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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의 사람 정규만 장로 ①

[ 2019-11-29 18:10:44]

 

< 왼쪽부터 2대 담임 윤철주 목사 내외,
초대담임 이영우 목사, 정규만 장로 부부>

서현교회와 정규만 장로 

서 론
 
한국교회사를 연구할 때 전체를 조명하는 통사적(通史的) 탐구와 전문 영역을 살피는 영역별 탐구 방법이 있다. 또 한국 전체를 조명하는 방안과 특정 지역을 연구하는 지역사 연구가 매우 중요하다. 여기에 인물사(人物史) 연구가 더하여야 역사를 정확히 볼 수 있다.
 
1. 개인사의 탐구
 
개인사(個人史)의 탐구는 전기문학(傳記文學)으로 표현된다. 전기 작가는 자신의 렌즈 즉, 세계관(Worldview)을 통해 대상 인물을 분석하고 묘사하며 평가한다. 그러니 저자의 관점에 따라 다른 표현들이 나올 수 있다.
지금까지 많은 전기문학 작품이 나왔는데 그것들은 칭송 일변도이거나 아니면 혹독한 비판서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개인사 탐구에는 역사성과 객관성이 있어야 한다. 한 인물을 만들어낸 역사적, 사회적 흐름을 조명해야 되고 이것을 객관화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2.
교회사의 새 영역
 
지금까지 교회사 연구는 정치사나 사상사적 측면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역사를 이끌어 간 인물에 대한 연구가 새 영역으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역사'라는 단어의 개념을 정의할 때에 여러 가지 표현들이 동원 될 수 있다. 유명한 수필가인 체스터톤(Gilbert K. Chesterton)'역사란 단지 사실들의 무더기에 불과하다'고 하였지만, 웹스터 사전은 역사를 '과거의 사건들을 기록하고 설명하는 한 분야'라고 정의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여야 하는 단어는 '설명한다''사건들'이다. 이것은 매우 포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지나간 세월 속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 라는 문제이다.
기독교 공동체 안에는 역사를 바라보는 두 가지 견해 즉 역사관(歷史觀)이 있다. 하나는 과거의 구체적이고 또는 특수한 사건들과 운동을 취급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역사의 전 과정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라는 문제를 조명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관점은 모두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고, 또 상호보완적 역할을 담당하여야 한다.

. 정규만의 신앙적 바탕
 
한 사람의 인물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바탕 즉 신앙, 가문 그리고 사회적 여건들을 살펴야 한다. 그러므로 정규만의 삶을 조명하기 위해 그의 신앙적 바탕을 밝혀볼 필요가 있다.
 
1. 경북 지방의 복음 전래
 
1884년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 알렌(H.N. Allen)의 입국을 통해 한국에서의 복음선교가 이루어졌다. 그 후 각국의 여러 선교부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좁은 땅에 여러 선교사들이 함께 일하게 됨으로써 불필요한 대립이나 지나친 경쟁을 예방하고 상호협력을 위한 성공적인 선교 사업을 전개하기 위하여 선교부 간의 선교지역 조정이 필요하였다. 또 미국형의 교파적 선교의 약점을 극복하여 피선교국인 한국에서는 하나의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점에 다수의 선교사들이 공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장로교선교부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연합과 상호협력 관계가 잘 이루어졌다.
1892년 미국남장로교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게 됨으로써 1893128일 북장로교선교사 빈톤 의사의 집에서 한국에 주재하는 장로교 선교사들이 모여 '장로교 정치를 쓰는 선교공의회'(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를 조직하였다. 한국에 있는 남자 장로교 선교사들을 회원으로 한 이 공의회의 목적은 한국에 하나의 장로교회 설립을 위해 사업을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회의는 처리기관이 아니며, 단지 자문기관으로 일한다는 것이었다.

