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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의 정통성을 왜곡하는 ‘반총회적 이설’

[ 2020-09-28 11:05:09]

 

심창섭 교수의 문제의 논문

총회의 정통성과 역사성을 훼손하는 '심각한 글'이 발표되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여기에 대한 철저한 규명이 필요하다.

 44회 총회. 1959, 에큐메니칼 운동을 주도하는 세계교회협의회(W.C.C.)의 활동에 분명한 반대 입장을 취한 총회는 결국 이를 지지하는 인사들의 이탈로 연동측(후에 통합)이 형성되었다. 외국선교사들이 연동측을 지지함으로 결국 총회는 그동안 축적해 온 교회들과 교단의 자산을 포기해야 했다(왼쪽 사진 설명).

 

문제의 발단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역사위원회가 발간하는 학술지 장로교 역사와 신앙3(2020915일 발행)에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원장을 역임한 심창섭 교수의 <한국전쟁 이후의 기독교>라는 논문에서 이른바 '3천만 원 사건'에 대해 언급하고 사실을 왜곡하여 총회의 정체성과 역사성을 훼손하는 일이 일어났다.

장로교 역사와 신앙은 총회역사위원회가 발간하는 연간지(年刊誌)로 이번 제3호는 '6.25전쟁 70주년과 한국교회'라는 주제로 7편의 논문이 게재되었다. '6.25전쟁과 한국교회'(이상규), '6.25한국전쟁과 순교자'(김남식), '한국전쟁 이후의 기독교'(심창섭), '개혁신학으로 본 통일신학'(주도홍), '개혁주의 입장에서 본 6.25한국전쟁과 한국교회'(신종철), '총회신학교의 대구시절 연구'(박창식), '십자군 의용대'(김병희)라는 논문이 게재되었다.

 

문제의 핵심

 

문제가 된 부분은 심창섭의 논문 124면과 125면에 나온다. 이른바 '3천만 원 사건'이다. 심창섭은 이것을 '박형룡 사건'이라고 불렀다.(125)

이 글이 말하는 몇 가지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3천만 원 사건'은 박형룡의 행정 미숙으로 인한 '사기 사건'인데, '박호근의 말이 사실이라면 박형룡도 공범인 것이다.'라고 심창섭은 기술하여 '박형룡 공범론'을 은연 중 제기하였다.

이러한 중대한 표현에 대해 박호근의 말의 출처를 밝히지 않고 있어, 학술논문을 핑계하여 '사자(死者) 명예훼손'을 하였다.

둘째, 이 글에서는 박형룡을 구하기 위해 W.C.C.문제를 들고나왔다고 했다.(124) 이것은 심각한 오류이다. W.C.C.문제는 1951년에 의혹이 제기되었고, 1954W.C.C. 에반스톤 총회에 명신홍, 김현정 목사가 참석하여 상반된 보고를 하는 등 총회 안에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여기에 이른바 '3천만 원 사건'을 결부시키는 것은 연동파의 정치적 책략의 산물이었다.

 

문제의 배경

 

'3천만 원 사건'이 확산된 데에는 당시 총회의 정치역학 구도와 관련이 있다. 총회 총무 선출에 김상권과 안광국이 치열하게 경쟁하였고, 이것이 진영논리로 확산되었다.

안광국은 총무 선출에서 실패하자 '3천만 원 사건'을 부각시켰고, 급기야 제44회 총회에서 이탈하는 선봉장이 되었다. 이런 배경 이해가 있어야 분열사를 바로 알 수 있다.

2013년 김남식 목사가 편집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100주년사(발행인 총회장 정준모 목사) 316쪽에 의하면,

 


연동측(통합측)의 이탈

 

1) WCC와 에큐메니칼 운동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다시 분열되는 아픔을 경험하였다. 이번에는 W.C.C.(World Council Churches)에 대한 신학적 의견의 대립으로 빚어진 것이었다.

