 이르켰고 이러한 불법을 기초하여 다음날부터는 서울 연동교회에서 집회까지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임원 불신임󰡑이라는 것은 우리 총회 헌법이나 규측에는 없는 일입니다. 이는 분명히 세상 법인데 세상 법으로서도 일단 정회 후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정부총회장을 포함하는 중대한 불신임안은 절차에 의하여 제출되고 정중한 비밀투표에 의할 것이지 정회 후의 일회원의 고함이나 구두 가결로 될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이러한 불법과 비법을 만행하여 별개의 총회를 조직하려는 데는 여러 가지 불순한 동기가 있음이 분명한 것입니다. 칼빈주의의 보수신앙을 그대로 지켜서 한국교회 75년의 역사를 불변하시는 복음 위에 확고히 세우려는 우리들은 또한 교회의 화평과 칼빈주의가 가리친 민주주의 원리인 준법정신에 철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신도 여러분! 이러한 교회의 위기에 서서 우리들은 여러분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말세를 당하여 옛 원수 마귀는 택함을 입은 자라도 할 수만 있으면 미혹하려고 단말마적인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지나간 전쟁 중 우리는 친척을 잃고 재물을 잃었습니다. 우리에게서 명예와 생명을 빼앗긴들 우리는 복음진리를 변할 수 없습니다. 형극의 가시밭길을 걷는 우리 총회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노진현 총회장의 명의로 총회 통지가 갈 때까지 기다려 주시고 여하한 유설에도 현혹되지 마시고 다만 주께 상달되는 기도의 제단을 계속 싸아 주시옵소서.

 

주후 1959930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임원회 일동󰡓

 

총회장 노진현 목사와 임원들은 연동교회에서 모인 총회를 향해 󰡒단말마적 몸부림󰡓이라는 거친 용어를 동원하면서까지 연동교회의 에큐메니칼 총회의 불법성을 규탄한 것이다. 확실히 경기노회 임시노회에서의 총대 선출과정, 법 절차를 무시한 총회에서의 불신임안 상정과 가결, 그리고 총회의 결정을 무시한 연동교회에서의 속회는 분명 정도는 아니었다.

에큐메니칼운동을 지지하는 이들이 따로 총회를 구성한 것은 교회의 연합과 일치와 화합이야말로 시대적인 사명이라고 지금까지 외쳐왔던 자신들의 주장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자기 모순적인 행동이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총회의 분열을 막고 총회의 일치를 지키려던 증경총회장들은 연동교회에서 W.C.C.를 지지하는 이들이 총회를 따로 구성하여 속회하자, 같은 날 929󰡒금월 29일 상오 10시 연동교회에서 모여 불법으로 조직한 집단이나 분파적인 여하한 언동에도 현혹됨이 없이 교회 설립 75주년의 전통과 순수한 복음진리를 파수󰡓하여 달라는 성명서를 전국에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동년 930일자 총회장 노진현 목사 명의의 성명서나,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임원회 일동의 성명서 모두 맥을 같이하고 있었다.

 

  [2006823, 󰡒합동 측 총회와 통합 측 총회의 분열󰡓] - 총회 100년사 편집인 총신대 홍치모 교수

 

1959년 대전중앙교회에서 소집된 제44회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의 분열은 한국장로교총회 역사상 크나큰 비극을 안겨준 사건으로, 장로교인은 물론 한국교회 모두에게 가슴 아픈 사건이었다. 이 분열은 오랜 세월 동안 같이 살아온 형제들임에도 불구하고 소위 교회 지도자들의 신학적 견해의 차이를 비롯하여 교회 안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군림하고 있던 W.C.C. 지지 세력과 이들을 반대하는 N.A.E. 세력의 대립 구도 속에서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에큐메니컬 측을 지지하면서 가속화되었다. 1959년의 분열은 통합 측이 설명하는 것처럼 3천만 환 사건이 아니라 1954년부터 총회 안에 일기 시작한 W.C.C.에큐메니컬 문제에서 발원했다.

1954년부터 W.C.C. 문제가 총회 안에 중요한 논제로 논의되고 있었다. 그것은 W.C.C.가 신학적으로 변천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리면서였다.