18931월에 열린 제1차 회의에서 각 선교부 간의 선교지역에 관한 조정이 있었는데, 남장로교 선교부는 전라도와 충청도를 선교 지역으로 하고, 북장로교는 나머지 지역을 선교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때 북장로교와 호주장로교는 부산에서 함께 선교하고 있었다. 두 선교부는 상호협의 끝에 부산은 공동으로 선교하되 낙동강 이남은 호주선교부가, 낙동강 이북은 북장로교 선교부가 맡기로 합의하였다. 이 선교지 분할정책을 보통 예양협정(禮讓協定, Comity Anangements)라고 한다. 몇 차례의 협의를 거쳐 1914년부터는 경상남도 전지역을 호주장로교선교부에 일임해 선교활동을 하게 하였다.

대구에 처음 발을 내디딘 공식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베어드(Rev. William M. Baird, 裵偉良) 목사이다. 그는 1891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부산지부(釜山支部) 책임자로 임명을 받고 와서 일하던 중 영남내륙 지방을 순행할 계획을 세운 후 1893417일 부산을 출발하여 1개월이 넘는 장기 순회여행을 서경조 조사와 고용인 박재룡과 마부 두 사람을 대동하고 삼랑진, 밀양, 청도를 거쳐 대구 남문(南門)에 도착한 날이 출발한 날로부터 엿새 만인 422일 토요일 오후 1시였다. 이 날이 바로 대구에 공식적인 선교사업을 띠고 선교사로서 처음 들어온 역사적인 날이었고 대구제일교회 창립일이 되었다.
대구에 부임한 베어드 선교사는 북장로교 선교부 대구지부 책임자로 18969월 부임하였다. 그해 10월 서울에서 열린 선교사 연례회에 참석하고 11월에 다시 대구에 돌아왔으나 베어드 목사는 이미 선교사 연례회에서 서울의 미국북장로교 선교본부의 교육담당 고문으로 내정되어 그해 12월 서울로 떠났다. 그의 후임으로 아담스(안의와) 목사가 부임할 때 동행한 사람이 한 사람 있었는데 구미 상모(上毛) 출신으로 그의 통역 겸 조사인 한국인 김재수(金在守)라는 청년이었다. 이 사람은 병고치기 위하여 소문을 듣고 부산에 가서 서양의사 하디(Robert A. Hardie, 河理泳)를 만나 전도 받고 예수를 믿고 세례까지 받은 자였다. 그때 벌써 부산에 있던 북장로교 선교회는 189512월 대구에 선교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하고 부지까지 구입해 놓은 상태였다.

아담스에 이어 18999월에 브루엔 선교사가 대구에 오고 동년 11월에 사리추 선교사가 오게 되어 선교사 3, 의사 1, 학습교인 9, 세례교인은 서자명 1, 교인은 모두 25명으로 발전하였다. 1900년에 이르러서는 교세가 발전됨에 따라 그해 1월에 처음 남성정교회(대구제일교회 전신) 당회가 조직되었는데 회장에 안의와, 서기 부해리, 조사 김기원, 영수 김덕경, 집사에 서자명서성오 등이었다. 1912년 홍승한 목사가 취임하기 전까지는 당회원 전원이 미국선교사였고 당회장은 아담스 목사였다. 대구는 남성정교회가 중심이 되어 복음이 확산되어 나갔고, 여러 교회가 분립되었다. 남성정교회가 선교의 획기적인 발판을 마련하기는 19101025일부터 열린 대전도대회와 그해 111일부터 열린 학생대전도대회를 치르고 난 후부터였다. 이 대회는 당시 대구 도성에 큰 충격을 불러일으킨 전도 집회였다.