W.C.C. 즉 세계교회협의회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결성되었다. 이는 전쟁 전부터 추진되고 있었던 세계교회 연합운동이 결실을 본 것이었다. W.C.C.는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지향하는데 창립대회를 자유주의, 신정통주의자들이 주도하였다. 대표적 신학자들은 칼 바르트와 라인홀드 니버였다. 이 대회에 한국 장로교 대표로 김관식 목사가 참석하였고 국제 정세에 어두웠던 총회는 정식 가입을 결의하였다.

고려신학교 교장이었던 박윤선 목사는 19504W.C.C.운동은 신신학자, 위기신학자, 사회복음주의자 등이 주도하고 있는데 전통적인 정통주의에 기반을 둔 운동이 아니며, 교회의 주도권을 확보하여 세계 교회를 장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1951년에는 22명의 기독교인 국회의원들이 W.C.C.는 용공적인 기관이라고 발표하였다. W.C.C.에 대한 의혹이 고조되어가자 총회는 1954W.C.C. 2차 대회(미국 에반스톤)에 명신홍, 김현정 목사를 대표로 파송하고 총회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40회 총회(1955)에서 명신홍 목사는 이 운동의 신학적 배경이 신정통주의, 자유주의적이라고 보고하였고, 김정현 목사는 160여 교파가 참여하고 있는 W.C.C.는 교회의 교제와 협력을 위한 기관이지 교회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운동이 아니라고 보고하였다.

이에 총회는 탈퇴를 보류하고 에큐메니칼 연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복음주의협의회(N.A.E.,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세계복음주의자협회(W.E.F., World Evangelical Fellowship) 등과 관계를 가지고 있는 기관이나 목사들은 W.C.C.를 반대하고 있었다.

 

2) W.C.C.N.A.E.

총회 내에 W.C.C.에 대하여 지지파와 반대파가 형성되어 갈등과 대립이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반대하는 세력은 복음주의 협의회(N.A.E.)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N.A.E.W.C.C.의 신학노선과는 달리 복음주의 입장을 표방하였다. 한국의 N.A.E.운동은 1948년경에 시작되어 1953년 한국 N.A.E.를 조직, 국제위원회에 정식으로 가입을 신청하고 활동하여 왔다. N.A.E.운동은 1942년 미국에서 시작된 초교파적 보수주의 운동으로, 메이첸의 제자였던 옥켄가(Harold Ockenga)가 주도하였다.

42회 총회(1957년 부산)에서는 W.C.C.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하여 친선과 협조를 위한 운동은 앞으로도 계속 참가하지만, 단일 교회를 지향하는 운동에 대하여는 반대하기로 가결하였다.

소위 냉전시대가 전개되면서 미국과 소련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을 때, 미국교회협의회(N.C.C.)가 공산주의 국가들과 우호관계를 수립할 것과 중공을 UN에 가입시키자는 결의를 한 바 있다. 이러한 용공적인 W.C.C.에 대하여 1958년 박형룡 박사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교리와 목적'이라는 글에서 '이 운동이 교리적으로는 혼란한 자유주의 지도하에 움직이며 정책적으로는 세계 단일 교회의 구성을 최종목표로 한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그는 이 운동에 방심하고 따라갈 수 없다고 경고하면서 '우리 교회는 결코 이 에큐메니칼 운동의 자유주의에 순응할 수 없으며 교파 합동 단일 교회를 바라보는 목적에 찬동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이러한 계획이 구체화할 때는 단호하게 탈퇴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3) W.C.C.측 이탈과 통합총회의 조직

W.C.C.에 대한 입장이 찬반으로 나뉘어 팽팽한 긴장이 고조되어가는 가운데 1959년 제44회 총회를 앞두고 W.C.C.측과 N.A.E.측은 주도권을 잡기 위한 세력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총회 전에 열린 노회에서 총대를 확보하기 위한 세력 다툼이 더욱 심화되었다. 1959924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4회 총회가 대전중앙교회당에서 개최되었을 때, 개회 벽두부터 경기노회 총대 문제를 가지고 격돌하였다.

