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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영남교직자협의회 하기수련회 성황리 개최
한국교회사에서 영남인의 역할 패널이 뜨거웠다

[ 2019-09-05 08:39:59]

 

< 경주 켄싱턴 호텔에 모인 영남교직자협의회>

이승희목사 영남지역 협의회장 취임 축하하였다

25회 전국영남교직자협의회(회장 장봉생목사) 하기수련회가 지난 827일과 28일 경주 켄싱턴호텔에서 대구교직자협의회, 경북교직자협의회, 경교직자협의회, 재경교직자협의회, 영남지역협의회 등 5개 교직자협의회 450여명이 하나가 되어 전국영남교직자의 단합되고 화목한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번 전국영남교직자회는 이승희목사가 독자적으로 영남지역협의회로 운영하고 있는 단체를 전국영남교직자협의회에 흡수하고 전국영남교직자협의회 회장 장봉생목사의 이름으로 축하하며 흡수하여 하나됨으로써 참으로 좋은 모습으로 보였다.
특히 이번 하기수련회에서 회장 장봉생목사는 한국장로회 118년 역사에서 '한국교회사에서 영남인의 역할이 무엇이며 앞으로 전국영남교직자회가 나아갈 방향이 무엇인가'를 전제로 한 패널토론을 전개하였다.
주제의 발표자는 총회역사위원회 위원장 박창식목사가 발표하였으며, 주제발표에 대한 패널로는 총회사의 산증인 기독신보 발행인 김만규목사와 교직자협의회 고문 권영식장로, 공동회장 권택성장로가 담당하였다.
다음은 한국교회사에서 영남인의 역할에 대한 패널토론에 첫 번째 패널리스트 기독신보 발행인 김만규목사의 논지를 게재한다.
 
- 김만규목사입니다. 먼저 저는 역사학자도 박사도 아닙니다. 그리고 유인물에 기록된 기독신보 주필이 아니고 기독신보를 발행하고 있는 사람이며, 다만 우리 총회를 70년간 현장에 참여하여 보고 듣고 알고 있는 것을 증언하고자 합니다.

(1)
한국교회사에서 영남인의 역할에서 자랑스러운 인물에 대해서

우리 총회사에서 장로교의 역사가 118년이 됩니다. 그중에
첫 번째는, 13회 제33회 제34회 총회장을 역임한 이자익목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자익목사는 영남인으로 호남에 가서 남의 집에 머슴살이를 하고 마부 노릇을 했으며, 교회에서는 집사직분을 맡았던 분입니다. 당시 집 주인인 금산교회 장로가 이자익집사에게 '이집사는 신학교에 가서 공부하라.'고 권면했고, 이자익집사는 머슴이며 집사로서 신학교를 마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자익목사에게는 신앙뿐 아니라 교회지도자로서 뛰어난 자질이 있어 1924년 제13회 총회 때에 총회장으로 선출되었고 24년 지나서 1947년에 제33회 총회장과 1948년 제34회 총회장직을 맡았으므로 총회장직 25년간 목회나 교회정치를 맡아 총회 최고치리권자로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역사를 주도한 인물입니다.

두 번째는,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제32회 총회장으로 당시 혼란기에 처했던 교회를 이끌었던 배은희목사가 있습니다. 그분은 6.25전쟁 중이던 1951년 경북 달성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등 목사로서 해방된 조국을 위해 봉사하는 영광과 기회를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세 번째는, 1948년 제35회 총회장 최재화목사는 19183.1운동 때 경남북권에 3.1독립운동을 전개하며 영남지역 3.1운동의 연락총책임진 국가적이며 장로교가 잊지 못할 애국자입니다. 최재화목사는 경북 선산에 3.1운동 애국지사비가 있으며 대구 계명기독교대학설립자 중에 한 분으로서 지금 대구계명대학교에는 백은관이라는 것이 있는데 백은은 최재화목사의 호입니다. 다시 말하면 최재화목사님은 한국독립운동가이며 3.1운동의 영남책임자이시고, 영남지역에서 처음으로 세운 기독교대학인 계명대학교를 설립한 영남의 인물입니다.