이 전도운동이 밑거름이 되어 한때는 1천여 명이 모이는 교회로 발전하였다. 이를 계기로 하여 복음이 경북도내 각 지역으로 메아리쳐 나갔으며 열정이 넘치는 젊은 선교사들은 한국인 조사를 동반하여 방방곡곡 찾아가서 말씀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다. 당시의 상황을 선교사들이 보고한 바에 의하면 매년 50여개 처의 교회가 설립되었다고 했으며 남성정교회로부터 19123월에 처음 범어교회가 분립되기 시작, 그해 5월에 신정교회가, 10월에 효목교회가 분립되었고 19157월에는 남산교회를 신축해 낙성식과 함께 부해리(H.M. Bruen) 선교사가 200명 교인을 거느리고 분립하게 되었고 19196월에 산격교회, 19239월에 동인교회, 19246월에는 중앙교회가 분립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복음의 불길이 점점 확산되자 경북도내 각 지역으로 자연히 전도가 되어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는데 아담스 선교사와 서자명(徐子明) 조사는 경산, 영천, 청도군을 담당 순회전도를 하며 교회를 세웠고 부루인 선교사는 김기원, 김영채, 이희봉 조사와 함께 선산, 군위, 김천, 칠곡군을 담당하였으며 안의와 선교사는 김호준, 서성오 조사와 함께 고령, 영일, 경주, 청송지역을 담당하였고, 어도만 선교사는 김성삼 조수와 함께 군위, 의성, 선산지방을 순회하면서 교회를 세웠다.

이 지방에 들어온 선교사들 역시 교육과 의료선교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1902년 남성정교회 구내에 안의와 선교사는 대남 남자 소학교를 세웠고 부해리 선교사 부인 부마태는 신명 여자소학교를 세웠는데 이는 실로 경북지방에 기독교 정신과 신교육 이념에 입각하여 세워진 최초의 사립공교육 기관이었다. 이렇게 교회를 중심으로 학교가 세워지게 되자 경북 일대에 산재한 50여 교회에서도 앞 다투어 학교를 세웠는데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1928)에 의하면 1902년에서 1910년 사이에 세워진 학교 수가 30개에 이르고 있다. 한국교회는 이렇게 처음부터 선교과 교육 사업이 균형있게 추진되었다.

전도사업과 교육사업을 병행하면서 의료선교에도 힘을 기울였는데, 189910월 제일교회 구내 의료선교사로 대구에 온 존슨의 자택에서 제중원이란 이름으로 출발한 것이 오늘의 대구동산의료원으로 발전하였고, 지금은 안동에 성소병원, 경주기독병원을 설립 운영하면서 선교적인 사명을 다해오고 있다.
구미지역의 초창기 장로교회의 설립양상은 부루엔 선교사의 큰 활약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어도만, 방혜법의 활동도 있었다. 이와 같이 선교사 주도로 설립된 교회들은 괴평, 대원, 오가동, 노산, 습레, 상립, 원동교회 등이다. 그런 반면 한국인 신자들의 주도로 설립된 교회는 월호도, 도산, 상모, 청산동, 백자동교회 등이 있다.
상모(上毛)교회사기()에는 1903년에 설립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1903년 선산군 상모교회가 성립하다. 선교사 부해리의 전도를 받아 신자가 생기므로 예배당을 신축하고 교회가 시작된 후 조사에 김기원, 이문주 등이 시무하였다'로 되어 있다. 그러나 상모교회 자체의 기록에 보면 '1901313일 본동 정인백 씨가 경기 주재 H. G.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복음을 받아 자택에서 남자 5, 여자 5명으로 예배를 드린 것이 상모교회의 처음 모임이 되다'로 되어 있다. 이런 기록들을 놓고 볼 때 상모교회의 시작은 본동 사람 정인백이 서울의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복음을 받아 돌아옴으로써 복음이 전파된 경우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자생적 교회의 모임이 시작되다가 아마 1903년에 와서 비로소 상모교회라고 하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고, 그 때쯤에 부해리 선교사의 전도로 교회가 본격적으로 조성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19034월에 교인이 증가하여 초가 4칸으로 예배당을 신축하여 교회가 부흥하여 교인 30여 명으로 증가되므로 그 때 대한예수교장로회 상모교회라 하였다. 교역자에 김기원, 영수에 정인백, 집사에 김명은, 정인명이 임명되었다. 1904년에는 예배당이 협소하여 초가 8칸으로 증축하였다. 교회 부속 기관으로 영명소학교를 창설하고 학생을 모집하니 학생이 50명이 되었다. 설립자는 정인백, 교장에 김기원, 교사에 조병진, 박천우 등이 수고하였다. 1907517일에는 거리 관계로 칠곡군 숭오, 덕산, 남율 3곳에 교회를 분립하였다. 1912년에는 칠곡군 북삼면 연평교회도 분립하였다. 1926321일에 정인명이 초대 장로로 장립함으로 당회가 조직되었다. 교인이 70명으로 성장하여 예배당을 18평 기와집으로 신축하였다.
1904년에 오가동 교회가 설립되었다. 초기에 부루엔 선교사가 전도하여 신자가 생기므로 교회가 설립되었고, 조사에 이희봉, 이문주 등이 시무하였다. 1904년에 노상(路上)교회가 설립되었다. 초기에 선교사 부루엔의 전도로 신자를 얻고 예배당을 건축하였고, 조사에는 이희봉, 이문주, 영수에 노석원이 시무하였다. 노상교회는 남녀연합전도회와 부인전도회가 조직되어서 신자를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
 