2차 대전이 끝나자 전쟁 전부터 추진하고 있던 세계교회연합운동은 드디어 결실을 맺게 되어 194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세계교회협의회(World Churches of Council)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총회 정치부장으로 있던 김관석 목사와 그의 사위인 엄요섭 목사가 참석하였다. 당시 한국은 정치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세계 정세의 변화에 대해서 어둡고 둔감하였다.

W.C.C. 창립대회에서 신학적으로 위세를 과시했던 신학자는 카를 바르트와 라인홀드 니버였다. 즉 위기신학자 또는 변증법적 신학자들의 독무대였다. 물론 창립 당시에 상당수의 보수교단이 가입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대회의 주도권은 자유주의자들과 신정통주의자들이 쥐고 있었다. 대회는 매 4년마다 개최하기로 되어 있었다. 당시 한국전쟁 때문에 지연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제2차 대회는 1954년 미국 시카고 북부에 소재하고 있는 작은 도시 에번스턴에서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에서는 명신홍과 김현정을 비롯하여 3인의 참관인을 파송하였다.

명신홍 목사는 귀국하여 총회에 보고하기를 W.C.C.의 신학적 배경은 신정통주의 내지 자유주의적이라고 하였으나, 김현정은 매우 우호적으로 보고하였다. 이들의 보고를 받은 1955년 제40회 총회에서는 에큐메니컬 연구위원회를 설치하였고, 1957년 제42회 부산 총회에서는 총회의 태도를 밝힌 바 있다.

1958년 제43회 총회에서 박형룡 박사가 교장직에서 물러나고 이사회가 󰡒박형룡 박사를 본교 명예교장 겸 교수로 추대키로󰡓 결정하고 총회의 인준을 요청했으나 총회에서 부결되었다.

1959년 제44회 총회를 앞두고 대구에서 경북노회 봄 노회가 개최되었을 때 W.C.C.측과 N.A.E.측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서 치열한 득표작전을 전개하던 중 노회가 양파로 분열되기 직적 아슬아슬하게 분열의 위기를 모면한 일이 있었다. 이것은 같은 해 대전중앙교회에서 모이게 될 제44회 총회가 통합과 합동 양측으로 갈라지게 될 전초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19591124일 제44회 총회 속회에서 합동 측은 W.C.C.N.A.E.를 영구히 탈퇴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한국 N.A.E.운동이 미국과 공식으로 관계를 끊게 되자 그것을 기회로 미국 I.C.C.C.(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의 대표자 칼 매킨타이어 박사 일행이 한국을 방문하여 일시적이나마 N.A.E.측 인사들과 손을 잡고 사상적으로나 재정적으로 후원해 주었다. 매킨타이어는 반 W.C.C.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에 보수적인 교단 지도자들이 그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취했다.

초창기에 신학적으로 급진적 성격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던 W.C.C.1960년대를 거쳐 1970년대에 이르면서 본색을 드러냈다. 그들은 아프라카에 선교자금을 보낸답시고 무기와 탄약을 구입하게 하여 정부를 전복시키는 일을 도와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영국 구세군도 W.C.C.에서 탈퇴했다.

W.C.C.로 인한 대립은 경기노회 총대 문제로 더욱 심화되었다. 1959514일 열린 경기노회 봄 정기노회에서 노회원 240명이 참석하여 총대 투표를 실시, 목사총대 이환수, 서재신, 이대영, 황은균, 한경직, 강신명, 권연호, 전필순, 배경준, 박찬목, 백매수, 이태준, 김세진, 고봉윤, 장로총대 이광옥, 고찬영, 박희몽, 심천, 서병호, 이규현, 유익, 민상기, 강만유, 이용성, 김자경, 이백산, 김장호, 정용해 등 이상 28명을 선출했다.

28명 중에 N.A.E.측이 18명이나 선출되자 에큐메니컬을 지지하는 이들은 당황하게 되었다. 마침 80표를 얻은 황금천 목사가 총대 명단에서 누락된 것이 발견되어 에큐메니컬 측은 재투표를 요구하였다. 이 문제는 노회를 더욱 대립으로 몰아갔다. 1959629일 에큐메니컬을 지지하는 80여 명은 승동교회에서 경기노회 제27차 임시노회를 열어 28명의 총대를 선출했는데 이중 2명을 제외하고 모두 에큐메니컬 측이었다. 논란은 더욱 심화되었다.