네 번째는, 1950년에 제36회 총회장 권연호목사로, 권연호목사는 19506.25전쟁으로 전국의 교회들이 부산으로 피난갈 때 당시에 총회장으로 19506월 부산초량교회당에서 목사 300명과 함께 금식기도하여 조국 대한민국에 UN 16개국이 파병을 오도록 한 기도의 인물입니다. 또한 권연호목사는 전란으로 폐교가 된 총회신학교를 대구서문교회당에서 개교하도록 하고 학교명을 '총회신학교'로 명명한 분입니다.

다섯 번째는, 노진현 목사로 1958년 제43회 총회장으로 총회신학교를 총신대학으로 명칭을 바꾸고 당시 교계에 이북세를 물리치고 영남인으로 총신대 재단이사회를 관장한 분입니다.

여섯 번째는, 양화석 목사로 1959년 제44회 총회장으로서 통합측의 교권 금권 세상권세를 떨치고 통합측을 물리쳐서 오늘의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교단이 있게 한 분입니다.

일곱 번째는, 1980년 제65회 총회장인 이영수목사입니다. 이영수목사는 육군군목 출신으로 경북노회를 관장하는 중 1963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로 진출하여 18년간 총회의 새로운 정치구도를 만들어 18년간을 총회를 통치한 인물입니다. 이영수목사가 총회로 진출할 때 총회를 이환수, 박찬목, 김윤찬, 정규오 목사 등이 총회를 관장하고 있던 때입니다.

(2)
한국교회 분열사에 나타난 영남인의 역할

우리 장로교는 옥중성도의 고신파와 재건파를 빼고는 크게 보아서 3번 크게 분열한 역사를 안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분열은, 1950421일 대구제일교회당에서 모인 제36회 총회입니다.
이 제36회 총회는 당시 조선신학의 김재준 씨의 성경 오류설이 문제였습니다. 김재준 교수는 조선신학교에서 강의하면서 성경의 문서설을 주장하여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말도 있다. 그리고 다른 종교의 말이 있다고 하여 소위 성경의 고등비판을 가르침으로 제36회는 김재준 씨를 면직하기로 사전에 작정하였으나 당시 김재준 씨가 소속한 경기노회와 조선신학 계통의 총대들의 반격으로 고함 욕설 그리고 난동과 칼을 들고 강단으로 침공함으로 총회장 최재화목사가 비상정회를 선언하고 여자권사들의 넓은 치마폭에 몸을 감추고 피난하는 사태가 빚어졌습니다.
그때 총회는 김재준 씨를 면직 제명하라고 경기노회에 하명하였으나 경기노회는 1953년에 김재준 씨를 면직 제명하게 되자 이들 일파가 분열하면서 교단명을 '한국기독교장로회'라 칭하고 조선신학교를 한국신학교라 개명합니다. 그래서 교계는 교단명을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측)이라 부르고, 신학교 명칭을 조선신학교를 '한국신학교'라 통칭하고 오늘에는 한신측, 기장측이라 호명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기장을 처리한 분이 최재화, 권연호, 박병훈 목사 등입니다.

그 두 번째 분열은, 1959924일 제44회 총회 때입니다.
기장 김재준 씨가 소속한 경기노회는 19593월에 노회장 이환수목사가 제44회 총대를 선출하여 총회에 보고하였는데 WCC문제로 격론 중 WCC 에큐메니칼을 선호하는 부노회장 강신명목사가 9월에 총회 총대를 선출하여 따로 보고합니다. 44총회는 경기노회 총대 문제를 개최도 못하고 장시간 논전과 난투극을 벌이다가 증경총회장단의 권유로 총회장 양화석목사가 총회를 비상정회하고 한 달 뒤인 19591023일에 서울 새문안교회당에서 속회한다고 선포하자 WCC 에큐메니칼을 선호하는 강신명목사측이 철도청에 미리 열차 3대를 준비하였다가 당일 서울 연동교회당으로 장소를 옮겨 부총회장 나덕환목사 사회로 당일 제44회 총회를 속회한 것이 오늘날 통합이라 부릅니다.
통합과 합동은 영구히 분열하고 우리 총회는 통합측과 강단 교류나 행사시 왕래를 할 수 없다고 12번이나 총회가 결의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재 제103회 총회 임원회는 이를 공공연하게 범하고 합동기도회를 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103회 총회임원이 제44회 총회 결의부터 12번에 걸쳐 결의를 파괴하는 행위에 해당합니다. 44회 총회장 양화석목사가 무덤에서 일어나야 합니까? 한국교회사에 빛나는 영남인 총회장들이 울고 있습니다.