2. 신앙의 씨앗
 
정규만 장로는 1911년 경북 구미 상모동에서 정인기 장로와 한신석 권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청년 시절에 백부인 정인백 영수 댁에 양자로 입적되었다. 양부 정인백 영수는 동학군에 가담하였다가 수배를 받아 피신하던 중 우연히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를 만나 그와 함께 몇 년간 기숙하면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귀중한 기회를 얻었다. 그는 나중에 신앙이 자라고 뿌리를 내리자 성도 10여 명을 모아 구미 상모동에 교회를 설립하고 첫 예배를 드렸다. 그 교회가 오늘날 교인이 만 명이나 되는 구미 상모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양부 정인백 영수는 교회 부설기관으로 영명소학교를 설립하는 등 고향 사람들을 깨우치고 복음을 전파하여 인근의 수많은 가정을 기독교인 가정으로 변화시켰다. 구미 상모동에서 태어나 상모교회에서 유아세례 및 입교를 한 정규만은 신실한 믿음의 종이었다. 특별히 물질의 축복을 받은 청년이었는데, 어느 때부터인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일찍부터 그는 마치 다윗처럼 이 땅에 '웅장하고 아름다운 교회당'을 건축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봉헌하겠다는 혼자만의 꿈을 소유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구미 상모교회 100년사에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규모의 건축헌금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그가 가슴 속에 키워온 꿈과 무관하지 않다.

정규만은 구미상모교회에 교회 대지 270평을 사서 헌납하였으며, 이와 별도로 20만 환의 특별헌금도 하였다. 이때 교인들의 헌금은 대략 100환에서 몇 천환이었고, 좀 많이 헌금한 성도가 1만 환이었다. 당시 구미 상모교회 신축헌금 특별헌금자의 명단에는 박정희 대통령도 보이는데 헌금액은 100만 환이었다. 19483월 서남교회 장로로 장립된 정규만 장로는 백남채 장로 소유 땅 205평을 사들여 서남교회에 헌납하면서 당시 최재화 담임목사에게 '주위 땅을 좀 더 확보하여 이 자리에 동양 최대의 교회당을 짓자!'라고 제의하였으나 당회가 거부하여 이 제의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꿈은 서현교회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양부 정인백의 신앙심을 전승받은 정규만 장로는 23세 때에 결혼한 배필을 통하여 믿음과 능력이 배가되었다. 부인 김영숙 권사는 정규만 장로에게 조금도 손색이 없는 특출한 믿음의 소유자였다. 두 사람은 평생 성수주일과 구제와 전도, 성경말씀 읽기와 기도, 헌신과 겸손을 목표로 주님께 약속하고 그대로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그들은 그 정신이 그대로 자녀에게 이어지기를 원했으며, 자녀의 학업 성적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오로지 하루에 성경 말씀을 몇 절 읽고 기도를 몇 번 했는지에만 관심을 두고 독려했다. <계속>
 
필자 김남식 박사
 
한국장로교사학회 회장 / 순교자 김정복 목사 기념사업회 회장 / 미국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선교학박사 / 남아공 University of Stellenbosch 신학박사 / 저서82, 역서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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