노회 규칙에는 󰡒총회 총대는 5월 정기노회에서만 택한다󰡓고 명문화되었다. 따라서 󰡒임시노회에서 택한 것은 위법󰡓이었다. 총대 문제로 에큐메니컬 측과 N.A.E. 측이 첨예하게 대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드디어 1959924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4회 총회가 대전중앙교회에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예상했 대로 총회가 개회하기 전에 총대 제로 충돌이 발생했다. 부노회장 강신명 목사가 총회 서기 김상권 목사에게 임시노회에서 선출한 총대 명단을 접수시키려고 제출했을 때 노회장 이환수 목사는 정기노회에서 선출한 총대 명단을 김상권 목사에게 접수시킨 후였다. 경기노회 총대 명단을 놓고 싸움이 벌어지자 총회장 노진현 목사는 증경총회장단과 상의하여 증경총회장 일동이 제시한 다음과 같은 안을 총회에 내놓고 총회가 이를 받기로 결정했다. 총회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건의안>

1. 현 총회의 정세하에서는 회무를 원만히 진행하기 곤란하므로 금년 1124일 화요일 오후7시까지 정회하고 그 전으로 경기노회 총대는 개선하여 오도록 할 것(, 계속 총회장소는 서울 새문안교회당으로 할 것).

2. 특별위원회 원, 부 총회장과 증경총회장과 각 노회장으로 구성하고 총회 다연한 문제를 수습하도록 하여주실 것.

증경총회장 일동

 

총회장 노진현 목사는 1124일까지 총회를 정회하기로 선포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총회 분열의 모든 책임을 합동 측에 떠넘기는 통합 측에게 묻고 싶다. 왜 증경총회장단의 자문을 받고 선포한 총회의 일시적 정회와 1124일 새문안교회에서 속개하기로 결정한 것을 무시하고, 1959928일 오후1시 대전시내에 있는 미락식당에 모여 전필순 목사를 회장으로 김광현 목사를 서기로 선출하고 총회 속개준비위원회를 구성했는가? 그리고 1959929일 오전10시 서울 연동교회에서 총회를 속개하기로 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총회를 분열시키는 결정적인 행동이 아니고 무엇인가?

교회 연합과 에큐메니컬 정신을 누구보다 강조했던 그들이 1124일까지 참지 못하고 독자 행동을 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 1124일 새문안교회에서 모여 다시 논의를 하다가 타협점을 찾을 수 없어 갈라선 것이라면 몰라도, 총회 소집 날짜가 정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연동교회에 모여 따라 총회를 발족시켰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 통합 측은 분열의 책임을 합동 측에 떠넘기고 있지만 오히려 내면적으로는 당시의 통합 측 인사들이 교회를 분리 내지 분열시키려 했던 것이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여하튼 대전에서 밤차를 타고 올라온 통합 측 총대들은 계획대로 연동교회에 회집하여 회장 이창규, 부회장 김석진, 서기 김광현, 부서기 김성칠 등 임원을 선출했다. 이로써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가 탄생했다.

한편 19591124일까지 기다리고 있던 합동 측 계통의 총대들은 그날 승동교회에 모여 노진현 목사 사회로 회장 양화석, 부회장 나덕환,서기 박찬목, 부서기 김상대, 회록서기 정규오, 부회록서기 송희용, 회계 양성봉, 부회계 배태준 등 새 임원을 선출함으로써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측)를 발족시켰다.

여기서 총회는 󰡒W.C.C.를 영구히 탈퇴하고 소위 W.C.C.적인 에큐메니컬 운동을 반대하기로 가결󰡓하고, 만약 󰡒이 문제를 변경하고자 할 때는 각 노회에 수의하여 총 노회수 및 투표 총수 3분의 2의 찬성을 얻어야 하기로 가결󰡓하였다. 또한 N.A.E.와 관련하여서도 󰡒개인적으로 가입된 N.A.E. 회원은 총회와는 직접으로 관계가 없으나 총회를 어지럽게 하는 요인이 된다는 평이 있으니 교직자(목사전도사)는 탈퇴하기로 가결󰡓하였다. 신학교도 정비하여 󰡒1117일 새벽 미명을 기하여 신학교 내에서 불미한 행동을 강행한 교수 계일승, 조교수 김윤국, 박창환 제씨를 해임󰡓하고 박형룡, 김치선, 김홍전을 신학교 교수로 임명했다.