그 세 번째 분열은, 1979년 제64회 총회 때입니다.
이때는 순전히 이영수목사의 장기집권이 싫다는 호남의 정규오목사의 반란입니다. 당시 정치와 신학과 법리 그리고 언변에 명인인 광주중앙교회 정규오목사는 제64회 총회를 분열하려고 했고, 광주에서 500명의 데모꾼이 대구동부교회당으로 온다는 소식에 총회임원회와 대구노회임원회가 대책을 강구해도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중정의 김재규 부장에 교계 난동을 막아줄 것을 당부하자 김부장은 경북도경 국장과 대구지검에 통보하여 난동을 예방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이때 본인은 대구 남부경찰서장에게 직접 중정과 도경의 지휘대로 예방경찰 동원을 청하였으나 남부경찰서장이 반대했습니다. 본인은 서장에게 그러면 지금부터 일어나는 모든 사태는 예방경찰을 배치하지 않은 남부경찰서장에게 있다고 선언하고 남부경찰서를 나오자 서장이 문 밖까지 쫓아와서 병력동원을 해줄 터이니 공식문서를 접수하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총회장 한병기목사, 총무 정봉조목사, 대구노회장 서성수목사 등 모두 문서발부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래서 본인이 도장방에 가서 '64회 총회준비위원장'이라는 직함의 인장으로 경찰 병력 동원을 요청하여 결국 경찰의 도움으로 제64회 총회에서 예상되었던 엄청난 혈전을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이때 개혁측(정규오목사측)은 대구 대동교회로 옮겼으나 대동교회 당회가 불허하니 다음으로 대구법원 앞 여관 2층에서 25명이 모여 조직한 것이 결국 '개혁측'이 되었습니다. 그후 개혁측은 3분하여 정규오목사측의 개혁측과 최선재목사측의 합동보수측 박병진목사와 박동섭목사측이 방배동측으로 나눠지게 되었습니다.
3차 분열은 순전하게 영남의 이영수목사의 장기집권에 대한 반발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소위 이영수목사측 사단이 있었는데 인천의 홍태우목사, 전주의 최성원목사, 광주의 최기채목사, 대구의 김기채목사, 서울의 이종일목사, 구미의 손중호목사, 서북권의 하구봉목사, 진주의 김동권목사, 대전의 김성준목사, 궐 밖의 김만규목사 등 10명이었습니다. 장로로는 우성기장로, 배태준장로, 서해룡장로, 정병환장로, 신홍식장로 등 5명이었습니다.
그중 이영수목사의 4인방, 5인방으로는 김기채, 손중호, 이종일, 하구봉, 김동권 등이 이영수목사의 정치동맹 격이었습니다.
 