경기노회는 노회 규칙대로 봄 정기노회에서 총회 총대를 선출하였으나 선거 부정 시비가 일어났다. 28명 총대 가운데 N.A.E.측이 2/3가 선정되었으나 총대로 당선된 자가 누락된 일이 밝혀지자 투표지를 다시 개표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 결과 노회에서 발표된 것과 차이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논란이 일자 이를 책임지고 임원진(노회장과 서기)이 사퇴하였다. 629일 임시노회(27)를 열고 정기노회에서 선출한 총대를 모두 무효화하고 다시 28명의 총대를 선출했는데 그중 26명이 에큐메니칼 운동을 지지하는 자들이었다.

노회규칙에 총회총대는 5월 정기노회에서 선출하도록 되어 있기에 임시노회에서 선출하는 것도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정기노회 때 실시했던 투표결과를 명확하게 계수하여 총대를 확정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제44회 총회 본회의 개회선언에 앞서 회원을 호명할 때, 경기노회에서 제출한 2개의 총대명단을 놓고 본회의 결정을 물었다. 이때 양측에서 소란을 피우며 분위기가 험난해졌다. 총회장은 양쪽의 의견을 청취토록 한 후 투표를 하였으나, 법해석 문제에 논란이 계속되어 회의를 계속할 수 없게 되자 정기노회 측이 제출한 고소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치부와 증경총회장 연석회의를 열어 의논하고 정치부장으로 보고토록 하였다.

하지만 장내가 소란하여 보고하는 것도 어렵게 되었다. 총회장 노진현 목사는 증경총회장단이 제시한 건의안(속회 전까지 경기노회 총대를 개선하여 제출하도록 함)을 받아들여 회무를 원만히 진행하기가 어려우므로 1124일까지 총회를 정회하기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기도하고 퇴장할 때 갑자기 안광국 목사가 등단하여 미리 준비한 총회임원 불신임안(총회 장소를 고의로 대전으로 한 일, 총대 명부를 1개월 전에 배부하지 않은 일, 경기노회 총대를 불법으로 처리한 일, 총회를 혼란케 한 일 등)을 낭독하고 ''하면 ''하시오 '가결되었습니다.'를 외치고 하단하여 회의장은 다시 소란 속에 난투극까지 벌어지는 불상사가 일어나고야 말았다.

W.C.C.를 지지하는 총대 148명은 대전 미락식당으로 가서 회합을 한 후 기차편을 이용하여 서울로 상경하였다. 이들은 미락식당에서 모임을 가졌을 때 총회 속개준비위원회(회장에 전필순 목사, 서기에 김광현 목사를 선출)를 구성하였다. 그 이튿날 이들은 서울 연동교회당에 모여 계속총회를 열어 총회임원을 개선하였다. 총회장에 이창규, 부회장에 이석진, 서기에 김광현, 부서기에 김성칠, 회록서기에 최중해, 회계에 김봉충 등이 선출되었다. 이로써 이른바 연동측으로 불리우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가 새롭게 출발하였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선봉에 서서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주장하던 인사들이 총회가 정회를 선포하고 속회하기로 가결한 마당에 총회의 결정에 반하여 독자적인 행동으로 총회를 이탈하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데 앞장서고 말았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4) 총회의 정비

19591124일 총회가 속회하기로 결정한 그날에 서울 승동교회당에서 제44회 총회가 노진현 목사의 사회로 속개되었다. 이때 참석한 노회는 27개 노회, 총대 회원이 193(폐회 때에는 209)이었다. 연동총회에 참석했던 총대들도 상당수 참석하였다. 새로운 임원선거에 들어가 총회장 양화석, 부회장 나덕환, 서기 박찬목, 부서기 김삼대, 회록서기 정규오, 부회록서기 송회용, 회계 배태준 등 새임원을 선출하였다.