 

[2012, 󰡒통합측 총회와 예장측 총회󰡓] - 김수진 통합측 역사학자의 견해, 서울 홍성사

 

<3,000만 환 사건>

박형룡 박사는 총회신학교를 한국 교회 보수신학의 요람지로 만들기 위해 학교 신축에 의욕적으로 임했다. 때마침 평양 숭의여자 중고등학교가 서울에 재건되고 남산공원 국유지(경성 신사당 포함) 일부를 불하받아 크게 확장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박형룡 박사는 이 학교 부지 확보에 공이 큰 브로커를 만나 남산공원 국유지를 캠퍼스 부지로 불하받도록 도와달라며 3,000만 환을 건넸다. 브로커는 남산공원을 불하받아 신학교를 건축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장담했다.

하지만 이 일은 결국 사기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 사기극에 말려든 박형룡 박사는 설자리를 잃었다. 그러나 그를 지지한 일부 세력은 학자여서 실리에 어두웠을 뿐이라며 그의 잘못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도 한 푼도 변상받지 않고 19583월 이사회에서 그의 사임을 수리했다. 그리고 노진현 목사를 교장서리로 임명했다. 그러나 3,000만 환 사건은 결국 총회로 옮겨졌다. 총회는 이 사건을 다시 거론해야 했기 때문에 각 지방 노회마다 자파 총대 확보에 안간힘을 기울였다.

1959928- 44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대전 중앙교회에서 개회. 에큐메니컬 문제로 총회가 합동측과 통합측으로 분열. 통합측은 서울 연동교회에서 속회 분립.

동년 1017- 남산 소재 총회신학교(통합측), 대광고등학교를 거쳐 광나루에 신학교 신착. 19612월 문교부로부터 장로회신학대학 인가.

동년 1124- 예장 합동측은 서울 승동교회에서 제44회 합동측 속회 총회로 분립. 44회 총회 분열로 총회신학교도 분열. 통합측은 장로회신학대학교, 합동측은 총신대학교.

 

[201325, 󰡒연동측(통합측)의 이탈󰡓] - 편집인 김남식의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100주년사>에서

 

1) W.C.C.와 에큐메니칼 운동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다시 분열되는 아픔을 경험하였다. 이번에는 W.C.C.(World Council of Churches)에 대한 신학적 의견의 대립으로 빚어진 것이었다.

W.C.C. 즉 세계교회협의회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결성되었다. 이는 전쟁 전부터 추진되고 있었던 세계교회 연합운동이 결실을 본 것이었다. W.C.C.는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지향하는데 창립대회를 자유주의, 신정통주의자들이 주도하였다. 대표적 신학자들은 칼 바르트와 라인홀드 니버였다. 이 대회에 한국 장로교 대표로 김관식 목사가 참석하였고 국제 정세에 어두웠던 총회는 정식 가입을 결의하였다.

고려신학교 교장이었던 박윤식 목사는 19504W.C.C. 운동은 신신학자, 위기신학자, 사회복음주의자 등이 주도하고 있는데 전통적인 정통주의에 기반을 둔 운동이 아니며, 교회의 주도권을 확보하여 세계 교회를 장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1951년에는 22명의 기독교인 국회의원들이 W.C.C.는 용공적인 기관이라고 발표하였다. W.C.C.에 대한 의혹이 고조되어가자 총회는 1954W.C.C. 2차 대회(미국 에반스톤)에 명신홍, 김현정 목사를 대표로 파송하고 총회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40회 총회(1955)에서 명신홍 목사는 이 운동의 신학적 배경이 신정통주의, 자유주의적이라고 보고하였고, 김현정 목사는 160여 교파가 참여하고 있는 W.C.C.는 교회의 교제와 협력을 위한 기관이지 교회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운동이 아니라고 보고하였다.

이에 총회는 탈퇴를 보류하고 에큐메니칼 연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복음주의협의회(N.A.E.,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세계복음주의자협회(W.E.F., World Evangelical Fellowship) 등과 관계를 가지고 있는 기관이나 목사들은 W.C.C.를 반대하고 있었다.

 

2) W.C.C.N.A.E.