(3) 한국교회사에 비친 영남인의 공헌에 대해서

첫째, 영남인들은 총신대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본래 우리 교단의 신학교의 시작은 이북 평양이었습니다. 1945년 일제하에서 해방된 우리나라에서 신학교를 시작한 것이 서울이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교단의 신학교는 서울남산에 있던 일본 사람이 설치한 신사였으나 이 신사에서 남산 한남동에 있는 김치선 박사의 대한신학교에서 수업하다가 그 다음은 용산의 4층 건물로 옮기고 그리고 사당동 현재 장소에 총신대학교를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이 사당동의 산지 18,000평은 백남조장로가 헌납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백장로님이 헌납한 사당동 산지 18,000평은 신학교도 건설하지 못하고 이 땅을 불교재단에 비밀리에 매각 처분하게 됩니다. 이때 총회를 주도하던 이환수목사, 박찬묵목사, 김윤찬목사와 안용준목사 등의 매각행위에 대하여 이영수목사, 배태준장로, 우성기장로 등이 검찰과 법원에 고소하고 공증증서불실기재죄로 소송을 하여 18,000평의 산지를 원인무효로 환수하게 됩니다.
이때까지는 합동총회는 이북세 즉 황해도 세력이 주도 관장하던 것이 총신대지 매각사건으로 자숙하고 또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백남조장로의 기증물인 사당동 산 18,000평에 총신대학교를 건설하게 됩니다.
현 총신대학교의 땅은 백남조장로의 헌납기증이요 사당동 총신대학을 건설한 자금은 돈은 당시 ICC한국본부장이었던 박병훈목사가 미국매킨타이어 ICC총재에게서 10만불을 얻어서 용산에 있는 4층짜리 건물을 매입하여 총회신학교를 하던 것을 매각한 것으로 건축기금으로 사용하였습니다(명신홍박사의 1달러 모금도 사용되었습니다). 영남인 이영수목사는 백남조장로를 총신건축위원장으로 세우게 됩니다. 당시 현 총신대학교는 순수한 산지이므로 학교건설이 불가능하였습니다. 이에 이영수목사는 영남인 박병훈목사에게 부탁하여 ICC의 매킨타이어 박사를 통해 미8군에 협조를 받게 되자 미8군 공병단과 미육군76공병대대와 미5공군167시설대대 그리고 미8군 산하 69수송대대 등이 동원되어 산지에 나무를 벌목하고 굴곡이 져 있는 산지를 불도저로 밀어붙였습니다.
당시 현지에서 봉사하던 미군들은 하루 16시간 노동을 하였으며 당시 우리 교단 사역자에게 감동을 준 것은 미8군과 5공군 육군장병들이 '여기 이 땅은 우리가 책임질 터이니 여러분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열심히 뜨겁게 기도하세요.'라고 권면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당동 총신대학교는 땅은 영남인 백남조장로가 비용은 영남인 박병훈목사를 통해, 매킨타이어 박사를 통해 장비와 주요시설을, 8, 미공군과 시설대대가 맡았습니다.
1967~1991년 기록에 의하면, 총신학교와 영남인에 대한 기록에는
총신대학교의 종합대학 설치위원 7인 중에는 배태준, 김동권, 이성헌, 김만규, 우성기 등 5인이 있고 베데스다병원 인수위원 5명 중에 영남인 배태준, 우성기, 김만규가 있고 축령산 기독병원 인수 및 총신대학교 의과대학 설치위원 5명 중에는 영남인 이영수, 배태준, 김만규, 박종호 등이 있으며 김희보 학장 부정 조사와 퇴진은 김만규 목사가 70회 총회시에 총신대학교 재단이사 전원 강제 해임시에 영남인 김만규 단독의 진정으로 당시 재단이사 전원을 복권하게 하여 총신대학교를 정상화 하게 한 것이 영남인의 공헌이었습니다.