총회는 불법적으로 이탈한 연동측 문제를 수습하기 위하여 증경총회장 7명과 회장이 자벽한 5명 등 12명을 수습위원으로 선출하여 연동측과 접촉하도록 위임하였다. 총회 분열의 핵심적인 문제가 되었던 W.C.C.와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하여 총회는 W.C.C.를 영구히 탈퇴하고 소위 W.C.C.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하기로 가결하였다.

만약 이 문제를 변경하고자 할 때에는 각 노회에 수의하여 총노회 수 및 총투표수의 2/3의 찬성을 얻어 결정하도록 가결하였다. 그리고 N.A.E.와 관련하여 개인적으로 가입된 N.A.E. 회원은 총회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나, 총회를 어지럽게 하는 요인이 된다는 평이 있으니 교직자(목사, 전도사)는 탈퇴하기로 가결하였다.

총회는 총회신학교를 정비하여 박형룡 박사를 비롯하여 김치선, 김홍전 목사를 교수로 임명하였다. 총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원칙과 정책󰡑을 작성하여 개혁주의의 신앙 위에 서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낼 것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 원 칙 -

 

[1] 대한예수교장로회는 오랫동안 독립 주권을 가진 교회로 알려져 왔다. 우리는 이제 이 주권행사에 있어서 또는 이 주권에 따르는 의무이행에 있어서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 의지하고 주님의 영광을 위 충분한 발전성장을 기한다.

[2]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 계시된 말씀에 틀림이 없고 또는 우리의 믿음과 모든 생활에 유일, 최고의 지침이 된다는 믿음을 항시 명백히 하여야 한다.

[3] 칼빈 선생이 가르친 장로교회의 신학과 모든 원칙들을 준수한다.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는 이러한 원칙들을 잘 표시한 것으로 인정하므로 이에 준거하여 작성된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신경을 충실히 준수하여야 한다.

[4] 교회는 본질상 거룩하며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신경적 유기체라는 터 위에서만 교회의 통일성이 존재한다. 교회의 신령한 속성들과 증표들을 가리움이나 흐림 없이 드러내야 한다.

[5] 우리는 이상의 원칙들을 양보나 타협이 없이 또는 모든 저해와 반세력은 이를 대적하고 물리치면서 명백하게 선양 실천하기로 한다.

 

그러니 '연동측의 이탈'은 경기노회 총대 문제가 직접 요인이고, W.C.C.문제는 간접 요인이다.

 

<기독신보 편집자 첨언>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총회는 목사이며 신학자인 박형룡의 신학을 기점으로 조직신학 특히 장로회의 구원의 서정을 제시하였으며 철저한 칼빈주의에 의한 교단으로서 세계 제1의 장로교단임을 자부한다.

세계 제1의 장로교단에 속한 목사가 장로교의 근본신앙의 지주를 혐오하고 모멸하는 글을 발표하였다면, 이는 실로 배교단적이고 배신앙적 행위로 볼 수밖에 없다.

2008년도 총신 100인 연구논문집 제13쪽에 심창섭 교수의 논문에는 '기독교 정통 가르침을 왜곡하여 전파하는 자는 이단'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정통과 이단의 변별법도 정통이 아니면 이단으로 볼 수밖에 없은즉 이번 사태는 단순하게 글 쓰는 자의 실수로민 볼 수 없다. 그러므로 2020년도 장로교 역사와 신앙을 기획하고 발간한 이들 중에 총회역사위원장 함성익 목사 편집위원장 신종철 목사 실제 편집자 심창섭 교수 등이 있는데, 이들에 대하여는 교회법 권징조례 제3조와 제42조에 의해 총회적 처벌이 있어야 할 것이다.

, 역사위원장과 편집위원장은 불법으로 교회를 분립케 하는 일에 동참한 것이 죄가 되며, 심창섭 교수는 총회와 총신대학교의 명예교수직에 있음에도 총회를 부끄럽게 하고 총신대학교를 분리케 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으며 또한 역사적 현장에서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닌데도 박호근의 말에 마치 사실처럼 글을 게재하였다는 것은 스스로 자신이 '이단자이므로 처벌하여달라'고 주문한 장본인으로밖에 볼 수 없다.