총회 내에 W.C.C.에 대하여 지지파와 반대파가 형성되어 갈등과 대립이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반대하는 세력은 복음주의협의회(N.A.E.)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N.A.E.W.C.C.의 신학노선과는 달리 복음주의 입장을 표방하였다. 한국의 N.A.E.운동은 1948년경에 시작되어 1953년 한국 N.A.E.를 조직, 국제위원회에 정식으로 가입을 신청하고 활동하여 왔다. N.A.E.운동은 1942년 미국에서 시작된 초교파적 보수주의 운동으로, 메이첸의 제자였던 옥켄가(Harold Ockenga)가 주도하였다.

42회 총회(1957년 부산)에서는 W.C.C.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하여 친선과 협조를 위한 운동은 앞으로도 계속 참가하지만, 단일교회를 지향하는 운동에 대하여는 반대하기로 가결하였다.

소위 냉전시대가 전개되면서 미국과 소련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을 때, 미국교회협의회(N.C.C.)가 공산주의 국가들과 우호관계를 수립할 것과 중공을 UN에 가입시키자는 결의를 한 바 있다. 이러한 용공적인 W.C.C.에 대하여 1958년 박형룡 박사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교리와 목적󰡑이라는 글에서 󰡒이 운동이 교리적으로는 혼란한 자유주의 지도하에 움직이며, 정책적으로는 세계 단일교회의 구성을 최종목표로 한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그는 이 운동에 방심하고 따라갈 수 없다고 경고하면서 󰡒우리교회는 결코 이 에큐메니칼 운동의 자유주의에 순응할 수 없으며 교파 합동 단일교회를 바라보는 목적에 찬동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이러한 계획이 구체화할 때는 단호하게 탈퇴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3) W.C.C.측의 이탈과 통합총회의 조직

W.C.C.에 대한 입장이 찬반으로 나뉘어 팽팽한 긴장이 고조되어가는 가운데 1959년 제44회 총회를 앞두고 W.C.C.측과 N.A.E.측은 주도권을 잡기 위해 세력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총회 전에 열린 노회에서 총대를 확보하기 위한 세력 다툼이 더욱 심화되었다.

1959924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4회 총회가 대전중앙교회당에서 개최되었을 때, 개회 벽두부터 경기노회 총대 문제를 가지고 격돌하였다. 경기노회는 노회 규칙대로 봄 정기노회에서 총회 총대를 선출하였으나 선거 부정 시비가 일어났다. 28명 총대 가운데 N.A.E.측이 2/3가 선정되었으나 총대로 당선된 자가 누락된 일이 밝혀지자 투표지를 다시 개표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 결과 노회에 발표된 것과 차이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논란이 일자 이를 책임지고 임원진(노회장과 서기)이 사퇴하였다. 629일 임시노회(27)를 열고 정기노회에서 선출한 총대를 모두 무효화하고 다시 28명의 총대를 선출했는데, 그중 26명이 에큐메니칼 운동을 지지하는 자들이었다.

노회 규칙에 총회 총대는 5월 정기노회에서 선출하도록 되어 있기에 임시노회에서 선출하는 것도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정기노회 때 실시했던 투표 결과를 명확하게 계수하여 총대를 확정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제44회 총회 본회의 개회선언에 앞서 회원을 호명할 때, 경기노회에서 제출한 2개의 총대 명단을 놓고 본회의 결정을 물었다.

이때 양측에서 소란을 피우며 분위기가 험난해졌다. 총회장은 양쪽의 의견을 청취토록 한 후 투표를 하였으나, 법해석 문제에 논란이 계속되어 회의를 계속할 수 없게 되자 정기노회 측이 제출한 고소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치부와 증경총회장 연석회의를 열어 의논하고 정치부장으로 보고토록 하였다.

하지만 장내가 소란하여 보고하는 것도 어렵게 되었다. 총회장 노진현 목사는 증경총회장단이 제시한 건의안(속회 전까지 경기노회 총대를 개선하여 제출하도록 함)을 받아들여 회무를 원만히 진행하기가 어려우므로 1124일까지 총회를 정회하기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기도하고 퇴장할 때 갑자기 안광국 목사가 등단하여 미리 준비한 총회임원 불신임안(총회 장소를 고의로 대전으로 한 일, 총대 명부를 1개월 전에 배부하지 않은 일, 경기노히 총대를 불법으로 처리한 일, 총회를 혼란케 한 일 등)을 낭독하고 󰡒󰡓하면 󰡒󰡓하시오 󰡒가결되었습니다.󰡓를 외치고 하단하여 회의장은 다시 소란 속에 난투극까지 벌어지는 불상사가 일어나고야 말았다.