둘째, 대치동 총회센타 건축은 영남인 이영수목사와 영남인 정태성장로가 주동이 되어 설립한 바가 있습니다.
1971년 제56회 영남인 총회장 정규선목사 때 총회는 총회센타를 건립하기로 가결하였습니다(그 전에는 총회본부가 김광철장로 책방 2층 그리고 임승원목사 서점 2층에 월세를 주고 기거했다).
10년 후인 1981년에 이영수목사는 부산 성창기업을 경영하는 정태성장로를 만나서 '장로님, 하나님의 축복이 머물 때 총회센타 하나 건축하면 좋겠습니다.'고 권고하고 정태성장로를 총회센타 건축위원장으로 하여 총회센타 건축을 시작하였습니다. 먼저 서울 여의도 그리고 종로 쪽 그 다음 강남구 대치동을 총회센타 후보지로 물망에 올려놓고 그중에 값이 싸고 다른 건물이 없는 허허벌판 언덕배기에 위치한 대치동 땅을 선택하여 우선 전국여전도회연합회 회장 대구사람 김숙애권사에게 여의도 땅을 매각하고 이곳 대치동 땅을 구입하여 총회센타를 설치하게 되면 2층을 여전도회에게 주겠다고 하고 여의도 땅 30평을 3억원에 매각케 하고 대치동의 땅 550평을 구입함으로써 총회센타를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성창기업은 합판공장으로 엄청난 수입을 얻게 되자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총회센타를 건축하게 되었던 바, 건축에 소용될 자금은 성창기업 정장로님이 시설공사는 대구 신진욱장로의 동생 신진수장로가 경영하는 신진건설에 맡겼습니다.
총회건물 4층 공사를 할 즈음 신진건설이 부도가 나서 공사를 청양건설이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건축기금이 고갈되어 총회는 모든 교역자의 십일조와 장로 5만원() 집사-권사 3만원(), 각노회 및 산하 교회가 특별헌금을 하는 등 모금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모금이나 건축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총회 주도권을 잃게 된 이북출신 교역자와 호남의 정규오목사측의 인사들이 비협조함으로써 총회센타 공사로 몹시 곤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원래 총회센타 공사는 6개월이었는데 자금 공급과 공사 시공자 변경 등등으로 총회센타는 46개월인 1984924일에 준공을 하게 되었습니다. 총회센타 준공에는 전국에서 300여명이 참석하였으나 예배 후 사진 촬영에는 120여명뿐이었는데, 총회 주도권 세력이었던 이북세가 빠지고 호남세가 물러갔으므로 순수 영남세로 사진촬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셋째, 양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건축은 영남인의 것이었습니다.
1981313일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양지의 임야 225,300평을 매각한다는 말을 듣고 박종호목사를 앞세운 이영수목사가 토지주를 찾았습니다. 양지의 현 임야의 대지는 백화소주 사장의 것이었는데 그 사장이 군산중앙교회 강정준장로라는 것이었습니다. 강장로는 장로가 백화소주 사장이라는 말에 부담을 느껴 재산을 정리하고 보다 깨끗이 신앙생활을 하자는 중에 이영수목사를 만나서 당시 시가 5억원에 호가하는 23만평을 37천만원에 계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양지의 땅 소개를 한 것이 영남인 박장하목사이고 직접 당사자로 계약한 것이 영남인 이영수목사로서 총신대학교를 총회센타를 양지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세운 것이 현실로서 과거의 영남인의 헌신과 공헌은 오늘에도 절실히 요청되는 바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교회사에서 영남인의 역할을 살피면서 영남인 이영수목사를 다시 한번 조명하고 평가하고 과거의 이영수목사의 길을 우리도 가야 할 것입니다. (1)이영수목사는 총신대학교를 건축하고 경영하였습니다. (2)이영수목사는 총회센타를 건축하였습니다. (3)이영수목사는 총회센타를 건축한 사람입니다. (4)이영수목사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설치하여 NCC계통을 제압하였습니다. (5)이영수목사는 찬송가공회를 공동설립하고 한국찬송가의 지분 50%를 확보한 자입니다(새찬송가지분). (6)이영수목사는 한국선교100주년 행사를 전국적으로 행사하여 본교단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7)이영수목사는 본 교단이 전국 교단 중에 제일 먼저 전교회 11조운동을 가동하여 교회와 총회를 경제적으로 안전케 하였습니다. (8)이영수목사는 최초에 1만교회 운동을 전개하여 교단 부흥발전에 이바지하였습니다. (9)이영수목사는 GMS세계선교회를 조직케 하여 우리교단이 선교세계 2위가 되게 하였습니다.
근래사에서 영남인 중에는 박무용목사와 허활민목사는 총신대학교 총 재산 40조에 대한 엉뚱한 꿈을 가진 자가 2억원을 가지고 사람을 포섭하려고 할 때에 단연코 '아니오'라고 거절하고 총신대학교 사유화를 막았으니 이는 영남인의 기백입니다.
또한 1998년 제83회 총회 길자연 총회장 시에 '총회구조조정'을 부르짖었으나 이를 이룩하지 못한 것을 19년이 지난 2017년에 총회를 구조조정하여 총회예산을 년 15억원을 유익케 한 것이 영남인 허활민목사라는 것도 솔직히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가만히 있는 기차는 앞으로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소리가 나고 흔들리고 움직일 때 기차가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소리는 있었지만 영남인은 앞으로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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