심 교수는 우리 교단의 역사를 왜곡하는 한, 총신대학교 명예교수라는 직함을 총회와 총신에서 삭제하고 그 명예직을 박탈하여야 할 것이다.

하마터면 우리 총회가 파괴될 뻔하였으나 하나님의 은총이 아직 총신대학교와 우리 교단에 함께하심에 감사할 뿐이다.

이 왜곡된 글로 인해, 현재 우리 교계 안팎에는 '이것은 안 된다.' '이럴 수 있느냐?' '하마터면 큰일 날뻔하였다.'고들 말하고 있다.

 

- 아래는 심창섭 교수의 논문에서 문제의 3천만 원 사건을 게재한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

 

남산신학교의 부지 매입을 둘러싼 3천만 원 사건을 한 예로 들 수 있다.

당시 신학교 교장이었던 박형룡 박사는 박호근의 말을 믿고 선교부로부터 받은 3천만 원을 이사회의 허락도 없이 단독으로 신학교 부지 매입을 위해 지불하였다. 박호근으로부터 영수증도 수령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신학교 부지도 불하받지 못하고 돈도 없어지게 되자 박 교장은 이사회에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은 구호금으로 인해 신학교의 분열과 교단의 분열을 가져온 비극이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을 통해 한국교회의 분열을 야기한 주된 이슈인 WCC의 신학적 문제가 더욱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박형룡은 박호근에게 사기당했다고 증언하지만 박호근은 문교부로부터 대학 인가를 받기 위해 로비자금이 필요하다고 이미 그 사용처를 박형룡에게 알렸다는 것이다. 박호근의 말이 사실이라면 박형룡도 공범인 것이다.

그리고 박호근은 또한 박형룡이 자신에게 미국에서 온 1만 달러를 암시장에서 환치기를 하도록 지시했다고 폭로하였다. 3천만 원이 거기에 포함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박호근의 주장대로 박형룡 박사가 불법 환전을 지시했다면 실수를 한 것이다.

195837일 대전에서 열린 이사회에서 박형룡 박사의 사표 수리를 두고 20명의 찬성과 17명의 반대파가 격돌하였다. 반대파들은 박형룡의 교장직 사임을 반대할 뿐 아니라 3천만 원 변제 조건으로 청파동 사택 반환도 반대하였다. 박형룡 박사를 지키려는 반대파는 보수신학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이었다.

박형룡을 밀어내는 것은 곧 보수정통을 밀어내고 신학적 진보세력이 득세하는 것으로 보았는데, 그중에서도 에큐메니칼과 용공 사상을 들고나온 것이다. 박형룡 박사를 연구한 장동민 교수는 흥미로운 접근을 시도하였다. 그는 3천만 원 사건 이전과 이후에 박형룡 박사의 에큐메니컬에 대한 태도의 변화에 대해 언급한다. 박형룡 박사는 3천만 원 사건 이후 에큐메니컬에 대해 더욱 강경파로 돌아섰으며 에큐메니컬 운동을 용공 세력으로 단정했다는 것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3천만 원 사건은한국 장로교회의 분열과 논쟁의 불씨가 되었고 분열을 가속화시켰음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동란 후 해외에서 한국교회에 밀려온 구호금 유입이 한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초기 선교정책이었던 자전, 자립, 자치의 네비우스 3자 정책이 유지되었더라면 이런 불상사는 없었을 것이다.

신학 논쟁은 동란 이전부터 발생하였지만 박형룡 박사의 3천만 원 사건이 신학 논쟁을 심화시켰고 이것은 한국교회 분열의 한 요인이었다. 논자의 견해는 신학 논쟁은 상존해 오던 갈등의 요인이었고 박형룡 사건이 없었더라도 한국교회 분열의 불씨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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