W.C.C.를 지지하는 총대 148명은 대전 미락식당으로 가서 회합을 한 후 기차편을 이용하여 서울로 상경하였다. 이들은 미락식당에서 모임을 가졌을 때 총회 속개준비위원회(회장에 전필순 목사, 서기에 김광현 목사를 선출)를 구성하였다. 그 이튿날 이들은 서울 연동교회당에 모여 계속총회를 열어 총회 임원을 개선하였다. 총회장에 이창규, 부회장에 김석진, 서기에 김광현, 부서기에 김성칠, 회록서기에 최중해, 회계에 김봉충 등이 선출되었다. 이로써 이른바 연동측으로 불리우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가 새롭게 출발하였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선봉에 서서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주장하던 인사들이 총회가 정회를 선포하고 속회하기로 가결한 마당에 총회의 결정에 반하여 독자적인 행동으로 총회를 이탈하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데 앞장서고 말았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4) 총회의 정비

19591124일 총회가 속회하기로 결정한 그 날에 서울 승동교회당에서 제44회 총회가 노진현 목사의 사회로 속개되었다. 이때 참석한 노회는 27개 노회, 총대 회원이 193(폐회 때에는 209)이었다. 연동 총회에 참석했던 총대들도 상당수 참석하였다. 새로운 임원선거에 들어가 총회장 양화석, 부회장 나덕환, 서기 박찬목, 부서기 김삼대, 회록서기 정규오, 부회록서기 홍희용, 회계 양성봉, 부회계 배태준 등 새 임원을 선출하였다.

총회는 불법적으로 이탈한 연동측 문제를 수습하기 위하여 증경총회장 7명과 회장이 자벽한 5명 등 12명을 수습위원으로 선출하여 연동측과 접촉하도록 위임하였다. 총회 분열의 핵심적인 문제가 되었던 W.C.C.와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하여 총회는 W.C.C.를 영구히 탈퇴하고 소위 W.C.C.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하기로 가결하였다. 만약 이 문제를 변경하고자 할 때에는 각 노회에 수의하여 총 노회 수 및 총 투표수의 2/3의 찬성을 얻어 결정하도록 가결하였다.

그리고 N.A.E.와 관련하여 개인적으로 가입된 N.A.E. 회원은 총회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나, 총회를 어지럽게 하는 요인이 된다는 평이 있으니 교직자(목사, 전도사)는 탈퇴하기로 가결하였다.

총회는 총회신학교를 정비하여 박형룡 박사를 비롯하여 김치선, 김홍전 목사를 교수로 임명하였다. 총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원칙과 정책󰡑을 작성하여 개혁주의의 신앙 위에 서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낼 것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원칙>

1. 대한예수교장로회는 오랫동안 독립 주권을 가진 교회로 알려져 왔다. 우리는 이제 이 주권행사에 있어서 또는 이 주권에 따르는 의무 이행에 있어서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 의지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충분한 발전성장을 기한다.

2.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 계시된 말씀에 틀림이 없고 또는 우리의 믿음과 모든 생활에 유일 최고의 지침이 된다는 믿음을 항시 명백히 하여야 한다.

3. 칼빈 선생이 가르친 장로교회의 신학과 모든 원칙들을 준수한다.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는 이러한 원칙들을 잘 표시한 것으로 인정하므로 이에 준거하여 작성된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신경을 충실히 준수하여야 한다.

4. 교회는 본질상 거룩하며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신경적 유기체라는 터 위에서만 교회의 통일성이 존재한다. 교회의 신령한 속성들과 증표들을 가리움이나 흐림 없이 드러내야 한다.

5. 성신의 내주와 역사로 개인생활에서나 교회에서 늘 스스로 반성하여 죄를 회개하며 또 그리스도의 사랑과 의의 품성이 더욱 더 구현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상의 원칙들을 양보나 타협이 없이 또는 모든 저해와 반세력은 이를 대적하고 물리치면서 명백하게 선양 실천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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